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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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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공유지에 참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여름이면 그 나무 그늘은 양치기와 양들의 쉴 곳이 되고, 도토리들은 인근 농민들이 키우는 돼지의 먹이가 되며, 마른 나뭇가지들은 마을의 과부들에게 땔감을 제공한다. 봄철에 새로 생긴 잔가지들은 성당을 꾸미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 그리고 해질 무렵이면 그 참나무 밑에서 마을 의회가 열린다.”
이것은 철학자 이반 일리치가 쓴 어떤 글의 한 대목이다. 이 시적인 묘사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공유지’라는 개념일 것이다.
산업사회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대개 공유지(commons)라는 것은 특정인에게 귀속된 사유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 구성원들에게 개방된 공공재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 전승되어온 관습에 따라 사람들은 그것을 적절히 자유롭게 이용함으로써 아무리 가난한 살림살이일지라도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최소한의 생존·생활을 영위하는 게 가능했다.
그리하여 가난한 민중은 비록 물질적 생산력이 낮은 삶의 환경 속에서도 이웃과 더불어 나름대로 생을 즐기면서 인간다운 문화를 일구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오늘날처럼 배타적인 경쟁 논리가 아니라 공유지를 기반으로 상부상조하며 살았던 옛사람들의 이러한 삶의 방식을 ‘도덕경제’라고 부른다.
‘도덕경제’의 원리는 조선의 민중사회에서도 예외 없이 통용되었다. 구한말 이 나라를 찾았던 서양인들은 나중에 그들이 남긴 기록에서 거의 이구동성으로 조선의 백성들이 게으르고 불결한 ‘비문명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백성들의 상호부조 관습과 타인에 대한 환대의 풍습에 주목했다.
“이 나라에서는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다. 들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즐거이 자기 밥을 나누어준다, 잔치가 벌어지면 이웃을 초청해서 모든 것을 나눈다. 길을 떠나는 사람은 여비를 받는다. 없는 사람과 나누는 것, 이것은 조선인이 가진 덕성 중의 하나이다.”(다블뤼 주교 <조선사입문을 위한 노트>)
조선의 백성들이 게으르게 살고 있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삶이 근대적 노동규율에 묶여 쫓기듯 살 필요가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당시 서양인들이 조선 백성들의 생활에서 나태와 불결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오히려 근대적 이기주의에 깊숙이 젖어 있던 서양인들 자신의 편견을 드러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도덕경제’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근대적 산업이나 자본주의 경제의 성과를 전면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 경제는 엄청난 생산력을 발휘하여 전대미문의 물질적 안락과 번영을 가져왔고, 그 결과 온갖 놀랄 만한 문명적 성취와 실험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 번영에 따르는 혜택이 고르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보다 엄격히 말하면, 물질적 혜택의 불균등 분배라는 이 결함은 불평등 구조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내재적 원리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연구자에 의하면, 자본주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실제로 이 문명의 수혜자는 인류 전체의 15%를 넘어본 적이 없다. 나머지 다수는 늘 소수의 안락과 행복을 위한 제물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희생의 시스템’도 어쨌든 경제성장이 계속되고, 그 성장의 덕분으로 언젠가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이 주어질 것이라는 ‘환상’이 꺼지지 않는 한, 지속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세계경제는 더 이상의 성장을 허용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난 수백년간의 자본주의 근대문명을 이끌어온 기본 동력은 화석연료였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문명은 ‘탄소문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탄소문명의 끊임없는 팽창의 필연적인 결과로 지금 우리는 전대미문의 위기, 즉 기후변화라는 기막힌 사태에 봉착했다. 인류사 최대의 이 위기상황에서 지금까지 하던 대로 탄소문명의 성장·확대를 계속 추구한다면 대파국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경제성장 논리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사회적 공공성과 난개발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규제마저 철폐하려는 난폭한 시도가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자세로는 물론 ‘대안’을 찾을 수 없다. ‘대안’이란 시대적·사회적 조건이 허용하는 틀 속에서 최대한 인간다운, 그리고 지속가능한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구상할 수 있는 대안다운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현 상황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기본소득제의 도입이다.
사회 구성원 전원에게 아무 조건 없이 기초생활비를 지급하는 이 방안은, 기왕의 시장논리를 존중하면서, 대다수 민중에게 그들의 잃어버린 생존 기반, 즉 ‘공유지’를 되돌려주고 ‘도덕경제’를 복원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간단한 방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적 상황에서 ‘공유지’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즉 토지뿐만 아니라 상하수도, 가스, 철도, 통신, 방송주파수, 의료, 교육, 금융제도 등등이 그렇다. 이러한 것은 영어식 표기(public utility)대로 원래 누군가의 사익 확보 수단이 되어서는 안될 공유재 혹은 공동자산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공공재는 그동안 특권층의 치부 수단이 되어왔고, 그 결과가 지금과 같은 절박한 생태적 위기, 부의 극심한 편중, 또 수많은 말세적 징후들이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공유재의 공공성을 되살리는 게 급선무이다.
그리고 주요 공유재의 운용에 의한 재정적 이익의 일부 혹은 전부는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기본소득에 관한 관심과 논의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경제성장이 멈추고, 과잉발달한 자동화 기술로 일자리가 급속히 사라지는 시대 상황을 볼 때,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클린턴 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저명한 정치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최근 어떤 강연에서 기본소득제는 이제 ‘거의 필연적’이라고 말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산업사회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대개 공유지(commons)라는 것은 특정인에게 귀속된 사유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 구성원들에게 개방된 공공재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 전승되어온 관습에 따라 사람들은 그것을 적절히 자유롭게 이용함으로써 아무리 가난한 살림살이일지라도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최소한의 생존·생활을 영위하는 게 가능했다.
그리하여 가난한 민중은 비록 물질적 생산력이 낮은 삶의 환경 속에서도 이웃과 더불어 나름대로 생을 즐기면서 인간다운 문화를 일구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오늘날처럼 배타적인 경쟁 논리가 아니라 공유지를 기반으로 상부상조하며 살았던 옛사람들의 이러한 삶의 방식을 ‘도덕경제’라고 부른다.
‘도덕경제’의 원리는 조선의 민중사회에서도 예외 없이 통용되었다. 구한말 이 나라를 찾았던 서양인들은 나중에 그들이 남긴 기록에서 거의 이구동성으로 조선의 백성들이 게으르고 불결한 ‘비문명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백성들의 상호부조 관습과 타인에 대한 환대의 풍습에 주목했다.
“이 나라에서는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다. 들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즐거이 자기 밥을 나누어준다, 잔치가 벌어지면 이웃을 초청해서 모든 것을 나눈다. 길을 떠나는 사람은 여비를 받는다. 없는 사람과 나누는 것, 이것은 조선인이 가진 덕성 중의 하나이다.”(다블뤼 주교 <조선사입문을 위한 노트>)
조선의 백성들이 게으르게 살고 있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삶이 근대적 노동규율에 묶여 쫓기듯 살 필요가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당시 서양인들이 조선 백성들의 생활에서 나태와 불결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오히려 근대적 이기주의에 깊숙이 젖어 있던 서양인들 자신의 편견을 드러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도덕경제’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근대적 산업이나 자본주의 경제의 성과를 전면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 경제는 엄청난 생산력을 발휘하여 전대미문의 물질적 안락과 번영을 가져왔고, 그 결과 온갖 놀랄 만한 문명적 성취와 실험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 번영에 따르는 혜택이 고르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보다 엄격히 말하면, 물질적 혜택의 불균등 분배라는 이 결함은 불평등 구조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내재적 원리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연구자에 의하면, 자본주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실제로 이 문명의 수혜자는 인류 전체의 15%를 넘어본 적이 없다. 나머지 다수는 늘 소수의 안락과 행복을 위한 제물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희생의 시스템’도 어쨌든 경제성장이 계속되고, 그 성장의 덕분으로 언젠가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이 주어질 것이라는 ‘환상’이 꺼지지 않는 한, 지속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세계경제는 더 이상의 성장을 허용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난 수백년간의 자본주의 근대문명을 이끌어온 기본 동력은 화석연료였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문명은 ‘탄소문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탄소문명의 끊임없는 팽창의 필연적인 결과로 지금 우리는 전대미문의 위기, 즉 기후변화라는 기막힌 사태에 봉착했다. 인류사 최대의 이 위기상황에서 지금까지 하던 대로 탄소문명의 성장·확대를 계속 추구한다면 대파국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경제성장 논리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사회적 공공성과 난개발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규제마저 철폐하려는 난폭한 시도가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자세로는 물론 ‘대안’을 찾을 수 없다. ‘대안’이란 시대적·사회적 조건이 허용하는 틀 속에서 최대한 인간다운, 그리고 지속가능한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구상할 수 있는 대안다운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현 상황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기본소득제의 도입이다.
사회 구성원 전원에게 아무 조건 없이 기초생활비를 지급하는 이 방안은, 기왕의 시장논리를 존중하면서, 대다수 민중에게 그들의 잃어버린 생존 기반, 즉 ‘공유지’를 되돌려주고 ‘도덕경제’를 복원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간단한 방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적 상황에서 ‘공유지’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즉 토지뿐만 아니라 상하수도, 가스, 철도, 통신, 방송주파수, 의료, 교육, 금융제도 등등이 그렇다. 이러한 것은 영어식 표기(public utility)대로 원래 누군가의 사익 확보 수단이 되어서는 안될 공유재 혹은 공동자산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공공재는 그동안 특권층의 치부 수단이 되어왔고, 그 결과가 지금과 같은 절박한 생태적 위기, 부의 극심한 편중, 또 수많은 말세적 징후들이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공유재의 공공성을 되살리는 게 급선무이다.
그리고 주요 공유재의 운용에 의한 재정적 이익의 일부 혹은 전부는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기본소득에 관한 관심과 논의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경제성장이 멈추고, 과잉발달한 자동화 기술로 일자리가 급속히 사라지는 시대 상황을 볼 때,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클린턴 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저명한 정치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최근 어떤 강연에서 기본소득제는 이제 ‘거의 필연적’이라고 말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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