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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친 사건을 시은자로 대합니까, 수은자로 대합니까?

요나 궁극이............... 조회 수 607 추천 수 0 2014.11.07 10: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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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1:1-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장 1절-3절.

 

1절-3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능력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격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우주만물을 다 창조하셨고, 우리 인간을 또한 창조하시되 당신처럼 창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이런 특수성을 넣어서 창조하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주 하나님을 닮아가는 이 일에 있어서 이 물질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동원하시고, 존재도 시간도 사건도 환경도 모든 것을 다 동원하시고, 선지사도들을 동원시켜 성경을 기록케 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담아 기록해준 이 말씀을 저희들에게 주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함으로 하나님을 잘 닮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고, 악령과 시험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아갈 수 있는 이런 좋은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심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이대로 버려두지 마옵시고 영의 눈을 밝히 열어주시옵소서.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나지 아니한다고 했고, 마지막 날이 가까울수록 어떤 어떤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분명히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고 불신세계에 일어나는 사건들도 점점점 그 사건들이 일어나는 횟수가 많아지고 또 그 사건이 중해지고, 반면에 사람의 목숨이 귀중하게 여겨지지 아니하고 마치 파리 목숨처럼 값없이 죽어가고 있는 이러한 현상을 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인 것을 저희들은 믿습니다.

 

또한 저희들의 개인 인생적으로 볼 때에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앓는 데가 많고, 아픈 데가 것은 하나님 앞으로 점점 가까이 가고 있구나 하는 이것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해서 신앙과 믿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이렇게 또 깨달음의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몸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등 여러 가지 이러한 징조들을 보아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이것을 진하게 느끼고 믿음생활 바로 해 나갈 수 있도록 저희들을 강력하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깨닫지 못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면 죽는 짐승과 같다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깨달음을 주시되 말씀의 오묘한 깨달음을 많이 허락해 주시고, 인생을 많이 깨닫고 주님의 마음을 많이 품고, 또한 진리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나누어 줄줄 아는, 주는 자가 복되다고 하시는 말씀을 다 순종하고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말씀으로 인격으로 찾아오시고 저희들에게 큰 깨달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한 목적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그 말씀의 효력성이 없어집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로되 그 말씀하신 그 목적을 못 깨달으면 그 말씀을 받는 자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을 못 본단 말이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신 목적이 무엇이냐? 본문을 보면 니느웨 성 사람들이 멸망 직전에 있는 것을 보시고 이들이 비록 이방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멸망을 하도록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이 사람들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요나를 파송하셨다. 분문 그대로 대개 학자들은 그렇게 많이 보고 있습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요나를 파송을 했다 그 말이요.

 

여기서 우리가 다른 이유를 캐봐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시는 그 목적이라면 요나보다도 더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구상에 유명한 사람이 요나 한 사람뿐이었겠느냐 그 말이요. 요나보다 훨씬 더 많이 배우고 잘 배우고 성질도 좋고 그런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 말이요.

 

또 일의 효력성으로만 본다고 하면 사람을 시키는 것보다도 하나님 당신이 직접 역사를 하시는 것이 일이 훨씬 더 효력적이고 능률적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을 시키는 것보다도 하나님 당신이 바로 해 버리면 더 일이 잘 되고 좋다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요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의 그 목적이, 요나에게 그 일을 시킨 것은 그 첫째 목적이 니느웨 성 사람들을 살릴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말이요. ‘첫째 목적이 니느웨 성 사람들이냐, 아니면 요나에게 목적이 있느냐’ 이렇게 볼 때 요나에게 더 큰 목적이 있다 그 말이요. 니느웨 성 사람들은 그 다음의 목적이고.

 

두 번째는 사건목적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한 것은 하나님 당신이 해야 할 그 사역을 인간에게 협조해 달라는 그런 뜻에서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니다 그 말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창조를 하실 때에 인간의 도움 없이 인간의 협조가 없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어떤 일을 하실 때 인간의 도움이 있어야만 하실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어떤 사역을 시키실 때는 그 사건을 위한 목적이 아니고 목적은 따로 있다 그 말이지요. 일을 시키시니까 일에 목적이 있는 것 같으나 일에다 둔 목적이 아니고 그 목적은 따로 있다 그 말입니다.

 

만일 그 사건이나 사역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면 인간은 시은자요 하나님은 수은자가 돼버립니다. 인간이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은 은혜를 받는 입장이 돼버린다 그 말이요.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 할 때 하나님이 일을 다 못해서 인간보고 일을 도와달라는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을 붙이면 그렇다 그 말이요.

 

우리는 ‘시은자냐 수은자냐’ 하는 이 위치를 분명히 가져야 인간 자기가 자기를 수은자의 위치에 둘 수가 있고, 또 하나님은 언제든지 시은자의 위치에다 모시고 살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큰 대접을 받았다고 해도, 또 인간이 어떤 큰일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수은자가 아니고 시은자이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을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 시은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시은자가 되면 그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라 그렇게 보는 거지요. 하나님 앞에 시은자로 산 이것을 바꾸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바로 못 믿습니다. ‘내가 가서 하나님을 도와드린다. 교회 일을 도와드린다. 주일학교를 도와드린다. 일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가서 도와드린다.’ 같은 일이지만 믿는 자기가 그렇게 생각을 해버리면 이거는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가 돼버립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요 완전자입니다. 하나님은 무능자가 아닙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랬지요. ‘내가 은혜를 입었사오면 이 일을 하게 해 주십시오.’ ‘이 일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일을 하는 것도 허락을 받아가지고 하는 것. 이게 수은자적 입장이란 말이요.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어야 되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는 영원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원적인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된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는 것은 당신의 일을 도와달라는 게 아닙니다. 집사직이나 목사직이나 전도사직이나 권찰직이나 교회에서 어떤 직을 줄 때에 어떤 사람들은 상당히 짐스럽게 여기지요? 그러나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은혜를 받으려면 ‘아멘’ 하고 받아야지요. 약자나 부족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뭔가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일을 맡긴다 그 말입니다. 본문도 알고 보면 요나 자신을 위해서 일을 맡기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요나서를 4장까지 죽 보면 요나는 성공을 했고, 또 한 편으로는 실패를 했습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전도를 해서 그들이 회개를 했으므로 멸망 직전에 있는 이 니느웨 성을 하나님께서 멸망을 시키지를 않았단 말이요. 그래서 성공입니다. 그리고 또 한 편 요나 자신을 위해서는 실패입니다. 성화구원에 실패란 말이요.

 

요나 하나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하셨던 사역이던 어떤 일이든 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명령을 하신다 그 말이요. 일을 주는 것도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말씀으로도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데 요나는 이 하나님의 목적을 모른 채 전도를 했기 때문에 자기의 구원은 실패가 됐습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사람을 참 사람 만들어지는 이 면에 두고 사는 겁니다. 요나가 만일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에 단일목적으로 나갔다면 요나는 아마 그 성질들이 다 고쳐졌을 런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몰랐단 말이요.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 또 모든 사건을 주시는 것은 다 인간 자기를 위해서 입니다. ‘모든 것은 인간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을 해도 좋습니다. 성도의 모든 신행(信行)은 다 자기를 위함입니다. 이 신행의 삶은 궁극적 결과에 가서 자기에게로 다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신행의 삶이 그렇습니다. 전부 다 자기를 위한 것으로 결과가 나온다 그 말이요.

 

2절에 보면 ‘너는 일어나’ 그랬지요? 일어나라. 누워있는 사람보고 ‘일어나라.’ 앉아있는 사람보고 ‘일어나라.’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한 것이 있지요? ‘일어나라. 같이 가자.’ 하나님께서는 육을 보고 몸뚱이만을 연상하면서 ‘일어나라’가 아니고 이성보고 일어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진리로써 영에다 결합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일어나라’는 이 말씀 한 마디 속에는 생명이 들어있고 사랑이 들어있고 진리가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고 하는 것은 이성이 가졌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버리든지, 아니면 그 말씀을 귀담아 들어서 순종을 하든지 하는 건 가치판단을 내리는 자기의 이성이 한다 그 말이지요.

 

중생된 영의 활동은 이성으로서 되어지는데, 이 이성의 활동은 또 육의 활동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을 진리 영감의 활동이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2절에 ‘너는 일어나’ 라고 한 것은 누가 하신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고, 3절의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일어나’ 또 그렇게 돼 있지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일어나. 그러니까 3절에서는 요나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일어난다’ 하는 일어나는 이걸 우리가 잘 분별을 해야 되겠다 그 말이요. 첫째, 하나님께서 ‘일어나라’ 하시는 말씀의 의도성과, ‘요나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는데 그 일어남은 무슨 마음을 가지고 일어나는 것이냐’ 하는 그 마음의 의도성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을 지금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어나라는 그 속에는 생명이 들어있고 진리가 들어있고 사랑이 들어있고 축복이 들어있단 말이요. 그런데 요나가 일어나는 마음은 그게 아니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는 생명적 사랑으로 일어나라 하심인데 요나는 사망적인 옛사람으로 일어났다 그 말이요. 정 반대가 돼버렸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보고 ‘일어나라’ 하시니 요나가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것을 제 삼자가 옆에서 보게 되면 생각하기를 ‘아,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일어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 그 말이요. 그러나 요나의 마음은 그 일어나는 마음이 떤 데 가서 있으면서 일어난다 그 말이요. 그런 거 있지요? 심부름을 시키면 일어나기는 일어나는데 딴 데로 내빼버리는 게 있습니까? 그런 것처럼 일어나는 마음이 달라. 일어나는 성질이 달라.

 

일어나는 것을 잘 심사해야 교회부흥이 사망적인지 생명적인지 잘 분별할 수가 있고, 신앙이 사망적인지 생명적인지 잘 분별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어나라’ 하심은 하나님의 단일목적대로 단일의사대로 일어나라 하심인데 요나는 일어나기는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그 의사에 마음에 합하지를 않고 하나님의 단일목적에서 이탈이 되어가지고 일어났으니 이게 과연 구원이 되겠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일어나긴 일어났으나 니느웨 사람들에게 진리를 접속시키려고 일어나지를 않고 하나님의 목적과 이질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이것이 곧 패역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목적대로 일어나지를 않고 왜 이렇게 이질목적으로 일어났을까?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하신 하나님의 제일 목적이 무엇이냐 그 말이요. 일어나라고 하신 그 제일 목적은 요나에게 구원을 입혀주시기 위해서 일어나라고 하신 겁니다.

 

‘니느웨 성으로 가라’ 그럴 때에 아닌 말로 여러분들 같으면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화구원을 입혀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입혀주시기 위해서 그 말씀을 하셨구나’ 이렇게 돼야 되겠는데 요나는 그렇게 듣지를 않고 ‘날 보고 니느웨로 가라고?’ 애들 같으면 나만 시킨다 그 말이요. 심부름을 시킬 때에는 심부름을 시키는 그 마음이 있다 그 말이요. 심부름을 하고 난 뒤에 뭘 주고 싶고 한 그런 게 있는데 그걸 모르는 아이들은 ‘날마다 나만 시킨다’ 그러거든. 그런 거나 똑같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요나하고 다른 게 하나도 없지.

 

하나님의 제일 목적이 뭐라고요? 요나에게 뭘 입혀주려고? 구원을 입혀주려고. 요나에게 하나님의 인격을, 하나님의 마음을 입혀주려고. 요나가 이 하나님의 제일 목적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그 뜻과 반대되는 이질적인, 하나님의 뜻하고 맞지 않는 그런 마음을 품었겠느냐 그 말이요. 그러니 요나가 지금 자기의 구원을 버리고 산다 그 말이요. 요나 자기의 생의 목적이 뭐요? 성화구원을 입는 목적이란 말이요. 그럼에도 요나가 자기의 생의 목적을 버리고 사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목적이탈로 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지? 나의 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오늘날 보통 보면 교인들인데도 도덕 윤리에 어긋난 이 죄만 보려고들 하지 하나님 앞에 목적이탈이 된 이 죄를 죄인 줄 모르고 살고 있더라 그 말이요. 그런 걸 우리가 많이 보지요?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바로 잡고 사느냐’ 이런데 신경을 쓰는 게 아니고 보통 보면 ‘누가 죄를 많이 지었느냐? 누가 제일 많이 도둑질을 했느냐? 누가 돈을 많이 훔쳐갔느냐? 누가 사람을 많이 죽였느냐?’ 하는 그 죄를 많이 신경을 쓰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뭘까? 이 목적을 바로 알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 말이요. 모두가 그 목적을 안다면 왜 도둑이 생기겠느냐 그 말이요. 그럼에도 목적이탈 된 이 죄를 죄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죄를 못 보고 있어요.

 

우리 인간은 자기의 재세기간의 목적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이 목적을 잡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재세기간 동안의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요나는 자기의 존재와 자기의 삶의 목적을 모르는 고로 패역과 방종을 떨고 있었다 그 말이요.

 

우리에게는 재세기간의 결과가 있기 때문에 목적을 붙잡는 겁니다. 인간이 목적을 붙잡지 않고 결과를 붙잡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드신 그 삶의 목적에서 이탈이 돼버렸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결과가 있으니 나에게 주고자 원하시는 이 결과는 영원계 신령계의 존귀와 영광입니다. 나를 존귀영광자로 만들려는 것. 결과적으로 말이요. 결과에 가서는 나를 존귀영광자로 만드는 것. 이 제세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입으면 결과에 가서는 존귀영광자가 된다 그 말이요. 능력자가 된다 그 말이요. 이 결과를 붙잡으면, 존귀영광의 결과를 붙잡으면 그 목적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 목적을 붙잡았으면 바른 방편을 붙잡아야 되는 것이고, 바른 방편으로 살려고 하니까 바른 진리지식을 붙잡아야 되는 거지요. 진리지식을 모르면 방편이 바른 방편이 안 나오고, 방편이 잘못 됐으면 아무리 바른 목적을 붙잡았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에 도달이 되지를 못해요.

 

바른 목적을 붙잡았다고 합시다. 하지만 방편이 비뚤어지고 진리지식이 비뚤어지면 바른 목적에 도달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목적도달이 안 돼요. 다시 말씀드리면 결과가 바른 결과가 나오지를 않는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바른 목적을 잡고 바른 방편으로 살아야 되겠지요? 목적과 방편이 다르면 안 됩니다. 활동의 종류가 신앙인 것 같아도 안 됩니다. 진리지식성이 비뚤어지면 안 된다 그 말이요.

 

바른 목적을 붙잡은 자는 ‘일어나라’ 할 때 일어나라고 하는 그 목적을 심사하고 일어난다 그 말입니다. 바른 결과를 붙잡은 자는 바른 목적을 붙잡게 되고, 또 바른 지식을 가지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겁니다. 바른 지식을 가져야 가치판단 평가성이 바로 나오지요. 그리고 바른 지식을 못 가지고는 바른 목적도 안 나오고 바른 결과가 나오지를 않아요. 이걸 아는 자는 바른 지식을 가지려고 애를 쓴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했을 때에 이렇게 말씀하신 은밀계시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안 됩니다. 본토가 뭔지, 친척이 뭔지, 아비 집이 뭔지, 왜 떠나라 하는 건지 그 계시를 모르면 모른다 그 말이요. 안 된다 그 말이요.

 

아브라함은 자기 마음대로 간 건 아니지요? 하나님 앞에 능동이 아닌 말씀을 붙잡고 피동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주관으로 사는 거냐, 객관으로 사는 거냐? 능동이냐, 피동이냐? 아브라함은 객관으로 살았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그 기준을 놓고 살았다 그 말이요. 주관이란 제 마음대로 제 좋도록 사는 거지요.

 

요나가 제 마음대로 다시스로 가든지, 아무 데고 가면 안 되느냐? 왜 꼭 니느웨로 가야만 되느냐 그 말이요.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고 했는데 요나는 다시스로 가고 있었지요? 말씀은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데 요나는 다시스로 갑니다. 가기는 가는데, 활동적으로 가는데 숨 쉬고 가고, 밥 먹고 가고, 그렇게 가면서 살고는 있지요.

 

그리고 아무리 효력적인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의를 입을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삶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명령을 어기고 가니까 구원과는 상관이 없고, 명령을 어기고 가니까 살기는 사는데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삶으로 살고 있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지계시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데 요나야, 너는 다시스로 가느냐?’ 인격적인 주님과 동행을 해야, 결합을 해야 구원이 입혀집니다. 자기 주관적으로 가면 갈수록, 활동을 하면 할수록 자기 주관이 강해집니다. 다시스로 가느니 만큼 자기 주관성이 강해져요.

 

말씀을 듣고 일어날 때 종교운동이냐, 신앙운동이냐, 그냥 활동이냐? 일어나기는 일어나는데 어떤 상태로 일어나느냐? 옛사람으로 일어나느냐, 새사람으로 일어나느냐? 요나의 일어남은 이성이 옛사람과 결합이 되어서 일어났습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목적은 구원을 덧입고자 함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간다’고 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명령이나 요구를 하실 때는 우리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이 때 여호와의 낯을 피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격적 동행으로 가면 구원이 됩니다.

 

다시스는 유럽지역이고, 유대 이스라엘과는 적국이 아닙니다. 그러나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서 이스라엘과는 적대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나느웨로 가서 전도를 하라고 하시니까 ‘니느웨는 우리의 원수 국인데 왜 그리로 가라고 하십니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니느웨를 원수로 여기는 마음이 요나 속에 들어 있었다 그 말이요. 그래서 니느웨로 안 가고 딴 데로 간다 그 말이요.

 

요나는 자기 속에 들어있는 적개심을 뽑아야 니느웨로 가게 됩니다. 그 적개심을 뽑지 아니하면 니느웨로 갈 수가 없는 거지요. 요나는 원수의 나라 앗수르가 잘 되는 걸 보기 싫다 그 말이요. 원수가 잘 되는 거 보기 싫다 그 말이요. 요나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아주 싫어한다 그 말이요. 왜 그러냐? 요나 속에 시기심이 있고 미움성이 있고 변덕심이 있고 조급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자원적으로 순종해서 니느웨로 가면 그러한 마음이 뽑혀 나가버리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요나가 그냥 혼자 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이 자기 속에 들어있는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어떤 사건을 뭉테기로 주게 되면 그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다 튀어나오게 된다 그 말이요. 추잡하고 더러운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 그 말이요. 요나가 그렇다 그 말이요.

 

요나에게 명령도 않고 가만 내버려 둘 때는 다른 사람들이 ‘아, 선지자 요나라, 성자 요나라’ 그런다 그 말이요.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이 와가지고 굴려버리니까 요나 속의 미움성이 막 나옵니까? ‘내 속에 이런 게 들어 있소’ 하고 막 나온단 말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장기(長技)가 문제가 아니지요. 교회에서 자기의 장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목적을 잡고, 결과를 잡고 존귀영광자가 되게 만드는 거. 이 세상에 있는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나에게 당신의 구원이 입혀지는 것, 성품이 입혀지는 것, 그리고 옳고 바른 진리지식을 붙잡고 가는 것.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지 않고 하나님과 대면해서 인격적 동행으로 재세기간을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순종하는 것마다 활동하는 것마다 구원으로 입혀지는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렇게 자기를 창조한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는 겁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 삶의 목적에서 이탈을 하지 말자 그 말이요. 이 목적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요, 궁극적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우리를 존귀영광자로 만드는 그 목적이라 그 말이요.

 

그럼에도 이 목적을 버리고 사는 것이 패역성이라. 이 목적에서 멀어질수록 그만큼 자기 주관성은 강하다 그 말이요. 이게 다 교만자인데 교만한 이 자는 멸망이 되는 겁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 그랬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제세기간의 목적을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기도 올립시다.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새나 짐승이나 나무가 돌멩이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이렇게 만들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수 있고, 귀담아 듣고 마음으로 가치판단 평가를 내려서 이 짧디 짧은 나그네 세상길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살면서 영원히 존귀영광자로 만들어질 수 있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이 복된 길을 오늘 저녁에 이 요나를 들어서 우리에게 깨달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요나는 어찌 됐습니까? ‘일어나라’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바로 못 깨닫고 니느웨가 민족적 원수이기 때문에 그리로 가지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사는 이 요나, 나중에야 갔습니다만 그러나 그 때는 억지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고도 자기에게는 유익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에, 사건이 임했을 때에 어찌하든지 저희들 마음속에 말씀을 바로 붙잡은 상태에서 순종을 하면서 바로 살아갈 때에 요나와 같은 그런 변덕스럽고 고집스럽고 시기가 있고 미움성이 들어있는 나쁜 마음이 다 뽑혀나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고 궁극적 그 나라에 가서는 존귀영광자가 될 것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무엇을 하든지 이 제세기간 동안에 말씀 바로 붙잡고 바른 순종을 하며 옳게 바르게 만들어지면서 살아가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죽음 저 넘어가서 ‘이 세상에서 예수 참 잘 믿었다’ 라고 할 수 있는 이 효력성을 가지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이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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