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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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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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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독교신문 2000/11/16(목) 11:45
■ 왜곡된 경건생활 1 (1553호. 2000.3.5 )
‘기독교인’ 밝히기 꺼려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떳떳하게 밝히기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에 대한 일반 사회인들의 인식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나아진게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생활양태가 10년 전이나 지금,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서도 가장 시급한 문제로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기독교인의 윤리성 회복’을 말한다. 비기독교인들이 하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말이 있다. 그것은 “크리스천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믿는 사람이나 안믿는 사람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과의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만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10여년전 모 교계 월간지에서 비기독교인 2백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이때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31.4%가 “교회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이기적인 경우가 많았다”고 답했다.
다음으로 22.9%가 “생활이 성실하기는 하나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답했으며, “비기독교인들보다 위선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가 18.6%로 나타났다. “모범적인 태도와 인격이 느껴져 사귀고 싶었다”고 답한 사람은 17.1%에 불과했다.
이 설문조사에서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부정적으로 느끼는 점은 “말이 앞서는 사람들”이라는 응답이 32.9%로 가장 많았으며, “교리의 틀 속에 너무 얽매여 있다”는 응답이 31.4%로 나타났다. 그리고 “선을 꾸미는 위선적인 사람들”이란 응답이 10%,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란 응답이 8.6% 순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로 첫 번째로 꼽은 것이 바로 “믿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생활모습이 부담된다”는 것이었다.
이 설문조사가 아니더라도 언제부터인가 비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위선”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얼마전 옷로비 사건 때, 증언에 나선 증인 4명 모두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성경에 손을 얹고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많은 기독교인들은 찹잡하다 못해 참담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자화상이다.
많은 목회자와 뜻있는 교인들은 “이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들이 성경에 손을 얹고 조용히 자문해볼 때가 왔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과연 다른 삶을 살았는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보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한국교회가 실로 윤리부재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경건생활 훈련 절실
흔히 기독교인이라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있다. 물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낫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다른 사람들 보다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한국교회 병리현상을 말하는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은 이제 한국교회 교인들이 진정 기독교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경건한 생활을 몸에 익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만이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지 않을 수 있으며,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경건이란 무엇인가. 경건이란 흔히 생각하듯 깊은 산 속이나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하거나 도를 닦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숭상하고 사람을 존경하고 자신을 귀히여기는 마음 가짐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경건이란 말은 도덕이나 윤리 신앙고백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활과 말씀에 충실하려는 심정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경건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야고보서 1장 27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이 구절을 통해보면 경건은 먼저 고아와 과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경건은 신앙의 기본자세
쉽게 이야기 해서 경건은 기독교인의 신앙자세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신앙생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살려고 하는 기독교인의 모든 생활이 곧 경건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비춰볼 때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은 경건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경건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교인들은 천주교나 불교 신자들에 비해 교회 출석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례로 지난 98년 한국교회미래를 준비하는 모임(한미준)이 한국갤럽에 의뢰한 ‘한국 개신교인의 교회활동 및 신앙의식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의 교회 출석률은 88.3%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또 매주 주일낮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은 전체 65.2%로 나타났으며, 한달에 2-3번이 18.0%, 한달에 한번 3.7%, 한달에 한번 이하 1.4%로 나타났다.
최근들어 주일성수가 무너지고 있으나 타종교에 비해 한국교회 교인들이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빈도수는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일치되지 못해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 가식적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 교인들 의식 속에는 주일날 하루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교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팽배하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한미준의 조사결과에서도 나타났듯이 현재 교회에 다니고 있는 교인들에게 주일에 교회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 물은 결과, 응답자 가운데 59.9%가 ‘예배만 드리고 온다”고 대답했다. 절반이상이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고 오며, 특히 작은 교회보다 큰 교회 교인과 모태신앙인 경우, 교회활동비율이 적은 것으로 나타나 관심을 끈다.
한국교회 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생활과 일상생활이 일치하지 못한다는데 고민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 교인들은 교회로부터 ‘기도’와 ‘좋은 설교와 말씀’, ‘성경공부와 교육모임’ 등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비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필요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마디로 말해 한국교회 교인들은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의 불일치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멀마전 일간지 스포츠면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흥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일간지에 소개된 기사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36억원이라는 거금을 뿌리친 아르헨티나 축구대표팀 주전 골키퍼인 카를로스 로아의 이야기이다.
독실한 ‘제7일 안식일 재림파’ 신도인 그는 하나님이 안식일로 정한 일요일에도 경기를 하는 것에 마음이 편치않았는데,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주전으로 발돋움하자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로아의 결정에 가장 놀란 그의 아내는 로아로부터 대표팀은 물론 소속팀인 레알 말로르카에서도 그만두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한달동안 울면서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말로르카 구단주인 레이네스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제시한 이적료 4 백만파운드의 절반(약 36억원)을 떼어주겠다고 설득했지만 로아는 “돈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며 “노”했다고 한다.
그는 비록 개신교인은 아니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무늬’만 기독교인인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국교회는 지금, 어떻게 하면 교회생활과 일상생활을 일치시킬 수 있을까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 일간지에 보도된 기사를 보면 오늘 한국교회가 어디까지 와 있는가 확연히 알수 있다.
“목사 낀 밀렵단 적발, 공무원들이 야생동물 취식 앞장”, “현직 목사가 낀 야생동물 밀렵단이 적발됐다. (1999년 12월 12일. 연합뉴스)“아들 2개월감금 숨지게 한 부모 등 체포”, “1.5평짜리 보일러실에 2개여월간 두 아들을 감금해 그중 한 아들을 숨지게 한 비정한 부모와 백부모가 경찰에 붙잡혔다.
(1999년 11월 5일. 연합뉴스)“70억원대 토지사기단 15명 적발” “현직 목사 등이 낀 70억원대 토지사기단 2개 조 직 15명이 검찰에 적발됐다.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반부패특별수사반 조인형(趙仁衡) 검사는 19일 토지소유자 의 이름으로 허위 개명한뒤 호적등본 등 토지 담보 서류를 발급받아 제약회사로부터 18억원 상당의 약품을 가로채려 하거나 파이낸스사로부터 대출을 받으려한 혐의로 현직 목사 등 10명을 구속 기소했다.”(1999년 10월 19일. 연합뉴스) “ 교육부의 인가도 받지 않은 미국 대학 한국분교에서 사회복지사 과정을 이 수한 학생들에게 무더기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발급된 것으로 밝혀졌다. (2000년 1월 19일.연합뉴스)
기복신앙, 개인주의 영향
한국교회 교인들은 언제부턴가 대형사건, 사고 노이로제에 걸렸다. 그것은 대형사고나 사건이 터지면 거기에는 꼭 기독교인이 끼어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선교 100여년이라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선교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발전과 성장을 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세계100대 교회중에 23개가 한국교회가 차지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 서면서 성장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90년대 들어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변해야 교회가 변하고 이 사회가 변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기복적인 신앙과 성장제일주의에 빠져서 개인의 경건적 삶에는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개인주의 신앙에 빠진 한국교회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서의 다른 생활을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는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도록 만든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사회적으로 볼 때 그 병리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사회적으로 볼때 한국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부패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있는 실상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최소한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의 의’를 보이려고 행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경건은 의무감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경건은 기독교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져야할 신앙자세이다.
한국교회는 성장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경건생활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김창수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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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곡된 경건생활 2 (1554호. 2000.3.12)
벙어리냉가슴 ‘性고민’
K교회 상담실 우편함에 가장 많이 요청되는 상담내용은 성(性)관련 고민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실재로 교인들이 교회에서 성문제와 관련, 목회자에게 상담을 받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동료신도에게 성관련 상담을 털어 놓기가 마음 편하다.
교인의 70%가 여성이고, 남자목회자가 대부분인 한국교회 상황을 감안하면, 성문제를 목회자와 평신도관계라고 해도 이성간의 성문제를 꺼내놓고 상담하기가 쉽지않다. 아니 오히려 혼자 삭이거나 마음맞는 동료신도에게 살짝 털어놓기가 편하다.
지난해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산하 기독교여성상담소에서 7백여명의 남녀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독교인의 성.평등의식 실태조사〉에 의하면, 36.3%가 동료신도, 30.4%가 교회내에서 상담할 사람이 전혀 없다고 응답해 교회가 성문제를 상담할수 있는 공간이 못되고 있음을 나타났다. 그렇지만 성은 인간의 생활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교인이라고해서 예외는 아니다. 교회에서 성문제를 내놓고 상담받을수 없다는 얘기는 거꾸로 교회가 교인들의 삶의 균형을 적절하게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도 통할 수 있다.
특히 아직까지 교회에서 성은 곧바로 ‘거룩’과 ‘금욕’ 그리고 ‘불결하다’는 단어를 먼저 떠오르게 한다. 왜일까? 몇몇 성경구절이 여성의 성기와 생리를 불결하게 묘사하고 있고, 세상의 절제되지 못한 성문제가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다윗, 야곱, 솔로몬 등 모든 성경의 지도자들이 성문제만큼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해 불순종하는 결과를 빚었다. 예외라면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근질긴 유혹을 물리친 정도랄까? 그러나 성경과 교회안의 성교육이 교과서수준의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을 때, 교인들의 의식은 많이 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태조사에 의하면 ‘성’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77.4%의 남녀교인들이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이 낮고 평신도직분을 가진자일수록 동의비율이 높았으나, 반대로 나이가 많고 직분이 있거나 성직자일 경우는 동의비율이 낮았다. 또한 남녀의 성적 호기심이나 성충동, 성지식등에 대해서도 90%이상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답했다.
구체적인 성행위인 자위행위에 대해선 65.7%가 긍정적, 31.3%는 부정적 입장을 보여 앞과 대비됐다. 반면, 혼전성관계는 사랑하는 경우라도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64.3%로서 절반이상이 부정적입장을 취했고, 동의는 34.4%를 보였다. 이 경우 남성들은 사랑한다면 혼전성관계가 가능하다는 입장에 45.5%가 동의한 반면, 여성은 30.6%만이 동의해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말을 바꿔 혼전에는 무슨일이 있어도 성관계를 해서는 안된다는 질문에는 48.9%와 48.8%로 절반씩 찬반이 나눴다.
이러한 ‘성’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는 젊고 나이가 어릴수록 개방적이고, 나이가 많고 직분이 있을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정확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낙태는 대표적인 예다. 낙태문제 관해서도 기독교적 입장은 반대다. 그러나 실재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쩔 수 없는 현실상황으로 인해 낙태를 하고 시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태조사에서도 61.6%가 낙태를 경우에 따라서는 인정해야 한다는 우세론이 나왔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적인 입장과는 대치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교인들중에 순결, 혼전 성관계, 외도, 낙태 그외 말못하는 여러가지 성적 문제로 인해 고민하며 죄의식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입장은 정죄하기만 바빴던 것이 그동안의 현실이었다. 무분별한 성을 절제하고 불순종시 오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하지만, 중요한것은 문제가 이미 발생한 이들이 ‘죄책감’으로 인해 온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부분이다. 기독교는 철저히 결혼외 성에 대해 죄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치유나 회개의 길로 인도하는 방법은 아직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부분이 바로 교회안에서 성문제를 드러내기 어렵게하는 요인되고 있다.
교회 성교육 빨리해야
요사이 기독교인 부모들은 청소년들의 이성교제에 너그러운 편이다. 청년들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교회안의 교제다. 교회안 자녀들의 이성교제가 문제가 됐을 때, 부정적 여론이 들끌게 된다. 특히 청소년들의 이성교제는 더 그렇다. N세대로 대표되는 요즘 10대들은 이성친구가 없는 이가 없고, 교제하다가 헤어져도 금새 새로운 이성친구를 만든다고 한다.
교회안 중고등부도 마찬가지다. 공과공부 후에는 대여섯씩 모여 자신들의 이성친구 얘기를 하기 바쁘다. 그러나 정작 교회에서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신학자협의회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81.3%가 교회에서 성교육을 실시해야한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그중에서도 중등부를 가장 많이 꼽았으며, 초등학생부터 청년, 예비부부, 장년층, 노년층까지 모두 성교육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또한 성교육도 교역자보다는 성교육전문가가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교육내용은 건전한 이성관계, 성비행/성폭행 예방교육, 성서가 말하는 성, 순결, 임신과 출산등의 순서로 나타났다. 특히 교회 청소년들의 성교육 내용으로서 피임법을 가르치는 부분에 대해서는 75%가 필요하다고 응답했고, 나머지는 시기상조, 부작용을 들어 반대해 눈길을 끌었다.
이같은 결과는 교회에서 빨리 성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임박감을 증명한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아직까지 청년들에 대한 성교육은 가끔 있어도, 청소년들에 대한 성교육실시를 꺼려하고 있다. 여태껏 한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거부감이 큰 것이다. 또 내부에 성교육을 할 전문가가 없고, 교육후 부작용을 앞서서 걱정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가르쳐야 하는가야에도 기준이 없다. 그냥 일반 공교육기관에 맡겨버리는 것이 속편하다. 그러나 기독교적 입장에서의 성교육은 역시 일반 사회와는 다르다.
시각을 바꿔 청년들의 경우는 어떤가? 아마도 청년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문제가 바로 이성문제이며, 교회 청년부에서의 가장 핫 이슈도 이문제일 것이다. 이성교제를 위해 철새따라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이동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특히 교회안에서 이성교제하다가 헤어져 상처받고, 교회를 안나오는 예도 많다. 해바리기식으로 서로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기, 삼각관계등 형태도 다양하다. 특히 믿는 양가집안이 서로 반대해 파혼하여 같은 교회안에 앙숙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다. 한번 잘못된 이성교제는 곧바로 교회를 떠나거나 불신앙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극한 상황으로까지 치닫는다.
여기에 결혼에 있어 기독교 청년들이 무엇을 배우자의 ‘조건’의 우선순위로 보는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신앙, 성격, 외모, 경제력, 인격등 내세우는 조건은 다양하지만, 문제는 세상사람들의 조건과 별반 다를것이 없다는 점이다. 특히 민감한 성문제에 있어서도 의견차가 다양해 기독교적 입장에서의 정립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에 대해 가장 빠른 속도로 개방적인 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면, 결혼한다면 혼전 성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많은 것은 물론, 잘못된 관계와 성적 불충족등으로 고민하는 계층이 많은 것도 청년층이기 때문이다. 많은 남자청년들이 경건한 삶을 사는데 가장 큰 적으로 육욕을 들고 있는 점은 웃고 넘어갈 부분이 아니다.
성문제나 성욕에 대해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청년부는 별로 없다. 어쩌다 공과시간에 성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기독교적인 원칙만이 일방적으로 선포될 뿐이다. 그러나 이에 공감하지 않는 청년들도 많다.
또한 결혼한 부부의 경우는 원치않는 임신으로 인한 또는 어쩔수 없는 현실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낙태’를 하고, 육체적 후유증과 정신적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다. 중년부부의 경우 혼외정사로 즉 배우자의 외도로 인해 많은 가정불화와 이혼으로까지 치닫고 있지만 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개인문제’ 내지 ‘부부간의 문제’를 이유로 함부로 끼어들기를 주저한다. 부부들도 비록 기독교인이지만 이 문제에 목회자가 깊숙히 개입하거나 자신들의 문제를 다 드러내기 꺼린다.
교회는 성평등하다?
해석을 달리해서 교회안에서 남녀는 평등한가? 여신학자협의회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남성들은 80%가 자신의 성에 만족하고, 여성들은 45.9%만 만족한다고 답했다. 나머지 여성들은 때때로 못마당하거나 다른 성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응답한 것이다. 남녀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기관의 대표가 될 수 있다에는 대다수가 찬성했으며, 교회안에서 평등한가에 대한 의견에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두드러지게 평등하다고 느끼고 있음이 나타났다.
특히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고린도전서 14장 34절에 대해서는 현실에 맞게 해석돼야한다는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고,11.5%만이 교회전통과 성서말씀이므로 따라야 한다고 답했다.
물론 이 설문조사가 한국교회 전체를 대변할수야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개방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평신도들의 의식을 일부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의식수준이 이같이 열려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직까지 여성목사나 여성장로에 대해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못하거나, 아얘 여성안수도 불허하는 교단이 많은 실정이다. 특히 임신한 여성이 강단에서 설교하거나 여성들이 각종 교회 기관과 예배순서에서 리더를 하는 것에는 의식수준만큼 실제적인 부분에서 투표율이 저조하다.
즉 의식은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만, 제도적으로 투표시는 그 의식만큼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한편으로는 교회에 중고등부, 청년부, 여전도회등 전 구역에 여성이 70%이다 보니 교회의 여성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래서 남성을 살리자는 캐치프래이즈하에 남성교인들을 끌어들이는 캠페인을 벌이는 교회들도 많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
성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만큼 감추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꺼내놓고 얘기하고 겅간한 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야 더 경건해지고 거룩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추고 교과서적인 답변만 하는 성교육은 오히려 궁금증과 범죄에 대한 유혹만을 키울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안의 성은 아직까지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쉽지않은 금기의 영역중 하나다. 절제와 금욕만이 믿음생활의 척도인양 되어버려 성문제와 관련 고민이 있어도 누구에게 믿고 털어놓기가 어려운 문제가 되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로인해 성 문제와 관련해 고민이 있는 이들이 그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고 치유하지 못해, 방황하거나 씻을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의미에서 초 등학생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별 성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전문강사진을 통한 명쾌한 성고민이 해결되는 과제는 당면 과제라고 볼 수 있겠다. 단순히 육체적인 성문제뿐만 아니라, 이성교제에 있어서도 세상적인 잣대와 조건에 휘청거리는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사람의 인성과 하나님 중심에 얼마만큼 서있는가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가치기준이 정립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은진기자
=============■ 왜곡된 경건생활 3 (1555호. 2000.3.19)
한국교회에는 다른 나라의 교회와는 다른 전통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교인들에게 술과 담배를 금하는 전통이다. 이 전통은 사실, 한국교회의 오늘날이 있게 한 소중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탄에 빠진 식민지의 민중들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술과 담배에 빠져 가는 것을 상당부분 막아 주는 역할을 했고, 또 그로 인해 기독교가 부녀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전통
하지만 주초금지의 전통이 한국교회에 가져온 가장 큰 공헌은 아마도 이로 인해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위치를 오늘날까지 유지할 수 있게 해 줬다는 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술취해 흥청거리는’ 불건전한 교제를 막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도의 거룩한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독교인이라면 대부분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식할 수 있게 됐고, 질펀하기 그지 없는 우리 나라의 접대문화 속에서도 “나는 기독교인”이라는 말 한마디면 술잔을 거두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전통도 생겼다.
그러나 또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같은 풍토는 이미 10여년 전에 지나갔다고도 할 수 있다. 목회자들은 인정하기 싫어하겠지만, 이미 한국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주초금지가 거의 사문화되다시피 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몇해전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사람중 절반 이상이 ‘주초금지를 폐지해야 한다’는데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결국 술이나 담배가 기독교신앙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교인들이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목회자들은 아직도 강단에서 ‘술취하지 말라’고 호소하지만 일반 교인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운다. 하지만 목사님의 설교 때문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은 찜찜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식’이 생기기도 하고, 아예 ‘예수님도 포도주를 만들어 나눠주셨는데 뭘’이라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교인들 뿐만이 아니다. 목사들이 술을 마시고 주먹다툼을 벌였다는 기사가 교계 신문에 실리는 것은 오히려 보기 드문 일이다. 민중교회운동이나 현장목회가 한창이던 시절,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던 목회자들은 현장 노동자들이나 지역의 주민들과 거리낌 없이 막걸리 잔을 나누곤 했다.
술을 현장의 양떼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김호식목사(예닮교회 담임)는 본지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아예 사모들에게 “하루종일 목회활동에 지친 목회자 남편을 위해 주일 저녁에는 상 위에 포도주를 한병쯤 올려 놓으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목사도 간단하게 포도주를 한 잔 함으로써 심신의 피로를 풀수 있다는 논리다.
여기서 교인들은 혼란에 빠진다. 과연 교회는 술과 담배를 금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깨끗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술이나 담배를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술잔을 입에 대는 목사님들을 깨끗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목회자는 거의 없다.
주초금지 ‘율법화’
이같은 혼란은 주초금지의 규정이 거의 사문화됐지만, 아직까지 그 위력을 갖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율법화됐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현실적인 분위기는 그렇지 않은데, 목회자들의 의식이나 전통상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교인들을 붙들어 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주초문제로 상당한 부담감과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건강을 위해서나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위해서라면 술이나 담배를 끊을 수 있겠지만,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데에는 부담감을 넘어 묘한 거부감까지 생긴다. 이렇게 되면 주초문제는 교인들에게 ‘신앙의 조건’이 아닌 걸림돌이 되고 만다.
또, 교인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목사님과 얘기하다가 우연히 술이나 담배 이야기가 나올 경우, 자신있게 ‘나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운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또다른 죄의식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주초문제에 대해 아직도 엄격함을 유지하는 한국교회의 전통과 사실상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상당수의 교인들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먼저 주초문제와 관련된 교회의 규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주초금지를 교단 헌법에 명시하고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1997년판 교리와 장정은, 제1편 역사와 교리의 제 2장 교리에 들어 있는 사회신경에서 “우리는 올바른 인간교육, 건전한 생활, 절제운동(금주 금연 등)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관의 형성과 도덕성 회복을 위해 앞장선다”고 밝히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총회측의 경우는 헌법 세칙 제 3조 교인의 의무에서 “교회의 직원은 성일(聖日)을 범하거나 미신 행위나 음주 흡연 구타하는 등의 행동이나 고의로 교회의 의무금을 드리지 않는 자의 직임을 면함이 당하고 교인으로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자로 간주한다”고 정해 놓고 있다.
그런데 두 조항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감리교의 사회신경은 주초문제를 ‘신앙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절제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반면, 예장총회측의 헌법세칙은 금주와 금연을 교회 직원의 임면을 좌우하는 조건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감리교는 음주와 흡연을 교회가 앞장서서 몰아내야 할 사회악의 하나로 보고 있는 반면 예장총회측은 교회의 직책을 맡을 수 없는 결격사유로 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다른 교단의 헌법들은 주초문제를 명시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의 경우는, 제2 편 정치의 제 8장 집사, 권사 제 51조 집사의 자격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금주와 금연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전서 3장 8-10절에 해당한자’라고 간접적으로만 언급돼 있다.
디모데전서 3장8절은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술을 마시지 말라기 보다는 술에 탐닉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하기 따라서는 간단한 음주는 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처럼 교단마다 주초문제를 둘러싼 규정에 차이가 있는 것은 선교 초기 주초를 금하게 된 과정이 ‘신앙적’이나 ‘신학적’이기 보다는 ‘사회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초창기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당시 자신들의 눈에 ‘우상숭배’로 여겨졌던 제사문제와 한국인들의 음주 흡연을 몰아내야 할 사회악으로 지목했고, 교인들에게 이를 적극적으로 권면했다. 이에 따라 금주와 금연은 한국교회의 ‘법’이 아닌 ‘전통’으로 자리잡았고, 뒤에 물산장려운동이나 절제운동을 펼치면서 큰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교리보다는 캠페인으로
그러나 이 전통이 율법화되면서 주초문제를 ‘믿음의 척도’로 여기는 풍토가 한국교회에 자리잡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음주나 흡연을 하는 사람은 마치 ‘죄인’인 것처럼 인식되는 풍토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교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서로를 백안시하던 시절에는 주초문제에 비교적 자유로운 태도를 보이던 진보측 목회자들을 ‘술마시고 담배피는 사람들을 어떻게 목사, 장로라고 할 수 있느냐’는 식의 말로 매도하는 일까지 나타났다.
실제로 몇해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가입 문제가 논의될 때, 이 교단의 한 원로는 ‘교회협의 회장이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주장해 부결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문제로 삼았던 교회협 회장 오충일목사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소속으로, 이 교단은 대한성공회와 함께 주초를 문제삼지 않는 교단이어서 그의 음주여부를 타교단 인물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보수권의 일선 목회자들도 주초문제와 관련해서 괴리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보수권 목회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의 음주와 흡연을 금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많은 교인들이 음주와 흡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다면 이제 교회도 신축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더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한발짝 물러섰다. 이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발언이 보도될 경우 ‘주초금지 전통을 부인하는 진보적 인물’로 낙인찍힐 수도 있음을 의식한 것이다.
물론 주초문제가 걸림돌이 된다고 해서 주초금지의 전통을 폐지할 수는 없다. 절제함이 없는 무분별한 음주는 개인의 건강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 심각한 역기능을 초래함으로써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역행하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주초문제는 신앙이나 율법적인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 구성원의 건강한 삶을 위한, 그리고 교인들의 경건하고 절제된 삶을 위한 캠페인의 주제로 전환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할 경우, 교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가식적인 경건’에 대한 죄의식 속에 교회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차원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펼치고 있는 ‘경건 절제 사랑 실천운동’이 온 교회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각 교단이 음주와 흡연을 사회악으로 분명하게 규정하고, 적어도 기독교인 가정에서 만큼은 술취한 모습과 재떨이를 몰아 내자는 운동을 펼쳐 나간다면, 교인들간의 솔직하고 거룩한 교제를 일궈 내는 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밝게 하는 데에도 큰 보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같은 절제운동을 불교나 유교등 다른 종교들과 연대해서 함께 펼쳐 나간다면, 사회에 대한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초문제를 기독교신앙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는 이제 벗어버릴 때가 됐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음주나 흡연을 하는 목회자를 비롯해서 장로나 집사 등은 모조리 교회의 ‘치리대상’이 돼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같은 문제가 두려워 주초를 허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초문제가 신앙의 본질과 직결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사실상 별로 없는 만큼, 교리의 차원이 아닌 절제운동이나 영성운동을 위한 캠페인의 주제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또한, 교인들은 가식적인 경건에 얽매이게 하기 보다는 스스로 판단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성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도 교회가 해야 할 목회적 과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의 입장에서도 청년 교인들과 거리낌 없이 포도주 한두잔을 나누며 삶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 자리는 훨씬 부드러워질 수도 있다. “목사들이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걸핏하면 싸우고 분열된다”는 어느 목회자의 푸념이 순전히 농담만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민성식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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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곡된 경건생활 1 (1553호. 2000.3.5 )
‘기독교인’ 밝히기 꺼려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떳떳하게 밝히기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에 대한 일반 사회인들의 인식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나아진게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생활양태가 10년 전이나 지금,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서도 가장 시급한 문제로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기독교인의 윤리성 회복’을 말한다. 비기독교인들이 하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말이 있다. 그것은 “크리스천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믿는 사람이나 안믿는 사람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과의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만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10여년전 모 교계 월간지에서 비기독교인 2백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이때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31.4%가 “교회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이기적인 경우가 많았다”고 답했다.
다음으로 22.9%가 “생활이 성실하기는 하나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답했으며, “비기독교인들보다 위선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가 18.6%로 나타났다. “모범적인 태도와 인격이 느껴져 사귀고 싶었다”고 답한 사람은 17.1%에 불과했다.
이 설문조사에서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부정적으로 느끼는 점은 “말이 앞서는 사람들”이라는 응답이 32.9%로 가장 많았으며, “교리의 틀 속에 너무 얽매여 있다”는 응답이 31.4%로 나타났다. 그리고 “선을 꾸미는 위선적인 사람들”이란 응답이 10%,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란 응답이 8.6% 순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로 첫 번째로 꼽은 것이 바로 “믿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생활모습이 부담된다”는 것이었다.
이 설문조사가 아니더라도 언제부터인가 비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위선”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얼마전 옷로비 사건 때, 증언에 나선 증인 4명 모두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성경에 손을 얹고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많은 기독교인들은 찹잡하다 못해 참담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자화상이다.
많은 목회자와 뜻있는 교인들은 “이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들이 성경에 손을 얹고 조용히 자문해볼 때가 왔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과연 다른 삶을 살았는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보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한국교회가 실로 윤리부재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경건생활 훈련 절실
흔히 기독교인이라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있다. 물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낫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다른 사람들 보다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한국교회 병리현상을 말하는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은 이제 한국교회 교인들이 진정 기독교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경건한 생활을 몸에 익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만이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지 않을 수 있으며,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경건이란 무엇인가. 경건이란 흔히 생각하듯 깊은 산 속이나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하거나 도를 닦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숭상하고 사람을 존경하고 자신을 귀히여기는 마음 가짐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경건이란 말은 도덕이나 윤리 신앙고백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활과 말씀에 충실하려는 심정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경건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야고보서 1장 27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이 구절을 통해보면 경건은 먼저 고아와 과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경건은 신앙의 기본자세
쉽게 이야기 해서 경건은 기독교인의 신앙자세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신앙생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살려고 하는 기독교인의 모든 생활이 곧 경건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비춰볼 때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은 경건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경건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교인들은 천주교나 불교 신자들에 비해 교회 출석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례로 지난 98년 한국교회미래를 준비하는 모임(한미준)이 한국갤럽에 의뢰한 ‘한국 개신교인의 교회활동 및 신앙의식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의 교회 출석률은 88.3%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또 매주 주일낮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은 전체 65.2%로 나타났으며, 한달에 2-3번이 18.0%, 한달에 한번 3.7%, 한달에 한번 이하 1.4%로 나타났다.
최근들어 주일성수가 무너지고 있으나 타종교에 비해 한국교회 교인들이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빈도수는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일치되지 못해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 가식적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 교인들 의식 속에는 주일날 하루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교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팽배하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한미준의 조사결과에서도 나타났듯이 현재 교회에 다니고 있는 교인들에게 주일에 교회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 물은 결과, 응답자 가운데 59.9%가 ‘예배만 드리고 온다”고 대답했다. 절반이상이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고 오며, 특히 작은 교회보다 큰 교회 교인과 모태신앙인 경우, 교회활동비율이 적은 것으로 나타나 관심을 끈다.
한국교회 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생활과 일상생활이 일치하지 못한다는데 고민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 교인들은 교회로부터 ‘기도’와 ‘좋은 설교와 말씀’, ‘성경공부와 교육모임’ 등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비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필요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마디로 말해 한국교회 교인들은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의 불일치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멀마전 일간지 스포츠면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흥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일간지에 소개된 기사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36억원이라는 거금을 뿌리친 아르헨티나 축구대표팀 주전 골키퍼인 카를로스 로아의 이야기이다.
독실한 ‘제7일 안식일 재림파’ 신도인 그는 하나님이 안식일로 정한 일요일에도 경기를 하는 것에 마음이 편치않았는데,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주전으로 발돋움하자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로아의 결정에 가장 놀란 그의 아내는 로아로부터 대표팀은 물론 소속팀인 레알 말로르카에서도 그만두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한달동안 울면서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말로르카 구단주인 레이네스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제시한 이적료 4 백만파운드의 절반(약 36억원)을 떼어주겠다고 설득했지만 로아는 “돈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며 “노”했다고 한다.
그는 비록 개신교인은 아니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무늬’만 기독교인인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국교회는 지금, 어떻게 하면 교회생활과 일상생활을 일치시킬 수 있을까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 일간지에 보도된 기사를 보면 오늘 한국교회가 어디까지 와 있는가 확연히 알수 있다.
“목사 낀 밀렵단 적발, 공무원들이 야생동물 취식 앞장”, “현직 목사가 낀 야생동물 밀렵단이 적발됐다. (1999년 12월 12일. 연합뉴스)“아들 2개월감금 숨지게 한 부모 등 체포”, “1.5평짜리 보일러실에 2개여월간 두 아들을 감금해 그중 한 아들을 숨지게 한 비정한 부모와 백부모가 경찰에 붙잡혔다.
(1999년 11월 5일. 연합뉴스)“70억원대 토지사기단 15명 적발” “현직 목사 등이 낀 70억원대 토지사기단 2개 조 직 15명이 검찰에 적발됐다.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반부패특별수사반 조인형(趙仁衡) 검사는 19일 토지소유자 의 이름으로 허위 개명한뒤 호적등본 등 토지 담보 서류를 발급받아 제약회사로부터 18억원 상당의 약품을 가로채려 하거나 파이낸스사로부터 대출을 받으려한 혐의로 현직 목사 등 10명을 구속 기소했다.”(1999년 10월 19일. 연합뉴스) “ 교육부의 인가도 받지 않은 미국 대학 한국분교에서 사회복지사 과정을 이 수한 학생들에게 무더기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발급된 것으로 밝혀졌다. (2000년 1월 19일.연합뉴스)
기복신앙, 개인주의 영향
한국교회 교인들은 언제부턴가 대형사건, 사고 노이로제에 걸렸다. 그것은 대형사고나 사건이 터지면 거기에는 꼭 기독교인이 끼어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선교 100여년이라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선교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발전과 성장을 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세계100대 교회중에 23개가 한국교회가 차지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 서면서 성장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90년대 들어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변해야 교회가 변하고 이 사회가 변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기복적인 신앙과 성장제일주의에 빠져서 개인의 경건적 삶에는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개인주의 신앙에 빠진 한국교회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서의 다른 생활을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는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도록 만든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사회적으로 볼 때 그 병리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사회적으로 볼때 한국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부패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있는 실상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최소한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의 의’를 보이려고 행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경건은 의무감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경건은 기독교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져야할 신앙자세이다.
한국교회는 성장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경건생활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김창수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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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곡된 경건생활 2 (1554호. 2000.3.12)
벙어리냉가슴 ‘性고민’
K교회 상담실 우편함에 가장 많이 요청되는 상담내용은 성(性)관련 고민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실재로 교인들이 교회에서 성문제와 관련, 목회자에게 상담을 받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동료신도에게 성관련 상담을 털어 놓기가 마음 편하다.
교인의 70%가 여성이고, 남자목회자가 대부분인 한국교회 상황을 감안하면, 성문제를 목회자와 평신도관계라고 해도 이성간의 성문제를 꺼내놓고 상담하기가 쉽지않다. 아니 오히려 혼자 삭이거나 마음맞는 동료신도에게 살짝 털어놓기가 편하다.
지난해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산하 기독교여성상담소에서 7백여명의 남녀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독교인의 성.평등의식 실태조사〉에 의하면, 36.3%가 동료신도, 30.4%가 교회내에서 상담할 사람이 전혀 없다고 응답해 교회가 성문제를 상담할수 있는 공간이 못되고 있음을 나타났다. 그렇지만 성은 인간의 생활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교인이라고해서 예외는 아니다. 교회에서 성문제를 내놓고 상담받을수 없다는 얘기는 거꾸로 교회가 교인들의 삶의 균형을 적절하게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도 통할 수 있다.
특히 아직까지 교회에서 성은 곧바로 ‘거룩’과 ‘금욕’ 그리고 ‘불결하다’는 단어를 먼저 떠오르게 한다. 왜일까? 몇몇 성경구절이 여성의 성기와 생리를 불결하게 묘사하고 있고, 세상의 절제되지 못한 성문제가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다윗, 야곱, 솔로몬 등 모든 성경의 지도자들이 성문제만큼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해 불순종하는 결과를 빚었다. 예외라면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근질긴 유혹을 물리친 정도랄까? 그러나 성경과 교회안의 성교육이 교과서수준의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을 때, 교인들의 의식은 많이 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태조사에 의하면 ‘성’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77.4%의 남녀교인들이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이 낮고 평신도직분을 가진자일수록 동의비율이 높았으나, 반대로 나이가 많고 직분이 있거나 성직자일 경우는 동의비율이 낮았다. 또한 남녀의 성적 호기심이나 성충동, 성지식등에 대해서도 90%이상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답했다.
구체적인 성행위인 자위행위에 대해선 65.7%가 긍정적, 31.3%는 부정적 입장을 보여 앞과 대비됐다. 반면, 혼전성관계는 사랑하는 경우라도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64.3%로서 절반이상이 부정적입장을 취했고, 동의는 34.4%를 보였다. 이 경우 남성들은 사랑한다면 혼전성관계가 가능하다는 입장에 45.5%가 동의한 반면, 여성은 30.6%만이 동의해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말을 바꿔 혼전에는 무슨일이 있어도 성관계를 해서는 안된다는 질문에는 48.9%와 48.8%로 절반씩 찬반이 나눴다.
이러한 ‘성’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는 젊고 나이가 어릴수록 개방적이고, 나이가 많고 직분이 있을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정확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낙태는 대표적인 예다. 낙태문제 관해서도 기독교적 입장은 반대다. 그러나 실재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쩔 수 없는 현실상황으로 인해 낙태를 하고 시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태조사에서도 61.6%가 낙태를 경우에 따라서는 인정해야 한다는 우세론이 나왔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적인 입장과는 대치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교인들중에 순결, 혼전 성관계, 외도, 낙태 그외 말못하는 여러가지 성적 문제로 인해 고민하며 죄의식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입장은 정죄하기만 바빴던 것이 그동안의 현실이었다. 무분별한 성을 절제하고 불순종시 오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하지만, 중요한것은 문제가 이미 발생한 이들이 ‘죄책감’으로 인해 온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부분이다. 기독교는 철저히 결혼외 성에 대해 죄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치유나 회개의 길로 인도하는 방법은 아직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부분이 바로 교회안에서 성문제를 드러내기 어렵게하는 요인되고 있다.
교회 성교육 빨리해야
요사이 기독교인 부모들은 청소년들의 이성교제에 너그러운 편이다. 청년들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교회안의 교제다. 교회안 자녀들의 이성교제가 문제가 됐을 때, 부정적 여론이 들끌게 된다. 특히 청소년들의 이성교제는 더 그렇다. N세대로 대표되는 요즘 10대들은 이성친구가 없는 이가 없고, 교제하다가 헤어져도 금새 새로운 이성친구를 만든다고 한다.
교회안 중고등부도 마찬가지다. 공과공부 후에는 대여섯씩 모여 자신들의 이성친구 얘기를 하기 바쁘다. 그러나 정작 교회에서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신학자협의회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81.3%가 교회에서 성교육을 실시해야한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그중에서도 중등부를 가장 많이 꼽았으며, 초등학생부터 청년, 예비부부, 장년층, 노년층까지 모두 성교육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또한 성교육도 교역자보다는 성교육전문가가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교육내용은 건전한 이성관계, 성비행/성폭행 예방교육, 성서가 말하는 성, 순결, 임신과 출산등의 순서로 나타났다. 특히 교회 청소년들의 성교육 내용으로서 피임법을 가르치는 부분에 대해서는 75%가 필요하다고 응답했고, 나머지는 시기상조, 부작용을 들어 반대해 눈길을 끌었다.
이같은 결과는 교회에서 빨리 성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임박감을 증명한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아직까지 청년들에 대한 성교육은 가끔 있어도, 청소년들에 대한 성교육실시를 꺼려하고 있다. 여태껏 한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거부감이 큰 것이다. 또 내부에 성교육을 할 전문가가 없고, 교육후 부작용을 앞서서 걱정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가르쳐야 하는가야에도 기준이 없다. 그냥 일반 공교육기관에 맡겨버리는 것이 속편하다. 그러나 기독교적 입장에서의 성교육은 역시 일반 사회와는 다르다.
시각을 바꿔 청년들의 경우는 어떤가? 아마도 청년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문제가 바로 이성문제이며, 교회 청년부에서의 가장 핫 이슈도 이문제일 것이다. 이성교제를 위해 철새따라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이동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특히 교회안에서 이성교제하다가 헤어져 상처받고, 교회를 안나오는 예도 많다. 해바리기식으로 서로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기, 삼각관계등 형태도 다양하다. 특히 믿는 양가집안이 서로 반대해 파혼하여 같은 교회안에 앙숙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다. 한번 잘못된 이성교제는 곧바로 교회를 떠나거나 불신앙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극한 상황으로까지 치닫는다.
여기에 결혼에 있어 기독교 청년들이 무엇을 배우자의 ‘조건’의 우선순위로 보는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신앙, 성격, 외모, 경제력, 인격등 내세우는 조건은 다양하지만, 문제는 세상사람들의 조건과 별반 다를것이 없다는 점이다. 특히 민감한 성문제에 있어서도 의견차가 다양해 기독교적 입장에서의 정립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에 대해 가장 빠른 속도로 개방적인 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면, 결혼한다면 혼전 성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많은 것은 물론, 잘못된 관계와 성적 불충족등으로 고민하는 계층이 많은 것도 청년층이기 때문이다. 많은 남자청년들이 경건한 삶을 사는데 가장 큰 적으로 육욕을 들고 있는 점은 웃고 넘어갈 부분이 아니다.
성문제나 성욕에 대해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청년부는 별로 없다. 어쩌다 공과시간에 성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기독교적인 원칙만이 일방적으로 선포될 뿐이다. 그러나 이에 공감하지 않는 청년들도 많다.
또한 결혼한 부부의 경우는 원치않는 임신으로 인한 또는 어쩔수 없는 현실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낙태’를 하고, 육체적 후유증과 정신적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다. 중년부부의 경우 혼외정사로 즉 배우자의 외도로 인해 많은 가정불화와 이혼으로까지 치닫고 있지만 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개인문제’ 내지 ‘부부간의 문제’를 이유로 함부로 끼어들기를 주저한다. 부부들도 비록 기독교인이지만 이 문제에 목회자가 깊숙히 개입하거나 자신들의 문제를 다 드러내기 꺼린다.
교회는 성평등하다?
해석을 달리해서 교회안에서 남녀는 평등한가? 여신학자협의회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남성들은 80%가 자신의 성에 만족하고, 여성들은 45.9%만 만족한다고 답했다. 나머지 여성들은 때때로 못마당하거나 다른 성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응답한 것이다. 남녀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기관의 대표가 될 수 있다에는 대다수가 찬성했으며, 교회안에서 평등한가에 대한 의견에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두드러지게 평등하다고 느끼고 있음이 나타났다.
특히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고린도전서 14장 34절에 대해서는 현실에 맞게 해석돼야한다는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고,11.5%만이 교회전통과 성서말씀이므로 따라야 한다고 답했다.
물론 이 설문조사가 한국교회 전체를 대변할수야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개방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평신도들의 의식을 일부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의식수준이 이같이 열려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직까지 여성목사나 여성장로에 대해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못하거나, 아얘 여성안수도 불허하는 교단이 많은 실정이다. 특히 임신한 여성이 강단에서 설교하거나 여성들이 각종 교회 기관과 예배순서에서 리더를 하는 것에는 의식수준만큼 실제적인 부분에서 투표율이 저조하다.
즉 의식은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만, 제도적으로 투표시는 그 의식만큼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한편으로는 교회에 중고등부, 청년부, 여전도회등 전 구역에 여성이 70%이다 보니 교회의 여성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래서 남성을 살리자는 캐치프래이즈하에 남성교인들을 끌어들이는 캠페인을 벌이는 교회들도 많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
성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만큼 감추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꺼내놓고 얘기하고 겅간한 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야 더 경건해지고 거룩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추고 교과서적인 답변만 하는 성교육은 오히려 궁금증과 범죄에 대한 유혹만을 키울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안의 성은 아직까지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쉽지않은 금기의 영역중 하나다. 절제와 금욕만이 믿음생활의 척도인양 되어버려 성문제와 관련 고민이 있어도 누구에게 믿고 털어놓기가 어려운 문제가 되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로인해 성 문제와 관련해 고민이 있는 이들이 그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고 치유하지 못해, 방황하거나 씻을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의미에서 초 등학생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별 성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전문강사진을 통한 명쾌한 성고민이 해결되는 과제는 당면 과제라고 볼 수 있겠다. 단순히 육체적인 성문제뿐만 아니라, 이성교제에 있어서도 세상적인 잣대와 조건에 휘청거리는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사람의 인성과 하나님 중심에 얼마만큼 서있는가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가치기준이 정립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은진기자
=============■ 왜곡된 경건생활 3 (1555호. 2000.3.19)
한국교회에는 다른 나라의 교회와는 다른 전통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교인들에게 술과 담배를 금하는 전통이다. 이 전통은 사실, 한국교회의 오늘날이 있게 한 소중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탄에 빠진 식민지의 민중들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술과 담배에 빠져 가는 것을 상당부분 막아 주는 역할을 했고, 또 그로 인해 기독교가 부녀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전통
하지만 주초금지의 전통이 한국교회에 가져온 가장 큰 공헌은 아마도 이로 인해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위치를 오늘날까지 유지할 수 있게 해 줬다는 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술취해 흥청거리는’ 불건전한 교제를 막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도의 거룩한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독교인이라면 대부분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식할 수 있게 됐고, 질펀하기 그지 없는 우리 나라의 접대문화 속에서도 “나는 기독교인”이라는 말 한마디면 술잔을 거두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전통도 생겼다.
그러나 또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같은 풍토는 이미 10여년 전에 지나갔다고도 할 수 있다. 목회자들은 인정하기 싫어하겠지만, 이미 한국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주초금지가 거의 사문화되다시피 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몇해전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사람중 절반 이상이 ‘주초금지를 폐지해야 한다’는데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결국 술이나 담배가 기독교신앙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교인들이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목회자들은 아직도 강단에서 ‘술취하지 말라’고 호소하지만 일반 교인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운다. 하지만 목사님의 설교 때문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은 찜찜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식’이 생기기도 하고, 아예 ‘예수님도 포도주를 만들어 나눠주셨는데 뭘’이라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교인들 뿐만이 아니다. 목사들이 술을 마시고 주먹다툼을 벌였다는 기사가 교계 신문에 실리는 것은 오히려 보기 드문 일이다. 민중교회운동이나 현장목회가 한창이던 시절,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던 목회자들은 현장 노동자들이나 지역의 주민들과 거리낌 없이 막걸리 잔을 나누곤 했다.
술을 현장의 양떼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김호식목사(예닮교회 담임)는 본지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아예 사모들에게 “하루종일 목회활동에 지친 목회자 남편을 위해 주일 저녁에는 상 위에 포도주를 한병쯤 올려 놓으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목사도 간단하게 포도주를 한 잔 함으로써 심신의 피로를 풀수 있다는 논리다.
여기서 교인들은 혼란에 빠진다. 과연 교회는 술과 담배를 금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깨끗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술이나 담배를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술잔을 입에 대는 목사님들을 깨끗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목회자는 거의 없다.
주초금지 ‘율법화’
이같은 혼란은 주초금지의 규정이 거의 사문화됐지만, 아직까지 그 위력을 갖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율법화됐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현실적인 분위기는 그렇지 않은데, 목회자들의 의식이나 전통상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교인들을 붙들어 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주초문제로 상당한 부담감과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건강을 위해서나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위해서라면 술이나 담배를 끊을 수 있겠지만,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데에는 부담감을 넘어 묘한 거부감까지 생긴다. 이렇게 되면 주초문제는 교인들에게 ‘신앙의 조건’이 아닌 걸림돌이 되고 만다.
또, 교인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목사님과 얘기하다가 우연히 술이나 담배 이야기가 나올 경우, 자신있게 ‘나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운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또다른 죄의식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주초문제에 대해 아직도 엄격함을 유지하는 한국교회의 전통과 사실상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상당수의 교인들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먼저 주초문제와 관련된 교회의 규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주초금지를 교단 헌법에 명시하고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1997년판 교리와 장정은, 제1편 역사와 교리의 제 2장 교리에 들어 있는 사회신경에서 “우리는 올바른 인간교육, 건전한 생활, 절제운동(금주 금연 등)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관의 형성과 도덕성 회복을 위해 앞장선다”고 밝히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총회측의 경우는 헌법 세칙 제 3조 교인의 의무에서 “교회의 직원은 성일(聖日)을 범하거나 미신 행위나 음주 흡연 구타하는 등의 행동이나 고의로 교회의 의무금을 드리지 않는 자의 직임을 면함이 당하고 교인으로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자로 간주한다”고 정해 놓고 있다.
그런데 두 조항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감리교의 사회신경은 주초문제를 ‘신앙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절제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반면, 예장총회측의 헌법세칙은 금주와 금연을 교회 직원의 임면을 좌우하는 조건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감리교는 음주와 흡연을 교회가 앞장서서 몰아내야 할 사회악의 하나로 보고 있는 반면 예장총회측은 교회의 직책을 맡을 수 없는 결격사유로 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다른 교단의 헌법들은 주초문제를 명시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의 경우는, 제2 편 정치의 제 8장 집사, 권사 제 51조 집사의 자격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금주와 금연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전서 3장 8-10절에 해당한자’라고 간접적으로만 언급돼 있다.
디모데전서 3장8절은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술을 마시지 말라기 보다는 술에 탐닉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하기 따라서는 간단한 음주는 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처럼 교단마다 주초문제를 둘러싼 규정에 차이가 있는 것은 선교 초기 주초를 금하게 된 과정이 ‘신앙적’이나 ‘신학적’이기 보다는 ‘사회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초창기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당시 자신들의 눈에 ‘우상숭배’로 여겨졌던 제사문제와 한국인들의 음주 흡연을 몰아내야 할 사회악으로 지목했고, 교인들에게 이를 적극적으로 권면했다. 이에 따라 금주와 금연은 한국교회의 ‘법’이 아닌 ‘전통’으로 자리잡았고, 뒤에 물산장려운동이나 절제운동을 펼치면서 큰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교리보다는 캠페인으로
그러나 이 전통이 율법화되면서 주초문제를 ‘믿음의 척도’로 여기는 풍토가 한국교회에 자리잡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음주나 흡연을 하는 사람은 마치 ‘죄인’인 것처럼 인식되는 풍토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교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서로를 백안시하던 시절에는 주초문제에 비교적 자유로운 태도를 보이던 진보측 목회자들을 ‘술마시고 담배피는 사람들을 어떻게 목사, 장로라고 할 수 있느냐’는 식의 말로 매도하는 일까지 나타났다.
실제로 몇해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가입 문제가 논의될 때, 이 교단의 한 원로는 ‘교회협의 회장이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주장해 부결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문제로 삼았던 교회협 회장 오충일목사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소속으로, 이 교단은 대한성공회와 함께 주초를 문제삼지 않는 교단이어서 그의 음주여부를 타교단 인물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보수권의 일선 목회자들도 주초문제와 관련해서 괴리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보수권 목회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의 음주와 흡연을 금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많은 교인들이 음주와 흡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다면 이제 교회도 신축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더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한발짝 물러섰다. 이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발언이 보도될 경우 ‘주초금지 전통을 부인하는 진보적 인물’로 낙인찍힐 수도 있음을 의식한 것이다.
물론 주초문제가 걸림돌이 된다고 해서 주초금지의 전통을 폐지할 수는 없다. 절제함이 없는 무분별한 음주는 개인의 건강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 심각한 역기능을 초래함으로써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역행하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주초문제는 신앙이나 율법적인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 구성원의 건강한 삶을 위한, 그리고 교인들의 경건하고 절제된 삶을 위한 캠페인의 주제로 전환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할 경우, 교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가식적인 경건’에 대한 죄의식 속에 교회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차원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펼치고 있는 ‘경건 절제 사랑 실천운동’이 온 교회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각 교단이 음주와 흡연을 사회악으로 분명하게 규정하고, 적어도 기독교인 가정에서 만큼은 술취한 모습과 재떨이를 몰아 내자는 운동을 펼쳐 나간다면, 교인들간의 솔직하고 거룩한 교제를 일궈 내는 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밝게 하는 데에도 큰 보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같은 절제운동을 불교나 유교등 다른 종교들과 연대해서 함께 펼쳐 나간다면, 사회에 대한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초문제를 기독교신앙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는 이제 벗어버릴 때가 됐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음주나 흡연을 하는 목회자를 비롯해서 장로나 집사 등은 모조리 교회의 ‘치리대상’이 돼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같은 문제가 두려워 주초를 허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초문제가 신앙의 본질과 직결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사실상 별로 없는 만큼, 교리의 차원이 아닌 절제운동이나 영성운동을 위한 캠페인의 주제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또한, 교인들은 가식적인 경건에 얽매이게 하기 보다는 스스로 판단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성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도 교회가 해야 할 목회적 과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의 입장에서도 청년 교인들과 거리낌 없이 포도주 한두잔을 나누며 삶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 자리는 훨씬 부드러워질 수도 있다. “목사들이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걸핏하면 싸우고 분열된다”는 어느 목회자의 푸념이 순전히 농담만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민성식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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