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
2002.12.30 들소리신문
◎ 홈페이지: http://www.deulsoritimes.co.kr
지금은 단순히 한 세대나 한 세기의 변화를 넘어서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신문명의 대 전환점에 우리는 서 있다. 물론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문명이 오더라도 구원의 진리는 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세상,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문명의 창출을 주도하는 것이 디지털 기기와 디지털 사고이기 때문에 그 어떤 문명의 주체가 새로이 생기기까지는 이 시대를 디지털 시대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디지털 시대의 교회가 어떻게 복음의 진리를 보수하면서 이 디지털 문명을 복음 중제적 문명으로 만들어갈 지를 고민해보고저한다.
먼저 디지털 시대의 특징에 관하여 살펴보자.
첫째, 체험(Experience)의 시대다. 디지털시대의 특징은 감각적이며 감성적이다.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이성이나 원칙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상세대의 특성상 보고 느끼고 즐기는 것만이 존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온라인상의 영상적 지식을 오프라인에서 몸소 체험하고저한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전달로 만족하는 아날로그식 사고가 아닌 오프라인에서 경험을 통해 체험적으로 완성하려고 한다. 그냥 온라인 상의 남녀가 채팅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서로 만나 채팅한 것을 체험하려고 한다. 지난 월드컵때 붉은 악마는 온라인상의 축구관전을 오프라인에서 체험하려고 한 결과다. 그래서 시청 앞에 몇 백만명씩 모인 것은 그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열기를 참여하고 경험하려는 것이다. 예배도 하나님에 관한 설교를 이성적으로 받기보다는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자 한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오순절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이 디지털 세대의 감성적 특성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둘째, 참여(participatory)의 시대다. 디지털 시대는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없다. 더 이상 두목과 졸병은 없다. 완전한 독립적인 개체로서 내가 있고 네가 있을 뿐이다. 방송도 녹화방송보다는 생방송이 인기다. 운동경기도 관람자와 선수가 서로 하나가 되는 참여의 열기를 체험해야 된다. 이번 대통령선거 때의 노사모 운동은 그 자체가 디지털 시대의 참여적 축제다. 대통령 후보나 노사모는 하나인 것이다. 노 대통령 후보의 당선은 바로 노사모 개인개인의 당선인 것이다. 2002년 한국 사회에서 인류사적으로 최초라고 할 수 있는 디지털세대의 문화가 표출된 것이 바로 노사모, 붉은 악마, 여중생사망추모 촛불시위다. 디지털 문명의 참여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들의 참여문화의 특성은 자율적 참여이며 자비량 참여이며 스스로 진행과 결과에 책임지는 참여인 것이다. 먼저 온라인상의 참여가 오프라인 상에서 한데 모여 즐김으로써 축제적인 폭발성 에너지를 창출하고 있다. 교회의 예배도 설교자와 성도의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 다같이 참여하고 즐기는 축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이미지화(Image-Driven)시대다. 열 마디의 사설보다 하나의 이미지가 모든 것을 대표하고 있다. 강렬한 이미지가 정서적 풍요를 자극하고 사람들은 그 정서적 자기 느낌에 반응하고 있다. 붉은 악마의 붉은 티셔츠나 노사모의 노란색 머플러, 여중생 추모시위의 촛불은 그 모임의 성격을 가장 잘 농축축시킨 이미지인 것이다. `전에는 다들 차범근 아들이라고 했잖아요? 지금은 다들 차두리 아빠라고 해요.' 이것은 어떤 국제전화의 광고다. 따뜻한 가족 간의 정다운 대화를 이미지 화한 것이라고 본다. 디지털 시대의 교회의 이미지. 어떻게 만들어가고 각인시킬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교회하면 성결, 교인하면 깨끗한 삶, 그런 이미지는 어떨까?
넷째, 연관(connected)의 시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을 전후해서 그 이전을 냉전의 시대 그 이후를 세계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냉전시대의 상징이 베를린 장벽으로 대표되는 벽(wall)이라면 세계화시대의 상징은 인터넷의 거미줄(web)일 것이다. 아날로그시대의 정보유통이 일방적이라면 디지털 시대의 정보유통은 상호적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바로 이 월과 웹의 충돌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디지털 시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상호 보완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여기에는 대등한 상호 존중과 신뢰라는 디지털 문명의 기본가치가 전제되어야 한다. 온라인상의 붉은 악마나 오프라인상의 붉은 악마는 둘이 아니요 서로가 연계된 하나다. 한국교회의 수직적 조직은 바로 이 수평적 개념의 연대를 무시하기 때문에 디지털 세대가 교회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디지털 세대의 선교를 위해 한국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 다음 몇 회에 걸쳐 주제별로 살펴보고저한다.
디지털 시대의 특징중의 하나가 참여(participatory)다. 평신도의 참여 없이는 교회의 부흥이나 선교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업사회의 대형화되고 표준화된 교회의 수직적 조직을 개편해야 한다. 그때는 설교라는 정보를 교회에 출석해서만이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설교 듣기 위하여 교회에 모이게 되고 이것이 조직화되고 대형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수직적 조직을 필요로 한 것도 사실이나 지금은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의 특성상 교회는 다양화 전문화된 소그룹 교회나 전문화된 소그룹 선교회가 필요한 시대다. 그뿐 아니라 설교를 미디어 매체를 통하여 세계 어디서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교회에 설교 듣기 위하여서만은 출석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물론 교회가 설교의 문제로만 평가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솔직히 체육관 식의 대형교회는 부흥의 원동력이 은혜로운 설교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설교는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있다. 문제는 교회공동체의 예배와 교제와 봉사와 교육이라는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어떻게 성도를 모이게 하느냐이다. 여기에 디지털시대의 특성인 참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모든 성도들을 설교의 청중에서 교회공동체의 참여자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소위 성직자들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운영되어진 교회의 모든 기능을 평신도의 능동적인 참여체제로 바꿈으로서 평신도들의 참여의 즐거움을 갖게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은 비성서적이다.
AD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십자가 표시가 된 기(flag)를 앞세워 적을 정복하라는 꿈을 꾸고 전쟁에서 대승한 후 기독교가 합법화되고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로마제국의 군주제도의 조직이 교회 조직에 유입되면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벽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신약성서의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생명력이 상실되는 출발이 된 것이다. 이런 계급조직은 서로가 머리가 되려는 지배와 피지배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고(막10:35∼45) 급기야는 중세 암흑기 같은 인류사적 범죄를 교회가 저지르게 된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1절의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는 말은 직책(office)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따라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는 기능(function)인 것이다. 성직자든 평신도이든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는 한가지 직책(office)뿐인 것이다. 감독이니, 집사니, 목사나 장로라는 신약교회의 직분은 계급이나 신분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상호 교환적(interchangely)인 역할분담인 것이고 제도화된 것(institutionalized)도 아니었다. 성직자니 평신도니 하는 용어부터가 AD4세기 이후 만들어진 천주교의 비성서적 산물인 것이다.
1517년 마틴루터에 의해 불붙기 시작한 종교개혁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 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란 것도 발견한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들을 대표하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목회자인 것이다. 모든 성도는 제사장으로서의 거룩한 의무가 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이 성직자가 독점하던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되돌려 주는 일에는 성공하였으나 만인제사장의 직분을 돌려주는데는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평신도와 성직자라는 계급의식은 아주 자연스런 교회의 유산으로 오늘에 이르게까지 고착화 되어온 것이다.
1950년경부터 서서히 모든 크리스찬들은 목회자(minister)라는 신학적 재발견이 시도되고 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성령강림과 동시에 모든 벽이 무너진 것이다. 당시 로마시대의 신분의 벽, 인종의 벽, 성별의 벽, 문화의 벽, 정치적 벽이 무너진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이 교회를 혹독하게 핍박한 것도 바로 이 사회적 벽을 허는 교회의 기능을 두려워 한 것이다. 18세기 웨슬리안 경건운동은 평신도들에 의한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며 20세기 초를 전후하여 미국에서 폭발한 성령의 운동이나 1907년 평양의 성령운동도 모두가 평신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신사도적교회(New Apostolic Church)운동은 모두가 평신도 중심 교회개혁운동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유교적 관습과 일본식민통치, 군사독재문화의 잔재가 교회를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계급적 담을 만들고 있다. 이 담을 헐어야 한다. 그리고 전문 평신도의 자유로운 참여에 의한 새로운 교회 기능을 회복하여야 젊은 디지털 세대가 교회로 다시 모일 것이다.
전문직 평신도목회자 시대를…
현재로부터 과거로 움직이는 전통과 유산 지향적(heritage-driven)교회는 정체되고 쇠퇴하지만 미래부터 현재로 움직이는 비전 지향적(Vision-driven)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한다.
디지털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연계성(connected)이다. 인터넷 세계의 온라인 상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이며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국경이나 국적이 무의미한 세계이지만 유일하게 연계성만이 구속력을 가지고 가상(Cyber)사회의 질서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 수평적 연계성은 개인적이고 평등적이며 자율적이며 유동적이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다양성을 사회적 특성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교회의 변신이 요구되는 시급한 시대적 소명이 있는 것이다. 정보화 사회의 교회의 자산은 건물이나 교권적 권위가 아니라 바로 풍부하고 다양한 인적자원이다. 이 인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선교에 사용하기 위하여는 다양한 전문직 평신도목회자가 필요하다고 본다.
평신도목회자란 단순히 제자훈련개념이나 평신도지도자 훈련개념이나 셀 그룹(cell group) 지도자 개념이 아니라 완전한 독립된 목회자를 의미한다. 성직자니 평신도니 하는 계급적이며 이분법적인 교회유산을 과감히 헐고 안수 받은 전임 목회자와 안수 받지 않고 특정분야에서 직장인으로 있으면서 자기 전문분야의 목회자가 되어 소그룹 전문 교회를 섬기는 평신도 목회자간의 팀 목회가 필요하다. 이런 경우 담임 목사의 감독아래서 예배, 교제, 봉사, 교육의 모든 교회 기능을 독립적으로 수행하되 성례전은 담임목사의 집례를 받아야 하고 교육은 담임목사의 체계적 훈련 프로그램을 따라야 교회의 통일성이 유지될 것이다.
어느 시대고 고급종교의 몰락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중의 하나가 외형적 건물이나 상징물의 치장에 과대한 관심을 쏟거나 성직자의 수가 급격히 늘면서 세속화되고 저질화 되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이런 징후가 보이고 있다. 성직자수의 급격한 증가는 평신도목회자의 제도화와 신학작업이 잘 이루어진다면 방지될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은 프로의 시대요 고품질의 시대다. 목회자의 프로화와 고품질화가 필요한 시대라고 본다. 안수 받은 전임목회자와 안수 받지 않은 전문직 평신도목회자의 기능적 차이는 성서적 권위의 차원에서 차별화 되어야 할 것이며 이에 따르는 신학적 교육인 지적 훈련과 영적 훈련이 균형있게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오순절교회중의 하나인 성서하나님의교회에서는 평신도목회자(Lay-Minister)제도가 잘 운영되고 있다. 미국 시민사회의 평등사상에서 출발한 까닭도 있지만 평신도목회자나 안수 받은 전임목회자(ordained minister)간에 조화가 매우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럴 경우 교회는 소그룹 평신도목회자의 연합목회 공동체이며 담임목사는 감독자요 조정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세기 초 미국의 오순절교회가 태동 될 때 평신도목회자들이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성서하나님의 교회의 경우는 오순절교회의 특성상 평신도 목회자의 차출과 훈련에 있어서 영성을 지적 훈련에 우선시한다. 그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보다는 성령의 임재하심이 증거로 보이느냐가 먼저 입증되어야 한다. 평신도목회자 임명 과정을 보면 첫째 성령세례의 은사적 증거가 주관적으로 경험되고 지교회 담임목사와 모든 교우들간에 객관적으로 그 증거가 입증되어야 한다. 둘째 평신도목회자로서 확실한 하나님의 부름(calling)이 있느냐 하는 고백과 입증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이 사람이 그의 지적 수준에 맞는 지적훈련과 목회자로서의 훈련을 받은 후 임명장(License)을 받게 된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서구 선교사들의 아세아 선교가 대부분 실패한 것에 반하여 한국교회가 성공적으로 부흥될 수 있었던 것은 1890년 6월에 중국에서 선교하던 네비어스(J.L.Nevius)선교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그의 선교지론인 자전, 자치, 자립의 삼자 선교 전략을 전수한 것이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영수나 조사라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먼저 교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전도하고 교육하며 스스로 교회를 조직하고 치리하며 스스로 경제적으로 자립하면서 힘이 있을 때 교역자를 청빙하는 평신도 중심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장하는 평신도목회자는 이보다 한 차원 높은 교사나 의사같은 전문직 평신도사역자를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평신도 자원을 활용할 때 정보화사회의 영적 세계뿐 아니라 사회적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홈페이지: http://www.deulsoritimes.co.kr
지금은 단순히 한 세대나 한 세기의 변화를 넘어서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신문명의 대 전환점에 우리는 서 있다. 물론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문명이 오더라도 구원의 진리는 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세상,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문명의 창출을 주도하는 것이 디지털 기기와 디지털 사고이기 때문에 그 어떤 문명의 주체가 새로이 생기기까지는 이 시대를 디지털 시대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디지털 시대의 교회가 어떻게 복음의 진리를 보수하면서 이 디지털 문명을 복음 중제적 문명으로 만들어갈 지를 고민해보고저한다.
먼저 디지털 시대의 특징에 관하여 살펴보자.
첫째, 체험(Experience)의 시대다. 디지털시대의 특징은 감각적이며 감성적이다.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이성이나 원칙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상세대의 특성상 보고 느끼고 즐기는 것만이 존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온라인상의 영상적 지식을 오프라인에서 몸소 체험하고저한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전달로 만족하는 아날로그식 사고가 아닌 오프라인에서 경험을 통해 체험적으로 완성하려고 한다. 그냥 온라인 상의 남녀가 채팅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서로 만나 채팅한 것을 체험하려고 한다. 지난 월드컵때 붉은 악마는 온라인상의 축구관전을 오프라인에서 체험하려고 한 결과다. 그래서 시청 앞에 몇 백만명씩 모인 것은 그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열기를 참여하고 경험하려는 것이다. 예배도 하나님에 관한 설교를 이성적으로 받기보다는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자 한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오순절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이 디지털 세대의 감성적 특성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둘째, 참여(participatory)의 시대다. 디지털 시대는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없다. 더 이상 두목과 졸병은 없다. 완전한 독립적인 개체로서 내가 있고 네가 있을 뿐이다. 방송도 녹화방송보다는 생방송이 인기다. 운동경기도 관람자와 선수가 서로 하나가 되는 참여의 열기를 체험해야 된다. 이번 대통령선거 때의 노사모 운동은 그 자체가 디지털 시대의 참여적 축제다. 대통령 후보나 노사모는 하나인 것이다. 노 대통령 후보의 당선은 바로 노사모 개인개인의 당선인 것이다. 2002년 한국 사회에서 인류사적으로 최초라고 할 수 있는 디지털세대의 문화가 표출된 것이 바로 노사모, 붉은 악마, 여중생사망추모 촛불시위다. 디지털 문명의 참여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들의 참여문화의 특성은 자율적 참여이며 자비량 참여이며 스스로 진행과 결과에 책임지는 참여인 것이다. 먼저 온라인상의 참여가 오프라인 상에서 한데 모여 즐김으로써 축제적인 폭발성 에너지를 창출하고 있다. 교회의 예배도 설교자와 성도의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 다같이 참여하고 즐기는 축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이미지화(Image-Driven)시대다. 열 마디의 사설보다 하나의 이미지가 모든 것을 대표하고 있다. 강렬한 이미지가 정서적 풍요를 자극하고 사람들은 그 정서적 자기 느낌에 반응하고 있다. 붉은 악마의 붉은 티셔츠나 노사모의 노란색 머플러, 여중생 추모시위의 촛불은 그 모임의 성격을 가장 잘 농축축시킨 이미지인 것이다. `전에는 다들 차범근 아들이라고 했잖아요? 지금은 다들 차두리 아빠라고 해요.' 이것은 어떤 국제전화의 광고다. 따뜻한 가족 간의 정다운 대화를 이미지 화한 것이라고 본다. 디지털 시대의 교회의 이미지. 어떻게 만들어가고 각인시킬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교회하면 성결, 교인하면 깨끗한 삶, 그런 이미지는 어떨까?
넷째, 연관(connected)의 시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을 전후해서 그 이전을 냉전의 시대 그 이후를 세계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냉전시대의 상징이 베를린 장벽으로 대표되는 벽(wall)이라면 세계화시대의 상징은 인터넷의 거미줄(web)일 것이다. 아날로그시대의 정보유통이 일방적이라면 디지털 시대의 정보유통은 상호적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바로 이 월과 웹의 충돌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디지털 시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상호 보완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여기에는 대등한 상호 존중과 신뢰라는 디지털 문명의 기본가치가 전제되어야 한다. 온라인상의 붉은 악마나 오프라인상의 붉은 악마는 둘이 아니요 서로가 연계된 하나다. 한국교회의 수직적 조직은 바로 이 수평적 개념의 연대를 무시하기 때문에 디지털 세대가 교회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디지털 세대의 선교를 위해 한국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 다음 몇 회에 걸쳐 주제별로 살펴보고저한다.
디지털 시대의 특징중의 하나가 참여(participatory)다. 평신도의 참여 없이는 교회의 부흥이나 선교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업사회의 대형화되고 표준화된 교회의 수직적 조직을 개편해야 한다. 그때는 설교라는 정보를 교회에 출석해서만이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설교 듣기 위하여 교회에 모이게 되고 이것이 조직화되고 대형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수직적 조직을 필요로 한 것도 사실이나 지금은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의 특성상 교회는 다양화 전문화된 소그룹 교회나 전문화된 소그룹 선교회가 필요한 시대다. 그뿐 아니라 설교를 미디어 매체를 통하여 세계 어디서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교회에 설교 듣기 위하여서만은 출석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물론 교회가 설교의 문제로만 평가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솔직히 체육관 식의 대형교회는 부흥의 원동력이 은혜로운 설교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설교는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있다. 문제는 교회공동체의 예배와 교제와 봉사와 교육이라는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어떻게 성도를 모이게 하느냐이다. 여기에 디지털시대의 특성인 참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모든 성도들을 설교의 청중에서 교회공동체의 참여자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소위 성직자들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운영되어진 교회의 모든 기능을 평신도의 능동적인 참여체제로 바꿈으로서 평신도들의 참여의 즐거움을 갖게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은 비성서적이다.
AD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십자가 표시가 된 기(flag)를 앞세워 적을 정복하라는 꿈을 꾸고 전쟁에서 대승한 후 기독교가 합법화되고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로마제국의 군주제도의 조직이 교회 조직에 유입되면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벽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신약성서의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생명력이 상실되는 출발이 된 것이다. 이런 계급조직은 서로가 머리가 되려는 지배와 피지배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고(막10:35∼45) 급기야는 중세 암흑기 같은 인류사적 범죄를 교회가 저지르게 된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1절의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는 말은 직책(office)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따라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는 기능(function)인 것이다. 성직자든 평신도이든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는 한가지 직책(office)뿐인 것이다. 감독이니, 집사니, 목사나 장로라는 신약교회의 직분은 계급이나 신분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상호 교환적(interchangely)인 역할분담인 것이고 제도화된 것(institutionalized)도 아니었다. 성직자니 평신도니 하는 용어부터가 AD4세기 이후 만들어진 천주교의 비성서적 산물인 것이다.
1517년 마틴루터에 의해 불붙기 시작한 종교개혁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 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란 것도 발견한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들을 대표하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목회자인 것이다. 모든 성도는 제사장으로서의 거룩한 의무가 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이 성직자가 독점하던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되돌려 주는 일에는 성공하였으나 만인제사장의 직분을 돌려주는데는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평신도와 성직자라는 계급의식은 아주 자연스런 교회의 유산으로 오늘에 이르게까지 고착화 되어온 것이다.
1950년경부터 서서히 모든 크리스찬들은 목회자(minister)라는 신학적 재발견이 시도되고 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성령강림과 동시에 모든 벽이 무너진 것이다. 당시 로마시대의 신분의 벽, 인종의 벽, 성별의 벽, 문화의 벽, 정치적 벽이 무너진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이 교회를 혹독하게 핍박한 것도 바로 이 사회적 벽을 허는 교회의 기능을 두려워 한 것이다. 18세기 웨슬리안 경건운동은 평신도들에 의한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며 20세기 초를 전후하여 미국에서 폭발한 성령의 운동이나 1907년 평양의 성령운동도 모두가 평신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신사도적교회(New Apostolic Church)운동은 모두가 평신도 중심 교회개혁운동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유교적 관습과 일본식민통치, 군사독재문화의 잔재가 교회를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계급적 담을 만들고 있다. 이 담을 헐어야 한다. 그리고 전문 평신도의 자유로운 참여에 의한 새로운 교회 기능을 회복하여야 젊은 디지털 세대가 교회로 다시 모일 것이다.
전문직 평신도목회자 시대를…
현재로부터 과거로 움직이는 전통과 유산 지향적(heritage-driven)교회는 정체되고 쇠퇴하지만 미래부터 현재로 움직이는 비전 지향적(Vision-driven)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한다.
디지털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연계성(connected)이다. 인터넷 세계의 온라인 상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이며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국경이나 국적이 무의미한 세계이지만 유일하게 연계성만이 구속력을 가지고 가상(Cyber)사회의 질서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 수평적 연계성은 개인적이고 평등적이며 자율적이며 유동적이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다양성을 사회적 특성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교회의 변신이 요구되는 시급한 시대적 소명이 있는 것이다. 정보화 사회의 교회의 자산은 건물이나 교권적 권위가 아니라 바로 풍부하고 다양한 인적자원이다. 이 인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선교에 사용하기 위하여는 다양한 전문직 평신도목회자가 필요하다고 본다.
평신도목회자란 단순히 제자훈련개념이나 평신도지도자 훈련개념이나 셀 그룹(cell group) 지도자 개념이 아니라 완전한 독립된 목회자를 의미한다. 성직자니 평신도니 하는 계급적이며 이분법적인 교회유산을 과감히 헐고 안수 받은 전임 목회자와 안수 받지 않고 특정분야에서 직장인으로 있으면서 자기 전문분야의 목회자가 되어 소그룹 전문 교회를 섬기는 평신도 목회자간의 팀 목회가 필요하다. 이런 경우 담임 목사의 감독아래서 예배, 교제, 봉사, 교육의 모든 교회 기능을 독립적으로 수행하되 성례전은 담임목사의 집례를 받아야 하고 교육은 담임목사의 체계적 훈련 프로그램을 따라야 교회의 통일성이 유지될 것이다.
어느 시대고 고급종교의 몰락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중의 하나가 외형적 건물이나 상징물의 치장에 과대한 관심을 쏟거나 성직자의 수가 급격히 늘면서 세속화되고 저질화 되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이런 징후가 보이고 있다. 성직자수의 급격한 증가는 평신도목회자의 제도화와 신학작업이 잘 이루어진다면 방지될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은 프로의 시대요 고품질의 시대다. 목회자의 프로화와 고품질화가 필요한 시대라고 본다. 안수 받은 전임목회자와 안수 받지 않은 전문직 평신도목회자의 기능적 차이는 성서적 권위의 차원에서 차별화 되어야 할 것이며 이에 따르는 신학적 교육인 지적 훈련과 영적 훈련이 균형있게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오순절교회중의 하나인 성서하나님의교회에서는 평신도목회자(Lay-Minister)제도가 잘 운영되고 있다. 미국 시민사회의 평등사상에서 출발한 까닭도 있지만 평신도목회자나 안수 받은 전임목회자(ordained minister)간에 조화가 매우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럴 경우 교회는 소그룹 평신도목회자의 연합목회 공동체이며 담임목사는 감독자요 조정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세기 초 미국의 오순절교회가 태동 될 때 평신도목회자들이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성서하나님의 교회의 경우는 오순절교회의 특성상 평신도 목회자의 차출과 훈련에 있어서 영성을 지적 훈련에 우선시한다. 그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보다는 성령의 임재하심이 증거로 보이느냐가 먼저 입증되어야 한다. 평신도목회자 임명 과정을 보면 첫째 성령세례의 은사적 증거가 주관적으로 경험되고 지교회 담임목사와 모든 교우들간에 객관적으로 그 증거가 입증되어야 한다. 둘째 평신도목회자로서 확실한 하나님의 부름(calling)이 있느냐 하는 고백과 입증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이 사람이 그의 지적 수준에 맞는 지적훈련과 목회자로서의 훈련을 받은 후 임명장(License)을 받게 된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서구 선교사들의 아세아 선교가 대부분 실패한 것에 반하여 한국교회가 성공적으로 부흥될 수 있었던 것은 1890년 6월에 중국에서 선교하던 네비어스(J.L.Nevius)선교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그의 선교지론인 자전, 자치, 자립의 삼자 선교 전략을 전수한 것이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영수나 조사라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먼저 교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전도하고 교육하며 스스로 교회를 조직하고 치리하며 스스로 경제적으로 자립하면서 힘이 있을 때 교역자를 청빙하는 평신도 중심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장하는 평신도목회자는 이보다 한 차원 높은 교사나 의사같은 전문직 평신도사역자를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평신도 자원을 활용할 때 정보화사회의 영적 세계뿐 아니라 사회적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