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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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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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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장복 교수 저, <예배의 신학>
저자/정장복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1.정교회의 예배신학 (An Orthodox Theology of Worship)
정교회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현존(presence)을 강조한다. 이 현존이란 신자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합될 때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본래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졌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의해 세워졌으며, 성령님에 의해 지탱되며, 성령님으로부터 권능을 얻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며, 구체화 되는 것이다. 예배에서의 모든 회중은 일반적으로는 예배를 통하여, 혹은 특수한 방법인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하게 되며, 하나님은 회중들에게 그분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정교회의 핵심은 바로 예배에 있다. 그리고 이 예배가 바로 그들의 영혼을 이끄는 지침인 것이다. 말씀과 이미지(imagery) 그리고 예전적 표현들로 가득찬 성경의 본문들은 교회의 권위와 전통들을 영광스런 형태로서 더욱 확고하게 해준다. 예배를 통하여 회중은 계속적으로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믿음의 진리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예배는 회중을 일깨우고, 개혁시키며, 변화케한다. 대체적으로 정교회 회중들의 삶과 그 특징은 예배를 통해 형성되고 이끌어진다.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세계를 향해 열려진 창문처럼, 예배는 믿음에 생명을 불어 넣어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예배는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위대한 학교이며,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인간의 성품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성별된 삶을 살도록 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선구자(agent)인 것이다.
정교회 예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인데,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예배는 역사 안에서 행해졌던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들을 끊임없이 재 경청하면서, 이미 완성되었고, 벌써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기쁨으로 찬양하는 자리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보증되었다. 또한 교회는 항상 미래를 향해 열려있으며, 다가올 세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정교회 신자들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의해 형성된다. 예배, 특히 성례전을 통하여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행위에 참여하게 되며, 날마다 부활 신앙으로 인도하는 성령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예배의 예전적 의식들을 통하여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확고하게 경험하게 됨으로 구원과 성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물리적인 형태(떡과 잔)로 영적인 실체를 구체화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육신을 장막을 벗고 홀연히 영적으로 변할 종국적인 구원과 우주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정교회의 필수적인 예배 요소와 기본적인 구조들은 초기 사도적 교회의 예배예전의 모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의 제의 의식과 형태는 여러 세기를 걸쳐 오면서 점차적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는데, 비잔틴이나 콘스탄티노폴리탄 예전에 이르러 통일된 형태로의 예전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의 예전은 가톨릭과 수도원적 형태의 혼합적인 모습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모든 예전의 형태들을 수용, 동화(assimilation), 종합한 동방 기독교의 풍부한 예전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예배의 기도는 많은 부분으로 나뉘는데, 다음은 이들 예배의 주요 요소이다.
(a) 성례전 예전과 예배, 그리고 성만찬 예전 (b) 성무일과 (c) 절기와 교회력에 따른 금식 (d) 성서일과 그리고 (e) 예전적 구조 배치와 예전적 몸짓들과 형식들에 관한 세부적인 지침들.
A. 성례전
성례전은 회중에게 미래의 삶을 준비케 할 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here and now)에서의 보다 더 실천적인 삶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회중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보다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능력은 역동적으로 역사하며,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발휘되도록 역사한다. 이것은 마술이나 기계적인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례전을 통해 주어지는 삶의 변화는 그들의 영성과 믿음, 그리고 헌신이 더욱 고취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하심과 그에 따른 인간의 응답이라는 협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신,인 협동을 '협조작용'(synergy)이라 부른다.
성례전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삶으로 이루어지며, 더욱 독특하면서도 특별한 의미는 성례전이 그분의 공생애 사역의 연장이며, 확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례전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을 만나게 될 뿐 아니라, 참된 인간의 모습과 우리가 돌아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동방 정교회는 7가지 성례를 인정한다: 성세(baptism), 견진성사(Confirmation), 성체성사(Eucharist), 고해성사(penance), 종부성사(anointing of the sick), 신품성사(priesthood), 혼배성사(marriage). 성례전 가운데 성세와 성체성사는 상위의 위치를 차지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될 때 비로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은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지속되며, 발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에 위치한 성만찬은 교회의 가장 심오한 기도임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목회인 것이다. 또한 성만찬은 교회의 교회됨과 교회로서의 최고 절정을 동시에 성취하게 하는 예전인 것이다. 성만찬을 통하여 교회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됨과 동시에 끊임없이 인간의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성령님의 전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로 변화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회중에게 내어주시며, 한 자리에 모인 회중은 그분의 삶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정교회는 성찬 성례를 거룩한 예전(The Divine Liturgy)으로 행하는데, 이는 가장 숭고한 의식이기에 그렇다. 이들의 거룩한 예전인 이 성찬성례의 순서는 두 번의 엄숙한 입장, 성경의 독경과 그 해석, 그리고 대 성찬 기도와 성체의 축성기도 그리고 분병,분잔으로 이루어진다. 동방 정교회의 성찬 성례는 모두 3가지 형태가 있다. 성 크리소스톰의 거룩한 예전(The Divine Liturgy)과 성 바질의 거룩한 예전, 그리고 성찬 전(前) 견신의 예전(the Pre-Sanctified Gifts)등 이 3가지 형태가 그것인데, 3번째 형태는 사순절 기간과 몇몇 성인 기념일과 고난주간(Holy Week) 동안에만 집례되었다.
성무일과(The Daily Office)
예전적 주기는 상호 연관된 네 개의 주기들에 의해 순환된다. 즉 일(day), 주(week), 달(month), 년(year) 등이다. 성무일과의 목적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신비에 연합케 하기 위함이며, 또한 평범한 삶의 시간들이 아닌 매 시간을 구원의 중대한 순간들로 바꾸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매일이 은혜의 날로 변화될 수 있으며, 매 해가 주의 해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하루의 성무주기는 다음과 같다. 만과(Vespers;하루일과가 끝날 때), 종도(Compline;잠자리들기전), 새벽기도(Midnight), 찬과(Orthros;새벽미명에) 그리고 일시과(prime;그후 조금 있다가), 삼시과(terce;9시), 육시과(sext;정오), 구시과(none;오후3시) 등이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하루일과를 마치고 드리는 만과와 새벽미명에 드리는 찬과는 상당히 발전된 형태를 지닌다.
이러한 성무일과의 뿌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드린 매일의 기도회와 수도원 공동체의 공동예배시 드린 기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성무일과의 예배는 매 예배시마다 그날의 대주제를 가지고 진행되는데 때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해당하는 소주제를 갖기도 한다. 특히 만과(Vespers)와 찬과(Orthros)의 성무예배는 축제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위대한 성일과 성자들을 축하하고 기념하며, 또는 그 밖의 교회사의 기념비적인 사건들을 기념한다. 그러므로 이 예배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현존에 중점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절기와 금식일(Feasts and Fasts)
가장 기본적인 교회의 축일은 주일(the Lord's Day)로서 이는 매주마다 지켜지는 교회의 가장 기초적인 절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 주일에 행하는 교회의 중심된 활동은 바로 거룩한 예전을 통하여 회중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이로써 주일은 매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예전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는 몇가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행하는 금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면서도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력에 있어서의 축일들과 금식일은 상황에 따라 유연성을 가지고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두 개의 커다란 범주로 나눌 수 있겠다. 즉, "유동성이 있는"(movable) 절기와 "고정된"(fixed) 절기가 그것이다. 유동적인 절기는 사정에 따라 준수된 절기로서 부활절 같은 절기가 그것이었다. 반면 고정적인 절기는 매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지켜졌다. 그리고 모든 절기들은 그것이 보편적이든 지역적이든간에 언제나 엄숙하면서도 거룩한 예전의 형태를 갖추어 집례되었는데, 그 이유는 매 예배마다 집례되는 성만찬이 교회의 영원한 축제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은 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엄숙하면서도 중요한 절기이다. 이 부활절은 교회력에서 가장 중심이면서 핵심적인 자리에 위치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은 그분의 핵심적인 구속사역이다. 그러므로 엄숙한 고난주간(Holy week)의 준수와 장중한 부활절 예배는 주님의 구속사역을 영광돌리는 중심적인 절기인 것이다.
고난주간에 앞서 40일간을 사순절로 지켰는데, 이를 대금식(Great Fast)일로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40일간 계속되는 사순절과 참회시간들을 통하여, 교회는 참회의 능력과 그 의미를 맛보게 되며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의 모습과 생명력을 확고히 하게 되는 것이다.
정교회는 이러한 부활절 외에도 12개의 대(大) 절기들을 지키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모 마리아의 삶 가운데 나타난 여러 사건들, 게다가 성모의 무흠수태 대축일, 성탄절, 주현절, 종려주일, 승천일, 성령강림절, 변화 축일(Transfiguration) 등을 포함한다.
매주일의 주간 금식일과 사순절기간의 금식일 이외의 다른 금식일로는 성탄절을 앞두고 일정기간을 금식하는 기간으로 삼았다.
금식기간에는 기도만이 아니라 봉헌도 함께 드려진다. 금식은 경건한 공로행위로 간주되지도 않았으며, 십자가를 지는 행위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인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는 말씀의 표현이며, 그 말씀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이란, 주로 영적인 지식의 성숙과 하나님께 향한 순종, 그분의 말씀에 대한 열정, 그리고 성화됨의 성숙으로 간주되었다.
공예배시 사용되는 예배서(service books)는 크게 주로 4개의 형태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Typikon이다. 단권으로 된 이 예배서는 매일 예배를 위한 예배 모범서요, 전례규범(Rubrics)서이다. 두번째 형태로는 'Euchologion'과 이에서 유래한 'Small Euchologion', 'Archieratikon' 그리고 'Diakonikon'를 들 수 있겠다. 이 예배서는 모든 예배를 비롯하여 성례전과 그 밖의 다른 예배시에 사용되는 제사장적 기도와 간구의 기도문을 담고 있다. 세번째는 형태로는 고정적인 형태의 성무일과와 환경에 따라 바꿔 사용할 수 있는 가변적인 형태의 성무일과 내용을 담고있는 예배서이다. Horologion는 성무일과에 있어서의 고정적인 예배 요소들과 그밖의 다양한 예배 순서들을 싣고 있다. Great Octoechos (또는 Parakletike)는 한 주간에 걸쳐 매일 드리는 예배에서 사용하는 찬양을 담고 있는데, 8주를 한 주기로 하여 반복된다. Triodion은 사순절 전야와 사순절 기간, 그리고 대금식일과 고난주간의 성무일과를 위한 찬양집이다. Pentaekostarion은 부활절 기간중의 성무일과에 불려지는 찬양집이며, Menaia은 모두 12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일년 12번, 매월 한권씩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12권의 책은 교회력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고정적인 예배나 절기예배 등을 다룬 예배서이다.
정교회의 찬송가는 감정적이기 보다는 다분히 교리적이다. 모든 곡은 교회 음악의 대표적기법인 기본 8음계 중에 하나로 시작된다.
네 번째 형태는 일종의 성서일과로서, 성경을 주기별로 읽을 수 있도록 한 책이다. Evangelion은 1년을 주기로 4복음서를 순서에 맞춰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한 것으로, 복음서의 말씀을 구절씩 재구성해 놓은 것이다. Apostolos는 사도행전부터 서신서에 이르기까지 각 구절로 나누어 1년동안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Psalter는 시편을 크게 9개의 노래로 나누었으며 그것을 또 20개부분으로 구분하여 놓았다. 그리고 Prophetologion는 한때 구약성경의 특정 부분을 미리 지정하여 그 부분을 읽도록 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예배예전서로 사용되지 않으며 단지 위에서 언급된 다른 예배서에 포함시켜 사용하고 있다.
예전적 구조 배치(Liturgical Space)
전통적인 교회건물이나 성전은 몇가지 독특한 특징과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당시의 교회 건축의 목적은 변모하는 세계의 미(美)적 수준과 부(富)를 반영키 위함이었으며, 또한 성만찬 예전의 본질을 명백하고도 뚜렷히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돔모양(domes)의 천장과 둥근 문(arches), 그리고 천문(apses;교회당의 동쪽 끝에 있는 반원형의 돌출부), 뿐만 아니라, 잘 그려진 도해(圖解)적인 구성과 촛불을 사용한 조명과 높이와 길이 등, 이러한 성전 양식을 통해 교회는, 인류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며, 인간과 세상을 향한 교회관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전은 주로 세 부분으로 구된다. 즉, 세례자를 위한 공간(narthex), 회중석(nave), 성단(sanctuary)이 바로 그것이다. 설교대와 설교단은 성단 밑, 회중석의 중앙에 위치하고, 성찬대나 제단은 성단의 중앙에 놓인다. 성단은 약간 올라가 있으며, 성화막(iconostasis;동방정교회의 제단쪽 성화병풍)에 회중석과는 분리되어 있다.
성상들은 정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며, 개인의 신앙 성숙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성상들은 주로 교회사에 기념비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을 다루며, 회중을 거듭난 중생의 삶으로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그 동안 성상은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것 자체가 숭상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상이 성육신에 대한 이해를 적절히 도울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며, 거룩케 하기 위한 전도자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2. 로마 카톨릭의 예배신학 (A Roman Catholic Theology of Worship)
로마 카톨릭의 예배신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두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예배의 각 부분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는 세상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신비로운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약 성경에서부터 시작된 기독교 예배의 기본적인 신학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 신학은 개혁교회의 신학과 같이, 중세 우주론의 가설들과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중세의 가설들은 성례전의 구체적 이해와 그 집례에 있어 끊임없는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특히 입교식과 성만찬에서 두드러졌다. 성경과 그 밖의 교회사를 통한 역사적인 연구들은 성경의 여러 기록들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형태를 보다 더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에큐메니칼 신학에 힘을 실어 주었다.
A.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배
모든 구원의 역사(모든 사건, 목적, 성소, 하나님의 현현, 제의)는 나사렛 예수의 인간되심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육화하심으로 구체화되었다. 인침을 받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며(요1:1,14); 새 창조(고후5:17;갈6:15;롬8:19ff;계5:14); 새 유월절과 어린양(고전5:7;요1:29,36;19:36;벧전1:19계5ff); 새 언약(마26:28;막14:24;눅22:20;히8-13), 새 할례(갈2:11-12) 그리고 하늘의 만나(요6:30-58;계2:17), 하나님의 성전(요2:19-22), 새로운 희생와 제사장(엡5:2,히2:17-3:2; 4:14-10:14) 안식일 휴식의 완성(갈2:16-17; 마11:28-12:8; 히3:7-4:11) 그리고 다가 올 메시야 시대(눅4:16-21;행2:14-36)의 도래인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외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2:16-17)
구약의 예전적이고 희생의 성전제사는 이제 다른 어떤 희생제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대체되었다.(히8-9)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인 것이며, 기독교 예배는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반응으로써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의 영광에 접붙임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제의(rite)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세례의 의미와 그 중요성도 언급하고 있다.(롬6-8장)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되다"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인간은 예배와 그분께의 순종, 그리고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데, 이러한 '예배와 순종, 믿음'이라는 수단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선물인 것이다. 즉 우리는 한 성령으로 하나님 보좌 앞에서 인간의 온전한 행위인 예배를 드림으로 그리스도와 접붙임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연합은 영원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세례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존재하는 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의 지체인 성도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로 감히 유입(insertion)되게 하는 은혜는 그리스도인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말씀의 신성함 때문에)과 모든 기독교 공동체와(그리스도의 인성 때문에) 연합하게 한다. 그러나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를 형성시키는데, 즉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하셨고, 구원코자 원하시는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구원의 성례전이며, 교회의 목적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과의 연합됨은 예배와 순종, 그리고 믿음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을 위한 요구를 포함한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연약함으로 인해 우리는 예배를 거부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되며 그렇게 될 때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구원이 모든 구원을 이루기 위한 충분한 원천이 되는 한, 구원과 예배드림으로 받게 되는 세례는 어떤 간구의 기도 없이도 주어지는 것이다. 은혜의 선물인 세례는 끊임없이 인간에 의해 성례전의 형태로 드려지고 수용되어야만 한다. 특히 주일 성만찬 예배가 그래야 하는 것이다.
B. 예전(Liturgy)- 교회의 공중 예배
회중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몸인 교회라는 실체적 공동체 안에서 세례를 받게 된다. 이것이 성령님을 통하여 드려지는 성부께 향한 예배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예전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선물로 주어진 최초의 예배라고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전, 희생, 제사장, 또는 제사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삶과 주님을 삶의 모범으로 따르며 사는 삶을 말했다. 우리가 공적인 예배 혹은 예전에로 부름을 받아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연합된다는 실제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고전10-14, 엡4, 골3:27-28)
'레이투기아'(Leitougia)라는 말에는 성전에서의 사가랴의 직무(눅1:23), 복음선교와 가난한 자을 위한 헌금(고후9:12), 바울을 섬긴 에바부로디도의 헌신(빌2:30),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에게 향한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히8:6) 등을 포함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개인적인 기도와 공동기도, 세상을 향한 섬김과 헌신,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는 성만찬은 서로 엄격히 분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한 우리의 유일한 전인적인 응답의 구체적인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전인적인 응답으로 우리는 한 번 희생으로 모든 이를 위한 속죄를 이룬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연합되는 것이다.(히10:10) 즉 교회의 중심 예전으로서의 성만찬은 사회적 요구의 구체적 표현이며, 각기 분리된 성전과 예배예전, 그리고 제사장 직분을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말씀과 성만찬이 있는 예배는 말씀이 곧 그리스도의 육신이 되게 하는 예배로서, 이 말씀을 입고 오시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성을 입고 다가오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위임받은 교회의 구성원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교회'라는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오늘의 상황에 구원하시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례전은 인간에 의해 고안되거나 단순히 교회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과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례전은 정확히 말해 그리스도의 몸을 예배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의 단면을 비쳐주고 있으며, 그 안에서 교회가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친밀하게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매주일 드려지는 성만찬은 회중들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희생,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의 참 모습과 미래의 소망,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만물의 완성 등을 되새기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독교인의 본질적인 연합은 성만찬 집례를 위한 본질이며, 이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이 '회상','기념'(anamnesis)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신조와 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아남네시스는(기념하는) 단지 심리학적 이해로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으므로 그 죽음으로 인해 한 개인이 감동을 받는 것도 아니며, 또한 미사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비록 왜곡된 미사의 집례가 그런 방향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말이다.) 교회가 성만찬시 "아버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상기하도록 하옵소서....우리는 당신에게 이 거룩하고 살아있는 당신의 희생에 감사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할 때,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위한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며, 나아가 2천년전에 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는 것이다.
교회가 세례를 베풀 때, 그 세례는 교회나, 집례자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친히 베푸시는 것이므로 비록 단 한 번의 세례라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유효한 세례인 것이다. 이와는 달리 매주 행하는 성만찬을 통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매주 기념하며, 그리스도의 심판과 위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망을 늘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거저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예배의 최고 절정인 하나님께 향한 넘치는 찬양이 그의 응답으로 있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며, 교회는 이러한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서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제의(ritual)라는 것은 보다 더 나은 의미의 해석과 전달을 위해 한 공동체가 만든 상징들(signs)과 몸짓들(gestures)로 이루어진 하나의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적 예배는 믿음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계를 더욱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교회의 중심된 예전은 바로 성례전(sacraments)인 것이다. 그리고 로마 가토릭은 언제나 개혁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포를 통해 발행된 '거룩한 예전의 제정'(The Constitution on the Sacred Liturgy)처럼 말이다.
3.루터교 예배신학(A Lutheran Theology of Worship)
루터교에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의 성전에 모이는 회중의 모임으로서 설교와 성찬을 통해 선포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회중의 믿음이 반복적으로 견고케 되는 자리이다.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며, 회중은 그에 응답한다. 형식에 있어서 루터교 예배는 복음주의적이면서도 가톨릭적인 성격을 띤다.
루터교의 예배 형태는 매우 명확하면서도 심지어 흥미롭기까지 한데, 그 이유는 이들의 예배에는 복음적인 면과 가톨릭적인 면이 동시에 역설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루터교 회중은 복음적인 신앙을 소유하길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방에 선포되어지기를 또한 원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모든 시대와 역사에 걸쳐 기독교를 하나의 예전으로 통일한 가톨릭의 위대한 예전적 전통에도 서있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은 참된 복음주의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복음주의자가 될 때 비로소 가톨릭 예배의 중심에 있게 된다고 믿고 있다.
한편 루터교인들은 자유로와야 할 예배가 마치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의식을 갖추어 드리는 예배만을 기뻐받으신다고 하는 전통에 의해 예배에서의 자유함을 빼앗으려는 것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특정한 예배의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예배는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예배'라고 주장하면서 예배에서 자유함만을 요구하는 주장도 통렬히 거부한다. 예배에서의 그런 '자유함'은 종종 예배 인도자를 폭군적인 인도자가 되도록 유혹하며 그로인해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예배를 낳게된다. 우리가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적인 형식을 통하여 기뻐 받으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갖추어 드림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믿음을 재확인코자 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독교 예배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과거 기독교 예배의 위대한 유산들을 자유로이 경험할 수 있는데, 이는 귀중한 선물인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이러한 귀중한 유산들 중의 일부는 너무도 중요하기에 이것들 없이는 도저히 예배드릴 수 없기까지 하다. 교회에서 읽혀지는 성경은 과거 교회들이 그 신성한 권위를 인정한 경전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루터교 예배의 핵심적 뼈대는 다름 아닌 그동안 교회들이 대대로 지켜왔고, 전해준 것들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는 행위인 '세례'와 성경의 주제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선포', 그리고 '사죄의 확인'과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임재와 언약의 확인으로서 교회가 언제나 행한 '주님의 식탁' 등이다. 그들은 이것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은 너무도 구체적인 형태로 주어졌으며('물', '성경',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하는 자', '빵과 포도즙'), 바로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인 성령을 부어주시는 '은혜의 통로'인 것이며, 우리를 온전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방편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인 선물들 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으며 또한 이러한 '은혜의 통로'(means of grace)가 중심이 되지 않은 루터교 예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또 다른 역설로 되돌아가 보자.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예배의 귀중한 유산들을 전해받아 전통에 따라 집례하되, 복음적인 시각으로 다시 비평하고 재구성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요구이기 보다는 오늘 모이는 회중들의 요구에 의존한 것인데,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배에 임하셔서 역사하신다. 주일아침에 드려지는 공적인 예배에서 예배를 집례하고 주도하는 분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시다. 예배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자리에 모인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말할 때, 우리의 말하는 입술과 찬양하는 입술을 빌려 친히 말씀하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치신대로 행하는 주님의 성찬과 세례도 하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루터교 예배의 핵심인데, 그 이유는 이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따르길 원하며, 주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이기에 그렇다. 루터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통해 일하시며 물리적인 재료들을 통하여 우리와 만나신다는 믿음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였음을 믿는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 예배의 두 가지 역설적인 면은 마치 신성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다는 엄청난 역설과 맞먹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루터교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이른바, '복음주의적 가톨릭주의'(evangelical catholicism) 예배의 특성은 그들의 교회론 신조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에겐 오직 하나의 거룩한 교회만이 있으며, 그 교회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순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 가운데 선포되어지며 복음에 따라 거룩한 성례전이 집례되어지는 곳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순전한 이해를 위한 복음선포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성례전의 집례는 기독교 교회의 온전한 일치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인간에 의해 고안된 의식들은 이 땅위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일치를 위해 불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Augsburg Confession, Article Ⅶ)
그러므로 이들은 최선을 다해 위대한 옛 예배 전통들을 추구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그것들을 복음의 시각에 비추어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언제나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가?"라고 자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은혜의 통로'인 예배 전통들을 중심으로 하되 비록 덜 중요시 여겨져 온 전통들 중에서 매우 유용한 것들은 수용하여 행하고 있다. 루터교인들은 주일을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며, 믿음의 공동체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로 여겨 거룩히 지킨다. 그들은 부활절과 성탄절, 그리고 옛적부터 내려온 그밖의 여러 교회력을 지킨다. 이들은 몇몇 성인들의 축일을 준수하고 전통적인 성서일과를 사용한다. 또한 미사를 위해서 옛 서방교회의 본문을 사용하고 이러한 예전적 본문들을 부분부분 영창한다. 이들은 예배 집례자와 세례받을 자들을 위해 전통적인 예복(vestments)을 입는다. 이렇듯 루터교인들의 옛 전통들에 대한 애착은 때때로 별로 쓸모없은 것들에까지 고수하게 하였는데, 그래서 이들은 종종 비본질적인 부분에서조차 보수적인 면을 보이고 변화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때도 있었다.
찬양 역시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루터교가 중세 미사와의 분리를 이룬 가장 환영할 만한 개혁중의 하나는 바로 예배중 모든 회중이 자국어 가사로 된 곡을 부를 수 있도록 함으로서 예배에 회중들의 참여를 독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일기시작했는데 시편가(psalms)와는 다른 찬송가(hymns)의 형태로 당시의 다른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도 이를 즐겨 사용했다. 그리고 여전히 루터교 예배의 주요 역설적인 면으로 남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제와 회중의 역할이다. 예배의 인도자인 목사는 전체 예배에 있어서 중대하고도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루터교 예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든 회중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구약 말씀을 교송으로 부르지 않고, 많은 부분에서 평신도의 지도력이 강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찬양을 통하여 회중들이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그렇기에 찬양은 단순히 설교를 듣기 전에 하는 그럴듯한 준비 순서가 아니라, 루터교 예배에서 그 중심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자, 이제 이들 예배에 있어서 보게 되는 마지막 역설적인 면을 살펴보자. 사실 여기까지 언급한 내용의 거의 전부는 즉, 말씀과 세례, 주님의 만찬 그리고 옛 전통들의 복음적 재구성과 회중 참여의 강화, 그리고 찬송가집의 사용 등,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 넓게 퍼져있는 보편적인 것들이며, 에큐메니칼 예전 운동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들이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이러한 특징들을 루터교 예배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한다고 한들 결코 루터교만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솔직히 말한다면, 루터교만의 유일한 예배 형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터교 예배는 오히려 가톨릭의 예배 전통을 받아들여 복음의 시각으로 끊임없이 질문과 갱신을 거듭한 예배인 것이다. 비록 그러한 예배의 형태가 비합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예배만이 그들이 믿는 복음을 가장 잘 운반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확신한다. 결론적으로, 루터교 예배의 가장 뛰어난 점은 이들의 예배는 루터주의에 찌든 편협한 예배가 아닌 가톨릭적이면서도 복음주의적인, 즉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인정받을 만한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예배라는 것과 이들의 예배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는 달리 매주 행하는 성만찬을 통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매주 기념하며, 그리스도의 심판과 위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망을 늘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거저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예배의 최고 절정인 하나님께 향한 넘치는 찬양이 그의 응답으로 있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며, 교회는 이러한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서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제의(ritual)라는 것은 보다 더 나은 의미의 해석과 전달을 위해 한 공동체가 만든 상징들(signs)과 몸짓들(gestures)로 이루어진 하나의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적 예배는 믿음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계를 더욱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교회의 중심된 예전은 바로 성례전(sacraments)인 것이다. 그리고 로마 가토릭은 언제나 개혁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포를 통해 발행된 '거룩한 예전의 제정'(The Constitution on the Sacred Liturgy)처럼 말이다.
4. 영국국교회(성공회) 예배 신학(An Anglican/ Episcopal Theology of Worship)
성공회 예배는 기독교 신앙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례전에 중점을 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교회는 가시적이며 세밀한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체화 하는 것이다.
성공회주의자들로 구성된 국가교회나 감독교회들은 공식적인 예배신학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단지 1549년에서부터 지금까지 여러번의 편집을 거듭해 사용하고 있는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통하여 이들의 예배 형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판의 공동기도서에서 미국 성공회는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활동으로 주일에 행하는 거룩한 성찬과 그밖의 다른 중요한 절기들, 그리고 매일 아침과 저녁 기도. . . 등은 이 교회의 정규적인 공식예배이다."(Book of Common Prayer, 13)라고 말하면서 고정된 형태로의 예배는 대중적인 호응을 불러 일으킨 매일 기도와 매주일 행하는 말씀과 성례전으로서의 예배가 그것이다.
성공회의 신학은 주로 성육신이나 성만찬적 신학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특히 예배의 신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들 예배에는 말씀과 그 말씀의 연출(actions)이 있게 되는데 이 보여지는 말씀으로의 연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내면적이면서 영적인 만남을 갖게 됨을 상징하는 외적이며 가시적인 형태의 말씀인 것이다.(공동기도서, 857) 그럼으로써 예배는 보다 더 구체화 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비롯하여 전인격으로 드리는 특별한 행위이다. 우리는 예배를 위하여 일어서고, 앉기도 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손을 높이들고 목소리를 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보고, 들으며, 노래하고, 고백하고, 침묵하기도 한다. 또한 냄새를 맡고 맛을 느끼기까지 한다. 비록 제아무리 특별한 방식으로 드린다 하더라도, 성공회 예배시 사용되는 외적인 예배 행위들에 대한 그들의 끊이지 않는 관심은 다음과 같은 확고한 신학적 신념에 의한 것이다. 즉, 우리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을 내어 맡길 수 있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주님의 자녀로 서게 될 곳인 하나님의 초월적인 신비의 자리로 이끌릴 수 있는 것은 예배시 사용되는 예전적 상징들을 활용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과 성례전에 참여코자 함께 나아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에 임하시며,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모인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인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마18:20)라는 이 말씀은 예배의 촉매가 되는 주요한 말씀인 것이다. 이 예배는 그의 자녀들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것이다. 이들 예배의 주요 순서로는 말씀의 봉독과 선포,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중보의 기도와 세례와 성찬을 중심으로한 성례전이 그것들이다.
한 자리에 모인 공동체로 예배드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능력을 상기하게 되며, 우리의 온 힘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다.(공동기도서, 336) 여기에는 죄의 고백과 우리의 무가치함의 시인, 그리고 열렬한 간구와 온 인류를 위한 중보의 기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이웃을 위한 중보의 기도가 있게 된다. 이는 우리가 오직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거룩한 만찬인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을 회상(anamnesis)하게 되는데, 이러한 기념적 성찬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부활에 동참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주님께서 명하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전1:24)는 말씀에 의지해 감사함으로 떡과 잔을 받아 먹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말미암아 살찌우게 되며 우리는 주님의 신비스런 몸에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공회의 중심적인 신학을 통해,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신비를 찬양하는 것으로서, 이는 매일의 아침,저녁에 드려지는 성무일과의 찬양을 통해 주님의 구속을 회상하고 결혼미사와 병자들을 위한 안수, 그리고 고해성사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 등과 같이 개인의 삶속에서 맞이하게 되는 중대한 시기의 예배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신비를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성공회는 주일 예배를 비롯한 주중의 모든 크고 작은 모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그 신비적 사역이 드높이 기념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회중의 삶의 모든 영역들이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안에 나타나신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며, 자신을 죽기까지 온전한 제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들도 자신의 전부를 헌신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점진적으로 받아 사도바울이 말한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가는 것이다.
5. 개혁교회 예배신학(A Reformed Theology of Worship)
개혁주의 예배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죄로 인해 무능력한 인간과의 만남의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개혁주의 예배는 복음에 근거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실천하는 예배인 것이다.
개혁주의 예배의 신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그간 두가지의 다소 상반된 이미지가 있어 왔다. 하나는 성전에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그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며, 다른 한 면은 멜빌(Melville)이 쓴 '백경(Moby Dick)'의 한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늘로 우뚝 솟은 높은 강단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예배를 드리는 회중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보자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구원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처럼 개혁주의 예배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하심과 주권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백인 일색의 예배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개혁주의와 장로교 예배의 역사적 흐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그리고 이에 반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연약한 인간과의 만남인 것이다.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로서 칼빈과 그 후예들의 주된 관심은 '말씀의 선포'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 선포되어야 하며, 이러한 강조는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라는 견지에서 보건데 루터에게서 보다 더욱 강조된 점이었다. 하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다. 즉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무한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불변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분은 지혜와 힘과 의와 거룩하심과 선함과 진실하신 인격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 제네바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 예배가 언제나 예배의 시작 부분에서 '죄의 고백'(a general confession)이나 '참회의 시편'(penitential psalm)순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자의 현주소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하심에 대한 관심은 개혁주의 예배의 깊은 뿌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름심에 경외심을 보임과 동시에 지체함 없이 그의 범죄한 입술을 제하여 줄 것을 간구했으며,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하심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자신을 헌신하게 된 것이다.
계시록에 나타나듯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다분히 환상적이고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중세 가톨릭의 미사에 대항한 개혁교회는 계시록에 등장하는 화려한 예배의 장면들을 또한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개혁교회에서는 여전히 그리스도 자신을 말씀의 중심이시며 근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교회사가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품고 있었던 설교에 대한 개혁의 열정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근세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추세가 예배를 하나의 종합 예술 작품처럼 취급하려는 듯 하나 분면히 말해 예배는 '창조적인 예술 작품'이 아닌 것이다. 히스롭(D.H. Hislop)은 그의 책 "Our Heritage in Public Worship(공중 예배에서의 우리의 전통; 역자 주)"에서 비유를 들어, 개혁주의 예배의 기본 틀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upward)"이라기 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틀(downward)"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위로 향하는 예배는 예배의 초점이 예배드리는 예배자나 혹은 그의 감정에게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받으시는 분께, 또한 예배자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에 두는 것이다.
칼빈, 부쳐, 오이코람파디우스, 베자, 파렐, 쯔빙글리 그리고 낙스와 같은 개혁가들은 매주 1회마다 성찬이 집례되기를 갈망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 성찬은 주일 아침 예배의 정규적인 순서였기 때문이었다. 성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회중들은 성찬에 즈음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성찬을 받도록 요구되었다. 이러한 회중 각인이 성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한 개혁자들의 주장은 과거 종교개혁 이전의 1년에 1회 내지는 그보다 더 적게 성찬에 참여케 한 관습보다 더 주위의 급속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의지는 무식한 관료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들은 연 4회의 성찬집례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결국 칼빈을 비롯한 다른 개혁자들도 그들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채 연4회의 성찬만을 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성찬이 집례되지 않는 날에는 축성기도 부분에서 찬송과 축도로 이어짐으로 예배를 끝마쳤다.)
개혁교회에서는 성찬시 일상적인 떡을 사용했으며 떡을 받는 회중은 각자의 양에 맞게 떡을 떼었다. 잔 또한 떡과 동일하게 전달되었다. 많은 회중들은 주님의 떡과 잔을 받기 위해 성찬 테이블 주위에 모였으며, 그들이 받는 성찬의 의미는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기보다는 우리와 맺으신 주님의 언약의 확인하는데 있었다. 또한 개혁자들은 성찬시 일반적으로 미리 정해진 축성기도를 드렸으며 그 기도는 주님께서 성례에 친히 임재하시기를 기원하는 형식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칼빈은 말씀을 통해 친히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조했는데, 주님은 다음과 같은 명확한 제정의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니. . . 또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니. . ." 한편 쯔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가 모인 회중들의 기억속에서 기념되는 것으로 보았다.
개혁가들의 기도서에 대한 사용은 복잡하리 만큼 다양한 차이를 보였다. 예배의 시작부분에 있는 시작을 위한 기원의 기도(The Prayers of the invocation)와 대중보의 기도는 기도서를 따랐다. 그러나 때때로 설교 후의 기도는 목회자의 자율에 따른 즉흥기도가 행해지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을 위한 존 낙스의 '공동예배서'(Book of Common Order)는 대개 칼빈의 '제네바 예식서'(Form of Prayer)를 따르고 있으나 또한 다소 성공회의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의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7세기에 이르러 영어 사용권의 개혁주의 국가와 대륙의 개혁교회는 서로 큰 차이를 보게 된다. 1643년 웨스터민스터 성 총회를 통해 절정에 달한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혁명은 국교회 내의 성공회 퓨리탄과 심지어 몇몇 분리주의자들과의 합의를 통하여 보다더 예전 중심적인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국교회 내의 성공회 퓨리탄들은 예배예전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분리주의자나 회중교인들은 적대시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스코트인들은 자신들의 예전 중심적인 입장을 얻어내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들과의 타협이 불가피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타협으로 말미암아 스코틀랜드 장로교와 후대 미국 장로교, 뿐만 아니라 미국의 이민 청교도 예배에서의 예전신학과 예전적 형태가 감소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같은 추세로, 그 동안 여러 개혁교회에서는 비공식적이나마 지켜지던 5가지의 성서적인 절기들, 성탄절, 성금요일,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등이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의 청교도 시대에는 무시되거나 금지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반대로 북미의 대륙계열의 개혁교회 후예들은 비록 그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다른 분파들이 반예전적 청교도주의를 택했다 하더라도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있었다.
대림절과 사순절은 비성서적이라는 이유로 개혁자들로부터 무시당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고행과 금욕적인 색깔을 띠고 있기에 구원론이 자칫 공로주의적 구원론으로 흐를 수 있으며 또다시 중세적인 예전의 악용을 불러일으킬 만한 여지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성자축일과 성인을 위한 기도 등은 개혁자들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러나 각 지역의 교회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 역사를 빛낸 믿음의 증인들과 교사들을 본받고 그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기 위해 그들을 기념하는 설교를 강화하곤 했던 것이다.
초기 개혁교회의 예배에는 말씀의 선포를 3가지로 구성했는데, 구약성경, 서신서 그리고 복음서로 나뉘었다. 또한 이러한 말씀 사이에 몇 개의 시편송이 불려졌다. 성서일과가 사용되면서 점점 성경봉독과 설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해당성구와 설교본문은 완성된 책으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짧은 구절보다는 성경의 한 장 전체를 읽는데 긴 시간을 할애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점점 성서일과가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설교자 자신의 자유로운 본문 해석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비록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지만 레위기나 민수기와 같은 보다 심오하고 난해한 본문들은 도외시되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의 절기나 회중들의 애경사가 있을 시에는 그로 인해 연속적인 성경본문의 진행이 차단되기도 했다.
점점 교회의 절기와 축일들이 감소되는 대신 매주 부활의 축제로서의 주일(the Lord's Day)성수가 그 의미를 더해갔다. 이와 같이 주일성수에 대한 중요성과 그 강조는 다른 주요한 기독교 전통을 이어받아 온 개혁교회의 특징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장로교와 청교도 전통은 안식일에 쇼핑을 한다든지 세상일에 몰두한다든지 그리고 주말에 휴가를 간다는 것은 금기시 했던 것이다.
금세기 장로교 예배의 선두 학자인 올드(H.O. Old) 박사는 그의 역작인 "Worship That is Reformed According to Scripture(성경에 기초한 개혁주의 예배;역자 주)"에서 성경에 기초한 개혁주의 예배에 있어서의 다섯 가지 본질적 요소를 언급했는데 첫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하며 둘째,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드려지는 예배이어야 하며 셋째,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인 성화된 모습이 있어져야 하며 넷째, 예배를 통해 사랑이 충만히 넘치는 삶이 있어져야 하며 다섯째, 회중을 교육하고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세례의 이해는 성경과 어거스틴의 입장인 '언약의 확인'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한다. 세례는 구원을 이루어 가는 회중의 거룩된 삶으로 이끄는 의식이 아니다. 즉 회중의 훈련과 성화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의식이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인 새로운 언약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 강조점을 두고 있는 예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로의 입교식인 것이며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세례 뒤에 따라오는 열매로서 기대되는 것이다. 유아세례를 받은 자는 훗날 12세에 이르러 교리문답 과정을 받아야 하며 회중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야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혁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전에 철저하고 강도높은 교리문답 교육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리스도 공동체의 언약인 세례는 언제나 공중 예배시에 집례되었다. 개혁가들은 세례를 구약의 언약이었던 모세의 할례와 연속선상에 두었으며 세례시에 성령님께서 세례받는 자에게 충만히 임하심을 보여주는 실제적인 표식이요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외에 기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다른 형태의 안수는 행해지지 않았으며 순수히 성경적 전통에 따라 성경에서 말하는 물을 붓는 세례만이 허용되었다.
세례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도 구약과 신약에서 행해졌던 대로 '언약의 식탁'으로 이해했다. 주님은 식탁을 통해 그분의 자녀들에게 실제로 임재하시지만, 그렇다고 주님의 임재가 아주 단순히 떡과 잔에 제한되어 그것 속에 임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만찬은 단순히 죽은 자를 기념하고 기리기 위한 식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주님의 임재하심의 약속이요, 언약인 것이다. 이 식탁은 주님께서 그의 12제자들에게 직접 행하시고 그들앞에서 제정하신 예전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주님의 성만찬 예전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정교회 예전의 신비적이며 미신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게 된 것이다. 반면 개혁교회의 성만찬은 성경을 통해 계시되는 말씀의 임재와 그 능력을 강화한다. 이 식탁에 있어서의 감사와 찬양의 모습은 시편송을 부르면서 나타나게 되며(때로는 일반적인 찬송) 중보의 대기도를 통해 창조와 타락, 성육신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상기하는 내용을 담았다. 요컨데 개혁교회의 "주님의 만찬"을 일컬어 "거룩한 신비"(Holy mysteries)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표현인 것이다.
20세기에 후반에 들어와 미국 장로교 예배에서 나타나는 한가지 현상은 아마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여파와 그 동안 무미건조한 예배의식을 탈피해 예배에서의 새로운 미적인 감각과 신비함, 그리고 드라마적인 예배의 연출을 추구하려고 하는 욕구로 인해 또다시 종교개혁 이전의 예배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1989년 신학적이면서도 실제적인 검증을 토대로 한 활용 가능한 '예배 지침서'(Directory for Worship)를 교회의 규정서로 지정하게 되었다. 이 예배 지침서에는 즉흥적인 예배를 제외한 6가지 공식적 예배 형태가 있는데, 성만찬이 있는 주일 예배에서의 세례식, 결혼식, 장례식, 매일 기도문, 특별 예배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예배 지침서에서는 과거 초기 개혁교회에서 행했던 세례와 병자를 위한 안수시 기름을 붓는 행위와 세례식이 있는 예배시 악령을 내어쫓는 행위와 초기 개혁교회 인도자들의 전통이었던 예전적인 제스쳐와 언어들이 제거되었다. 이 외에도 더 큰 변화를 위해 예배시 사용하는 언어와 예배, 시편가집, 찬송가집, 심지어 성경도 합당한 목적을 위해서 적절한 변화를 가져와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의 변화가 아무리 정치적으로 설득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장로교를 비롯한 개혁교회들의 예배의 변화는 인간의 욕구만을 채우기 위한 인간적인 도구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고 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예배의 변화는 과거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자리로서의 초기 개혁교회의 예배의 이해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소지를 낳고 있는 것이다.
6. 침레교 예배신학 (A Baptist Theology of Worship)
침례교인들이 성경에 근거한 예배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성경에만 근거한 예배의 모형보다는 일반적인 예배의 원리에 따르는 경향이 다분한 것을 보게 된다.
모든 침례교의 신학은 성경 자체에 근거한 성경 중심적 신학이다. 이것은 그들의 예배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지는 특징으로서, 그들의 예배의 신학과 형태를 발전시킴에 있어 예배와 연관된 성경 본문들을 중요한 자료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모세(출33-34), 이사야의 부르심(사6장), 나사렛의 회당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눅4:16-30),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4:19-24), 최후의 만찬에 관한 여러 가지 언급들(특히 고전11:23-26), 그밖에도 초대 교회의 수많은 예배의 모습과 심지어 계시록에 묘사된 천상 예배의 모습(계4-5장)까지를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그들은 또한 참된 예배란 삶 속에서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개인이나 공동체가 아무리 잘 갖추어진 예전적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믿음의 교제와 성결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기독교 예배는 예배 신학만이 아닌 예배의 윤리와의 통합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침례교의 예배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적인 예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의 형태를 모두 가지고 있으나 이 부분에서는 공적인 예배에 초점을 두고 전개하려 한다.
이들에게 있어 공적인 예배(Corporate Worship)는 회중예배(Congregational Worship)를 의미한다. 즉 회집된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개념과 만인 제사장적 견지에서 이들은 목사와 평신도간의 구분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예배시 회중의 역할은 목사의 역할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한 자리로 간주된다.
설교에 중점을 두면서 고정된 예전적 형태를 갖추지 않는 이들의 예배 특징은 때때로 회중의 참여를 소극적으로 만들어 왔다. 그러나 침례교 예배는 다른 형태로 회중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회중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이들은 평신도에게 예배 기도와 예배인도를 맡기고 있으며 이들은 또한 회중 찬양과 응답적 성경봉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봉헌의 의미와 그 중요성의 회복에 중점을 두고 주일 예배를 위한 공동 기도서와 회중 교독문을 발간해냈다.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이끄는 '초청'은 19세기 영적 대각성 시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지금도 전 회중의 헌신과 결단을 이끄는데 사용되곤 한다. 침례교는 또한 '주님의 만찬'(Communion)의 중요성의 회복을 통해 회중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침례교에서 말하는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대화의 장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은 그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형태는 말씀봉독, 설교, 찬양, 침례, 그리고 주님의 만찬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런 점에서 회중의 응답 부분은 찬양과 감사로서, 예배시 회중은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와 구속의 사건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회중은 찬양과 봉헌, 기도와 회중적 말씀봉독, 교독문과 결단이라는 부분을 통해 하나님께 응답한다. 그래서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되어지며 또한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침례교 예배의 결론인 것이다.
이들은 예배시 언제나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를 인정한다. 비록 예배가 순서에 따라 의식과 질서있게 드려져야 하고 예전적 부분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겠지만, 고정된 예전의 형태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배시 회중가운데 자유롭게 활동하셔야 하기 때문에 예배는 비교적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과 하나님과의 만남 사이에 복잡한 것들이 가로막아서는 안 되는데 복잡한 예전적 예배는 자칫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데 장애물이 되기도 하기에 그렇다. 예배시 초월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잘 짜여진 예전적 순서에 통제 받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님은 복잡한 예전적 예배이든, 그렇지 않은 아주 단순한 예배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때와 장소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회중은 언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침례교의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하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열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에 자리하신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적 은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기에 그리스도께서 예배의 초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야 말로 예배에 있어서 핵심 부분이며, 말씀의 선포인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에 초점을 두기에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듣는 회중들에게 장래일에 대한 소망을 주며, 하나님의 은혜와 동행하심이 언제나 회중의 삶 속에 함께하심을 확신케 하며, 각인의 영적, 물질적 갈급함을 채워주는 것이다.
주님의 만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초점을 둔다. 19세기의 영적 대각성 당시 침례교는 이 주님의 만찬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그들의 침례교 전 역사를 통해 볼 때 그들에게 있어 주님의 만찬은 예배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도 예배에서의 그 중요성을 다시 회복하려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만찬은 과거에 행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을 선포하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하며, 오늘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회중의 마음과 심령속에 그리스도께서 동일하게 임하여 주심을 선포하는 자리이다. 그리고 이 주님의 만찬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세상 가운데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다.
요컨데,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corporate worship)는 하나님과 믿음의 공동체가 만나는 자리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회중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충만히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총에 한 목소리로 응답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만남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초월적인 방법으로 회중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리고 침례교의 회중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에 자신의 귀를 기울이며, 예배를 통하여 자신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응답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예배를 통하여 그들의 중심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의 은총과 회중을 온전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정장복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1.정교회의 예배신학 (An Orthodox Theology of Worship)
정교회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현존(presence)을 강조한다. 이 현존이란 신자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합될 때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본래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졌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의해 세워졌으며, 성령님에 의해 지탱되며, 성령님으로부터 권능을 얻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며, 구체화 되는 것이다. 예배에서의 모든 회중은 일반적으로는 예배를 통하여, 혹은 특수한 방법인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하게 되며, 하나님은 회중들에게 그분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정교회의 핵심은 바로 예배에 있다. 그리고 이 예배가 바로 그들의 영혼을 이끄는 지침인 것이다. 말씀과 이미지(imagery) 그리고 예전적 표현들로 가득찬 성경의 본문들은 교회의 권위와 전통들을 영광스런 형태로서 더욱 확고하게 해준다. 예배를 통하여 회중은 계속적으로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믿음의 진리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예배는 회중을 일깨우고, 개혁시키며, 변화케한다. 대체적으로 정교회 회중들의 삶과 그 특징은 예배를 통해 형성되고 이끌어진다.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세계를 향해 열려진 창문처럼, 예배는 믿음에 생명을 불어 넣어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예배는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위대한 학교이며,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인간의 성품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성별된 삶을 살도록 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선구자(agent)인 것이다.
정교회 예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인데,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예배는 역사 안에서 행해졌던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들을 끊임없이 재 경청하면서, 이미 완성되었고, 벌써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기쁨으로 찬양하는 자리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보증되었다. 또한 교회는 항상 미래를 향해 열려있으며, 다가올 세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정교회 신자들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의해 형성된다. 예배, 특히 성례전을 통하여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행위에 참여하게 되며, 날마다 부활 신앙으로 인도하는 성령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예배의 예전적 의식들을 통하여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확고하게 경험하게 됨으로 구원과 성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물리적인 형태(떡과 잔)로 영적인 실체를 구체화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육신을 장막을 벗고 홀연히 영적으로 변할 종국적인 구원과 우주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정교회의 필수적인 예배 요소와 기본적인 구조들은 초기 사도적 교회의 예배예전의 모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의 제의 의식과 형태는 여러 세기를 걸쳐 오면서 점차적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는데, 비잔틴이나 콘스탄티노폴리탄 예전에 이르러 통일된 형태로의 예전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의 예전은 가톨릭과 수도원적 형태의 혼합적인 모습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모든 예전의 형태들을 수용, 동화(assimilation), 종합한 동방 기독교의 풍부한 예전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예배의 기도는 많은 부분으로 나뉘는데, 다음은 이들 예배의 주요 요소이다.
(a) 성례전 예전과 예배, 그리고 성만찬 예전 (b) 성무일과 (c) 절기와 교회력에 따른 금식 (d) 성서일과 그리고 (e) 예전적 구조 배치와 예전적 몸짓들과 형식들에 관한 세부적인 지침들.
A. 성례전
성례전은 회중에게 미래의 삶을 준비케 할 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here and now)에서의 보다 더 실천적인 삶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회중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보다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능력은 역동적으로 역사하며,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발휘되도록 역사한다. 이것은 마술이나 기계적인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례전을 통해 주어지는 삶의 변화는 그들의 영성과 믿음, 그리고 헌신이 더욱 고취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하심과 그에 따른 인간의 응답이라는 협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신,인 협동을 '협조작용'(synergy)이라 부른다.
성례전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삶으로 이루어지며, 더욱 독특하면서도 특별한 의미는 성례전이 그분의 공생애 사역의 연장이며, 확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례전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을 만나게 될 뿐 아니라, 참된 인간의 모습과 우리가 돌아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동방 정교회는 7가지 성례를 인정한다: 성세(baptism), 견진성사(Confirmation), 성체성사(Eucharist), 고해성사(penance), 종부성사(anointing of the sick), 신품성사(priesthood), 혼배성사(marriage). 성례전 가운데 성세와 성체성사는 상위의 위치를 차지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될 때 비로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은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지속되며, 발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에 위치한 성만찬은 교회의 가장 심오한 기도임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목회인 것이다. 또한 성만찬은 교회의 교회됨과 교회로서의 최고 절정을 동시에 성취하게 하는 예전인 것이다. 성만찬을 통하여 교회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됨과 동시에 끊임없이 인간의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성령님의 전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로 변화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회중에게 내어주시며, 한 자리에 모인 회중은 그분의 삶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정교회는 성찬 성례를 거룩한 예전(The Divine Liturgy)으로 행하는데, 이는 가장 숭고한 의식이기에 그렇다. 이들의 거룩한 예전인 이 성찬성례의 순서는 두 번의 엄숙한 입장, 성경의 독경과 그 해석, 그리고 대 성찬 기도와 성체의 축성기도 그리고 분병,분잔으로 이루어진다. 동방 정교회의 성찬 성례는 모두 3가지 형태가 있다. 성 크리소스톰의 거룩한 예전(The Divine Liturgy)과 성 바질의 거룩한 예전, 그리고 성찬 전(前) 견신의 예전(the Pre-Sanctified Gifts)등 이 3가지 형태가 그것인데, 3번째 형태는 사순절 기간과 몇몇 성인 기념일과 고난주간(Holy Week) 동안에만 집례되었다.
성무일과(The Daily Office)
예전적 주기는 상호 연관된 네 개의 주기들에 의해 순환된다. 즉 일(day), 주(week), 달(month), 년(year) 등이다. 성무일과의 목적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신비에 연합케 하기 위함이며, 또한 평범한 삶의 시간들이 아닌 매 시간을 구원의 중대한 순간들로 바꾸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매일이 은혜의 날로 변화될 수 있으며, 매 해가 주의 해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하루의 성무주기는 다음과 같다. 만과(Vespers;하루일과가 끝날 때), 종도(Compline;잠자리들기전), 새벽기도(Midnight), 찬과(Orthros;새벽미명에) 그리고 일시과(prime;그후 조금 있다가), 삼시과(terce;9시), 육시과(sext;정오), 구시과(none;오후3시) 등이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하루일과를 마치고 드리는 만과와 새벽미명에 드리는 찬과는 상당히 발전된 형태를 지닌다.
이러한 성무일과의 뿌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드린 매일의 기도회와 수도원 공동체의 공동예배시 드린 기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성무일과의 예배는 매 예배시마다 그날의 대주제를 가지고 진행되는데 때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해당하는 소주제를 갖기도 한다. 특히 만과(Vespers)와 찬과(Orthros)의 성무예배는 축제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위대한 성일과 성자들을 축하하고 기념하며, 또는 그 밖의 교회사의 기념비적인 사건들을 기념한다. 그러므로 이 예배는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현존에 중점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절기와 금식일(Feasts and Fasts)
가장 기본적인 교회의 축일은 주일(the Lord's Day)로서 이는 매주마다 지켜지는 교회의 가장 기초적인 절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 주일에 행하는 교회의 중심된 활동은 바로 거룩한 예전을 통하여 회중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이로써 주일은 매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예전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는 몇가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행하는 금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면서도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력에 있어서의 축일들과 금식일은 상황에 따라 유연성을 가지고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두 개의 커다란 범주로 나눌 수 있겠다. 즉, "유동성이 있는"(movable) 절기와 "고정된"(fixed) 절기가 그것이다. 유동적인 절기는 사정에 따라 준수된 절기로서 부활절 같은 절기가 그것이었다. 반면 고정적인 절기는 매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지켜졌다. 그리고 모든 절기들은 그것이 보편적이든 지역적이든간에 언제나 엄숙하면서도 거룩한 예전의 형태를 갖추어 집례되었는데, 그 이유는 매 예배마다 집례되는 성만찬이 교회의 영원한 축제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은 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엄숙하면서도 중요한 절기이다. 이 부활절은 교회력에서 가장 중심이면서 핵심적인 자리에 위치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은 그분의 핵심적인 구속사역이다. 그러므로 엄숙한 고난주간(Holy week)의 준수와 장중한 부활절 예배는 주님의 구속사역을 영광돌리는 중심적인 절기인 것이다.
고난주간에 앞서 40일간을 사순절로 지켰는데, 이를 대금식(Great Fast)일로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40일간 계속되는 사순절과 참회시간들을 통하여, 교회는 참회의 능력과 그 의미를 맛보게 되며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의 모습과 생명력을 확고히 하게 되는 것이다.
정교회는 이러한 부활절 외에도 12개의 대(大) 절기들을 지키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모 마리아의 삶 가운데 나타난 여러 사건들, 게다가 성모의 무흠수태 대축일, 성탄절, 주현절, 종려주일, 승천일, 성령강림절, 변화 축일(Transfiguration) 등을 포함한다.
매주일의 주간 금식일과 사순절기간의 금식일 이외의 다른 금식일로는 성탄절을 앞두고 일정기간을 금식하는 기간으로 삼았다.
금식기간에는 기도만이 아니라 봉헌도 함께 드려진다. 금식은 경건한 공로행위로 간주되지도 않았으며, 십자가를 지는 행위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인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는 말씀의 표현이며, 그 말씀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이란, 주로 영적인 지식의 성숙과 하나님께 향한 순종, 그분의 말씀에 대한 열정, 그리고 성화됨의 성숙으로 간주되었다.
공예배시 사용되는 예배서(service books)는 크게 주로 4개의 형태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Typikon이다. 단권으로 된 이 예배서는 매일 예배를 위한 예배 모범서요, 전례규범(Rubrics)서이다. 두번째 형태로는 'Euchologion'과 이에서 유래한 'Small Euchologion', 'Archieratikon' 그리고 'Diakonikon'를 들 수 있겠다. 이 예배서는 모든 예배를 비롯하여 성례전과 그 밖의 다른 예배시에 사용되는 제사장적 기도와 간구의 기도문을 담고 있다. 세번째는 형태로는 고정적인 형태의 성무일과와 환경에 따라 바꿔 사용할 수 있는 가변적인 형태의 성무일과 내용을 담고있는 예배서이다. Horologion는 성무일과에 있어서의 고정적인 예배 요소들과 그밖의 다양한 예배 순서들을 싣고 있다. Great Octoechos (또는 Parakletike)는 한 주간에 걸쳐 매일 드리는 예배에서 사용하는 찬양을 담고 있는데, 8주를 한 주기로 하여 반복된다. Triodion은 사순절 전야와 사순절 기간, 그리고 대금식일과 고난주간의 성무일과를 위한 찬양집이다. Pentaekostarion은 부활절 기간중의 성무일과에 불려지는 찬양집이며, Menaia은 모두 12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일년 12번, 매월 한권씩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12권의 책은 교회력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고정적인 예배나 절기예배 등을 다룬 예배서이다.
정교회의 찬송가는 감정적이기 보다는 다분히 교리적이다. 모든 곡은 교회 음악의 대표적기법인 기본 8음계 중에 하나로 시작된다.
네 번째 형태는 일종의 성서일과로서, 성경을 주기별로 읽을 수 있도록 한 책이다. Evangelion은 1년을 주기로 4복음서를 순서에 맞춰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한 것으로, 복음서의 말씀을 구절씩 재구성해 놓은 것이다. Apostolos는 사도행전부터 서신서에 이르기까지 각 구절로 나누어 1년동안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Psalter는 시편을 크게 9개의 노래로 나누었으며 그것을 또 20개부분으로 구분하여 놓았다. 그리고 Prophetologion는 한때 구약성경의 특정 부분을 미리 지정하여 그 부분을 읽도록 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예배예전서로 사용되지 않으며 단지 위에서 언급된 다른 예배서에 포함시켜 사용하고 있다.
예전적 구조 배치(Liturgical Space)
전통적인 교회건물이나 성전은 몇가지 독특한 특징과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당시의 교회 건축의 목적은 변모하는 세계의 미(美)적 수준과 부(富)를 반영키 위함이었으며, 또한 성만찬 예전의 본질을 명백하고도 뚜렷히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돔모양(domes)의 천장과 둥근 문(arches), 그리고 천문(apses;교회당의 동쪽 끝에 있는 반원형의 돌출부), 뿐만 아니라, 잘 그려진 도해(圖解)적인 구성과 촛불을 사용한 조명과 높이와 길이 등, 이러한 성전 양식을 통해 교회는, 인류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며, 인간과 세상을 향한 교회관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전은 주로 세 부분으로 구된다. 즉, 세례자를 위한 공간(narthex), 회중석(nave), 성단(sanctuary)이 바로 그것이다. 설교대와 설교단은 성단 밑, 회중석의 중앙에 위치하고, 성찬대나 제단은 성단의 중앙에 놓인다. 성단은 약간 올라가 있으며, 성화막(iconostasis;동방정교회의 제단쪽 성화병풍)에 회중석과는 분리되어 있다.
성상들은 정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며, 개인의 신앙 성숙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성상들은 주로 교회사에 기념비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을 다루며, 회중을 거듭난 중생의 삶으로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그 동안 성상은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것 자체가 숭상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상이 성육신에 대한 이해를 적절히 도울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며, 거룩케 하기 위한 전도자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2. 로마 카톨릭의 예배신학 (A Roman Catholic Theology of Worship)
로마 카톨릭의 예배신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두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예배의 각 부분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는 세상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신비로운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약 성경에서부터 시작된 기독교 예배의 기본적인 신학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 신학은 개혁교회의 신학과 같이, 중세 우주론의 가설들과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중세의 가설들은 성례전의 구체적 이해와 그 집례에 있어 끊임없는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특히 입교식과 성만찬에서 두드러졌다. 성경과 그 밖의 교회사를 통한 역사적인 연구들은 성경의 여러 기록들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형태를 보다 더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에큐메니칼 신학에 힘을 실어 주었다.
A.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배
모든 구원의 역사(모든 사건, 목적, 성소, 하나님의 현현, 제의)는 나사렛 예수의 인간되심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육화하심으로 구체화되었다. 인침을 받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며(요1:1,14); 새 창조(고후5:17;갈6:15;롬8:19ff;계5:14); 새 유월절과 어린양(고전5:7;요1:29,36;19:36;벧전1:19계5ff); 새 언약(마26:28;막14:24;눅22:20;히8-13), 새 할례(갈2:11-12) 그리고 하늘의 만나(요6:30-58;계2:17), 하나님의 성전(요2:19-22), 새로운 희생와 제사장(엡5:2,히2:17-3:2; 4:14-10:14) 안식일 휴식의 완성(갈2:16-17; 마11:28-12:8; 히3:7-4:11) 그리고 다가 올 메시야 시대(눅4:16-21;행2:14-36)의 도래인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외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2:16-17)
구약의 예전적이고 희생의 성전제사는 이제 다른 어떤 희생제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대체되었다.(히8-9)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인 것이며, 기독교 예배는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반응으로써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의 영광에 접붙임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제의(rite)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세례의 의미와 그 중요성도 언급하고 있다.(롬6-8장)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되다"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인간은 예배와 그분께의 순종, 그리고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데, 이러한 '예배와 순종, 믿음'이라는 수단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유일한 선물인 것이다. 즉 우리는 한 성령으로 하나님 보좌 앞에서 인간의 온전한 행위인 예배를 드림으로 그리스도와 접붙임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연합은 영원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세례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존재하는 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의 지체인 성도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로 감히 유입(insertion)되게 하는 은혜는 그리스도인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말씀의 신성함 때문에)과 모든 기독교 공동체와(그리스도의 인성 때문에) 연합하게 한다. 그러나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를 형성시키는데, 즉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하셨고, 구원코자 원하시는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구원의 성례전이며, 교회의 목적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과의 연합됨은 예배와 순종, 그리고 믿음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을 위한 요구를 포함한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연약함으로 인해 우리는 예배를 거부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되며 그렇게 될 때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구원이 모든 구원을 이루기 위한 충분한 원천이 되는 한, 구원과 예배드림으로 받게 되는 세례는 어떤 간구의 기도 없이도 주어지는 것이다. 은혜의 선물인 세례는 끊임없이 인간에 의해 성례전의 형태로 드려지고 수용되어야만 한다. 특히 주일 성만찬 예배가 그래야 하는 것이다.
B. 예전(Liturgy)- 교회의 공중 예배
회중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몸인 교회라는 실체적 공동체 안에서 세례를 받게 된다. 이것이 성령님을 통하여 드려지는 성부께 향한 예배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예전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선물로 주어진 최초의 예배라고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전, 희생, 제사장, 또는 제사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삶과 주님을 삶의 모범으로 따르며 사는 삶을 말했다. 우리가 공적인 예배 혹은 예전에로 부름을 받아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연합된다는 실제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고전10-14, 엡4, 골3:27-28)
'레이투기아'(Leitougia)라는 말에는 성전에서의 사가랴의 직무(눅1:23), 복음선교와 가난한 자을 위한 헌금(고후9:12), 바울을 섬긴 에바부로디도의 헌신(빌2:30),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에게 향한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히8:6) 등을 포함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개인적인 기도와 공동기도, 세상을 향한 섬김과 헌신,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는 성만찬은 서로 엄격히 분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한 우리의 유일한 전인적인 응답의 구체적인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전인적인 응답으로 우리는 한 번 희생으로 모든 이를 위한 속죄를 이룬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연합되는 것이다.(히10:10) 즉 교회의 중심 예전으로서의 성만찬은 사회적 요구의 구체적 표현이며, 각기 분리된 성전과 예배예전, 그리고 제사장 직분을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말씀과 성만찬이 있는 예배는 말씀이 곧 그리스도의 육신이 되게 하는 예배로서, 이 말씀을 입고 오시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성을 입고 다가오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위임받은 교회의 구성원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교회'라는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오늘의 상황에 구원하시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례전은 인간에 의해 고안되거나 단순히 교회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과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례전은 정확히 말해 그리스도의 몸을 예배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의 단면을 비쳐주고 있으며, 그 안에서 교회가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친밀하게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매주일 드려지는 성만찬은 회중들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희생,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의 참 모습과 미래의 소망,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만물의 완성 등을 되새기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독교인의 본질적인 연합은 성만찬 집례를 위한 본질이며, 이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이 '회상','기념'(anamnesis)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신조와 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아남네시스는(기념하는) 단지 심리학적 이해로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으므로 그 죽음으로 인해 한 개인이 감동을 받는 것도 아니며, 또한 미사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비록 왜곡된 미사의 집례가 그런 방향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말이다.) 교회가 성만찬시 "아버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상기하도록 하옵소서....우리는 당신에게 이 거룩하고 살아있는 당신의 희생에 감사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할 때,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위한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며, 나아가 2천년전에 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는 것이다.
교회가 세례를 베풀 때, 그 세례는 교회나, 집례자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친히 베푸시는 것이므로 비록 단 한 번의 세례라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유효한 세례인 것이다. 이와는 달리 매주 행하는 성만찬을 통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매주 기념하며, 그리스도의 심판과 위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망을 늘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거저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예배의 최고 절정인 하나님께 향한 넘치는 찬양이 그의 응답으로 있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며, 교회는 이러한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서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제의(ritual)라는 것은 보다 더 나은 의미의 해석과 전달을 위해 한 공동체가 만든 상징들(signs)과 몸짓들(gestures)로 이루어진 하나의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적 예배는 믿음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계를 더욱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교회의 중심된 예전은 바로 성례전(sacraments)인 것이다. 그리고 로마 가토릭은 언제나 개혁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포를 통해 발행된 '거룩한 예전의 제정'(The Constitution on the Sacred Liturgy)처럼 말이다.
3.루터교 예배신학(A Lutheran Theology of Worship)
루터교에 있어서 예배는 하나님의 성전에 모이는 회중의 모임으로서 설교와 성찬을 통해 선포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회중의 믿음이 반복적으로 견고케 되는 자리이다.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며, 회중은 그에 응답한다. 형식에 있어서 루터교 예배는 복음주의적이면서도 가톨릭적인 성격을 띤다.
루터교의 예배 형태는 매우 명확하면서도 심지어 흥미롭기까지 한데, 그 이유는 이들의 예배에는 복음적인 면과 가톨릭적인 면이 동시에 역설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루터교 회중은 복음적인 신앙을 소유하길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방에 선포되어지기를 또한 원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모든 시대와 역사에 걸쳐 기독교를 하나의 예전으로 통일한 가톨릭의 위대한 예전적 전통에도 서있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은 참된 복음주의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복음주의자가 될 때 비로소 가톨릭 예배의 중심에 있게 된다고 믿고 있다.
한편 루터교인들은 자유로와야 할 예배가 마치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의식을 갖추어 드리는 예배만을 기뻐받으신다고 하는 전통에 의해 예배에서의 자유함을 빼앗으려는 것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특정한 예배의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예배는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예배'라고 주장하면서 예배에서 자유함만을 요구하는 주장도 통렬히 거부한다. 예배에서의 그런 '자유함'은 종종 예배 인도자를 폭군적인 인도자가 되도록 유혹하며 그로인해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예배를 낳게된다. 우리가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적인 형식을 통하여 기뻐 받으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갖추어 드림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믿음을 재확인코자 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독교 예배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과거 기독교 예배의 위대한 유산들을 자유로이 경험할 수 있는데, 이는 귀중한 선물인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이러한 귀중한 유산들 중의 일부는 너무도 중요하기에 이것들 없이는 도저히 예배드릴 수 없기까지 하다. 교회에서 읽혀지는 성경은 과거 교회들이 그 신성한 권위를 인정한 경전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루터교 예배의 핵심적 뼈대는 다름 아닌 그동안 교회들이 대대로 지켜왔고, 전해준 것들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는 행위인 '세례'와 성경의 주제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선포', 그리고 '사죄의 확인'과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임재와 언약의 확인으로서 교회가 언제나 행한 '주님의 식탁' 등이다. 그들은 이것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은 너무도 구체적인 형태로 주어졌으며('물', '성경',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하는 자', '빵과 포도즙'), 바로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인 성령을 부어주시는 '은혜의 통로'인 것이며, 우리를 온전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방편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인 선물들 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으며 또한 이러한 '은혜의 통로'(means of grace)가 중심이 되지 않은 루터교 예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또 다른 역설로 되돌아가 보자.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예배의 귀중한 유산들을 전해받아 전통에 따라 집례하되, 복음적인 시각으로 다시 비평하고 재구성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요구이기 보다는 오늘 모이는 회중들의 요구에 의존한 것인데,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배에 임하셔서 역사하신다. 주일아침에 드려지는 공적인 예배에서 예배를 집례하고 주도하는 분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시다. 예배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자리에 모인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말할 때, 우리의 말하는 입술과 찬양하는 입술을 빌려 친히 말씀하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치신대로 행하는 주님의 성찬과 세례도 하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루터교 예배의 핵심인데, 그 이유는 이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따르길 원하며, 주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이기에 그렇다. 루터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통해 일하시며 물리적인 재료들을 통하여 우리와 만나신다는 믿음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였음을 믿는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 예배의 두 가지 역설적인 면은 마치 신성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다는 엄청난 역설과 맞먹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루터교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이른바, '복음주의적 가톨릭주의'(evangelical catholicism) 예배의 특성은 그들의 교회론 신조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에겐 오직 하나의 거룩한 교회만이 있으며, 그 교회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순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 가운데 선포되어지며 복음에 따라 거룩한 성례전이 집례되어지는 곳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순전한 이해를 위한 복음선포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성례전의 집례는 기독교 교회의 온전한 일치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인간에 의해 고안된 의식들은 이 땅위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일치를 위해 불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Augsburg Confession, Article Ⅶ)
그러므로 이들은 최선을 다해 위대한 옛 예배 전통들을 추구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그것들을 복음의 시각에 비추어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언제나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가?"라고 자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은혜의 통로'인 예배 전통들을 중심으로 하되 비록 덜 중요시 여겨져 온 전통들 중에서 매우 유용한 것들은 수용하여 행하고 있다. 루터교인들은 주일을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며, 믿음의 공동체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로 여겨 거룩히 지킨다. 그들은 부활절과 성탄절, 그리고 옛적부터 내려온 그밖의 여러 교회력을 지킨다. 이들은 몇몇 성인들의 축일을 준수하고 전통적인 성서일과를 사용한다. 또한 미사를 위해서 옛 서방교회의 본문을 사용하고 이러한 예전적 본문들을 부분부분 영창한다. 이들은 예배 집례자와 세례받을 자들을 위해 전통적인 예복(vestments)을 입는다. 이렇듯 루터교인들의 옛 전통들에 대한 애착은 때때로 별로 쓸모없은 것들에까지 고수하게 하였는데, 그래서 이들은 종종 비본질적인 부분에서조차 보수적인 면을 보이고 변화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때도 있었다.
찬양 역시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루터교가 중세 미사와의 분리를 이룬 가장 환영할 만한 개혁중의 하나는 바로 예배중 모든 회중이 자국어 가사로 된 곡을 부를 수 있도록 함으로서 예배에 회중들의 참여를 독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일기시작했는데 시편가(psalms)와는 다른 찬송가(hymns)의 형태로 당시의 다른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도 이를 즐겨 사용했다. 그리고 여전히 루터교 예배의 주요 역설적인 면으로 남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제와 회중의 역할이다. 예배의 인도자인 목사는 전체 예배에 있어서 중대하고도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루터교 예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든 회중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구약 말씀을 교송으로 부르지 않고, 많은 부분에서 평신도의 지도력이 강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찬양을 통하여 회중들이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그렇기에 찬양은 단순히 설교를 듣기 전에 하는 그럴듯한 준비 순서가 아니라, 루터교 예배에서 그 중심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자, 이제 이들 예배에 있어서 보게 되는 마지막 역설적인 면을 살펴보자. 사실 여기까지 언급한 내용의 거의 전부는 즉, 말씀과 세례, 주님의 만찬 그리고 옛 전통들의 복음적 재구성과 회중 참여의 강화, 그리고 찬송가집의 사용 등,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 넓게 퍼져있는 보편적인 것들이며, 에큐메니칼 예전 운동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들이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이러한 특징들을 루터교 예배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한다고 한들 결코 루터교만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솔직히 말한다면, 루터교만의 유일한 예배 형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터교 예배는 오히려 가톨릭의 예배 전통을 받아들여 복음의 시각으로 끊임없이 질문과 갱신을 거듭한 예배인 것이다. 비록 그러한 예배의 형태가 비합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예배만이 그들이 믿는 복음을 가장 잘 운반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확신한다. 결론적으로, 루터교 예배의 가장 뛰어난 점은 이들의 예배는 루터주의에 찌든 편협한 예배가 아닌 가톨릭적이면서도 복음주의적인, 즉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인정받을 만한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예배라는 것과 이들의 예배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는 달리 매주 행하는 성만찬을 통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매주 기념하며, 그리스도의 심판과 위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망을 늘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거저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예배의 최고 절정인 하나님께 향한 넘치는 찬양이 그의 응답으로 있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며, 교회는 이러한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서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제의(ritual)라는 것은 보다 더 나은 의미의 해석과 전달을 위해 한 공동체가 만든 상징들(signs)과 몸짓들(gestures)로 이루어진 하나의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적 예배는 믿음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계를 더욱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교회의 중심된 예전은 바로 성례전(sacraments)인 것이다. 그리고 로마 가토릭은 언제나 개혁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포를 통해 발행된 '거룩한 예전의 제정'(The Constitution on the Sacred Liturgy)처럼 말이다.
4. 영국국교회(성공회) 예배 신학(An Anglican/ Episcopal Theology of Worship)
성공회 예배는 기독교 신앙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례전에 중점을 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교회는 가시적이며 세밀한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체화 하는 것이다.
성공회주의자들로 구성된 국가교회나 감독교회들은 공식적인 예배신학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단지 1549년에서부터 지금까지 여러번의 편집을 거듭해 사용하고 있는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통하여 이들의 예배 형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판의 공동기도서에서 미국 성공회는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활동으로 주일에 행하는 거룩한 성찬과 그밖의 다른 중요한 절기들, 그리고 매일 아침과 저녁 기도. . . 등은 이 교회의 정규적인 공식예배이다."(Book of Common Prayer, 13)라고 말하면서 고정된 형태로의 예배는 대중적인 호응을 불러 일으킨 매일 기도와 매주일 행하는 말씀과 성례전으로서의 예배가 그것이다.
성공회의 신학은 주로 성육신이나 성만찬적 신학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특히 예배의 신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들 예배에는 말씀과 그 말씀의 연출(actions)이 있게 되는데 이 보여지는 말씀으로의 연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내면적이면서 영적인 만남을 갖게 됨을 상징하는 외적이며 가시적인 형태의 말씀인 것이다.(공동기도서, 857) 그럼으로써 예배는 보다 더 구체화 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비롯하여 전인격으로 드리는 특별한 행위이다. 우리는 예배를 위하여 일어서고, 앉기도 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손을 높이들고 목소리를 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보고, 들으며, 노래하고, 고백하고, 침묵하기도 한다. 또한 냄새를 맡고 맛을 느끼기까지 한다. 비록 제아무리 특별한 방식으로 드린다 하더라도, 성공회 예배시 사용되는 외적인 예배 행위들에 대한 그들의 끊이지 않는 관심은 다음과 같은 확고한 신학적 신념에 의한 것이다. 즉, 우리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을 내어 맡길 수 있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주님의 자녀로 서게 될 곳인 하나님의 초월적인 신비의 자리로 이끌릴 수 있는 것은 예배시 사용되는 예전적 상징들을 활용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과 성례전에 참여코자 함께 나아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에 임하시며,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모인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인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마18:20)라는 이 말씀은 예배의 촉매가 되는 주요한 말씀인 것이다. 이 예배는 그의 자녀들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것이다. 이들 예배의 주요 순서로는 말씀의 봉독과 선포,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중보의 기도와 세례와 성찬을 중심으로한 성례전이 그것들이다.
한 자리에 모인 공동체로 예배드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능력을 상기하게 되며, 우리의 온 힘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다.(공동기도서, 336) 여기에는 죄의 고백과 우리의 무가치함의 시인, 그리고 열렬한 간구와 온 인류를 위한 중보의 기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이웃을 위한 중보의 기도가 있게 된다. 이는 우리가 오직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거룩한 만찬인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을 회상(anamnesis)하게 되는데, 이러한 기념적 성찬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부활에 동참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주님께서 명하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전1:24)는 말씀에 의지해 감사함으로 떡과 잔을 받아 먹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말미암아 살찌우게 되며 우리는 주님의 신비스런 몸에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공회의 중심적인 신학을 통해,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신비를 찬양하는 것으로서, 이는 매일의 아침,저녁에 드려지는 성무일과의 찬양을 통해 주님의 구속을 회상하고 결혼미사와 병자들을 위한 안수, 그리고 고해성사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 등과 같이 개인의 삶속에서 맞이하게 되는 중대한 시기의 예배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신비를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성공회는 주일 예배를 비롯한 주중의 모든 크고 작은 모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그 신비적 사역이 드높이 기념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회중의 삶의 모든 영역들이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안에 나타나신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며, 자신을 죽기까지 온전한 제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들도 자신의 전부를 헌신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점진적으로 받아 사도바울이 말한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가는 것이다.
5. 개혁교회 예배신학(A Reformed Theology of Worship)
개혁주의 예배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죄로 인해 무능력한 인간과의 만남의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개혁주의 예배는 복음에 근거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실천하는 예배인 것이다.
개혁주의 예배의 신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그간 두가지의 다소 상반된 이미지가 있어 왔다. 하나는 성전에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그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며, 다른 한 면은 멜빌(Melville)이 쓴 '백경(Moby Dick)'의 한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늘로 우뚝 솟은 높은 강단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예배를 드리는 회중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보자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구원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처럼 개혁주의 예배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하심과 주권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백인 일색의 예배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개혁주의와 장로교 예배의 역사적 흐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그리고 이에 반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연약한 인간과의 만남인 것이다.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로서 칼빈과 그 후예들의 주된 관심은 '말씀의 선포'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 선포되어야 하며, 이러한 강조는 예배의 중심적인 자리라는 견지에서 보건데 루터에게서 보다 더욱 강조된 점이었다. 하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다. 즉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무한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불변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분은 지혜와 힘과 의와 거룩하심과 선함과 진실하신 인격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 제네바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 예배가 언제나 예배의 시작 부분에서 '죄의 고백'(a general confession)이나 '참회의 시편'(penitential psalm)순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자의 현주소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하심에 대한 관심은 개혁주의 예배의 깊은 뿌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름심에 경외심을 보임과 동시에 지체함 없이 그의 범죄한 입술을 제하여 줄 것을 간구했으며,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하심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자신을 헌신하게 된 것이다.
계시록에 나타나듯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다분히 환상적이고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중세 가톨릭의 미사에 대항한 개혁교회는 계시록에 등장하는 화려한 예배의 장면들을 또한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개혁교회에서는 여전히 그리스도 자신을 말씀의 중심이시며 근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교회사가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품고 있었던 설교에 대한 개혁의 열정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근세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추세가 예배를 하나의 종합 예술 작품처럼 취급하려는 듯 하나 분면히 말해 예배는 '창조적인 예술 작품'이 아닌 것이다. 히스롭(D.H. Hislop)은 그의 책 "Our Heritage in Public Worship(공중 예배에서의 우리의 전통; 역자 주)"에서 비유를 들어, 개혁주의 예배의 기본 틀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upward)"이라기 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틀(downward)"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위로 향하는 예배는 예배의 초점이 예배드리는 예배자나 혹은 그의 감정에게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받으시는 분께, 또한 예배자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에 두는 것이다.
칼빈, 부쳐, 오이코람파디우스, 베자, 파렐, 쯔빙글리 그리고 낙스와 같은 개혁가들은 매주 1회마다 성찬이 집례되기를 갈망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 성찬은 주일 아침 예배의 정규적인 순서였기 때문이었다. 성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회중들은 성찬에 즈음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성찬을 받도록 요구되었다. 이러한 회중 각인이 성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한 개혁자들의 주장은 과거 종교개혁 이전의 1년에 1회 내지는 그보다 더 적게 성찬에 참여케 한 관습보다 더 주위의 급속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의지는 무식한 관료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들은 연 4회의 성찬집례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결국 칼빈을 비롯한 다른 개혁자들도 그들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채 연4회의 성찬만을 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성찬이 집례되지 않는 날에는 축성기도 부분에서 찬송과 축도로 이어짐으로 예배를 끝마쳤다.)
개혁교회에서는 성찬시 일상적인 떡을 사용했으며 떡을 받는 회중은 각자의 양에 맞게 떡을 떼었다. 잔 또한 떡과 동일하게 전달되었다. 많은 회중들은 주님의 떡과 잔을 받기 위해 성찬 테이블 주위에 모였으며, 그들이 받는 성찬의 의미는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기보다는 우리와 맺으신 주님의 언약의 확인하는데 있었다. 또한 개혁자들은 성찬시 일반적으로 미리 정해진 축성기도를 드렸으며 그 기도는 주님께서 성례에 친히 임재하시기를 기원하는 형식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칼빈은 말씀을 통해 친히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조했는데, 주님은 다음과 같은 명확한 제정의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니. . . 또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니. . ." 한편 쯔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가 모인 회중들의 기억속에서 기념되는 것으로 보았다.
개혁가들의 기도서에 대한 사용은 복잡하리 만큼 다양한 차이를 보였다. 예배의 시작부분에 있는 시작을 위한 기원의 기도(The Prayers of the invocation)와 대중보의 기도는 기도서를 따랐다. 그러나 때때로 설교 후의 기도는 목회자의 자율에 따른 즉흥기도가 행해지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을 위한 존 낙스의 '공동예배서'(Book of Common Order)는 대개 칼빈의 '제네바 예식서'(Form of Prayer)를 따르고 있으나 또한 다소 성공회의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의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7세기에 이르러 영어 사용권의 개혁주의 국가와 대륙의 개혁교회는 서로 큰 차이를 보게 된다. 1643년 웨스터민스터 성 총회를 통해 절정에 달한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혁명은 국교회 내의 성공회 퓨리탄과 심지어 몇몇 분리주의자들과의 합의를 통하여 보다더 예전 중심적인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국교회 내의 성공회 퓨리탄들은 예배예전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분리주의자나 회중교인들은 적대시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스코트인들은 자신들의 예전 중심적인 입장을 얻어내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들과의 타협이 불가피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타협으로 말미암아 스코틀랜드 장로교와 후대 미국 장로교, 뿐만 아니라 미국의 이민 청교도 예배에서의 예전신학과 예전적 형태가 감소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같은 추세로, 그 동안 여러 개혁교회에서는 비공식적이나마 지켜지던 5가지의 성서적인 절기들, 성탄절, 성금요일,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등이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의 청교도 시대에는 무시되거나 금지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반대로 북미의 대륙계열의 개혁교회 후예들은 비록 그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다른 분파들이 반예전적 청교도주의를 택했다 하더라도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있었다.
대림절과 사순절은 비성서적이라는 이유로 개혁자들로부터 무시당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고행과 금욕적인 색깔을 띠고 있기에 구원론이 자칫 공로주의적 구원론으로 흐를 수 있으며 또다시 중세적인 예전의 악용을 불러일으킬 만한 여지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성자축일과 성인을 위한 기도 등은 개혁자들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러나 각 지역의 교회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 역사를 빛낸 믿음의 증인들과 교사들을 본받고 그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기 위해 그들을 기념하는 설교를 강화하곤 했던 것이다.
초기 개혁교회의 예배에는 말씀의 선포를 3가지로 구성했는데, 구약성경, 서신서 그리고 복음서로 나뉘었다. 또한 이러한 말씀 사이에 몇 개의 시편송이 불려졌다. 성서일과가 사용되면서 점점 성경봉독과 설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해당성구와 설교본문은 완성된 책으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짧은 구절보다는 성경의 한 장 전체를 읽는데 긴 시간을 할애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점점 성서일과가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설교자 자신의 자유로운 본문 해석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비록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지만 레위기나 민수기와 같은 보다 심오하고 난해한 본문들은 도외시되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의 절기나 회중들의 애경사가 있을 시에는 그로 인해 연속적인 성경본문의 진행이 차단되기도 했다.
점점 교회의 절기와 축일들이 감소되는 대신 매주 부활의 축제로서의 주일(the Lord's Day)성수가 그 의미를 더해갔다. 이와 같이 주일성수에 대한 중요성과 그 강조는 다른 주요한 기독교 전통을 이어받아 온 개혁교회의 특징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장로교와 청교도 전통은 안식일에 쇼핑을 한다든지 세상일에 몰두한다든지 그리고 주말에 휴가를 간다는 것은 금기시 했던 것이다.
금세기 장로교 예배의 선두 학자인 올드(H.O. Old) 박사는 그의 역작인 "Worship That is Reformed According to Scripture(성경에 기초한 개혁주의 예배;역자 주)"에서 성경에 기초한 개혁주의 예배에 있어서의 다섯 가지 본질적 요소를 언급했는데 첫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하며 둘째,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드려지는 예배이어야 하며 셋째,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인 성화된 모습이 있어져야 하며 넷째, 예배를 통해 사랑이 충만히 넘치는 삶이 있어져야 하며 다섯째, 회중을 교육하고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세례의 이해는 성경과 어거스틴의 입장인 '언약의 확인'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한다. 세례는 구원을 이루어 가는 회중의 거룩된 삶으로 이끄는 의식이 아니다. 즉 회중의 훈련과 성화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의식이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인 새로운 언약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 강조점을 두고 있는 예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로의 입교식인 것이며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세례 뒤에 따라오는 열매로서 기대되는 것이다. 유아세례를 받은 자는 훗날 12세에 이르러 교리문답 과정을 받아야 하며 회중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야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혁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전에 철저하고 강도높은 교리문답 교육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리스도 공동체의 언약인 세례는 언제나 공중 예배시에 집례되었다. 개혁가들은 세례를 구약의 언약이었던 모세의 할례와 연속선상에 두었으며 세례시에 성령님께서 세례받는 자에게 충만히 임하심을 보여주는 실제적인 표식이요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외에 기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다른 형태의 안수는 행해지지 않았으며 순수히 성경적 전통에 따라 성경에서 말하는 물을 붓는 세례만이 허용되었다.
세례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도 구약과 신약에서 행해졌던 대로 '언약의 식탁'으로 이해했다. 주님은 식탁을 통해 그분의 자녀들에게 실제로 임재하시지만, 그렇다고 주님의 임재가 아주 단순히 떡과 잔에 제한되어 그것 속에 임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만찬은 단순히 죽은 자를 기념하고 기리기 위한 식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주님의 임재하심의 약속이요, 언약인 것이다. 이 식탁은 주님께서 그의 12제자들에게 직접 행하시고 그들앞에서 제정하신 예전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주님의 성만찬 예전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정교회 예전의 신비적이며 미신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게 된 것이다. 반면 개혁교회의 성만찬은 성경을 통해 계시되는 말씀의 임재와 그 능력을 강화한다. 이 식탁에 있어서의 감사와 찬양의 모습은 시편송을 부르면서 나타나게 되며(때로는 일반적인 찬송) 중보의 대기도를 통해 창조와 타락, 성육신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상기하는 내용을 담았다. 요컨데 개혁교회의 "주님의 만찬"을 일컬어 "거룩한 신비"(Holy mysteries)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표현인 것이다.
20세기에 후반에 들어와 미국 장로교 예배에서 나타나는 한가지 현상은 아마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여파와 그 동안 무미건조한 예배의식을 탈피해 예배에서의 새로운 미적인 감각과 신비함, 그리고 드라마적인 예배의 연출을 추구하려고 하는 욕구로 인해 또다시 종교개혁 이전의 예배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1989년 신학적이면서도 실제적인 검증을 토대로 한 활용 가능한 '예배 지침서'(Directory for Worship)를 교회의 규정서로 지정하게 되었다. 이 예배 지침서에는 즉흥적인 예배를 제외한 6가지 공식적 예배 형태가 있는데, 성만찬이 있는 주일 예배에서의 세례식, 결혼식, 장례식, 매일 기도문, 특별 예배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예배 지침서에서는 과거 초기 개혁교회에서 행했던 세례와 병자를 위한 안수시 기름을 붓는 행위와 세례식이 있는 예배시 악령을 내어쫓는 행위와 초기 개혁교회 인도자들의 전통이었던 예전적인 제스쳐와 언어들이 제거되었다. 이 외에도 더 큰 변화를 위해 예배시 사용하는 언어와 예배, 시편가집, 찬송가집, 심지어 성경도 합당한 목적을 위해서 적절한 변화를 가져와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의 변화가 아무리 정치적으로 설득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장로교를 비롯한 개혁교회들의 예배의 변화는 인간의 욕구만을 채우기 위한 인간적인 도구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고 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예배의 변화는 과거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자리로서의 초기 개혁교회의 예배의 이해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소지를 낳고 있는 것이다.
6. 침레교 예배신학 (A Baptist Theology of Worship)
침례교인들이 성경에 근거한 예배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성경에만 근거한 예배의 모형보다는 일반적인 예배의 원리에 따르는 경향이 다분한 것을 보게 된다.
모든 침례교의 신학은 성경 자체에 근거한 성경 중심적 신학이다. 이것은 그들의 예배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지는 특징으로서, 그들의 예배의 신학과 형태를 발전시킴에 있어 예배와 연관된 성경 본문들을 중요한 자료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모세(출33-34), 이사야의 부르심(사6장), 나사렛의 회당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눅4:16-30),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4:19-24), 최후의 만찬에 관한 여러 가지 언급들(특히 고전11:23-26), 그밖에도 초대 교회의 수많은 예배의 모습과 심지어 계시록에 묘사된 천상 예배의 모습(계4-5장)까지를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그들은 또한 참된 예배란 삶 속에서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개인이나 공동체가 아무리 잘 갖추어진 예전적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믿음의 교제와 성결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기독교 예배는 예배 신학만이 아닌 예배의 윤리와의 통합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침례교의 예배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적인 예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의 형태를 모두 가지고 있으나 이 부분에서는 공적인 예배에 초점을 두고 전개하려 한다.
이들에게 있어 공적인 예배(Corporate Worship)는 회중예배(Congregational Worship)를 의미한다. 즉 회집된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개념과 만인 제사장적 견지에서 이들은 목사와 평신도간의 구분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예배시 회중의 역할은 목사의 역할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한 자리로 간주된다.
설교에 중점을 두면서 고정된 예전적 형태를 갖추지 않는 이들의 예배 특징은 때때로 회중의 참여를 소극적으로 만들어 왔다. 그러나 침례교 예배는 다른 형태로 회중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회중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이들은 평신도에게 예배 기도와 예배인도를 맡기고 있으며 이들은 또한 회중 찬양과 응답적 성경봉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봉헌의 의미와 그 중요성의 회복에 중점을 두고 주일 예배를 위한 공동 기도서와 회중 교독문을 발간해냈다.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이끄는 '초청'은 19세기 영적 대각성 시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지금도 전 회중의 헌신과 결단을 이끄는데 사용되곤 한다. 침례교는 또한 '주님의 만찬'(Communion)의 중요성의 회복을 통해 회중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침례교에서 말하는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대화의 장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은 그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형태는 말씀봉독, 설교, 찬양, 침례, 그리고 주님의 만찬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런 점에서 회중의 응답 부분은 찬양과 감사로서, 예배시 회중은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와 구속의 사건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회중은 찬양과 봉헌, 기도와 회중적 말씀봉독, 교독문과 결단이라는 부분을 통해 하나님께 응답한다. 그래서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되어지며 또한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침례교 예배의 결론인 것이다.
이들은 예배시 언제나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를 인정한다. 비록 예배가 순서에 따라 의식과 질서있게 드려져야 하고 예전적 부분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겠지만, 고정된 예전의 형태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배시 회중가운데 자유롭게 활동하셔야 하기 때문에 예배는 비교적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과 하나님과의 만남 사이에 복잡한 것들이 가로막아서는 안 되는데 복잡한 예전적 예배는 자칫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데 장애물이 되기도 하기에 그렇다. 예배시 초월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잘 짜여진 예전적 순서에 통제 받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님은 복잡한 예전적 예배이든, 그렇지 않은 아주 단순한 예배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때와 장소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회중은 언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침례교의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하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열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에 자리하신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적 은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기에 그리스도께서 예배의 초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야 말로 예배에 있어서 핵심 부분이며, 말씀의 선포인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에 초점을 두기에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듣는 회중들에게 장래일에 대한 소망을 주며, 하나님의 은혜와 동행하심이 언제나 회중의 삶 속에 함께하심을 확신케 하며, 각인의 영적, 물질적 갈급함을 채워주는 것이다.
주님의 만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초점을 둔다. 19세기의 영적 대각성 당시 침례교는 이 주님의 만찬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그들의 침례교 전 역사를 통해 볼 때 그들에게 있어 주님의 만찬은 예배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도 예배에서의 그 중요성을 다시 회복하려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만찬은 과거에 행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을 선포하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하며, 오늘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회중의 마음과 심령속에 그리스도께서 동일하게 임하여 주심을 선포하는 자리이다. 그리고 이 주님의 만찬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세상 가운데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다.
요컨데,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corporate worship)는 하나님과 믿음의 공동체가 만나는 자리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회중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충만히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총에 한 목소리로 응답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만남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초월적인 방법으로 회중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리고 침례교의 회중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에 자신의 귀를 기울이며, 예배를 통하여 자신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응답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예배를 통하여 그들의 중심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의 은총과 회중을 온전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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