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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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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돈 생각하기 - 돈! 영적인 차원의 문제
본문 / 마태복음 6:19-24
교정된 시각 : 부자가 되는 것이 축복은 아니다
반드시 ‘부자=축복’은 아닙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축복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부자가 되는 것이 해가 될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부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이런 문제로 고민합니다. “왜 예수를 잘 믿는데 가난한가?” 혹은 “왜 예수를 안 믿는데 부자인가?”
예수를 믿어도 가난해 질 수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질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까? 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면서 재물에 대해 많이 언급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거지와 나사로,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0장 25절에 보면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반드시 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의 영적인 차원 : 악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
신앙인의 경제생활에 관한, 혹은 돈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에 대한 다양한 견해 중 대체로 일관된 시각이 있는데, 그것은 ‘돈의 중립적 가치’입니다. 돈은 본질적으로 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험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돈은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사용하거나 즐기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든지, 돈의 지배를 받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영적인 문제와 관계된다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하면서 돈은 나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돈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돈’은 영적인 세력
돈은 그냥 단순한 물질이 아닙니다. 돈은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성경적인 용어로는 ‘육체의 소욕’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19절)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20절)” 라고 말씀하시면서 ‘돈’은 영적인 세력이며 영적 세력으로서의 돈은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돈은 육체적인 소욕을 구체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경계해야 합니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돈이 없으므로 정욕의 죄를 짓지 않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물질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번 돈으로, 내가 육체의 소욕을 즐긴다.’ 라든지 혹은 ‘깨끗하게 번 돈은 내가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 라는 생각은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돈을 버는 것이,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우리 속에 욕망으로, 혹은 삶의 목표가 되어있지 않은가를 분명하게 보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돈을 가지고 즐기고 누리는 모든 것을 끊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아무리 돈에 대해 중립적인 가치를 둔다 해도 돈을 사랑하는 것을 면하기는 힘이 듭니다. 그것은 돈에 대한 유혹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일반적인 쾌락을 절제하고 물질적인 만족을 스스로 부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그리고 ‘잘’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열심히’, ‘잘’에 있습니까? 아니면 ‘축복’에 있습니까? 솔직하게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깨끗하게 사는 것은 바로 주어질 축복을 바라기 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즉,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헌금을 드리는 이유가 바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깨끗한 부자’가 되려는 욕망
기독교계에서 늘 ‘청부론’과 ‘청빈론’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번 돈으로 얼마든지 누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청부론’입니다. 즉 깨끗한 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깨끗한 부자란 신앙인으로서 부도덕한 돈을 거부하고 반드시 정직한 십일조와 구제헌금을 하는 사람, 즉 자신의 돈과 하나님의 돈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깨끗한 부자’가 되기 위하여 구별(區別)하여 드린다, 성별(聖別)하여 드린다, 모든 것을 드린다는 신앙의 원리가 결국은 부를 정당화하고 내가 누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 : ‘돈’ VS ‘하나님’
누가복음 18장 18-23절에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지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청년의 마음속에 가장 큰 관심과 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다는 이 청년을 향하여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라 (눅18:22)”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이 청년의 삶에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청년은 부자이지만, 남을 구제하는 사람이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고, 살인과 간음의 죄를 짓지 않는 사람,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청년이 부를 누리는 데 무어라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깨끗하게, 모범적으로 사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 자신의 물질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깨끗한 부자’였던 것입니다.
돈이 ‘영적인 문제’라는 것은 결단과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두 주인(‘돈’VS‘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 가난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시 가난한 이유 때문에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죄를 지으려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자가 되어서 육체적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 어느 순간에 돈의 지배를 받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돈」에 대한 반듯한 생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번다면 반드시 그릇된 길로 가게 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욕망은 충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끊임없이 경계할 줄 알아야 하고, 우리 속에 끊임없이 성령의 소욕이 필요함을 알아야 하고, 성령께서 나를 간섭하시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이 욕망이 되지 않기를 제어해야 합니다. (만나신문 2007년 7월호 /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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