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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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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아름다움, 남녘교회 임의진 목사
국토 남쪽의 ‘퓨전교회’
교회 성당 절집… 우리 시대의 종교적 공간이 그
본래의 의미에서 퇴색했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라면 강진의 남녘교회를 찾을
일이다. 가난한 자와 함께 있지 않고, 당대의 ‘로마’에 저항하지 않는 교회가 불만스럽다면
다시 한번 남녘교회로 가는 행장을 꾸리라고 권하고 싶다.
강진에서 해남 가는 18번 국도에서 다산초당 길로 좌회전하면 곧바로 오른편에 주황색 첨탑과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네온 장치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밤길이라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흰색 벽에 통혁당 사건의 장기수였던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쓴 ‘남녘교회’ 글씨가 가지런하다. 이쁘고 소박한 교회의 겉모습, 그 안쪽은 어떨까.
절집에서나 볼 수 있는 돌탑과 석등이 교회 뒤편 담임 목사의
사택 앞마당에 자리잡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쨍-쨍- 소리를 내며 처마에
걸려있다. 앞은 교회이고 뒤는 절이라는 말인가. 아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사택의
이름은 숫제 ‘선무당’(仙舞堂)이다. 첨탑의 십자가만 뽑아내면 이곳의 종교적 중심이
‘예수’여야 할 이유가 사라지고 만다. 요샛말로 완전히 ‘퓨전’, 말하자면 ‘짬뽕’이다.
그렇다면 남녘교회를 이끌고 있는 목사도 더 이상 목사가 아닐 것이다.
<직녀에게> 부르며 예배
이미 그러고 있다. 남녘교회의 담임목사 임의진(35)씨는 ‘어깨춤’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어깨춤은 “이 겨레강산에서 신명나게 한판 춤추며 살다 가고픈 바람이 담겨 있는
이름”이라고 한다. 어깨춤 임의진은 말한다. “교회는 모여서 이야기하는 공간이고
목사는 사회자일 뿐입니다.”
임씨가 사회를 보고 있는 교회에 주일이 되면 20여명의 신자들이 모여든다. 그이들과 임씨는 입당송으로 ‘직녀에게’를 부른다. 금년 설날 예배에서는 “나의 살던 고향은…”으로 시작하는 ‘고향의 봄’을 불렀다. 필요에 따라 꽹과리를 치기도 하고 피아노를 두드릴 때도 있다. 예배도 ‘퓨전’이다. 교회 정면 벽에 붙은 표어의 한 대목이 상기됐다.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
논과 밭 두어 마지기를 손수 지으며 임씨가 남녘교회에서 ‘퓨전한’ 삶을 꾸리게
된 근원에는 광주에서 보낸 80년대의 고등학교 시절과 20대의 방황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학생 임의진은 자취방 건너편에 살던 대학생 형에게 군사정권의 악행을 낱낱이 보고(?)받았다.
그 형 방에서 불법음반으로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을 듣고는 전율, 또 전율하였다.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평전을 읽은 것도 그때쯤이었다. 고등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시골친구들이 모두 이런 공장에 가 있을 게야 싶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다.
전자상가에서 부품을 배달하고, 식당의 접시를 닦으며 신학교 교정을 오르내렸다.
임씨가 “말짱한 조작”으로 여겼던 신의 존재를 다시 가다듬을 수 있게 된
시기였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신의 또 다른 존재방식으로서 인간”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20대의 여정 끝에
마침내 임씨는 목사 안수를 받고 강진으로 회귀했다.
무보수 목사직 세습
임씨가 남녘교회의 사회자로 자리를 잡은 때는 지난 95년 칠월칠석날이다. 팔순의
목사 아버지가 운영하던 덕남교회의 뒤를 이른 것이다. 이른바 ‘세습’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데 세습의 이유가 다르다. 아버지는 무보수 목사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은 세습이다.
그에게 대형교회의 세습문제에 대해 물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거친 험담을 기대했는데 의외였다. 이어지는 다음 말, “어차피 대형교회는 주식회사인데,
이러쿵저러쿵 신경 쓸 일도 아니지요.”
교회를 맡은 그는 개 한 마리를 대동한 채 느릿느릿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동네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들에게 인사하러 다녔다. 일손이 필요하면 손발 걷어붙이며 달려들었고,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기분이 좋아지면 ‘관광버스춤’을 추었다. 처음에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차츰 신도들이 교회를 찾았다. 대형교회의 휘황찬란한 외양에 짓눌려
교회 문앞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통일교회로 가는 걸음
어깨춤 임의진이 추구하는 지상의 목표는 ‘통일’이다. 그래서
‘직녀에게’가 입당송이 되었고,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월칠석이 남녘교회의 가장
큰 명절이다. 이 때는 ‘민족화해선언문’이 기도가 된다.
통일은 조국에만 한정되는 수사가 아니다. 갈라진 마음, 담을 쌓은 종교, 서로 죽이는
인류 모두에게 통일은 필요한 가치이다. 남녘교회가 비록 기독교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거처일 뿐 어떠한 종교적 도그마도, 장벽도
스스로 두지 않는 이유이다. 임씨는 스님과 수녀, 시인과 예인, 평범한 이웃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그이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남녘교회는
삶과 종교, 예술과 변혁의 정거장인 셈이다.
“남녘교회라는 이름은 통일교회로 가는 중간적인 이름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써준 ‘한겨레교회’라는 현판이 우리 교회에 걸릴 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남녘교회 사회자 임의진의 어깨 뒤로 돌탑과 종루와 선무당이 보인다. 그 사이로
풍경소리가 숨바꼭질 하듯 흘러갔다. 임의진은 달마 같기도 하고 예수 같기도 하고,
낭만파 술주정꾼이거나 오지랖 넓은 한량인 듯도 하다. 그 아름다움이 매우 불온하게
보인다.
이정우 기자 arrti@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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