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
[경향신문] 2003년 08월 26일 (화)
서울 어느 대형교회 목사가 구속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보도에 따르면, 한때 손잡고 일했던 이들의 고발로 그리 되었다 한다. 그 정도밖에는 아는 바 없다.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았고, 알아보고 싶지도 않다. 이 아까운 지면에서 그에 관한 무슨 시비를 따질 마음은 조금도 없다. 어차피 법정에 서게 됐으니 법관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말이 나온 김에 종교인이란 어떤 사람인지(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짧은 소견을 적어봄으로써 다른 누구보다도 목사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야 하는 나 자신에게 다짐을 주고자 한다. 종교라는 말은 한문으로 ‘마루 종(宗)’에 ‘가르칠 교(敎)’로 되어 있다. 풀어 쓰면 ‘으뜸 가르침’이 되겠다. ‘종(宗)’에는 마루라는 뜻과 함께 밑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마루 종(宗)’도 되고 ‘밑 종(宗)’도 된다. 가장 높은 마루와 가장 낮은 밑이 한 글자에 담겨 있다. 동양적 시각(視角)을 보여주는 한자의 묘미라 하겠다.
-하늘과 땅을 품은 가르침-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가르침이 있다. 도자기 굽는 방법도 가르치고, 자동차 운전기술도 가르치고, 외국어도 가르치고, 요리법도 가르친다. 이렇게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가르침 가운데 가장 높으면서 가장 낮은 가르침이 바로 종교다. 종교는 그 가르치는 내용이 ‘하늘’에 닿아 있어서 가장 높고, 동시에 ‘땅’에 깔려 있어서 가장 낮다. 가장 높은 하늘과 가장 낮은 땅을 아울러 품은 스승의 가르침이 바로 종교라는 얘기다.
종교인은 비유하자면, 산 꼭대기를 바라고 올라가는 사람과 같다. 바다를 바라고 흘러내려가는 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되겠다. 가르침의 근원인 스승이 가장 높은 산 꼭대기 또는 가장 낮은 바다에 있기 때문이다. 스승은 자기 자리에서 사람들을 불러 “이리로 오라”고 한다. 그 어떤 구애도 장애도 없는 순수 자유의 경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껴안는 순수 사랑의 품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 초대에 응하여 길을 떠난 사람이 바로 종교인이다. 따라서 지금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지 않는 사람, 지금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지 않는 사람은 종교인이 아니다.
예컨대 바다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내려가기를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더 높을 수 없는 자리에 서있는 무상지존(無上至尊) 붓다를 향하여 올라가고 또 올라가는 사람이 불자(佛者)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와 하나로 되고, 불자는 붓다를 만나 붓다로 되는 데서 종교인의 긴 여정을 마감하는 것이다.
산을 오르면 등고선(登高線)이 높아지면서 산의 경계는 좁아진다. 물이 흐르면 수심(水深)이 깊어지면서 물의 폭은 넓어진다. 종교인의 삶도 그렇다. 스승의 가르침을 좇아 살기를 계속하면 깨우침의 차원이 높아지면서 그가 차지하는 경계는 좁아진다. 고승(高僧)일수록 본사(本寺)보다 더 높으면서 더 작은 암자에 기거하는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머리둘 곳조차 없는 분이 예수였다. 산 꼭대기에 오르면 발 딛고 설 자리가 좁아져서 그럴 수밖에 없다.
-재물은 없어도 마음은 넉넉-
스승의 가르침에 오로지 충실했던 많은 성현들이 우리에게 종교인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그들은 명실상부하게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프란체스코가 그랬고, 마하트마 간디가 그랬고, 마더 테레사가 그랬다. 그러나 산 꼭대기에 오른 사람이 전후좌우 사방팔방을 한눈에 내려다 보듯이, 그들의 가슴은 온 세상을 품고도 남을 만큼 넉넉하다. 자기 이름으로 소유한 재물은 없지만 뭇 중생들이 그 품에 안겨 위안을 얻는다. 그들은 종파나 인종이나 종족 따위를 가리지 않는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붓다는 불자(佛者)가 아니다. 그들은 그냥 그대로 ‘사람’이다. 종교인은 앞에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는 그냥 그대로 사람이 되기까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오르고 또 오르기(내리고 또 내리기)를 계속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수십년 종교에 몸담고 있었다는 사람이, 그것도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이 호사스런 별장을 드나들면서 숱한 직함을 훈장처럼 달고 다닌다면 스승의 이름을 팔아 자기 욕망을 채운 자라는 누명을 벗기 어려울 것이다.
〈이현주/목사〉
서울 어느 대형교회 목사가 구속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보도에 따르면, 한때 손잡고 일했던 이들의 고발로 그리 되었다 한다. 그 정도밖에는 아는 바 없다.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았고, 알아보고 싶지도 않다. 이 아까운 지면에서 그에 관한 무슨 시비를 따질 마음은 조금도 없다. 어차피 법정에 서게 됐으니 법관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말이 나온 김에 종교인이란 어떤 사람인지(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짧은 소견을 적어봄으로써 다른 누구보다도 목사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야 하는 나 자신에게 다짐을 주고자 한다. 종교라는 말은 한문으로 ‘마루 종(宗)’에 ‘가르칠 교(敎)’로 되어 있다. 풀어 쓰면 ‘으뜸 가르침’이 되겠다. ‘종(宗)’에는 마루라는 뜻과 함께 밑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마루 종(宗)’도 되고 ‘밑 종(宗)’도 된다. 가장 높은 마루와 가장 낮은 밑이 한 글자에 담겨 있다. 동양적 시각(視角)을 보여주는 한자의 묘미라 하겠다.
-하늘과 땅을 품은 가르침-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가르침이 있다. 도자기 굽는 방법도 가르치고, 자동차 운전기술도 가르치고, 외국어도 가르치고, 요리법도 가르친다. 이렇게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가르침 가운데 가장 높으면서 가장 낮은 가르침이 바로 종교다. 종교는 그 가르치는 내용이 ‘하늘’에 닿아 있어서 가장 높고, 동시에 ‘땅’에 깔려 있어서 가장 낮다. 가장 높은 하늘과 가장 낮은 땅을 아울러 품은 스승의 가르침이 바로 종교라는 얘기다.
종교인은 비유하자면, 산 꼭대기를 바라고 올라가는 사람과 같다. 바다를 바라고 흘러내려가는 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되겠다. 가르침의 근원인 스승이 가장 높은 산 꼭대기 또는 가장 낮은 바다에 있기 때문이다. 스승은 자기 자리에서 사람들을 불러 “이리로 오라”고 한다. 그 어떤 구애도 장애도 없는 순수 자유의 경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껴안는 순수 사랑의 품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 초대에 응하여 길을 떠난 사람이 바로 종교인이다. 따라서 지금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지 않는 사람, 지금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지 않는 사람은 종교인이 아니다.
예컨대 바다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내려가기를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더 높을 수 없는 자리에 서있는 무상지존(無上至尊) 붓다를 향하여 올라가고 또 올라가는 사람이 불자(佛者)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와 하나로 되고, 불자는 붓다를 만나 붓다로 되는 데서 종교인의 긴 여정을 마감하는 것이다.
산을 오르면 등고선(登高線)이 높아지면서 산의 경계는 좁아진다. 물이 흐르면 수심(水深)이 깊어지면서 물의 폭은 넓어진다. 종교인의 삶도 그렇다. 스승의 가르침을 좇아 살기를 계속하면 깨우침의 차원이 높아지면서 그가 차지하는 경계는 좁아진다. 고승(高僧)일수록 본사(本寺)보다 더 높으면서 더 작은 암자에 기거하는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머리둘 곳조차 없는 분이 예수였다. 산 꼭대기에 오르면 발 딛고 설 자리가 좁아져서 그럴 수밖에 없다.
-재물은 없어도 마음은 넉넉-
스승의 가르침에 오로지 충실했던 많은 성현들이 우리에게 종교인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그들은 명실상부하게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프란체스코가 그랬고, 마하트마 간디가 그랬고, 마더 테레사가 그랬다. 그러나 산 꼭대기에 오른 사람이 전후좌우 사방팔방을 한눈에 내려다 보듯이, 그들의 가슴은 온 세상을 품고도 남을 만큼 넉넉하다. 자기 이름으로 소유한 재물은 없지만 뭇 중생들이 그 품에 안겨 위안을 얻는다. 그들은 종파나 인종이나 종족 따위를 가리지 않는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붓다는 불자(佛者)가 아니다. 그들은 그냥 그대로 ‘사람’이다. 종교인은 앞에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는 그냥 그대로 사람이 되기까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오르고 또 오르기(내리고 또 내리기)를 계속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수십년 종교에 몸담고 있었다는 사람이, 그것도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이 호사스런 별장을 드나들면서 숱한 직함을 훈장처럼 달고 다닌다면 스승의 이름을 팔아 자기 욕망을 채운 자라는 누명을 벗기 어려울 것이다.
〈이현주/목사〉
|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