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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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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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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크리스챤헤럴드
조명환<목사·본지 편집국장>
교회를 죽이는 방법? 어찌 이런 반 기독교적인 말을 함부로 뱉을 수 있단 말인가? 괘씸죄는 고사하고 종교재판 따위를 열어서 출교조치를 하거나 공개처형을 외쳐도 좋을 만큼 그것은 아주 살벌한 죄목이다. 교회성장은 선이요, 축복이요, 하나님편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꼼꼼히 세고 또 세고 뱃속에 있는 아이들 숫자까지 합쳐도 겨우 100여명도 못 채우는 군소교회는 선이라기보다는 악에 가깝고 축복은커녕 하나님께서 모른척 등을 돌린 교회라고 거침없이 신앙적 정죄를 남발해도 일언반구없이 그저 한없이 죄송스러워야 마땅하고, 작은교회는 큰교회로부터 핸디캡 취급을 당하든가 수치를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만연되어 있는 이 시대의 교회성장 지상주의 .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공동체가 안고있는 문제는 교회성장이란 마라톤 코스에서 단거리 선수처럼 헉헉대고 달려드는 뜨겁게 성장하는 교회, 혹은 기형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들에게서 한참이나 왕따를 당하고 있는 작은 교회들이 사실은 절대다수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개신교회가 안고 있는 겸연쩍은 자화상이다.
교회를 성장시키는가 했더니 느닷없이 날라 들어온 청빙제의를 받아들여 훨씬 더 큰 교회의 담임목사로 거침없이 '스카웃'되어 가면서도 "이제는 떠날 때가 됐다"면서 아주 근사하게 자기를 합리화시켜가며 자리바꿈을 계속하는 오늘날의 큰 교회 지향주의. 따라서 성장은 은혜이지만 정체나 후퇴는 늘 저주요 미움이다. 교회를 키우는 목사들은 수퍼스타로 떠오르고 교회윤리고 나발이고 큰 교회가 덩치를 믿고 버티는 졸부근성에 누구 하나 대드는 목소리로 정의와 진실을 외치기는커녕 그냥 덩치 큰 게 언제나 참이요 최선이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아부하는 이 땅의 교회질서 가운데 어디다 대고 무엄하게 교회를 죽이는 방법이라?
딸아이가 한 크리스천 잡지를 읽다가 아버지의 신분을 생각해서 염려라도 된다는 듯이 "How to Kill a Church" 라는 기사를 책에서 오려낸 다음 내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12학년 내 딸의 저의는 교회를 죽이기는커녕 교회를 살려내는 교인들을 잘 양산해 보라는 아빠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은연중에 섞여 있었으리라. 대강 읽어보니 이것은 교회를 죽이는 길이니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이 곧 성장하는 길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는 글이었다.
교회를 죽이는 방법 첫째는 마땅이 해야 할 것을 겨우 해내는 것 외에는 가능하면 교회의 모든 일에 참여하지 말것, 그리고는 "이 교회는 교인들의 목소리가 죽었다" 고 불평을 털어놓으라는 것.
두번 째는 만약 교회에서 무슨 일을 부탁받으면 절대로 하지 말것! 그것은 으례 체면치레로 부탁하는 것이니라. 그런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교회성장을 위해 제의하는 모든 발전적인 아이디어에 대해 무조건 삐딱하게 부정론을 피력하라.
세번 째는 우리교회에 오라고 주변사람들을 권면하지 말라. 그것은 구질구질한 구걸행위요 저속한 장사꾼이나 하는 짓이니라. 그리고는 "왜 우리교회는 성장을 못하고 난쟁이 쳇바퀴만 돌리느냐" 고 거칠게 불평하라.
네번 째는 교회에서 무슨 편지가 오면 읽어보지도 말라.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나중에 교회 가서는 전혀 들은바가 없다고 딱 잡아 떼라.
다섯번 째는 무슨 은사가 있다고 이런저런 자원봉사를 삼가하 라. 그것은 하찮은 자기만족이다. 그리고는 자기는 전혀 제의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 놓으라.
여섯번 째는 그럴경우 교회가 성장할 턱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성장하거든 그런 때는 교회 젊은이들을 붙잡아 놓고 "교회가 이만큼 성장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아마도 그대들은 지난날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능청을 떨라!
교회성장을 막아서는 이같은 보편적인 원리(?)말고도 한인교회가 가지고 누리는 특수한 불리함은 수두룩하다. 예컨대 복음성가를 잘 부르는 눈물 많은 가수들을 따라 철새처럼 옮겨다니는 기러기 교인, 부흥강사로 초빙되었던 목사를 모셔다가 새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 깨뜨리기, 교회를 건축하면서 부동산중개업자가 건축위원장이 되는 교회직책과 세속직업의 뒤범벅. 그러나 사실은 한쪽에선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로되 한쪽에선 성장의 기적으로 환영받고 갈채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이 동전 한닢의 양면성. 똑같은 양의 물이지만 작은 컵에 담으면 충만이요, 넓은 대접에 담으면 결핍이다. 마찬가지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담는 그릇이 아니라 물이 아니겠는가?
충만과 결핍, 성장과 정체는 상대적이지 본질적은 것은 아니다. 큰 교회와 작은교회의 잣대도 마찬가지. 본질에서 이탈되지 않는 한 메이저 리그만이 위대한것은 아니다. 마이너 리그도 아름답다. 교회성장이란 것이 일류 목사가 되기 위한 수단이 되고 그것은 또 큰 교회로 팔려다니기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저속한 상품냄새를 풍기는 것 같아 때로는 교회를 죽이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평범한 이류가 좋다, 아니 삼류 목사라도 좋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본질인 그분으로부터 이탈되지 않는 한 삼류란 낮은 자리는 오히려 그분에게 기쁨의 자리가 될지도 모른다. 교회를 죽이지 않고 살리는 길은 그런 겸손하고 평범한 이류를 지향하고, 마이너 리그를 즐거워 하는 자리라고 믿는 것은 내 딸에겐 당치도 않는 우격다짐일까?
조명환<목사·본지 편집국장>
교회를 죽이는 방법? 어찌 이런 반 기독교적인 말을 함부로 뱉을 수 있단 말인가? 괘씸죄는 고사하고 종교재판 따위를 열어서 출교조치를 하거나 공개처형을 외쳐도 좋을 만큼 그것은 아주 살벌한 죄목이다. 교회성장은 선이요, 축복이요, 하나님편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꼼꼼히 세고 또 세고 뱃속에 있는 아이들 숫자까지 합쳐도 겨우 100여명도 못 채우는 군소교회는 선이라기보다는 악에 가깝고 축복은커녕 하나님께서 모른척 등을 돌린 교회라고 거침없이 신앙적 정죄를 남발해도 일언반구없이 그저 한없이 죄송스러워야 마땅하고, 작은교회는 큰교회로부터 핸디캡 취급을 당하든가 수치를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만연되어 있는 이 시대의 교회성장 지상주의 .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공동체가 안고있는 문제는 교회성장이란 마라톤 코스에서 단거리 선수처럼 헉헉대고 달려드는 뜨겁게 성장하는 교회, 혹은 기형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들에게서 한참이나 왕따를 당하고 있는 작은 교회들이 사실은 절대다수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개신교회가 안고 있는 겸연쩍은 자화상이다.
교회를 성장시키는가 했더니 느닷없이 날라 들어온 청빙제의를 받아들여 훨씬 더 큰 교회의 담임목사로 거침없이 '스카웃'되어 가면서도 "이제는 떠날 때가 됐다"면서 아주 근사하게 자기를 합리화시켜가며 자리바꿈을 계속하는 오늘날의 큰 교회 지향주의. 따라서 성장은 은혜이지만 정체나 후퇴는 늘 저주요 미움이다. 교회를 키우는 목사들은 수퍼스타로 떠오르고 교회윤리고 나발이고 큰 교회가 덩치를 믿고 버티는 졸부근성에 누구 하나 대드는 목소리로 정의와 진실을 외치기는커녕 그냥 덩치 큰 게 언제나 참이요 최선이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아부하는 이 땅의 교회질서 가운데 어디다 대고 무엄하게 교회를 죽이는 방법이라?
딸아이가 한 크리스천 잡지를 읽다가 아버지의 신분을 생각해서 염려라도 된다는 듯이 "How to Kill a Church" 라는 기사를 책에서 오려낸 다음 내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12학년 내 딸의 저의는 교회를 죽이기는커녕 교회를 살려내는 교인들을 잘 양산해 보라는 아빠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은연중에 섞여 있었으리라. 대강 읽어보니 이것은 교회를 죽이는 길이니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이 곧 성장하는 길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는 글이었다.
교회를 죽이는 방법 첫째는 마땅이 해야 할 것을 겨우 해내는 것 외에는 가능하면 교회의 모든 일에 참여하지 말것, 그리고는 "이 교회는 교인들의 목소리가 죽었다" 고 불평을 털어놓으라는 것.
두번 째는 만약 교회에서 무슨 일을 부탁받으면 절대로 하지 말것! 그것은 으례 체면치레로 부탁하는 것이니라. 그런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교회성장을 위해 제의하는 모든 발전적인 아이디어에 대해 무조건 삐딱하게 부정론을 피력하라.
세번 째는 우리교회에 오라고 주변사람들을 권면하지 말라. 그것은 구질구질한 구걸행위요 저속한 장사꾼이나 하는 짓이니라. 그리고는 "왜 우리교회는 성장을 못하고 난쟁이 쳇바퀴만 돌리느냐" 고 거칠게 불평하라.
네번 째는 교회에서 무슨 편지가 오면 읽어보지도 말라.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나중에 교회 가서는 전혀 들은바가 없다고 딱 잡아 떼라.
다섯번 째는 무슨 은사가 있다고 이런저런 자원봉사를 삼가하 라. 그것은 하찮은 자기만족이다. 그리고는 자기는 전혀 제의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 놓으라.
여섯번 째는 그럴경우 교회가 성장할 턱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성장하거든 그런 때는 교회 젊은이들을 붙잡아 놓고 "교회가 이만큼 성장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아마도 그대들은 지난날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능청을 떨라!
교회성장을 막아서는 이같은 보편적인 원리(?)말고도 한인교회가 가지고 누리는 특수한 불리함은 수두룩하다. 예컨대 복음성가를 잘 부르는 눈물 많은 가수들을 따라 철새처럼 옮겨다니는 기러기 교인, 부흥강사로 초빙되었던 목사를 모셔다가 새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 깨뜨리기, 교회를 건축하면서 부동산중개업자가 건축위원장이 되는 교회직책과 세속직업의 뒤범벅. 그러나 사실은 한쪽에선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로되 한쪽에선 성장의 기적으로 환영받고 갈채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이 동전 한닢의 양면성. 똑같은 양의 물이지만 작은 컵에 담으면 충만이요, 넓은 대접에 담으면 결핍이다. 마찬가지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담는 그릇이 아니라 물이 아니겠는가?
충만과 결핍, 성장과 정체는 상대적이지 본질적은 것은 아니다. 큰 교회와 작은교회의 잣대도 마찬가지. 본질에서 이탈되지 않는 한 메이저 리그만이 위대한것은 아니다. 마이너 리그도 아름답다. 교회성장이란 것이 일류 목사가 되기 위한 수단이 되고 그것은 또 큰 교회로 팔려다니기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저속한 상품냄새를 풍기는 것 같아 때로는 교회를 죽이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평범한 이류가 좋다, 아니 삼류 목사라도 좋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본질인 그분으로부터 이탈되지 않는 한 삼류란 낮은 자리는 오히려 그분에게 기쁨의 자리가 될지도 모른다. 교회를 죽이지 않고 살리는 길은 그런 겸손하고 평범한 이류를 지향하고, 마이너 리그를 즐거워 하는 자리라고 믿는 것은 내 딸에겐 당치도 않는 우격다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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