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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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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4.11.07 20:34
입력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부모와 아이의 선의와 바람과는 상관없이 끝없이 아이를 좌절시키는 일이다. 이제 한국에서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아이들을 제지하고 주저앉히지 않고는 아이들과 일상적 생활이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을 몸소 체득해가는 과정 그 자체가 되었다. 기막히지만 이것이 오늘을 사는 부모와 교사와 아이들이 놓인 현실이고 그 현실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오랜 삶의 지향과 욕망의 결과물이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아이들의 삶의 만족도가 꼴찌라는 것에 의외라는 듯 설레발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아이들을 무릎 꿇리고 제지하고 간섭하고 주저앉히고 밀어붙이는 것이 일상화가 된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어른도 아이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한국에서 십몇 년을 보낸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앓고 있는 질병이 있다. 그것은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집에서, 교사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무엇도 하지 못하게 하고 아이들은 집과 학교에서 자기 자신의 결대로 크지 못하며 연일 제압을 당한다.
이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아이들에게 삶의 질에 관해 이야기할 무엇이 있겠는가. 그 책임이 부모인 나와 교사인 나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제도와 시스템과 상대편을 탓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대로였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한국 아이들의 일상에 깊고 무겁게 깔린 ‘학습된 무기력’의 후유증과 파괴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것은 가랑비에 두꺼운 옷이 젖듯 시나브로 아이들 일상을 파고들어 마침내 한 인간 삶의 의지와 기운을 앗아간다. 무언가 판단해야 하고 뒤이어 몸을 일으켜 행동해야 하는 일을 내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리고 일이 어떻게 되든지 마냥 밖에서 누군가로부터 지시와 명령이 들리지 않으면 그냥 그 자리에 머무른다. 아이들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어 놓고 너희 삶의 질이 어떠냐고 묻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심한 모욕이다. 바야흐로 복종과 학습하는 기능만 갖춘 ‘어린 신민’ 만들기 프로젝트가 완성되었고 그 결과는 OECD 꼴찌다.
내가 직장의 개가 아닌 것처럼 아이들 또한 부모와 교사의 애완견이 아니다. 그 아이들도 나와 똑같이 속박을 못 견뎌 하는 자유의지를 갖춘 한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면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에 동참할 수 있다. 내가 직장에서 굴욕과 좌절을 견디며 이렇게 일하는 것처럼 너희도 일하듯 공부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혹한 일이다.
어른들 삶이 도무지 곁을 돌아볼 수 없고 날마다 날 선 긴장으로 보내야만 하더라도 아이들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배울 권리는 있지만, 의무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어른은 아이들이 배우도록 여건을 만들어줄 의무는 있지만, 배움을 강제할 권리가 없다. 이것이 아이를 돌보는 품위 있고 성숙한 어른의 태도이다.
우리 아이들의 삶의 질은 왜 오래도록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부모와 교사와 사회가 아이들에게 들이미는 수많은 학습과 시험과 체험과 커리큘럼과 프로그램과 창의성 계발과 음악회와 전시회 관람에 아이들이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무지막지한 배움의 가짓수와 양에 말이다.
왜 이 어린아이들을 일찌감치 배움에 질리게 하지 못해 안달인가. 게다가 좋다는 곳을 찾아 마구잡이로 아이들을 끌고 다니며 아이들의 진을 다 빼놓는가. 부모와 교사들이여 왜 아이들을 질리게 하고 진을 다 빼는데 그렇게들 열심인가. 대한민국 아이들은 소진되었다. 아이들을 좀 놔둬라. 초등학교 5, 6학년만 되어도 뭔가 배우는 것에 진절머리 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반대쪽 계층 아이들은 이런 것들에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OECD 국가 중 아이들 삶의 만족도 꼴찌에서 보여주듯 아이들은 자기들한테 더는 이러지 말라고 한다. 나를 시장에 팔아먹을 제품 만들 듯 조립하고 포장하지 말라고 한다. 오늘 집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풀어 달라. 그렇지 않고서는 저 차가운 바닷속 아이들을 우리는 결코 건져낼 수 없다.
<편해문 | 놀이·터 운동가>
이렇게 한국에서 십몇 년을 보낸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앓고 있는 질병이 있다. 그것은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집에서, 교사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무엇도 하지 못하게 하고 아이들은 집과 학교에서 자기 자신의 결대로 크지 못하며 연일 제압을 당한다.
이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아이들에게 삶의 질에 관해 이야기할 무엇이 있겠는가. 그 책임이 부모인 나와 교사인 나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제도와 시스템과 상대편을 탓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대로였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한국 아이들의 일상에 깊고 무겁게 깔린 ‘학습된 무기력’의 후유증과 파괴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것은 가랑비에 두꺼운 옷이 젖듯 시나브로 아이들 일상을 파고들어 마침내 한 인간 삶의 의지와 기운을 앗아간다. 무언가 판단해야 하고 뒤이어 몸을 일으켜 행동해야 하는 일을 내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리고 일이 어떻게 되든지 마냥 밖에서 누군가로부터 지시와 명령이 들리지 않으면 그냥 그 자리에 머무른다. 아이들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어 놓고 너희 삶의 질이 어떠냐고 묻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심한 모욕이다. 바야흐로 복종과 학습하는 기능만 갖춘 ‘어린 신민’ 만들기 프로젝트가 완성되었고 그 결과는 OECD 꼴찌다.
내가 직장의 개가 아닌 것처럼 아이들 또한 부모와 교사의 애완견이 아니다. 그 아이들도 나와 똑같이 속박을 못 견뎌 하는 자유의지를 갖춘 한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면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에 동참할 수 있다. 내가 직장에서 굴욕과 좌절을 견디며 이렇게 일하는 것처럼 너희도 일하듯 공부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혹한 일이다.
어른들 삶이 도무지 곁을 돌아볼 수 없고 날마다 날 선 긴장으로 보내야만 하더라도 아이들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배울 권리는 있지만, 의무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어른은 아이들이 배우도록 여건을 만들어줄 의무는 있지만, 배움을 강제할 권리가 없다. 이것이 아이를 돌보는 품위 있고 성숙한 어른의 태도이다.
우리 아이들의 삶의 질은 왜 오래도록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부모와 교사와 사회가 아이들에게 들이미는 수많은 학습과 시험과 체험과 커리큘럼과 프로그램과 창의성 계발과 음악회와 전시회 관람에 아이들이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무지막지한 배움의 가짓수와 양에 말이다.
왜 이 어린아이들을 일찌감치 배움에 질리게 하지 못해 안달인가. 게다가 좋다는 곳을 찾아 마구잡이로 아이들을 끌고 다니며 아이들의 진을 다 빼놓는가. 부모와 교사들이여 왜 아이들을 질리게 하고 진을 다 빼는데 그렇게들 열심인가. 대한민국 아이들은 소진되었다. 아이들을 좀 놔둬라. 초등학교 5, 6학년만 되어도 뭔가 배우는 것에 진절머리 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반대쪽 계층 아이들은 이런 것들에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OECD 국가 중 아이들 삶의 만족도 꼴찌에서 보여주듯 아이들은 자기들한테 더는 이러지 말라고 한다. 나를 시장에 팔아먹을 제품 만들 듯 조립하고 포장하지 말라고 한다. 오늘 집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풀어 달라. 그렇지 않고서는 저 차가운 바닷속 아이들을 우리는 결코 건져낼 수 없다.
<편해문 | 놀이·터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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