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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 복음주의와 기독교교육

인기감동기타 유윤종............... 조회 수 3348 추천 수 0 2002.10.04 01: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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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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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유윤종

Ⅰ. 들어가는 글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의 헌법에는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에서 믿는 교리와 신조는 기독교 개신교파가 믿는 복음주의니 이는 신앙의 생명이며 골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성결교회가 복음주의 교회임을 천명하는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의 나아갈 방향과 기독교교육적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성결교회의 정체성이 바르게 규명될 것이고, 성결교회의 교육도 지향하는 목적을 분명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복음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문자적으로 복음주의란 성경의 복음을 지상의 가치로 간주하고 교회와 신학의 내용과 방향이 복음을 지향하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 내지는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드(C. H. Dodd)에 의하면 복음은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에 포함되어 있는데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의해 약속된 시대가 도래하였고 성령이 강림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서 재림하실 것이며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은사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대단히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주의라는 개념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를 항상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혼돈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는 그 뿌리를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미에서 일어난 대각성운동의 전통에 두고 있는 신앙이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복음주의는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신학적 현상과 부흥운동이다. 복음주의는 복음 자체를 강조하는 표현이며,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의 입장을 나타내기 위해 선택한 말이다. 복음주의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항상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복음주의는 어느 한 교파나 신학노선에 국한되지 않고, 초교파적인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루터주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비교화적인 근본주의자와 유식한 루터파 혹은 개혁파 신학자, 그리고 오순절주의자와 신정통주의자 등을 포괄하기에 충분한 큰 개념이다.
  1950년대 이후 복음주의는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공고히 해왔다. 그래서 이러한 복음주의의 확대와 수적 증가가 오히려 정체성의 위기와 불확실성의 위기를 증가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앤도버 뉴튼신학교의 가브리엘 파커는 현대 '복음주의 제국화'를 지적하며 여섯 가지로 분류되는 다양한 복음주의의 관측을 제시했다.
  첫째,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우익으로 극단적 무오성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분파주의 정신에 지배받는 '극단주의적 복음주의', 둘째, 중생의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을 우선으로 삼는 대중전도주의자들의 '구복음주의', 셋째, 신앙의 사회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변증적 설득력을 갖춘 '신복음주의', 넷째, 16세기의 재세례파들과 같이 종교적 우익과 정치적 좌익의 급진적 행동주의자들의 '정의의 복음주의', 다섯째,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황홀경에 빠진 예배주의자들의 '은사주의적 복음주의', 여섯째, 교회의 연합을 위해 더 큰 기독교 공동체들과 연결하여 운동하고자 하는 '교회연합 복음주의' 등이다.
  그만큼 복음주의 안에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 복음주의는 수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증가 추세를 계속한다. 이 복음주의의 발전이 미래의 기독교회의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서구의 복음주의 교회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20세기에 들어와 급격하게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한번 선포함으로써 전도의 기치를 높이 들려고 한다.
  이 글에서는 성결교회의 신학과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복음주의와 기독교교육과의 관계를 정립하려고 한다. 물론 아직도 성결교회의 신학이 바로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과 복음주의를 어떻게 정의 하는냐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한계가 있지만 현재까지의 연구에서 복음주의가 가지는 특징을 중심으로 복음주의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고, 이것을 기초로하여 복음주의 교육에 대하여 연구하려고 한다.


Ⅱ.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1. 복음주의의 기원과 중요성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복음주의는 시대마다 학자마다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복음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하기 보다는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 그 안에서 공통 분모를 찾아서 그 중요성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사실 복음주의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5세기말 중세 교회에서이다. 그것은 중세 말기 교회의 형식적 신앙에 반기를 들고 성서적 신앙 회복을 주창했던 카톨릭 저술가들을 가리키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공식화 되었고, 영국과 미국에서의 부흥운동에서 꽃피우게 되었으며, 20세기의 근본주의의 편협성을 극복한 신복음주의에 의해 현재 복음주의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 복음주의란 개신교 종교개혁 일반, 특히 16세기 전통 속에서 나온 루터파 교회들을 지칭할 수 있다. 여기서 복음주의는 그들의 활동에 대한 "그리스도 복음"의 중심성을 표현해 준다. 이 초기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이 복음의 규범적 진술을 제공해 준다고 주장하였고, 과중한 교회 구조는 일반 신자들의 권리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책임을 상당히 빼앗는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성서의 권위를 주장하였다. 중세 천주교회가 전통의 권위에 근거해서 잘못된 길로 나갈 때 루터는 기독교는 성서에만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대한 천주교의 전통과 제도에 대항하여 개신교는 성서에만 궁극적인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영어권에서의 복음주의란 말은 종종 18세기의 부흥운동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영국의 존 웨슬리,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대서양의 양단에서 설교한 조오지 휫필드 등은 회개, 생활의 경건, 열정적인 증언과 전도, 사회악의 개혁을 강조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영국에서의 부흥운동은 평신도의 주도권, 적극적인 사회 참여, 복음전도적 설교, 그리고 경건의 열심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영어권의 복음주의는 19세기 피니의 복음주의 운동으로 꽃피게 되었다. 피니의 부흥운동은 미국 기독교를 비관주의적 칼빈주의에서 좀더 적극적인 복음주의적 알미니안주의로 바꾸는데 공헌을 하였다. 미국의 독립 선언문을 살펴볼 때, 그것은 전통적인 칼빈주의와 맞지 않는다. 독립 선언은 인간은 본래적 권리와 선택의 능력을 주장했다. 이 새로운 정신 위에 미국은 건설된 것이다. 19세기 초에 시작된 미국의 제2차 대각성운동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이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신학이 복음주의적 알미니안주의 였던 것이다. 이 복음적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은총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피니는 이런 복음주의적 알미니안주의의 대표자였다.
  셋째, 최근 수십 년 간에 어떤 이들은 복음주의란 말은 그 어떤 전통의 개신교도이건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이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여 왔다. 특히 성령의 은사들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사용되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은 성경에 대한 공통적인 헌신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구원에 대한 신념, 거룩한 생활에의 열망, 세상에서의 정의에 대한 관심 등이다. 이런 복음주의자들은 루터파, 오순절파, 여러 다른 침례교파, 여러 장로교파, 웨슬레파 감리교도, 성결교파들, 그리스도교회들, 메노나이트파, 형제파 등 여러 교단 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일은 어렵다. 복음주의 자체가 뚜렷한 신조처럼 명시적인 운동강령을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지구촌의 다양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복음주의의 최소한의 공통된 분모로서 성경의 긍극적인 권위와 생동력 있는 체험적 신앙, 그리고 열정적인 복음전도에 대한 강조 등을 들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를 믿는다. 성경이 권위적이라는 말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이 그 기록과 해석에 있어 성령의 활동에 의존되어 있음을 믿는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은 생동력 있는 체험적 신앙을 강조한다. 복음주의의 체험적 측면에 대한 강조는 주로 영미 복음주의의 산물이다. 미국에 이민 온 초기 청교도들은 형식적인 신앙을 반대하고 오직 하나님 은혜의 체험을 간증할 수 있는 사람들만 회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체험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전통은 기독교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종교로 보지 않고, 성경에 기록된 신앙이 현재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불신자들에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2. 복음주의의 특징

  우리는 앞에서 복음주의가 시대적, 교파적, 상황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복음주의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점은 성경의 궁극적 권위에 대한 강조와 체험적 신앙, 그리고 열정적인 복음전도이다. 여기서는 이 세 가지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1) 성경의 궁극적 권위
      복음주의 교회는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복음주의는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성을 초월하는 신적 권위를 가진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리에 대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루터는 '오직 성경으로'라고 하는 슬로건을 가지고 종교 개혁을 이루었다. 이는 성경만이 성령에 의해 조명을 받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의 궁극적 권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첫째, 복음주의는 성경을 계시의 유일한 원천으로 주장한다. 복음주의자들은 모두가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를 인정하지만, 특히 종교 개혁자들은 이를 특히 강조함으로 그들의 개혁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전통이 성경과 동등하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들은 성경만이 계시된 신적 진리를 포함할 뿐만아니라, 계시된 총체적 진리임을 믿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교회는 신앙에 관한 어떤 조항도 세울 힘이 없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것도 세우지도 않았고 결코 세우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개혁자들이 교회를 모독하려는 것이 아니고, 교회란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말씀의 종이어야 함을 명백히 하려 한 것이다.
  둘째, 복음주의는 성경을 이성을 초월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성경은 교회나 이성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하여 신뢰를 얻는다. 이는 외적인 것에 의해서 권위를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 권위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성경은 그것의 가르침의 신뢰성과 그것의 메시지의 긴박성을 독자와 청중들의 마음속에 각인시킬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복음주의는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마음속에 내주하는 성령에 의해서 동반될 때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였다. 칼 헨리는 성령과 성경의 통일성을 "성령의 역할은 성경에 객관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인간을 이동시키시지도 않고 도덕적 자기 충족성으로 인간을 해방시키지도 않는다. 성령은 성령이 감동시켰던 기록된 말씀 속에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다스려진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본래적인 명료성을 주장한다. 이는 성경의 기본적 메시지는 세련되지 못한 평신도에게도 분명하며, 사람은 누구나 진리를 찾고 발견하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성경에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복음주의는 경험, 즉 꿈과 징조와 표적보다도 성경의 우위성을 주장한다. 신앙의 근거가 되는 권위란 성경 안에서 반사된 거룩한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이다. 물론 신앙의 증거들과 확증들이 꿈과 징조와 표적 등과의 연결 속에서 포함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신앙의 삶에 한 위치를 갖지만 신앙을 위한 기초가 아니고, 이미 신앙하고 있는 자들을 위한 신앙의 진리에 대한 조명으로 보아야한다.

    2) 체험적 신앙
      복음주의는 성경의 말씀을 오늘의 삶에서 역동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적 경험으로서의 '중생'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중생함으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체험적 신앙이 중요한 이유이다. 복음주의는 개인적 회심과 체험적 신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복음주의의 뿌리가 된 종교개혁은 성경의 중요성을 복음주의의 초점과 표준이 되게 했다. 반면에 영미 복음주의는 회심과 복음전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고, 성령을 통한 내적 변화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단지 구원을 죄와 용서라는 법적인면이나 지식적인 면에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은총에 대한 주관적 증표인 중생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개혁적 신앙을 강화하는 영적 각성의 물결로서, 청교도 운동과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 그 기반이 되었고, 18-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의 부흥 운동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면, 체험적 신앙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첫째, 체험적 신앙은 회심 체험으로 나타난다. 회심 체험은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적 체험을 말한다.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한 전형적 실례이다.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며 지식보다 오히려 실천에서 존재한다. 의인, 중생, 성화는 교리로만 취급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해야 되는 것이다. 이 체험적인 신앙은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수많은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도록 만들었다. 즉 예수의 생애에 나타났던 기적이나,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반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둘째, 체험적 신앙은 경건하고 성결한 삶으로 나타난다. 경건하고 성결한 삶은 회심 체험의 결과로서, 복음주의 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영미 복음주의 운동의 직접적인 뿌리는 18세기 웨슬리의 부흥운동과 에드워즈의 사상이다. 웨슬리는 성화를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으로서 성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요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미국인들이 초기 청교도들이 가졌던 신앙적 열정을 잃어버린 것을 개탄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지속적으로 체험하려면 세속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면서, 복음주의의 체험적 신학을 정립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됨의 본질은 인간 영혼의 가장 내면적 부분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면 영혼은 기쁨에 완전히 젖게 된다는 것이다.

    3) 열정적인 복음 전도
      복음주의는 복음 전도에 우선권을 두고 전도와 선교를 강조한다. 복음주의는 성서의 메시지로부터 유래한 신학체계인 동시에, 기독교에서 일어난 독특한 운동, 즉 경건하고 헌신적인 신앙 풍토이다. 종교개혁 운동, 경건주의 운동, 청교도 운동, 대각성 운동, 부흥운동, 성결운동, 은사운동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주의 운동에는 반드시 불신자를 회심시키는 복음전도와 선교가 뒤따랐다. 물론 종교개혁 운동은 교회 개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 개혁의 정신 자체가 복음적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이후의 복음주의 운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면, 복음주의의 전도는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가? 첫째, 중생을 주요 메시지로 강조하는 부흥회의 형태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개인 전도를 통해서 청중을 모아서, 중생의 복음을 주로 선포하였다.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들이 다시 전도자와 선교사로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처럼 복음주의자들은 구원의 확신의 증표로서 중생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특히 청교도 운동에 있어서 중생 혹은 회심은 신앙의 핵심이다. 청교도들은 신자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복음적인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회심을 경험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부흥회적인 신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신앙 형태는 18세기 들어서 더욱 강조되었다. 18세기 영국의 감리교 운동과 미국의 대각성 운동은 증생을 복음주의의 표어로 삼고 열심히 중생의 복음을 전하였다. 이를 위해서 복음주의자들은 부흥회라는 새로운 방법을 선택하였고, 야외 집회, 순회 전도, 감정적인 설교등을 사용하였다.
  둘째, 복음전파와 더불어 사회 개혁을 추구한다. 복음주의의 전도는 사회 참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웨슬리는 18세기의 도시 산업 근로자들을 상대로 선교하였다. 물론 웨슬리는 이들을 위하여 복음도 전했지만 아울러 학교 선교, 빈민 구제, 또는 노예폐지운동에도 앞장섰다. 웨슬리는 단지 성화의 재발견에서 끝나지 않고 당시 산업화를 인해 피폐화된 중하류층에 대한 선교와 봉사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여기에서 복음주의 운동의 탄력성을 볼 수 있는데 복음주의는 항상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새롭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또한 19세기에 미국과 영국의 전역에서 일어난 성결운동은 기존의 교회가 버리고 간 도시 빈민을 상대로 한 전도운동이었다.
  셋째, 복음주의는 폭넓은 대중 전도 운동이다. 이점에 있어서 복음주의는 20세기초의 자유주의나 현대주의를 능가하는 장점이 있다. 자유주의 내지 현대주의는 소수의 지적인 엘리트의 취향에 부합하는 반면, 복음주의는 대다수의 대중의 취향에 맞는 신앙형태를 개발하였다. 즉,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열정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신을 새롭게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전도운동에는 선교 단체의 전도운동이 하나의 역할을 감당했다. IVF나 C.C.C와 같은 단체는 전도에 대한 열정으로 대중 속에 뿌리를 내렸고, 실질적으로 기존교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때도 있었다. 또한 빌리 그래함과 같은 복음주의적 비전을 가진 지도자들이 이끄는 전도운동은 종교 개혁적인 정신을 회복하면서 특히 세상을 긍정하고 문화를 포용하여 큰 영향력을 끼쳤다.


Ⅲ. 복음주의와 기독교교육

  우리는 지금까지 복음주의의 기원을 통하여 그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았고, 복음주의를 의미하는 여러 가지의 내용중에서 대표적인 특징을 세 가지로 알아보았다. 여기서는 위에 언급된 특징들이 기독교교육과 어떻게 연관되어지느냐 하는 것을 알아보겠다.

  1. 성경 교육 : 기독교교육의 핵심

  복음주의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첫 번째 특징은 성경의 권위를 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즉,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도 성경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성경의 초월적 주장들에 근거한 신앙만이 모든 문화적, 이념적 비전을 대신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교육의 핵심은 성경이 되어야 한다. 성경 교육이 바르게 이루어질 때, 온전한 기독교적 인간을 양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전통이나 이성 혹은 인간의 경험에 우선하여 교육되어져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진 말씀으로서(딤후 3:1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게 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엡 4:13). 또한 성경은 사람을 변화시켜서 영혼을 바르게 하고(히 4:12), 인생의 복된 길을 알려 주며(계 1:3, 시1:1-3), 모든 삶의 지침이 된다(시 119:105).
  그러면, 효과적인 성경 교육의 방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성경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기독교는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또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교회의 기초와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근거와 규범을 바로 성경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성경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삶이 변화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리스 컬리는 "성경은 계속적으로 기독교교육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더욱 생생하게 우리의 삶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경 교육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실재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고 예배와 순종으로 이에 응답할 수 있게 해야한다. 더 나아가서 자신을 알고 우주와 자연 및 사회와 역사의 의미를 깨닫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생활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한 사회 건설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둘째, 성경을 기독교교육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성경은 교육의 내용이다. 성경이 내포하는 각종 메시지는 교육의 주제로서 존재한다. 성경이 기독교교육의 중심에 위치하는 이유는 성경은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추적이 담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들의 삶과 죽음을 포함한 인생사에 깊은 관심을 표현하시는 사랑이다. 또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함에 있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죽게 하시고 부활케 하셔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한 바로 그 사랑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배워야한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내는 과정을 가능케 하는 토대로서 기독교교육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교육에 있어서 성경을 대신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화 상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성경을 다른 여타의 사상과 동일시하고, 기독교교육의 일부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현대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이 그리스도인의 일상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눈에 보이는 합리성만을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적인 공격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기독교적인 독특성을 잃지 않고 세상을 포용한 것이 바로 복음주의이다. 따라서 복음주의 사상에 근거한 성경 교육을 효과적으로 시행할 때, 기독교교육이 추구하는 바른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2. 삶의 변화를 위한 교육

  삶을 변화시키는 중생 혹은 회심의 체험은 복음주의의 또다른 특징이다. 인간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고, 그 결과로 진정한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복음주의자들은 청교도적인 신앙을 강조하고, 부흥회와 같은 신앙 운동을 펼침으로 중생을 체험하도록 도왔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변화는 기독교교육의 중요한 과제이다. 때때로 중생이나 회개는 좁은 의미의 종교적 용어로 이해되지만, 삶의 변화는 교육적 주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변화를 위한 교육은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인 중생을 인위적으로 이루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 가치 체계를 지닌 인간의 삶의 변화를 도모하겠다는 뜻이다.
  인간 행동의 근본적 변화는 기독교의 핵심적 주제일 뿐 아니라 기독교교육의 근본적 관심사이다. 기독교 신앙의 전통에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본래 창조된 모습을 회복해야한다. 따라서 교육은 인간 행동과 삶의 변화를 계획한다. 물론 어느 누구도 새 것을 꿈꾸며 계획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이상, 꿈은 우리 인간의 안에서 이미 경험되었던 과거의 지식체계의 투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하여 거듭난 인간의 모습은 다르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새롭게 구원받은 인간은 진리와 자유와 사랑이 가득찬 온전한 인간이다. 따라서 교육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삶의 모습을 이루고자 한다.  
  그러면, 어떻게 삶의 변화를 위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첫째, 회심을 체험하도록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특히 순간적 회심으로서의 중생의 체험이 우선되어야 한다. 중생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왜 중생해야 하는지, 중생은 무엇을 뜻하는지, 어떻게 중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적 배려는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고 선포하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마 4:23). 마찬가지로 중생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비밀을 알려주신 것처럼(요 3:1-16), 오늘 우리에게도 교육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회심을 위한 교육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교육 내용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서야만 올바로 생존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새로운 인간의 삶이 우리의 현실에 이루어져야만 우리는 회심을 위한 교육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그 삶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신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 교육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앙 체계를 확립하는 것을 뜻하며, 이것을 통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아래서 파악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믿음의 눈을 열어주는 신념 체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회심을 위한 교육은 인간의 삶 가운데서 옳고 그른 것들, 선하고 악한 것들을 분별하고 선택하며 참여하게 할 수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정립하도록 도와준다.
  셋째, 성결한 삶을 강조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변화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신앙 체험의 결과로서 성결하고 경건한 삶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성결한 삶의 모습을 교육 내용으로 제시하면,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적인 삶을 지향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정보 사회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한 21세기의 급격한 변화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세속화된 문화와 가치를 바로 잡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위한 교육은 다양한 내용과 방법으로 준비되어져야 한다. 시대를 복음적 안목으로 새롭게 해석하여 새로운 기독인간의 모습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3. 전도와 선교를 위한 교육

  복음주의는 다양한 신앙 운동의 형태를 취하면서, 불신자에 대한 전도와 선교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로 복음주의 교회는 많은 성장을 이루었고, 지금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는 복음주의 교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선교와 기독교교육은 초대교회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사명으로 자리잡았다. 예수께서는 선교와 교육의 사명, 즉 가서 제자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명(마 28:18-20)을 그의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으며, 제자들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또한 가르쳤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게 되었다(행 2:40-47).
  복음주의는 중생을 강조함으로 인간의 변화를 추구하였고, 변화된 인간은 자연스럽게 사회 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교육의 역할이 강조되었고, 또한 교육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전도자로 헌신하여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복음주의 교회나 복음주의 선교 단체에서는 교육을 통한 끊임없는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전도와 선교를 위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첫째, 부흥회의 요소를 가미한 영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부흥회에서는 성령의 은혜를 통한 중생의 체험을 강조한다. 이러한 영적 체험을 인위적으로 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교육적으로 배려하는 것은 인간의 영적 체험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확인해 줄 뿐만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예를들어, 성령은 죄사함을 통해서 받게 된다(행 2:38). 그리고 믿음으로 받게 된다(갈 3:14).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보다는 감정이나 분위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따라서 진정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 과정을 분명하게 교육하여서 그들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운다면, 영적으로 성장하여 또다른 복음의 재생산에 참여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새신자로부터 선교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체계적인 교육을 마련하여 실시하면, 끊임없는 전도와 선교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둘째, 복음전도와 함께 사회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 진정한 전도는 영적인 필요만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온전한 회복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따라서 신앙 선교 운동 만이 아니라 학교 선교, 빈민 구제, 각종 사회 사업을 더불어 함께 함으로 온전한 복음의 구현을 위해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서 사회 개혁을 위한 일련의 교육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 교육, 환경 교육, 생태 교육, 평화 교육, 통일 교육 등을 계획하고 실시해야 한다.  
  셋째, 세상을 긍정하고 문화를 포용하는 복음 전도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교육해야 한다. C.C.C의 빌 브라이트는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간단히 네가지로 요약하여, 그것을 철저히 교육시켜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것을 사영리라고 부른다. 이처럼 복음 전도의 방법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내면화되어질 수 있도록 교육되어진다면, 세계선교는 더 빠르게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복음 전도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이 팔요하다. 특히 연령별로 전도 방법을 개발하여 교육과정에 반영한다면, 가장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복음의 명확성을 교육해야 한다. 존 스토트는 복음전도에 있어서 내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진숙하는 데 성실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듣는 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알고 있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에 대하여 그리고 가능한한 보상할 준비를 갖추어야 함에 대하여 설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하며 삶의 모든 부분을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굴복할 필요성에 대해 선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교회내의 교제 가운데서 그리스도께 개방적이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충성을 다하도록 간청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복음을 통하여 삶의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Ⅳ. 맺는 글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복음주의의 기본적인 세 가지 특징을 통하여 복음주의와 기독교교육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먼저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역사적 흐름을 따라 알아보았다. 복음주의는 종교 개혁의 전통에서 비롯되어진 개념으로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에서 꽃피우게 되었으며, 현재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개념의 대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복음주의는 시대적, 교파적, 상황적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어지고 있지만, 세 가지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를 강조하고, 체험적인 신앙을 중요시하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궁극적 권위는 성경은 전통, 이성, 경험을 초월하는 계시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것이다. 체험적인 신앙의 강조는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적 체험은 성경을 통하여 오늘의 삶에서 역동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열정적인 복음전도는 복음주의는 기독교에서 일어난 독특한 신앙 부흥운동을 수반하여, 인간과 사회를 함께 개혁하는 대중 전도 운동임을 알아보았다.
  이상의 내용을 기독교교육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본 내용은 첫째, 성경교육이 기독교교육의 핵심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다양한 현대 사상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의 독특성을 유지하는 힘은 복음주의에서 비롯되어지며, 복음주의를 지탱하는 힘은 바로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 교육은 당연히 강조되어야 하고, 또 기독교교육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둘째, 복음주의의 또다른 특징인 회심은 곧 삶의 변화시킨다는 관점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 전도와 선교를 위한 교육을 강조하였다. 복음주의의 선교는 회심을 강조하는 부흥회의 형태로 이루어졌고 사회개혁을 더불어 실천하였으며 폭넓은 대중의 기반 두었다. 따라서 부흥회에 기반을 둔 영성교육과 사회 개혁을 위한 일련의 교육 그리고 현대 문화를 포용하는 대중적 전도 교육의 필요성을 말하였다.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복음주의 교회로서, 성결교회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를 생각해 보았다. 성결교회의 교육은 한 마디로 성경 교육, 회심 교육, 선교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개인과 사회와 문화 전체를 변혁 시키는 선교 교육을 통하여 21세기를 대처해야 한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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