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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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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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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좌 : 새로운 세기ㆍ희망 찾기ㆍ참고 글
없는 것과 있는 것
이현주(목사, 시인)
종교의 스승이란 누구인가? 인간을 착각에서 해방시켜 옹근 진리로 이끌어주는 존재다. 그러나 그는 다만 도울 수 있을 뿐이다. 착각에서 해방되는 것도, 옹근 진리로 나아가는 것도, 당사자의 몫이다. 따라서 그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무력하기 짝 없는 존재가 예수님이요 부처님이요 공자님이다. 문자 그대로 그분들은 당신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반대로, 당신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긴 사람에게는 못할 일이 없다. 순식간에 그를 번뇌에서 열반으로 바꿔 놓을 수 있고 죄수에서 해방자로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착각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일까? 라마나 마하리쉬의 말을 들어보면, 모든 착각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나'라는 물건이 있다는 착각이다. 일인칭이 있으니까 2인칭 3인칭이 있듯이, '나'라는 물건이 있다는 착각 때문에, 신의 마야(幻)일 뿐인 세계를 실재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내가 있는가? 과연 '나'라는 이름으로 부를 만한 것이 있는가? 내가 있으려면 '나' 아닌 것이 있어야 한다. 과연 이 우주에 나 아닌 것이 있는가? 잠깐만 생각해봐도 딱 부러지게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임을 알 수 있다.
경계(境界)란, 인간의 머리 속에나 있는 개념일 뿐 실체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손가락과 손바닥의 경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대강 보면 경계가 뚜렷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디에다 금을 그어야 할는지 알 수 없다. 손바닥과 손가락은 억만분의 일 'mm'도 떨어져 있지 않다. 빈틈없는 '한 몸'이다. 손바닥은 손가락의 연장이요 손가락은 손바닥의 연장이다. 한 나라 영토 안에 어찌 국경(國境)을 그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에는 경계가 없는 것이다.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 뿐만 아니라 내 허파와 대기(大氣) 사이도 그렇고 내 몸과 우주 사이에도 경계는 없다. 그러기에, 인간의 몸은 소우주(小宇宙)가 아니라 그냥 그대로 우주다. 그리고, 우주에는 '바깥'이 없다. 여기까지가 우주요 여기서부터는 우주가 아니라는 그런 말이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바깥이 없으니 속도 없다. 안팎이 없는 물건이 과연 있는 물건인가? 그래서 우주를 마야(幻)라고 부르는 것이다.
내가 있으면 내 것이 있게 마련이다. 반대로 내가 없으면 내 것도 없다. 종교의 스승은 먼저 나와 내것이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내 것이 있으니까 움켜 잡게 되고 내가 있으니까 너와 다투게 된다. 그 모든 집착과 다툼이 결국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한 결과이니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있는' 것일까? 어떤 이는 "오직 신(神)이 있을 뿐이다." 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오직 '나' 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가 말한 '나'는 우리가 쉽게 나니 너니 하고 부를 때 쓰는 '나'가 아니다.) 또 어떤 이는 '순수 의식'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름이야 어찌 부르든, 나뉘지 않고 바뀌지 않고 옮겨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꿈 속에서 존재하는 환영(幻影)이라면, 그렇다면 시방 누군가가 꿈을 꾸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환(幻)이 있으니까 따라서 실체(實體)가 있는 것이다.
나와 내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거기 자유가 있고 춤(舞)이 있다. 내 것을 버리면, 버려지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나의 착각이다.
얼마 전, 이런 일을 겪었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가 접촉 사고를 당했다. 상대편 차(트럭)는 짐끈 고리 끝에 우리 차 페인트가 조금 묻은 것이 전부고 우리 차는 길 가 벼랑을 내리 굴러 시멘트 수로에 앞머리를 박았다. 내 입술이 찢어지고 코피가 터지고 정강이가 까였다. 아내는 안전벨트 덕분에 무사했다.
일단 차에서 내려 정신을 수습하고 트럭 임자를 만나는데, 그의 말인즉 자기는 직진이고 우리가 우회전이니까 자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이 과속을 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는, 우리 차를 보기는 보았는데 당연히 멈추리라 생각하고 그냥 달렸다고 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누가 얼마나 더 잘못을 했는지 그것을 측정하는 일이다. 부근 파출소에서 나온 순경이 "사고 처리를 하겠느냐?"고 묻는다. 사고처리가 뭐냐고 물으니, 사고처리를 하면 경찰서에서 교통사고 전담 경찰이 나와 시비를 가리고 뒷처리를 해준다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데 갑자기 "이게 아니지" 하는 말이 속에서 울렸다. 순경과 트럭 임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깐 사람들을 등졌다.
"어떻게 하지요?"
스승께 여쭈어 보는 것은 제자의 권리이자 의무다. 이 순서를 빼먹고 만사를 제가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더욱 꼬이는 것이다. 질문이 급하면 대답도 급한 법이다.
"너에게 일어난 일이니 네가 수습해라."
"알았습니다. 그러면 비용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누구 주머니에서 나오면 무슨 상관이냐? 결국 내 돈 내가 쓰는 것인데."
순간, 모든 것이 환해졌다. 순경에게 사고처리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트럭 임자를 보냈다. (사실은 내가 가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가버렸다.)
차는 정비공장에 들어갔다가 1주일만에 나왔고 정강이에 붙어 있던 피 딱지는 열흘만에 떨어져 나갔다. 모든 수습이 끝났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각기 소중한 '메시지'를 위로부터 받아 챙겼다.
내가 신(神)을 믿는다는 것은 그에게 나를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다. 내가 볼펜을 그대에게 주면 그 순간부터 나에게는 볼펜이 없다. 없는 것이 정상이다. 주어버린 물건을 어떻게 여전히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나를 신(神)에게 내어 드렸으면 그 순간부터 '나'는 없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나에게 어찌 '내 것'이 있겠는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렇게 쉽사리 입술에 매달고 다니는 게 아니다. 그것도 자유라면 할 말이 없지만, 아무리 심심해도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러면 못 쓴다. 그래서 하느님이 성을 내실리야 없겠지만, 결국 자기를 속이는 버릇만 커질 뿐이니 손해가 막심이다. 자기를 속이는 놈이 남이야 오죽 잘 속이겠는가? 그런데, 세상에는 자기를 속이는 놈을 믿어줄 사람이 없으니, 세상 천지를 외로운 늑대처럼 헤매고 다녀야 할 것이다.
종교는 신앙이요 신앙은 실천이다. 스승의 가르침이 내 삶의 갈피에서 샘처럼 솟아나지 않는다면, 그렇찮아도 많은 쓰레기 더미에 냄새나는 인간 쓰레기 하나 더 올려놓는 것일 뿐이렷다!
(이 글은 남녘교회 임의진 어깨춤 목사님의 도움으로 "참꽃 피는 마을 1999년 가을호"에서 옮겨왔습니다.)
없는 것과 있는 것
이현주(목사, 시인)
종교의 스승이란 누구인가? 인간을 착각에서 해방시켜 옹근 진리로 이끌어주는 존재다. 그러나 그는 다만 도울 수 있을 뿐이다. 착각에서 해방되는 것도, 옹근 진리로 나아가는 것도, 당사자의 몫이다. 따라서 그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무력하기 짝 없는 존재가 예수님이요 부처님이요 공자님이다. 문자 그대로 그분들은 당신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반대로, 당신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긴 사람에게는 못할 일이 없다. 순식간에 그를 번뇌에서 열반으로 바꿔 놓을 수 있고 죄수에서 해방자로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착각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일까? 라마나 마하리쉬의 말을 들어보면, 모든 착각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나'라는 물건이 있다는 착각이다. 일인칭이 있으니까 2인칭 3인칭이 있듯이, '나'라는 물건이 있다는 착각 때문에, 신의 마야(幻)일 뿐인 세계를 실재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내가 있는가? 과연 '나'라는 이름으로 부를 만한 것이 있는가? 내가 있으려면 '나' 아닌 것이 있어야 한다. 과연 이 우주에 나 아닌 것이 있는가? 잠깐만 생각해봐도 딱 부러지게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임을 알 수 있다.
경계(境界)란, 인간의 머리 속에나 있는 개념일 뿐 실체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손가락과 손바닥의 경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대강 보면 경계가 뚜렷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디에다 금을 그어야 할는지 알 수 없다. 손바닥과 손가락은 억만분의 일 'mm'도 떨어져 있지 않다. 빈틈없는 '한 몸'이다. 손바닥은 손가락의 연장이요 손가락은 손바닥의 연장이다. 한 나라 영토 안에 어찌 국경(國境)을 그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에는 경계가 없는 것이다.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 뿐만 아니라 내 허파와 대기(大氣) 사이도 그렇고 내 몸과 우주 사이에도 경계는 없다. 그러기에, 인간의 몸은 소우주(小宇宙)가 아니라 그냥 그대로 우주다. 그리고, 우주에는 '바깥'이 없다. 여기까지가 우주요 여기서부터는 우주가 아니라는 그런 말이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바깥이 없으니 속도 없다. 안팎이 없는 물건이 과연 있는 물건인가? 그래서 우주를 마야(幻)라고 부르는 것이다.
내가 있으면 내 것이 있게 마련이다. 반대로 내가 없으면 내 것도 없다. 종교의 스승은 먼저 나와 내것이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내 것이 있으니까 움켜 잡게 되고 내가 있으니까 너와 다투게 된다. 그 모든 집착과 다툼이 결국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한 결과이니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있는' 것일까? 어떤 이는 "오직 신(神)이 있을 뿐이다." 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오직 '나' 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가 말한 '나'는 우리가 쉽게 나니 너니 하고 부를 때 쓰는 '나'가 아니다.) 또 어떤 이는 '순수 의식'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름이야 어찌 부르든, 나뉘지 않고 바뀌지 않고 옮겨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꿈 속에서 존재하는 환영(幻影)이라면, 그렇다면 시방 누군가가 꿈을 꾸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환(幻)이 있으니까 따라서 실체(實體)가 있는 것이다.
나와 내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거기 자유가 있고 춤(舞)이 있다. 내 것을 버리면, 버려지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나의 착각이다.
얼마 전, 이런 일을 겪었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가 접촉 사고를 당했다. 상대편 차(트럭)는 짐끈 고리 끝에 우리 차 페인트가 조금 묻은 것이 전부고 우리 차는 길 가 벼랑을 내리 굴러 시멘트 수로에 앞머리를 박았다. 내 입술이 찢어지고 코피가 터지고 정강이가 까였다. 아내는 안전벨트 덕분에 무사했다.
일단 차에서 내려 정신을 수습하고 트럭 임자를 만나는데, 그의 말인즉 자기는 직진이고 우리가 우회전이니까 자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이 과속을 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는, 우리 차를 보기는 보았는데 당연히 멈추리라 생각하고 그냥 달렸다고 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누가 얼마나 더 잘못을 했는지 그것을 측정하는 일이다. 부근 파출소에서 나온 순경이 "사고 처리를 하겠느냐?"고 묻는다. 사고처리가 뭐냐고 물으니, 사고처리를 하면 경찰서에서 교통사고 전담 경찰이 나와 시비를 가리고 뒷처리를 해준다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데 갑자기 "이게 아니지" 하는 말이 속에서 울렸다. 순경과 트럭 임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깐 사람들을 등졌다.
"어떻게 하지요?"
스승께 여쭈어 보는 것은 제자의 권리이자 의무다. 이 순서를 빼먹고 만사를 제가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더욱 꼬이는 것이다. 질문이 급하면 대답도 급한 법이다.
"너에게 일어난 일이니 네가 수습해라."
"알았습니다. 그러면 비용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누구 주머니에서 나오면 무슨 상관이냐? 결국 내 돈 내가 쓰는 것인데."
순간, 모든 것이 환해졌다. 순경에게 사고처리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트럭 임자를 보냈다. (사실은 내가 가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가버렸다.)
차는 정비공장에 들어갔다가 1주일만에 나왔고 정강이에 붙어 있던 피 딱지는 열흘만에 떨어져 나갔다. 모든 수습이 끝났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각기 소중한 '메시지'를 위로부터 받아 챙겼다.
내가 신(神)을 믿는다는 것은 그에게 나를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다. 내가 볼펜을 그대에게 주면 그 순간부터 나에게는 볼펜이 없다. 없는 것이 정상이다. 주어버린 물건을 어떻게 여전히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나를 신(神)에게 내어 드렸으면 그 순간부터 '나'는 없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나에게 어찌 '내 것'이 있겠는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렇게 쉽사리 입술에 매달고 다니는 게 아니다. 그것도 자유라면 할 말이 없지만, 아무리 심심해도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러면 못 쓴다. 그래서 하느님이 성을 내실리야 없겠지만, 결국 자기를 속이는 버릇만 커질 뿐이니 손해가 막심이다. 자기를 속이는 놈이 남이야 오죽 잘 속이겠는가? 그런데, 세상에는 자기를 속이는 놈을 믿어줄 사람이 없으니, 세상 천지를 외로운 늑대처럼 헤매고 다녀야 할 것이다.
종교는 신앙이요 신앙은 실천이다. 스승의 가르침이 내 삶의 갈피에서 샘처럼 솟아나지 않는다면, 그렇찮아도 많은 쓰레기 더미에 냄새나는 인간 쓰레기 하나 더 올려놓는 것일 뿐이렷다!
(이 글은 남녘교회 임의진 어깨춤 목사님의 도움으로 "참꽃 피는 마을 1999년 가을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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