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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3: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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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
본문: 창세기 23장 1∼13절,
찬송가 376장 (통 422장)
록펠러는 암에 걸려 1년 시한부 인생을 통고받았습니다. 록펠러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곧 세상을 떠날 텐데 네 마음껏 자선 사업이나 하고 가렴』 록펠러는 그때부터 자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아낌없이 주니 가슴이 확 트이면서 마냥 행복해졌습니다. 결국 록펠러는 의사의 선고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 무려 40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상 시한부 인생입니다. 언젠가는 『세상소풍』을 마치고 떠나야만 합니다. 소풍을 마치는 그날까지 자기가 가진 것을 얼마나 의미있고 가치있게 나누며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선은 물질을 나누는 것만이 아닙니다. 시간, 재능, 마음을 나누는 것도 이 시대의 큰 자선입니다.
한 해를 보낼 때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 세월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이 세상에 잠시 들렀다가 다시 고향을 찾아가는 나그네의 삶입니다.
옛날 구약성경에 야곱이라는 사람이 아들 요셉을 찾아 애굽 나라로 갔을 때 애굽 왕 바로가 『당신의 나이가 얼마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야곱의 대답이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라며 자기일생을 나그네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이곳 저곳에는 인생을 나그네라고 표현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을 향하여 말씀하는 중에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29:15)라고 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25:23)고 했습니다. 그러면 인생이 나그네와 같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인생은 이 세상에서 얼마동안 나그네와 같이 살다가 떠나간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생은 고향인 하나님 나라를 떠나서 나그네로 이 세상을 얼마동안 살다가 이 땅을 떠나서 고향인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에 있어서 이 세상은 영원한 정처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얼마동안 살다가 떠나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으로서 틀림없이 할 수 있는 예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예언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되어 있습니다. 영웅도 죽고, 열사도 죽고, 천재도 죽고, 농민도 죽습니다. 사람이면 반드시 죽어 이 세상을 떠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인생이 나그네』라는 성경말씀의 뜻입니다.
둘째로, 인생이 잠깐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장한 세월에 초로인생이라는 한문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세월은 길고 한가한데 사람의 생명은 풀에 맺힌 이슬같이 잠깐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홍안, 내일의 백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오늘 어여쁜 얼굴이 내일이면 흰 뼈로 변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안개와 같습니다. 쉬 지나가는 하루와 같습니다. 어린 시절은 아침과 같고, 젊은 시절은 낮과 같고, 늙은 시절은 저녁과 같이 잠깐 지나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따라서 한 옛 시인은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드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고 했습니다. 며칠 전 저명 인사 한 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에 그에게 몇 번이나 전도를 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예, 나중에 믿지요. 지금은 너무 바빠서 교회에 나갈 시간이 없어요.』라고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급하게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주치의는 그의 병명을 골수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골수암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당신, 이 땅에서의 생명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준비해야 된다』고 말했으나, 그는 주치의의 말만 듣고 가벼운 병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암 전문박사인 주치의가 그보다 먼저 암으로 죽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끝내 그 어른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지 않고 세상을 떴습니다. 6개월 전만 해도 그는 정정한 모습이었습니다. 꿈도 컸습니다. 그러나 6개월 후에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에 비하면 우리 인생은 밤의 한 정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저희는 아침 구름 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호세아 13:3)
셋째로, 인생이 나그네라는 뜻은 사람이 세상에서 떠나갈 때에 모든 것을 두고 가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요즘같이 호텔업이 발달된 시대에는 나그네 생활이 매우 편안합니다. 식당에는 음식이 있고, 방안에는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있고, 성경책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갖 실내 오라기구와 실외 운동시설까지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호텔의 손님으로 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차려 놓은 좋은 환경시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편리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그네의 특징은 일단 그 여관에서 떠나가는 날에는 그 좋은 것들을 전부 놓아두고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호텔에 속한 것이지 자기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잠시 사는 동안에는 좋은 호텔에 들어 사는 손님같이 모든 시설을 자유로 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세상 나그네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하늘나라로 떠나갈 때에는 그 좋은 것들을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딤전6:7)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나그네와 같다고 합니다. 간다는 뜻이요, 잠깐이라는 뜻이요, 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이 나그네인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은 자기가 세상에서 나그네인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옛 신앙의 용사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증거로 세상에서는 나그네라는 것을 알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산 것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그곳이 바로 하늘의 고향입니다.(히11:13-16)
그리고 우리가 나그네인 줄을 아는 이상에는 우리를 나그네로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이 계셔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나그네로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그네로서 이 세상에 사는 자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일체의 활동이 장차 하늘나라에서 사는 삶을 결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나그네와 같습니다.
인간에게 이 땅은 영원한 곳이 아닙니다. 인간은 얼마동안 이 땅에 살다가 모든 것을 뒤에 두고 하늘 고향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는 나그네로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찾아서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나그네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손을 맞잡고 힘찬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한 내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늙어서 1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은 말로 다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아내의 죽음과 하나님의 약속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으매 『내가 죽은 자』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사라의 죽음은 곧 사람은 누구나 죽어야 한다(히 9:27)는 철학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무덤을 사서 『매장했다』는 말속에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무덤은 인간에게 굴욕과 멸망의 상징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무덤을 돈을 주고 구입하여 막벨라 굴을 선택한 것은 최종적으로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수많은 진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감추어져 있는 신앙의 진리를 살펴보면서 사라의 죽음과 나그네길을 살고 있는 성도들이 어떤 모습과 신앙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 우리의 신분을 분명하게 알고 삽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실존(Exi stence)을 분명하게 알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3∼14절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은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오늘 세상에 살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수천 년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며 세상에 마음을 굳히고 세상 것만을 위해 사는 사람을 향한 경고입니다. 본향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둘째, 인생의 본질을 알고 세상적인 욕심을 버립시다.
인생의 본질을 안다면 애착을 버리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거룩한 랍비의 이야기가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인 몇 명이 폴란드 여행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이들은 거룩한 랍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랍비는 인생의 대부분을 그 마을에서 보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거룩한 사람을 보려고 그의 집을 찾아간 그들은 집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살림살이가 거의 없이 집안이 썰렁했던 것입니다. 랍비가 앉아서 성경을 공부하는 의자와 책상, 그리고 간단한 침대가 눈에 띄는 가구의 전부였습니다. 손님들은 물었습니다. 『랍비님, 당신의 가구는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랍비는 잠시 책에서 눈을 떼 이들을 올려다 보면서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그러는 여러분의 가구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가구요? 왜 우리가 가구를 들고 다닙니까? 우리는 잠시 지나가는 길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나도 똑같습니다.』 애착에서 벗어나고 소유에 대해 죽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나그네 인생길에 들고 다녀야 하는 『가구』가 얼마만큼이 적절한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필요도 없는 물건을 지고 다니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됩니다. 그 자유와 아울러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인생을 누리게 됩니다.
셋째, 나그네는 잠시 머물러 있다가 떠날 준비 즉 살아가는 길을 계획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한 나그네가 여행 중에 날이 저물자 대궐처럼 큰 집 앞에서 하룻밤 묵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집주인은 정중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집은 여관이 아니니 저 건너편 여관에나 가보십시오.』 그러자 나그네가 주인에게 질문을 하면서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이 집에서 몇 대가 살았습니까?』 『16대째 살고 있다오.』 『그렇다면 그분들이 다 생존해 계십니까?』 『허 어리석은 소리하지 마시오. 모두 세상 떠난 지 오래 되었소.』 그러자 이 나그네가 반색을 하며 『그렇다면 이 집이 여관방과 같지 않습니까? 대대로 자고 가고 자고 가기를 16대나 하였으니 저도 하룻밤만 자고 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주인은 어쩔 수 없이 하룻밤만 묵는 것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잠시 거쳐가는 곳이라면 목적지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어디를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처량하고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여관 주인의 상냥함과 여관의 아름다운 분위기에 사로잡혀 가야 할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눌러 살려고 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출구를 빠져나갈 때 새롭게 가야 할 최종 목적지가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인생은 준비의 연속입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내일의 안정된 삶을 위함입니다. 공부하는 이유도 오늘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준비하며 사는 삶이 인생인데 영원한 내세를 준비하지 못하고 산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삶입니다.
고향을 떠나 있는 나그네의 삶이란 고향에 돌아갈 때에 고생한 보람으로 내놓을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베트남에 사업하시는 어떤 분은 베트남의 심장병 어린이를 15명이나 한국에서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외국에 나가서 사업하시는 분들은 고생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한 댓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고향에 돌아와 내놓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과 고향을 뒤에 두고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는 분들의 고생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내가 아는 어느 신학교 교수는 너무 시간이 없어서 수염도 깍지 못하고 길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생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한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누리게 됩니다.
넷째, 나그네를 잘 대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접은 사랑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 받고 대접함으로써 대접받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황금률입니다. 남을 대접함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천국의 상급을 소원할 수 있습니다. 대접의 결과로 복이 오기도 하지만 대접하는 삶 자체가 바로 복이기도 합니다.
남을 대접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느 날 마므레 상수리나무 수풀 근처 그의 장막문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맞아들여 잘 대접하였다. 그는 손님을 주님처럼 모셨습니다. 진정 그 세 사람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을 대접할 때 부지중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사람 사랑이 하나님 사랑의 길입니다. 사람을 대접하면 그 대접의 결과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접하는 과정 자체에서 벌써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받습니다.
또한 대접은 자신을 행복하게 합니다. 사람을 대접해본 사람은 대접하는 사람의 행복을 압니다. 사랑을 주어본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행복을 압니다.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고 하셨습니다. 대접과 섬김은 예수님의 인격의 실현입니다. 대접함으로써 그 사람의 인격은 가장 복되신 분 예수님의 인격으로 고양됩니다.
그리고 대접은 천국의 상급을 받는 복입니다. 예수님은 최후 심판의 날에 주린 자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느냐, 목마른 자는 마시게 하였느냐, 나그네 될 때에 영접하였느냐, 벗은 자에게 입혔느냐,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느냐, 옥에 갇힌 자에게 와서 보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이 말씀은 작은 자에게 대접하였느냐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또 예수님 없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옥에 갇혀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주었느냐고 묻는 말씀입니다.(마25:31- 46)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출23:9)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19:33-34)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딛1:8)
다섯째,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이조 숙종 때 서울에서 일찍 남편을 여의고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생계가 곤란해 남의 집 바느질을 하면서도 알뜰하게 돈을 장만해 아들 학성 형제를 가르쳤습니다. 하루는 비가 내렸는데 빗방울이 떨어지는 곳에서 금속성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상히 여기며 주위를 파보니 큰 가마니에 은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학성 어머니는 한참 생각하다가 그것을 전보다 더 단단히 묻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학성 어머니는 오빠에게 그 집을 속히 팔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집을 새로 구입해 전과 다름없이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가며 두 아들을 가르친 결과 학성 형제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느 해 학성 어머니는 오빠를 초대하고 두 아들을 불러 옛날 집에서 은가마니를 묻고 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깜짝 놀라 이유를 묻는 오빠에게 학성 어머니는 『아무런 수고 없이 큰 재물을 얻으면 반드시 뜻하지 않은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어릴 때 의식(衣食)이 편하면 학업에 힘쓰지 아니할 것이고, 궁한 것을 알고 고생을 해보아야만 사는 것이 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오빠와 두 아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두 아들은 무수한 고생 가운데서도 진실하고 아름답게 산 자기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더욱 훌륭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12:1)
여섯째. 나그네는 동반자와 함께 해야 됩니다.
해외여행 중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팀의 총무인 동생과 함께 성지순례 중인 언니는 가는 곳마다 골칫덩어리였습니다. 단체여행은 순발력이 뒷받침돼야 왕따를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니는 방문하는 기념교회마다 앉아서 기도하느라 항상 지각생이었습니다. 그것도 눈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니 뭐라 할 수도 없어서 모두들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한번은 눈물로 기도하는 그 언니를 미처 챙기지 못한 상태로 버스가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현지 가이드가 추가로 탑승하면서 전체 인원에는 변동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되돌아가는 버스에서 동생이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언니는 수일 전에 갑자기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여기에 올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지만, 장례를 치르고 너무 슬퍼하는 언니를 겨우 설득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면서 가는 곳마다 기도하면서 그 아픔을 이겨내자고 한 것이죠. 그러다 보니 여러분께 피해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우리는 함께 여행하는 나그네들입니다.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중에는 더 배려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인생행로는 광야와 같습니다. 광란의 파도가 몰아치는 험악한 바닷길과 같습니다. 이러한 나그네의 가는 길에는 그 누구보다도 동반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외로울 때 위로와 어려울 때 의지함과 힘들 때 의논하고 도와주는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여러분의 인생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과 손잡고 가는 인생길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안전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라고 말씀하십니다.
나그네의 행로에는 작은 짐도 무겁고 고달픕니다. 몸도 아프고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의 모든 염려와 고통을 다 내게 고하라 그러면 너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주고 고통스러운 질고를 고쳐주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너희에게 평강과 소망과 위로를 줄 것이라』 예수님과 인생의 동반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508장 (통 270장)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쟎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2. 주 예수 말씀이 온세상 만민들 흉악한 죄에서 떠나라 하시니 이 말씀 듣고서 새생명 얻어라 이 기쁜 소식 전하세
3. 영생의 복락과 천국에 갈길을 만백성 알도록 나가서 전하세 주 예수 말씀이 이복음 전하라 우리게 부탁하셨네
[후렴]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세상 널리 전하세
우리는 목적 있는 나그네, 순례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히11:13). 우리는 이 땅에서 목적이 있는 순례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거주민으로 살아가려고 하지만, 성도는 나그네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는 근신하고, 둘째는 거룩하게 살고, 셋째는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 13- 17)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은 한마디로 나그네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나그네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교훈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생은 모두가 나그네임을 인류에게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인생이 나그네임을 철저히 깨닫고 나그네 정신으로 살 때 창조주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그네임을 잊고 이 땅에 안주하려고 할 때 그것은 곧 우상숭배가 됩니다.
우리는 40년 동안 38번이나 이사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 땅에서 나그네요 이주민의 신세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이러한 노정을 통하여 회개하며 깨닫고 결단케 하십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에 희망을 두고 전진하는 나그네요 목적 있는 순례자로 우리를 인도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높은 환상을 품고 날마다 걸어가는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십시오.
오래 전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여인의 죽음이 세계 매스컴의 초점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 땅의 모든 부귀영화 그리고 미모까지도 겸비해 많은 젊은 연인들로부터 사랑을 받던 다이애나 영국 황태자비였고 또 한 사람은 자기의 조국도 아니요 고향도 아닌 인도 캘커타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다가 87세의 일기로 본향으로 돌아간 마더 테레사 수녀입니다. 과연 인류의 가슴속에 누가 진정한 사랑을 심어주었을까? 진정 누가 아름다운 나그네 삶을 산 것일까? 그리고 누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본향에 갔을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나그네 정신이 없기에 폭력과 불의와 부패로 얼룩진 어두운 세상이 돼가고 있습니다. 진정 나그네로 살고자 하는 그곳에 평화가 있고 진실과 사랑이 넘칠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8)
나그네는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을 사모합니다.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뒤 탈출한 난민들은 온갖 설움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유대인도 1900년간 온갖 수모를 당하며 고향 시온을 그리워했습니다. 나그네에게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기독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육신의 고향보다 마음의 고향인 교회를 더 사랑하고 영원한 고향인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당신의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또 나그네의 삶에는 괴로움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잠깐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는 하루가 천년처럼 느껴지지만 그 시련을 겪고 나면 잠깐이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우주의 여관인 지구에 잠시 다니러온 나그네입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본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첫째,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자는 자는 싸울 수 없고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 있는 자만이 대비할 수 있고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잠자고 있을 때 사탄은 우리 육체의 소욕을 부추겨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잠자지 말고 깨어 있어서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짐을 챙겨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한 부자 관원에게 너의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왜 그 부자 관원이 능히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내려놓기에 아까운 짐이 너무도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독인들이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게 살아도 우리의 마음만은 본향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이 땅의 짐이 가볍습니다. 이 땅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짐을 가볍게 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나 버리고 갈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좋은 씨앗을 뿌리고, 사랑을 베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눈보라가 치는 추운 어느 겨울 날, 한 나그네가 산 건너편에 있는 마을에 가기 위해 눈을 헤치며 힘겹게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 속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 동사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 나그네는 어물어물하다가 자신도 얼어 죽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냥 지나쳐갔습니다. 얼마 후, 그 길을 또 한 사람의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거의 죽어가는 그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 사람은 죽을 거야. 내가 구해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고는 그를 업고서 갔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보니 길가에 한 사람이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지나갔던 바로 그 나그네였습니다. 자기만 살겠다고 혼자 지나쳐간 사람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를 업고 가던 사람은 그를 업었던 탓으로 힘을 쏟아 자신의 체온이 높아지고, 그로인해 등에 업힌 사람까지 살아났습니다. 결국 두 사람의 주고받은 체온 덕분에 둘 다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해 선을 베풀어야 할 것에 베풀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첫 번째의 나그네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을 베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시126:5, 6)
넷째, 보람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홀트아동복지회 설립자인 버서 홀트 여사는 가족을 잃은 한국 아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미국 오리건주의 농장주였던 남편 헤리 홀트와 1954년 우연히 6?25전쟁 기록영화를 본 뒤 전쟁 고아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땅을 팔아 한국을 찾았고 고아 8명을 입양하였습니다. 홀트 부부는 적극적인 입양사업을 위해 1960년에 홀트아동복지회의 전신인 『홀트양자회』를 설립하고 국제 입양사업을 활성화했습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버서 홀트 여사는 입양사업을 계속 추진해나갔습니다. 모든 입양아들의 할머니로 남아 아이들의 위탁가정을 찾고 장애인 복지시설과 특수학교를 운영했으며 장학사업과 상담, 미혼모 예방을 위한 교육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지냈던 한국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대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헤리 홀트의 묘 옆에 나란히 묻혔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그네 인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언제 본향으로 돌아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하며 짐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사는 동안 보람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모두 칭찬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오! 하나님 나를 기억하고 위해서 기도해주는 나의 부모와 가족과 친구들과 사랑하는 자들을 축복하시기 원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기억해줄 사람이 없고 또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 사람이 없는 자들과, 노약자들과 외롭고 쓸쓸한 자들과 사랑할 대상도, 사랑해줄 사람도 없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내가 특별히 기억하여 기도해야 할 질병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과, 그의 삶이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자들 그리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자들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 참회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자들 그리고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자들에게 긍휼과 은총을 베푸시옵소서. 이 시간 내게 당신의 모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나의 모든 죄를 회개하는 마음과 당신 안에서 참다운 평안을 누리는 마음을 허락하옵소서 당신의 사랑에 의지하여 간구하오니 이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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