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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그리스도

인기감동기타 김성민............... 조회 수 2939 추천 수 0 2002.10.04 21: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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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출처/http://boknam.waa.to
저자/김 성 민(협성대교수. 종교와 심리)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그리스도  - 하나님의 이미지와 원형적 그리스도

1.현대 사회의 문제와 그리스도

인류 역사상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많이 있었지만 현대인들이 당면한 문제는 그 전 시대와 달리 긴박한 특성이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현대인들은 그 전보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도덕성이 증대되지 않아 그 사이에 불균형이 심각한 것이다. 그래서 현대 사회의 예민한 문제인 핵무기나 환경파괴의 문제 또는 컴퓨터공학 기술과 생명공학 기술의 오용 가능성은 인류를 어떤 상황으로 몰고 갈지 모른다. 이런 외적인 상황 못지 않게 현대인들의 내적 상황은 더욱더 심각하다. 수많은 사람들은 삶의 목적과 방향을 찾지 못하여 무의미감과 권태감을 호소하고, 때때로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제어하지 못해서 폭력이나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경우도 많다. 알콜과 약물의 오남용은 물론 도박중독, 성중독 역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며, 우울증이나 정신분열병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분석심리학자 C.G.융은 현대 사회의 이런 문제들의 핵심에는 지나친 합리주의, 물질주의, 무신론 등이 들어있으며, 그것은 결국 종교적인 문제로 귀착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삶에 질서를 잡아 주는 정신요소가 있으며, 그것은 그들이 가진 신관(神觀)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데, 현대인들은 계몽주의 시대이래 합리주의에 물들어 하나님에 대해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눈에 보이는 것들만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한 의혹은 인격의 중심적인 요소에 불안을 불러일으켰고 ... 현대 사회에 전염병처럼 유포되어 있는 물질주의, 무신론 및 그와 유사한 대체물들에 대한 ... 믿음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하고 역동적인 요소이다. 사람들은 거기에 진, 선, 미 등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고, 때때로 거기 사로잡혀서 삶이 온통 뒤흔들리는 체험을 하곤 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무의식에서 요청하는 하ご?상(像)과 현대 종교에서 제시하는 하나님 상 사이에 균열이 커서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다. 그 결과 과거 하나님 상에 투여했던 정신 에너지는 현대인들에게 되돌아와 그들을 사로잡으며, 그들에게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것이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에 무슨 주의(ism)가 그렇게 많고 현대인들이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을 하나님처럼 신봉하는 것도 그 남은 에너지 때문이다 : "과거에 교회가 떠 안고 만족스러운 설명을 해주었던 원형의 내용들이 이제는 현대인들의 투사에서 벗어나 현대인들을 사로잡는다. ... 거기에 결합되었던 에너지들이 요동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의무의 갈등은 불가피하며,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대부분은 거기서 생겨난다. 현대인들에게 삶의 지표 역할을 하는 판단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그들은 선악의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도덕적 갈등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을 직시하지 못하여 악과 대적하지 못하거나, 어떤 것이 악인 줄 모르고 악을 행하며, 어떤 것은 악인 줄 알면서 행하기도 한다. 더구나 악은 모두 밖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적을 공격하려고 핵무기나 화학무기를 만들면서 그것이 선이라고 주장하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서 불안해하고, 유전자를 조작하여 새로운 종자를 만들지만 그것이 반드시 선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도덕성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현대인들이 자연을 따르고 자신의 본성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자기 자신은 물론 온 세계가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 "이제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그 괴물 같은 파괴력이 사람들의 손에 붙여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그 힘을 사용하려는 욕망에 저항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사랑과 지혜의 영 덕분에 순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기독교에 중요한 과제를 던지고 있다. 현대교회는 전통적인 하나님 상을 믿지 못해서 거기 투여되었던 에너지를 다른 상들에 쏟아 붓거나,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힘에 이끌려 고통받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하나님 상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힘은 밖으로 나가서 파괴적으로 작용하거나, 안으로 들어와 우울증이나 분열증을 유발하고 만다. 하지만 현대교회는 이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 같지 않다. 수많은 현대인들은 이미 교회를 떠났으며, 교회에 남아있어도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 때문에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확립하지 못하여 깊이 없는 신앙 생활만 하고 있다. 현대교회에서 열광주의나 근본주의가 만연되어 있는 것도 그런 불안감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무의식에서 찾고 있는 구원자와 도그마에서 제시하는 구원자 사이의 괴리를 감지하고, 그 의혹을 덮으려고 그들의 감정이나 문자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면 현대사회가 이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 있는가? 이에 대해서 융은 현대인들이 지나친 합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차원, 깊이의 차원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의식 못지 않게 무의식이 존재하며, 무의식의 어떤 요소들은 자아를 인간 정신의 깊은 중심과 만나게 하여 삶 전체에 조화와 안정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우리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을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들만 쫓아다니는 것이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그들의 본성과 단절되었고, 그들을 내면의 깊은 차원과 만나게 해주는 신화와 상징을 잃어버렸다. 현대인들이 마치 고향을 떠나 뿌리 뽑힌 것과 같은 소외되고 불안한 삶을 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가리켜서 니이체는 어느 미친 사람이 시장 바닥을 내달리면서 "신을 찾는다"고 외치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비유하였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내면에는 여전히 하나님 상과 결부된 강력한 에너지가 담겨있고, 현대인들은 여전히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기 때문에 상황은 그렇게 절망적인 것이 아니다. 문제는 현대교회가 전통적인 도그마에서 말하는 상징의 의미를 현대인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기독교 교의에서 말하는 개념들은 의식 밖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었고, 동정녀 탄생과 신-인(神-人)에 대한 생각은 그들이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낯설거나 환상적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융은 "구세주 상과 무의식의 어떤 내용 사이에 아무 유사성도 없다면,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빛도 보지 못할 것이며, 열정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기독교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 교의를 새로운 언어로 해석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1938년 인도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종교가 본질적인 것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기독교 교의가 전하려고 하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고찰하였다.
이런 고찰에 대해서 피터 호만스는 융이 몰두했던 것은 기독교 도그마의 심리학적 기반을 밝히고, 그 심리학적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현대인들이 그것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한편으로는 기독교 도그마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해서 기독교를 떠나 그들의 내면과 접촉하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세속성과 피상성에 지쳐서 더 깊은 체험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융은 그의 생애 말년에 중요한 두 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론에 관한 것이었다 : <<새로운 시대>>(Aion, 1950)와 <<욥에의 회신>>(R ponse Job, 1957)이 그것인데, 그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살아있고,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 안에서 온전히 실현되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의미 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속 사람과 개성을 갖춘 개인의 발달인데, 그것을 발달시킬 수 있는 보물은 한편으로는 신화적인 전통 속에,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의 영혼 속에 감추어져 있다."

2.하나님 이미지의 변화와 종교
많은 종교에서는 서로 다른 신에 대해서 선포하고, 같은 종교에서도 시대에 따라서 서로 다른 신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샤머니즘에서 말하는 신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같지 않고,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 사이에서도 다른 모습이 보인다. 그러면 그들은 서로 다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체험을 했기 때문인가? 그 문제에 대해서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종교인들이 표현하는 것은 신 자체가 아니라 신에 대한 관념이며, 신학이나 종교학 역시 신 관념에 대한 연구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와 같은 생각은 에크하르트와 융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에크하르트 역시 신(Got)과 신성(Gotheit)을 구분하면서, 신은 우리가 삼위일체나 창조주로 인식하는 분이고 신성은 신의 원천으로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초월적인 무(無)라고 주장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융 역시 "우리가 ...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오랜 세월 속에서 변화되어온 이미지나 언어적 개념을 말할 뿐이다. 우리는 ... 이 변화가 그 이미지나 개념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존재 자체에 대한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같은 분일지 몰라도 사람들이 체험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언제나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체험하고, 어떤 이미지로 그려왔는가? 먼저 종교는 엄청난 놀라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반 델 레에우는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것과 다른 특별히 강력하거나, 눈에 띄게 크거나, 매우 드물게 가치 있는 것을 본 다음 깜짝 놀라서 그 안에 일상적인 것과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초자연적인 것이 있음을 직관하고 그 앞에서 신성력(numen)을 느꼈다는 것이다. 영국 선교사 코드링턴이 발견한 마나(mana) 경험도 그런 것이다. 마나란 멜라네시아 사람들이 신봉하던 물질적인 것만도, 정신적인 것만도 아닌 강력한 힘인데, 그들은 엄청나게 열매가 많이 맺힌 나무나 엄청나게 새끼를 많이 낳은 동물을 보고 강력한 힘의 존재를 느끼면서 그 힘을 숭배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힘을 자연물에서 발견하지 않고, 사람이나 제의나 규칙에도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인도에서 브라만은 본래 성스럽고 사람들을 켕기게 하는 힘을 의미했는데,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 들어가 그들을 힘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였다. 또한 사람들은 그 힘이 자연의 확고하고 규칙적인 진행 속에서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될 때 그 힘은 자연운행의 뒤에 숨어있는 원리나 법(法)이나 도(道)로 이해되는데, 운명이나 팔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것의 일종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힘이 동물이나 식물은 물론 산이나 강에 있다고 생각하였고, 사제, 왕, 위인들에게 깃들어 있다고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신(神)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생각하여 그 안에 유아시절 부모들과 겪었던 감정을 투사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초자연적인 영역을 만나서 엄청난 정동체험을 하고, 그것을 이론화하고 제의를 만들어 다시 체험하여,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이기고 희망과 의미를 잃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여러 종교의 신 관념 가운데서 유대-기독교의 신 관념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그것은 유대-기독교에서 인격신 관념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본래 기원전 19세기경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했던 아브라함의 후예들의 종교였다.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그들이 겪은 출애굽, 가나안 정착, 바빌론 포로생활과 귀환 등을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파악하였다. 야훼 하나님은 그들을 특별히 선택하였고, 그들은 그 하나님만 경배해야 하는 민족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종교사에서 볼 때 유대인들의 이런 인격신 관념은 특별한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처음에 천지를 창조한 최고신을 믿었더라도 문명이 발달하면서, 최고신을 버리고 풍요의 신이나 다산의 신 등 기능신을 섬겼는데, 그들은 야훼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야훼가 유대인들에게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만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긴 역사 속에서 각각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야훼를 요청했고, 서로 다른 야훼 상을 체험했던 것이다. 남 유다에서 활동했던 J 기자와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E 기자의 신관은 다를 수밖에 없었고, 신명기 기자(D)와 제사장파(P)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인자하고 따뜻한 아버지로 나타났지만, 모세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존재로 나타났고,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방민족을 사정없이 무찌르는 잔인하고 무서운 분이지만, 제2이사야는 하나님이 이집트와 앗시리아에까지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더구나 구약의 예언자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선포하였다. 아모스는 하나님과의 계약이 특권만이 아니라 책임이라고 강조하면서 사회정의를 주장하였고, 호세아는 창녀가 된 아내를 데려오려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투사하여 죄 지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선포하였다.
기원전 4세기경에 있었던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은 그리스 사상이 유대사회에 전파되는 계기를 만들면서 유대인들의 하나님 상을 변화하게 하였다. 잠언서는 지혜를 의인화시켜 하나님이 태초에 지혜와 더불어 있었다고 주장하였고, 욥기는 그 전까지 믿어왔던 하나님 신앙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 화를 내린다고 믿었는데 욥은 이유 없이 고난 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 있고, 사람들은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욥기의 이런 인식은 사람들의 의식이 상당히 각성되었음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 같은 비반성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도 유대인들은 기원전 2세기경 시리아왕 에피파네스의 치하에서 혹독한 고난을 받으면서 포로기 때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을 떠올리며 묵시사상을 발달시켰고, 부활신앙을 낳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은 이런 역사적인 맥락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그들을 구원할 신-인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고대 사회에서 인격신에 대한 열망이 강렬해서 나자렛 예수는 어렵지 않게 그들이 고대하던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물론 경건한 유대교인들에게 예수 안에 하나님이 성육되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질 수 없어서 기독교는 유대인보다 이방인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신봉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제국을 형성하여 새로운 신을 찾고 있던 로마에 받아들여져서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하나님과 새로운 인간성을 갈구하는 내면적 열망과 부합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 후 기독교는 3,4세기경 현재 기독교 교의의 대부분이 확립되면서 큰 변화 없이 천 년 동안 발달하다가 15세기 오스만 터기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동방교회 학자들이 서구세계로 대거 유입되면서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지리상 발견의 시대의 개막되어 그 전과 전혀 다른 상황이 주어지면서 새로운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그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천동설을 믿으며, 지구 중심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지만, 이제 인식의 폭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그것들을 설명해주고, 그들의 삶을 지탱시켜주어야 하는 새로운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전통을 비판하고,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만이 올바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아서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루터가 제시한 새로운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개신교도들에게 그 전까지 그들을 억압했던 절대군주적인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켰다. 개신교도들은 아무리 기도해도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성인들과 성모의 상들을 난폭하게 파괴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원시인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는 신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신상으로 대체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언제나 어떤 하나님 상을 가지고 살다가 그것이 달라진 상황에 맞지 않으면 새로운 하나님 상으로 대치시켰던 것이다.
18세기 이후 유럽 사회는 또 다시 그 전 시대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산업혁명의 결과 물질적으로 풍요해지면서 세속사회가 급격하게 전개됐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절대적 복종만 강요하는 하나님과 자의적인 하나님은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자아의식이 확장된 현대인들은 자기 삶에 스스로 책임지려고 했으며, 그들이 겪는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찾는 하나님을 기성종교 안에서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신 죽음을 선포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 삶에 초월적인 영역은 전혀 없다고 주장하면서 철저하게 세속주의에 빠져서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태까지 사람들에게 아버지 같은 역할을 했던 하나님이 사라졌으니 이제 사람들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또한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서 인격신 뒤에 감춰진 하나님의 신비한 부분을 체험하려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융 역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그는 무의식의 여러 가지 상징들을 분석하여 그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God-within-us)을 만나고, 그것을 통하여 의식을 초월하는 실재를 만나려고 하였다. 신비주의자들의 방법과 비슷했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신비주의자들은 종교상징을 통해서 그들의 내면에 있는 초월에 다가가려고 했고, 융은 심리학을 통해서 다가가려고 했던 것이다.

3.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미지 : 원형과 원형상
그러면 그는 어떻게 내면적인 초월에 다가가려고 했는가? 그는 먼저 우리 내면에는 하나님과 같이 강력하고, 전체성을 나타내는 원형(archetype)이 존재하며, 그것은 사람들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원형은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게 하고, 그에게 주어진 법칙을 따라서 살고, 발달하게 하는 선험적인 구조와 역동성을 지닌 정신요소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도토리가 도토리로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내면에 사람이나 도토리로 살게 하는 잠재성으로서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형은 인류가 태초부터 지구 위에 살면서 겪었던 경험들이 축적된 집단무의식의 구성요소이다. 원형은 언제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 특성이 있고, 한 사람의 삶에서 실현되어 나타나는 개인적 특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같은 사람으로 존재하지만 사는 모습은 서로 다르다. 원형에서 주목할 점은 원형이 하나의 가능성을 간직한 틀이지 그 내용까지 들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원형이란 그 자체로는 비어있는 형식적 요소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어떤 내용들을 만들어내는 그릇인 것이다... 이 틀은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본능처럼 커다란 틀로 전수된다." 사람들은 원형이라는 틀을 물려받았지만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원형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성을 나타내는 원형이다. 그것은 인격의 중심이고, 정신의 대극적인 요소들을 통합한 전체적이며, 초월적인 정신요소이다. 원형은 정신의 균형을 잡아주고, 삶을 질서 있게 하며, 인격의 기반이 되고, 그 사람을 그의 타고난 특성을 따라서 살게 하기 때문에 융은 자기(the self)라고 불렀다. 자기 원형은 의식과 관계를 맺고 자아를 통해서 온전히 실현되려는 성향이 있어서 자아의식은 내면에 있는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의 인도를 따라서 전체성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는 정신의 전체성과 초월성을 나타내는 자율적인 요소로서 정신 에너지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의 정감을 가장 강하게 자극한다. 자기가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나타날 때, 사람들이 누멘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원형은 사람들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이미지'(l'image de Dieu)와 구별할 수 없으며, 우리-안에 있는-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전체성을 나타내는 원형은 하나님의 이미지와 비슷한 중심적인 입장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하나님의 이미지는 그 특별한 내용 때문에 다른 어떤 무의식의 요소보다 자기 원형과 합치되는 것이다."
융이 추상적인 하나님에 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고, 하나님이라고 생각되는 이미지(l'image de Dieu)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해서 그가 종교적인 문제를 과소평가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원형은 자율적인 요소이고, 살아있는 주체로서 사람들을 휘어잡고 삶을 온통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나의 의지를 온통 사납고 맹렬하게 뒤흔들어 놓은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들의 이름이며, 나의 개인적인 견해나 계획이나 의도를 뒤집어엎고, 내 삶의 길을 좋은 방향으로나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라고 하였다. 보편적인 틀로서의 원형과 그 안에 이러저러한 내용이 담긴 원형상이 다르듯이 하나님 자체와 하나님의 이미지 사이를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원형과 원형상의 구별은 우리에게 모든 종교에서 신이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기독교에서도 시대에 따라서 하나님이 다르게 체험되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모든 원형은 의식에 통합되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생각의 형태로 나타나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자기 원형 역시 우리에게 인식되지 못할 때 의식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여러 가지 작용을 하여 많은 어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하나님의 이미지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미지를 통해서 밖에 인식될 수 없는 무의식의 자기 원형이 어느 사회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다를 경우 정신 에너지는 다른 대상으로 흐르거나 정신 내면에 고여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거기에 있다. 현대 교회가 아무 의미도 없는 설교만 하거나 현대인들의 무의식적 요청과 무관한 도그마만 제시해서 현대인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고통을 받는 것이다. 융에 의하면 교의는 근원적인 종교체험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아서 편집한 이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의는 사람들을 누멘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화석처럼 되어 하나의 의식이나 제도에 불과한 것으로 되기도 한다. 그때 교의는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새롭게 해석되거나 전적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사람들에게 아무 체험도 하지 못하게 하고, 외면 당하고 만다.
고대인들에게 종교상징은 의미 있었고, 그들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화 속에서 살았고, 신들과 대화를 나누며 살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제 많은 교의들을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그리스도의 기적 역시 놀라운 것이지만 그들과 아무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일차적으로는 현대사회의 지극한 합리주의나 세속주의 때문이고, 이차적으로는 달라진 환경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동안 똑같은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그들의 내면에 있는 가장 강력한 원형과 떨어져 살면서 고통받는다 : "교리는 무의식 과정이 나타내는 상징의 진수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이미지가 그 뿌리에서 절단되면 그것을 그의 존재의 기반에 묶어두었던 관계는 소멸되고, 메마르게 된다. 그 경우 그 시원(始原)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게 된다." 이제 현대인들은 그들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찾아서 다시 활기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를 찾아온 환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온 사람들이라고 융은 말한 적이 있다. 현대인들이 내면의 원천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고통 당하지만 현대종교는 그들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4.그리스도와 자기 원형
융은 자기 원형의 상징으로서 그리스도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깊은 내면을 떠나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분열 가운데서 고통받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전체성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땅 속에 파묻힌 보물, 바다 속에 감추어진 진주, 커다란 나무가 될 겨자씨로 비유하였고, 고대 그리스철학자나 연금술사들은 안트로포스, 소우주, 원물질, 실체(substance)라고 불렀으며, 때때로 물질에 투사시켜 물질에서 찾으려고도 하였다. 고대 교부들 역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영원히 죽지 않는 속 사람, 제2의 아담이라고 부르면서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어거스틴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아담의 타락으로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고, 다만 훼손되고 변형되었을 뿐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은 완전성에 이르는 것이고, 우리의 완전성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자로 맞았던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무의식에 반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운명과 과제를 그의 몸으로 겪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원형적인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대극들(the opposites)을 직시하고, 대극의 고통 앞에서 도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면서 결국 통합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서 암중모색하던 길이 그에게서 활짝 열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몰두하였다. 사람들에게는 밝음과 어둠, 강함과 약함, 남과 여 등 수많은 대극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때때로 내면에 있는 어두운 부분들과 결합되어 우리 삶을 갈등과 분열로 몰고 간다. 그런데 나자렛 예수는 그의 내면에서 모든 대극들을 통합하고 삶을 완성하여 다른 사람들도 그의 뒤를 따라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 "그리스도는 자기 원형의 기독교적인 모델이며, 유대-이집트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안트로포스에 해당합니다. 그의 도덕성과 여러 가지 속성들은 신성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대 세계에서 그렇게 바랐던 신-인의 원형이었으며, 사람들이 육체를 입고 사느라고 고통 당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실현시키려고 했던 원형의 실현상이었다. 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그들의 신 관념을 가지고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의 내면에 있는 자기 원형을 좀더 쉽게 의식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제 달라진 세계에서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다만 위대한 교사나 능력이 뛰어났던 존재로 알 뿐 자신의 삶과 연관시키지 못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 담긴 무의식적인 의미를 감지하지 못하고 합리적으로만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원형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있으며, 현대인들도 그리스도 원형을 실현시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사건을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 "그리스도 상은 당신에게 살아있으며, 그것은 결정적이고 움직일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지난 이천 년 동안 그 의미를 새롭게 확인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야 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 사람은 낙원을 약속 받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던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인간의 운명과 과제를 잘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융은 주장하였다. 자기 원형상인 그리스도는 의식이 분화되고 발달하여 대극의 갈등을 겪게 되지만 그것을 모두 초월한 가운데 자리에서 선악을 통합하고 결국 부활하기 때문이다. 나자렛 예수는 인간의 본성을 분화시킨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그의 삶은 자기(le Soi)를 실현시킨 개성화된 삶의 전형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좀더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했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는 사람 안에 있는 성부의 표시들인 신적 기원을 가진 실체들이나 부분들을 그에게로 이끄는 자석으로서, 그것들을 모아 하늘의 원천에까지 끌어올렸다." 예수로부터 파급되기 시작한 이 물결은 점점 더 넓게 퍼져서 마침내 온 세상을 뒤덮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실현시키는 삶이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과 같은 고통과 외로움으로 가득 찬 삶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것만이 궁극적인 것이고, 전체적인 것은 항상 갱신되고 스스로 재생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 하나님의 이미지는 선과 악이 분화되지 않은 대극의 복합체(complexio oppositorum)였다. 구약에서 야훼는 하나님의 진노로 표현되는 어두운 측면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욥기에서도 야훼와 사탄은 친밀한 관계로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어두운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밝고 선하며, 사랑이 가득 찬 하나님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고, 악은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밝은 빛 앞에서 사람들은 선과 악을 의식하고 분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가 선교여행을 다녀온 제자들에게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눅10,18)고 한 것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선악의 분화에 대한 것이었다고 융은 주장하였다.
예수 역시 그의 그림자를 의식했던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영생의 도를 묻는 부자 청년에게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막10, 18)고 대꾸했으며, 베드로가 수난을 만류하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16,23)고 하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투사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그의 내면에도 그림자가 있음을 직시하였고, 약해지려는 자신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6,13)라는 그의 기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악에 물들지 않았으며, 악과 맞섰고, 악을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 야훼 하나님에게 선과 악이 미분화 상태에 있었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분화되고, 통합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악을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악을 직시했고, 대극의 갈등을 그의 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악의 세력이 너무 클 경우 그것을 없다고 하거나, 그 앞에서 도망치려고 하는데 반해서 예수는 자신의 그림자는 물론 세상의 모든 악을 직시하였고 자기 몸에 통합하였다. 그가 십자가에서 못이 박혀 돌아가신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딛고 부활하여,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 "그리스도가 주는 큰 교훈은 이것입니다. 그는 선을 선택했고, 어둠을 거부하였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할 수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대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숙이란 선악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악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인데, 예수는 그렇게 성숙한 삶의 원형을 그대로 실현시켰던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될 때 내면에 있는 분화되지 않은 본능이나 감정의 희생이 되지 않고,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5.개성화 과정과 새로운 하나님의 이미지
이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처럼 내면에 있는 자기 원형을 따라서 대극을 통합하고, 전체성을 실현시켜야 한다. 융은 이렇게 자기를 실현시키는 것을 개성화라고 불렀는데, 개성화 과정은 내면에 있는 악인 그림자를 직면하고 그림자와 분화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할 때, 내면에 있는 모호한 그림자와 어둠을 깨닫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 그림자를 부정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고, 직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내면에 남아서 대극의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 내면에 있는 그림자를 직면하고, 통합하는데 그리스도는 많은 도움을 준다. 악에 맞서고, 악에 지지 않으려면 선의 강한 힘과 도덕성이 필요한데, 그리스도는 어느 상황에서도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고, 선의 보증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선에 굳게 서지 않을 경우 악의 너무 강한 힘 때문에 악에 정복되고 만다. 우리는 악의 힘을 가볍게 보고 악에 사로잡힌 모습을 파우스트나 지킬 박사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악에 직면해서 겪는 긴장을 견디지 못하여 악과 타협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상징이 우리 시대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그 때문이다 :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시대에 뒤떨어진 상징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발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그리스도의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그림자를 직면하고, 그림자 때문에 갈등을 겪으며, 그림자를 동화시키는 것이라고 융은 강조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악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제대로 보지 않고, 자신이 잘못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망각하기 쉽다. 많은 일에서 절제하지 않고, 자아 중심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정신의 균형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내면에서 모든 대극들을 겪고, 갈등을 이겨내야 한다. 진정한 샤먼들이 신병을 겪으면서 자신을 모두 해체하고 재통합하듯이 자신을 재통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려고 하기보다 십자가를 예수의 어깨 위에 올려놓으려 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을 멀리 하려 한다.
그런데 그림자를 동화시키고 대극을 통합하려면 우리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이미지가 필요하다고 융은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가 개성화 과정의 어느 단계까지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지만 그리스도 이미지는 너무 밝기 때문에 어두운 그림자까지 포용할 수 있는 더 넓은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위성(quat rnit )을 제안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또 다른 요소인 악의 원리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나는 그리스도 상징을 계속 지니고 있으면서 그 상징이 하나님 안에 있는 대극의 완전한 상징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 밝은 빛에 어둠을 덧붙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독교에서 말하듯이 지고선(summum bonum)이라면 하나님께 속한 것은 모두 선하고 악은 있을 수 없는데, 그런 하나님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도 없고, 악을 통합하게 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이 선하기만 하다면 하나님은 나쁜 것의 원천이 될 수 없고, 일이 잘못 되었을 경우 그 책임은 모두 사람들이 져야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죄의식에 빠지고,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의 맹점은 사람들 안에 있는 악의 잠재성을 무시하고 선만 추구하게 하는데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운 부분과 직면해서 긴장을 견디려 하지 않고 억압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결코 그림자를 통합하게 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고, 그에 맞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밝은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부분도 있으며, 우리들에게 때때로 어두움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그림자 문제에 좀더 진지하게 다가설 수 있으며, 하나님의 그림자를 통합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안에 어두운 부분이 있다는 느낌이 들 때 그것이 나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여 그 짐을 혼자서 지거나, 지지 않으려고 도피하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본성의 일부라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지려고 할 때 더 쉽게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마11,29)라고 한 것은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융은 지고선으로서의 하나님보다 대극의 복합체로서의 하나님 이미지를 제시하였다 : "대극이 충돌하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을 나타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극을 짊어져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순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성육되게 된다."
지고선으로서의 하나님 이미지와 결부되는 기독교의 가르침 가운데서 융은 '선의 결핍설'(privatio boni) 역시 비판하였다. 선의 결핍설은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이 세상에 악은 있을 수 없고, 악하게 보이는 것은 악한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선의 결핍설은 현존하는 악의 존재를 부정하고, 악의 실체를 교묘히 인정하면서 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존하는 악을 선이 결핍된 것이라고 하면서 악에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거나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선의 결핍설은 선이 어느 정도 결핍된 상태를 주장하기 때문에 그 실체를 인정하여 악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융에 의하면 악이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이다. 실체는 없지만 어둠이 짙게 드리운 그림자인 것이다. 어둠에 덮여 있을 때 파괴력은 대단하지만 빛이 비치면 어둠은 물러가고 만다. 그래서 악과 맞서려면 악을 똑바로 인식하고, 악에 뒤따르는 긴장을 견디면서, 악을 통합해야 한다.
우리는 사위일체에 대한 융의 주장에서 인격적인 하나님 상을 극복하려는 그의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다 알 수 없는 분인데, 기독교에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의 결핍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에 의하면 선의 결핍설에는 너무 두려운 악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자아중심적이며 합리적인 의도가 숨어있다 : "하나님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의식을 초월하고, 인간의 논리로 절대 파악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강력한 힘이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거나 ... 나쁘기보다는 선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인격적인 측면도 있지만 도저히 알 수 없는 존재이고, 때때로 어둠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사실 하나님을 선하게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면서 산다.
그래서 융은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다 알 수 없는 분이며, 심리학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내면에 있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중심'과 대응하며, 그 하나님을 실현하는 개성화는 중심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개성화는 대화과정인데, 자아가 우리 내면의 중심에 있는 이 비어 있는 곳과 만나야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비어있다는 말은 없다거나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강력한 것이 있어서 모두 다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융과 신비주의자들이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비어 있는 중심이다. 그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신비의 심연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 심연을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도 그것을 올바르게 나타낼 수 없다. 그래서 융은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ph nom ne)이라고 주장하였다 : "그것은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본질적으로 무의식적인 존재의 행위이다. 욥이 말했듯이 야훼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이 중심 앞에서 자아는 깨어지고, 개성화 과정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살았던 과거를 모두 해체하고, 내면의 중심과 하나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개성화 과정에 앞으로 나아가는 기간이 있는가 하면 뒤로 후퇴하는 기간도 있고, 직선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나선형으로 진행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동물을 길들이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것은 자아 중심적인 개인을 전부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을 해체하는 것은 자기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전에 자아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은 나를 초월하고, 모든 면에서 나를 지배하는 더 넓은 어떤 것 안에 모아지기 때문이다."

6.결론 : 새로운 시대와 성령, 계속되어야 하는 성육신
자아가 인격의 중심이 되기를 포기하고 자기가 인격의 중심이 되는 개성화 과정과 하나님이 인간으로 된 성육신 사건 사이에는 그 안에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서로 비슷한 사건이라고 융은 생각하였다. 성령의 임무는 인간의 영혼을 발달시켜 대극들이 화해하고 통합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지창조 때 자신을 계시한 이래 계속해서 성육신 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육신 되어 이 세상에 자신을 더 뚜렷하게 계시하셨다. 융은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사건을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성령이 일단 사람의 몸을 통하여 나타났으면, 이제 모든 사람들 속에서 계속해서 성육신 되어야 하는 원형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의 삶은 물론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삶이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본성을 통합한 하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
융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 하나는 성령의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계속되는 성육신이다. 그에 의하면 성령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상기시키고, 그리스도가 완수한 사업을 계속하게 하는 진리의 영이다. 따라서 "성령의 현존은 신적인 특성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확장시키고...", 사람들을 신적인 존재로 만든다. 성령은 사람들이 모든 대극들을 통합하게 하고, 온전한 삶을 살게 하는데, 그 상태는 그리스도가 성육신 된 상태와 비슷하다고 하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서에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고 하였다"(요10,34)라는 말은 사람들 속에 성령이 내주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욥기 시대에 그리스의 지혜 사상이 유대 사회에 전파된 이래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전까지 하나님을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였는데 이제 인지가 발달되면서 삶의 어두운 부분을 통합하기 위해서 무의식에 있던 신적인 본성을 각성하게 된 것을 성육신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나자렛 예수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는 사건이다. 이제 하나님이 인간으로 되어 인간이 드높여졌고, 성령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신적인 존재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사람들에 대한 성령의 직접적이고 지속되는 역사는 사실 성육신 과정을 계속해서 확장시킨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그리스도는 첫 아들로서 앞으로 계속해서 늘어나는 수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아킴 드 플로르(1130-1202)가 성자의 시대 다음에 성령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던 사실에 주목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이 각성된 현대 사회에서 성령은 더욱더 사람들에게 성육신 되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대극을 통합하고, 영적인 존재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진리의 영을 그들의 몸에 담고 더욱더 신적인 존재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만연된 지나친 합리주의, 물질주의, 무신론은 그리스도가 온 후 천년이 지난 다음 시작될 적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라고 융은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의 악마적인 발달, 물질과 도덕의 파괴, 현대세계의 비기독교화 등은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종말론적인 사건과 비슷하며,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라고 할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사회의 혼란상은 그리스도가 출현하여 높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던 영성이 너무 일방적으로 나아가다가 역전되어 물질을 정복하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물질적 야망과 만나서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세속화가 급격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시대도 성령 안에서 통합되어야 한다. 성령에는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를 화해시키고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성령을 내면화시키는 사람들의 책임은 중요해진다. 모든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로 상징되는 대극을 의식이 뚜렷하게 각성된 상태에서 통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안에 있는 미분화된 감정과 충동들 및 모든 어두운 부분들은 변환되어 우리 인격을 더욱더 풍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개성화 과정을 통하여 좀더 높은 의식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 안에서 그의 대극을 통합시키려 한다고 융은 주장하였다. 집단적인 의식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대극의 긴장을 겪으며 그것을 통합한 사람들 속에서 대극을 통합시키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려고 결단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대극의 문제를 담당하고 그 대극을 통합해야 한다 :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면,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 문제는 하나님은 선하기만 하다고 선포된 순간 제기된 대극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앞에 어둠을 두고 어떻게 선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문제 해결의 모델이 되고, 그 상징은 대극을 통일한 십자가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이제 의식이 각성되었기 때문에 그의 내면에 자기 원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실현시켜야 하며, 자기 원형에 어두운 측면이 있다는 사실까지 깨닫고 그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제 강력한 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어둠에 사로잡혀 정신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어떤 일을 할지 모른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적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고, 어떤 것들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융은 <<욥에의 회신>> 마지막 부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가 거의 하나님처럼 강력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더 이상 눈멀고 무의식적인 채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는 그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고 하나님에 관해서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의 본성과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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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인기감동기타 [바울신학] 사도행전에 근거한 바울의 선교전략 이우성 2002-10-04 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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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인기감동기타 [교리] 침례교회가 사도신경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용복 2002-10-02 5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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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인기감동기타 [특수선교] 교회가 장애인 사역을 해야 할 10가지 이유 최용우 2002-09-29 3142
34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산 속 기도실이 아름다운 곳 강릉정동기도원 다람쥐 2002-08-01 7974
33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신성수양관 다람쥐 2002-08-01 5241
32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강화 「교산교회」 다람쥐 2002-08-01 4368
31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 풍경] 전원형 교회 「김포전원교회」 다람쥐 2002-08-01 6477
30 선교화제현장 [교회가 있는풍경] 작고 아름다운 시골교회, 계룡산 학봉교회 다람쥐 2002-08-01 4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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