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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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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기독교를 복(福)의 종교라 부릅니다. 성경 전체 중에서 <복>이란 말이 무려 450여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복의 내용이 문제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복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셨고 성경이 말해주는 복의 내용이 다르다는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 신앙의 정도와 깊이는 그가 품은 복에 대한 인식과 이해에 따라 정하여진다 하겠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국민이든 다 복을 바라고 복을 누리기를 바라겠지만 우리들 한국인들은 복 받는 일에 대하여는 유별납니다. 오랜 역사에 너무나 수난과 핍박에 시달리기만 하고 복을 누려보지 못하였기에 복에 한(恨)이든 백성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집안 가구나 세간 모두에 복(福)자를 새겨두고 있습니다. 밥상에도, 수저에도, 그리고 이부자리에도 온통 복자 투성이 입니다. 그래서 조리에도 '복조리'가 있고 주머니에도 '복주머니'가 있습니다.
복에 대한 이런 갈망은 예수를 믿게 되어도 변함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예수는 복을 나누어 주는 분으로 생각하고 성령님을 복의 배달꾼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에 한국교회가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바탕으로 바르게 서려면 먼저 이 복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에 대한 바른 신앙의 기준을 어디에서 찾아야겠습니까?
마태복음 5장의 첫 부분에 나오는 여덟가지 복에서 그 기준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산상수훈 첫머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일러 주신 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간에 우리는 예수를 믿노라면서도 복에 관한 믿음은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성경의 교훈을 따르지 못하고 세속적인 축복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의 기저에는 무속신앙인 샤마니즘(shamanism)이 터를 잡고 있기에 무당들이 가르쳐 주던 축복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무속신앙의 특성중의 첫째가 바로 치병기복(治病祈福) 신앙이기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무속신앙에 젖어있는 한국교회 교인들은 치병기복신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복에 관하여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바로 배워 바른 신앙으로의 기본을 다져 나가야겠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는 열심 (Passion)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알고, 바로 깨달아, 바로 믿는 일입니다. 우리들 한국교회 교인들의 열심은 세계가 알아주는 바입니다. 이런 열심에 바른 깨달음을 기초로 하며 바른 믿음이 더 하여 진다면 그런 믿음이야 말로 백성들을 구원하고 겨레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정신적 원동력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믿음을 세워나감에 있어 꼭 필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가 바로 축복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성경적인 신앙에 있어 축복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가 바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어 복되게 살게 하시려는 데 있었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씀에 담긴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맨 처음으로 하신 일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 복을 누리며 살게 하신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사는 일이 바로 영적인 삶의 근본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을 누리고 살지 못한다면 그 삶은 영적인 삶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거스리는 삶이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누리며 살게 하신 복의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점이 바로 바른생활을 결정짓는 핵심 사항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의 복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과 혼동하여 그릇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시편은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찬송가에 해당합니다. 전체 150편으로 이루어진 시편들 중에 제1편은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동시에 전체를 요약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1편의 주제(主題)는 1절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2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점이 흔히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복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건강이 좋아지고 물질적으로 부요하여 지는 경우 등을 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밤과 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그렇게 복 있는 사람이 받게 되는 복의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일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성경에서 ‘물’은 주로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이란 마치 시냇가에 있는 나무가 물 근원이 가깝기에 가뭄에도 물을 공급 받아 잎이 항상 푸르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성령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고 늘 성령님과의 교통이 깊어 그의 삶이 항상 싱싱하고 생명력이 넘쳐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경영하는 모든일이 막힘이 없이 형통함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도 형통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다 잘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되어야 할 것은 되고 되지 않아야 할 것은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결정과 선택은 우리들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지켜보시는 여호와께서 결정하십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묵상함을 생활화 하여서 복있는 사람의 삶을 살아갑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에배소서 1장 3절)
복(福)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땅에 속한 복과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 정치가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 나눈 대화 중에 다음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크리스챤들은 거듭난 사람들이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영의 사람들입니다. 영의 사람들이 받는 복은 하늘에 속한 복이요, 하늘에 속한 복은 세상적인 복이 아니라 신령한 복입니다.
그럼에도 크리스챤들이 땅에 속한 복을 찾아 누리려고 든다면 그는 성숙되지 못한 사람, 즉 크리스챤답지 못한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이점에 한국교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말로나 겉으로는 모든 조건을 갖춘 크리스챤이면서도 속사람은 땅에 속한 복만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습니다. 교회에서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워서 그릇된 축복관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이라면 마땅히 땅에 속한 복을 떠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바른 축복관은 어떤 내용이겠습니까? 그 점에 대하여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친히 가르치신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산상수훈 중의 8복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8복의 가르침 중에서 예수님은 바른 축복관의 진수를 가르치셨습니다. ‘복이 있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여‘로 시작되는 가르침은 성경적인 축복관의 진수가 되는 부분입니다. 앞으로 10회에 걸쳐 8복의 핵심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두레교회 김진홍
기독교를 복(福)의 종교라 부릅니다. 성경 전체 중에서 <복>이란 말이 무려 450여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복의 내용이 문제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복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셨고 성경이 말해주는 복의 내용이 다르다는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 신앙의 정도와 깊이는 그가 품은 복에 대한 인식과 이해에 따라 정하여진다 하겠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국민이든 다 복을 바라고 복을 누리기를 바라겠지만 우리들 한국인들은 복 받는 일에 대하여는 유별납니다. 오랜 역사에 너무나 수난과 핍박에 시달리기만 하고 복을 누려보지 못하였기에 복에 한(恨)이든 백성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집안 가구나 세간 모두에 복(福)자를 새겨두고 있습니다. 밥상에도, 수저에도, 그리고 이부자리에도 온통 복자 투성이 입니다. 그래서 조리에도 '복조리'가 있고 주머니에도 '복주머니'가 있습니다.
복에 대한 이런 갈망은 예수를 믿게 되어도 변함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예수는 복을 나누어 주는 분으로 생각하고 성령님을 복의 배달꾼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에 한국교회가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바탕으로 바르게 서려면 먼저 이 복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에 대한 바른 신앙의 기준을 어디에서 찾아야겠습니까?
마태복음 5장의 첫 부분에 나오는 여덟가지 복에서 그 기준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산상수훈 첫머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일러 주신 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간에 우리는 예수를 믿노라면서도 복에 관한 믿음은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성경의 교훈을 따르지 못하고 세속적인 축복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의 기저에는 무속신앙인 샤마니즘(shamanism)이 터를 잡고 있기에 무당들이 가르쳐 주던 축복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무속신앙의 특성중의 첫째가 바로 치병기복(治病祈福) 신앙이기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무속신앙에 젖어있는 한국교회 교인들은 치병기복신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복에 관하여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바로 배워 바른 신앙으로의 기본을 다져 나가야겠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는 열심 (Passion)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알고, 바로 깨달아, 바로 믿는 일입니다. 우리들 한국교회 교인들의 열심은 세계가 알아주는 바입니다. 이런 열심에 바른 깨달음을 기초로 하며 바른 믿음이 더 하여 진다면 그런 믿음이야 말로 백성들을 구원하고 겨레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정신적 원동력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믿음을 세워나감에 있어 꼭 필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가 바로 축복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성경적인 신앙에 있어 축복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가 바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어 복되게 살게 하시려는 데 있었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씀에 담긴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맨 처음으로 하신 일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 복을 누리며 살게 하신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사는 일이 바로 영적인 삶의 근본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을 누리고 살지 못한다면 그 삶은 영적인 삶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거스리는 삶이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누리며 살게 하신 복의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점이 바로 바른생활을 결정짓는 핵심 사항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의 복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과 혼동하여 그릇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시편은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찬송가에 해당합니다. 전체 150편으로 이루어진 시편들 중에 제1편은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동시에 전체를 요약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1편의 주제(主題)는 1절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2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점이 흔히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복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건강이 좋아지고 물질적으로 부요하여 지는 경우 등을 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밤과 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그렇게 복 있는 사람이 받게 되는 복의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일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성경에서 ‘물’은 주로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이란 마치 시냇가에 있는 나무가 물 근원이 가깝기에 가뭄에도 물을 공급 받아 잎이 항상 푸르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성령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고 늘 성령님과의 교통이 깊어 그의 삶이 항상 싱싱하고 생명력이 넘쳐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경영하는 모든일이 막힘이 없이 형통함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도 형통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다 잘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되어야 할 것은 되고 되지 않아야 할 것은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결정과 선택은 우리들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지켜보시는 여호와께서 결정하십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묵상함을 생활화 하여서 복있는 사람의 삶을 살아갑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에배소서 1장 3절)
복(福)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땅에 속한 복과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 정치가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 나눈 대화 중에 다음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크리스챤들은 거듭난 사람들이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영의 사람들입니다. 영의 사람들이 받는 복은 하늘에 속한 복이요, 하늘에 속한 복은 세상적인 복이 아니라 신령한 복입니다.
그럼에도 크리스챤들이 땅에 속한 복을 찾아 누리려고 든다면 그는 성숙되지 못한 사람, 즉 크리스챤답지 못한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이점에 한국교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말로나 겉으로는 모든 조건을 갖춘 크리스챤이면서도 속사람은 땅에 속한 복만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습니다. 교회에서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워서 그릇된 축복관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이라면 마땅히 땅에 속한 복을 떠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바른 축복관은 어떤 내용이겠습니까? 그 점에 대하여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친히 가르치신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산상수훈 중의 8복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8복의 가르침 중에서 예수님은 바른 축복관의 진수를 가르치셨습니다. ‘복이 있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여‘로 시작되는 가르침은 성경적인 축복관의 진수가 되는 부분입니다. 앞으로 10회에 걸쳐 8복의 핵심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두레교회 김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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