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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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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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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영성 세미나
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강당
2004년 6월 25일 오후 1시 강연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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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여기에 사는 즐거움
임의진
발바닥이 따가워도 맨발로 걷고는 한다
우물가에서 한번 씻으면 되는 거니까
왜 맨발로 마당을 싸돌아 다니는 거냐고
멱살을 잡고 고소 고발을 할 사람은 없다
아래마당에서 내가 옷을 다 벗고 돌아댕겨도
도망칠 사람들은 젊은 동네여자나 그렇겠지
딛고 서 있는 이 별이 언제부턴가
스킨쉽을 요구한다
주책없이 더 이상을 요구한다면 나는
코끼리와 개미의 연애가 가당하겠냐고
거절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뭐 이 정도쯤
못해준다면 인정머리 없는 거라서
발바닥으로, 살갗으로 이 별과
나는 적절한 관계다 청춘을 불사르며
별이 사람을 사랑하여 만지고 싶어서
뜨거운 날 용암과 화산과 지진의 원인은
발바닥으로 이 별을 어루만져 주지 않아서다
한동안 이 나라에 유황불이 솟구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전 국민들이여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오늘도 누군가 맨발이다
(맨발의 청춘)
목사 아니랄까봐 처음부터 성경이냐시겠지만,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보면요. 신발을 벗으라고 그러시잖아요. 모세한테 하느님께서요. 너는 말이야 신발을 벗고 나를 만나라구! 대지의 신이 그렇게 속삭이잖아요. 저는 양말을 잘 안 신어요. 교회 설교하러 올라가는데 양말 안 신고 올라가기도 해요. 뭐 우리교회는 맨바닥이고 슬리퍼도 구비되어 있으니까 맨발이 들키지 않아요. 양말이 있어도 빵구난 것이 많고 혼자 지내니까 꼬매기도 성가시고 아예 포기하고 안 신어요. 양말 그거 정말 피곤하잖아요. 신고 벗고 냄새나고... 여름에 샌달 신고 살면 되게 편해요.
맨발로 땅을 걸어보세요. 얼마나 즐거웁고 신난지 몰라요.
그런 홀가분함으로 이 지상을 거닐어야 해요. 보헤미안 집시가 된다면, 국경이 없이 떠돈다면, 소유가 없다면 얼마나 행복해 질까요. 맨발의 청춘들이 많아졌으면 해요.
오늘 저도 맨발로 여러분 곁에 섰어요. 인디언들은요 땅별의 촉감을 느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대요. 저는 산에서 살 듯 들에서 살 듯 강물가에서 거닐 듯 그렇게 편하게 지금 맨발로 서 있어요. 예의도 차리고 범절도 모르는 바 아니나, 이젠 정말 편하고 다정하게 살고 싶어요. 거꾸로 생각해보면 다정하면 편해지잖아요. 싹수머리 없어지기도 하지만, 조금 삐딱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가만있나요. 남 참견하기 얼마나 좋아하고 충고 많이들 하잖아요. 그래도요 적당히 맞춰는 주겠지만, 횡포에는 주눅들지 않을래요. 아랑곳 않고, 이제 좀 편하게 살고 싶어요. 물건 많이 들여서, 기계를 빌려 그렇게 사는 편한 거 말고, 나에게 있었던 원시의 자유로움, 때로는 맨발의 편함, 지구별과의 교감으로 말이예요.
서울을 떠나 시골에, 그것도 전라남도 땅끝 바닷가에 낙향한지가 10년세월이 되었네요. 도시에서 줄곧 학교 댕기고, 몇가지 노동으로 벌어먹고 살고(뭐 돈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도시에 가끔 찾아가 몇푼 안되는 돈을 사장님들께 약탈해 가지만(저는 글도 쓰고 말도 하고 남하는 일도 돕고 그런 일로 먹고 살아요. 교회가 가난해서 돈을 안주시네요^^) 그 이유 말고는 도시가 내 삶의 반경하고는 아주 멀어졌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요, 무조건하고 고향을 떠나잖아요. 난 그게 참 이상하구 궁금해요. 공부하겠단 인간들은 꼭 고향을 떠나요. 많이 배워서 고향에 음덕을 지피고 보은하는 것이 아니라 배반 배신을 돌려주지요^^. 잘 되고 성공하면 현수막도 걸어주고 지역신문에도 나고 박수도 쳐주는데 말이예요. 고시 합격하면 뭐 그러잖아요.
외국 이야기해보면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배우고 고향에서 평생 살다 죽는 사람 많더군요. 우린 무슨 연유로 고향을 떠나는게 잘난 친구들 전형적인 스토리가 되었는지 몰라요. 고향을 떠나 살아가니까 다들 사이코가 되는 거 같아요. 정서적으로 무척 불안한거죠. 어떤 상실감도 있을 거구요. 저는 안 미칠려고(?) 고향으로 돌아가, 지금 고향에서 눌러 살고 있네요. 아마 특별한 경우 없으면 거기서 다른 별로 헤엄쳐갈 예정이예요. 고향에서 푸대접도 많지만, 가끔 나와서 돌아다니면 되고, 사람이 그런 편안한 푸대접도 받아야 마음결이 고와지잖아요.
더구나,시골 동네는 핵발전소만 없다면 어디나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이지요. 몇해전 휘트먼 다리를 지나 필라델피아에 갔었는데, 나무숲 아래 도시가 숨어 있어서 거기 등불을 밝히지 않으면 도시가 있는지도 모르겠더라구요. 그런 나무숲 아래의 도시는 우리나라에 없잖아요. 여긴 시멘트로 이뤄진 나라같아요. 걸리버는 이런 나라에 여행을 오고 싶지 않을거예요. 예수님도 서른살 이전에 암으로 스트레스로 돌아가셨을 거예요.
나무에 대고 오줌을 누고 싶어서라도, 서울에서의 며칠은 참 견디기가 힘들어요. 그래도 친구들이 살고 있으니까 오고 후회하고 또 오고를 반복해요. 나무가 우거지고, 수선화가 만발하고, 여름 깊은 날 쏙독새가 울고 개구리소리에 시끄러워 잠을 설치는 편이 좋아요. 차소리에 경적소리에 술꾼들 싸움소리에 아파트 주차하는 소리... 그런 소리는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감나무를 흔드는 소리랑 견줄수가 없지요.
한번 사는 세상이예요. 부귀영화의 환락도 그때뿐이죠. 웅숭깊은 심성으로 맞이하는 생명, 생명의 하루를 회복해야 해요. 이 공것인 공일의 평화를 누려야 해요. 인생은 여백을 채우는 놀이인데ㅡ이 놀이를 생명과 평화로 물들여야 해요.
도시와 멀리 떨어져, 도시적 라이프스타일을 걷어치우고 사막의 교부님들이나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로빈슨 크루소나 허균의 한정록에 등장하는 은자들처럼, 친자연적으로 살아가지요. 기름보일러가 아닌 장작불 모으고 사는 일은 이제 생활습관이 되어 힘들지가 않아요. 시골에선 가족과 떨어져 혼자살이라서 쓸쓸도 하지만 나름대로 묘한 치기도 생기도 재밌는 살맛도 느껴요. 인류의 스승들은 변방에서, 주변부에서, 지방에서 외로움을 곱씹으며 희망의 들불을 지피셨다지요. 뭐 거기까지는 제 능력밖이고요, 그래도 저도요 변방 살이로 십년을 지내왔어요. 사람이 그립고 사람을 좋아하지만 사람을 떠나 살줄도 알아야 한다고 뇌알이면서... 그리고 조그맣게 밭농사도 일궈보고 잘난체 않고 의식이라는 벽을 치지 않는 순박하고 청초한 시골 동네 사람들이랑 아옹다옹 말따먹기 놀이를 즐기고,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산책도 다니고, 권위적인 목사로 군림하기 보다는 흐리멍텅 목사 친구로 어깨동무하면서, 나누고 아껴주면서... 그렇게 지내고 있지요.
동네 이장님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위대한 농촌 지도자도 내 몫이 아니고, 성공한 농촌 교회는 내가 아는 성공이란 뜻과 그쪽의 성공이란 뜻이 다른 말일테니까 되우 어긋난 소리고요.
시골살이가 어찌 기쁘기만 하겠어요. 이웃 어떤 인간은 시골살이 질렸노라고 못살겠다고 하소연을 뿜어대고, 빚문제로 목숨도 끊고, 돈 때문에 그놈의 돈 때문에 온집구석이 풍비박산이 나고, 도시에 살던 애갱이들을 모두 할매에게 맡기고 연락이 끊어지고, 농약중독에 엄청난 약물중독... 독거자들의 천국, 나의 살던 꽃피는 고향이 아닌 폐가 흉가의 전설의 고향......
그러나 절망보다는요 시골엔 아직 푸근한 할매들 이야기가 있고요, 논밭에 개구리 울어대고, 이웃집 누가 어떻게 살며 어떤 밥 지어 먹고 어떤 거 먹어서 어떤 방귀 뀌는지 죄- 아는 다정함과 오붓함이 있지요.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풋풋한 정분이 남아 있지요. 사람의 정, 사람의 평화, 자연과의 의사소통, 자연과의 평화 그런 것이 아직 있지요. 그래서 그거 하나 있는 것 감격해하며 오늘까지 살고 있네요. 그것마저 없어질까 굴삭기와 맞서기도 하고 여러몸짓으로 무등산을 지키기도 하고...
영성, 영성--- 많이들 노래하지요. 깨달음에 대한 갈망, 학문적 접근, 감성적 수도 정진... 어떤이들의, 겁 없는 용맹정진... 다 좋아요. 다 고마워요. 그런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합류... 또는 합일... 또는 겸양이 아닐까요. 저는 천성이 부족해서 그렇고 머리가 나빠서도 그렇고 그냥 시골구석에 틀어박혀 특출나지 않게 동네의 일원으로 고요히 지내요. 위대한 깨달음을 얻어 영성을 왕창 받아버리고 누리고 얻고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럼 벗들과 멀어질테니까요. 그렇담 시골동네의 미리부터 있어왔던 공동체! 그 공동체에 대한 신뢰는 없어지고 요상망상한, 자기가 지도자가 된 공동체를 꿈꾸겠지요. 그런 자기만의 공화국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늦더라도, 조금 기다리더라도, 하느님께 일을 맡기고 게으른(?) 종은 합일과 합체와 합류의 영성으로 어우러졌어요.
동네 벗들과 위화감 없는 합일을 즐기는 일! 그것으로 벽을 무너뜨리고 종교간의 완강한 담벼락도 문을 하나 틀 수가 있었지요. 저는 무슨 비빌언덕, 무슨 백그라운드 조직도 없고(제가 담임하고 있는 남녘교회는 조직 교회^^이긴 하지만, 할머니들 돌아가시면 교인이 없어서 문 닫아야 해요. 그러니까 지금 상태로는 끝간이 보이는 교회지요) 뭐 기운센 천하장사! 느닷없이 명성을 드날리며 근방을 석권하면서 으뜸으로 꼽히는 자랑거리가 되고 싶지도 않고요. 그저 고요히, 조용히, 하는 일 없이 ,핑핑 놀면서,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오늘에 이르렀으며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요. 이름하여 낮잠의 영성으로요. 난 거북이예요. 내 스피드가 있거든요. 도시의 토끼 스피드는 못따라가겠어요. 여러분도 지치지 않나요? 숨가쁘지 않나요?
고무신 신고 들판을 홰홰 걸어댕기고, 운동화 신고 아주 멀리도 여행을 다니고, 햇볕이 쨍쨍하면 나무그늘에 숨고 비가 우루루 내려싸면 우산에 꼭 숨고. 나에게 어떤 삶이 피어날까 무척 궁금해 하면서 살지요. 그간 하나도 이룬 것이 없으니까 뭔가 이룰 기대에도 젖어 보고요. 그런데 그런 욕심은 금방 인어공주가 물거품으로 날아가듯 사라져 버리는 욕심이예요. 그냥 물 흐르듯 살고 싶거든요. 내놓을 것이 없으니까 내 속에 무엇이 있는지 자주 서랍을 열어봐요. 별 거 없는 놈이라 있는 거를 소중히 알고 살아가자는 다짐이죠.
바다에 가면 갈매기가 살지
산에 가면 뻐꾸기가 울고
당신의 집엔 해당화가 피었더군
우체국에 가면 빨간 우체통이 있고
만두집에 가면 방금 찐 만두가
쩝-쩝- 군침을 돌게 하지
그렇담 난 무엇을 지니고 있나
뒷호주머니에 꿍쳐 놓은 지폐야 뭐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거 말고 나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대체 그것은 무엇일까
(나만이 가지고 있는 그것)
고요히 나에게 자주 물어봐요. 시골에서 살다보니까 나와 무척 친해졌어요. 도시에선 친구들이랑 많이 친해져요. 오늘도 여러분과 친해질 거고, 저랑 친하기 싫은 분 계시면 다음 기회로 미루죠. 여하튼 그런 것이 도시 생리인데, 시골은 자기 자신이랑 많이 대화하게 되요.
시골살이는 명상시간이 많아서 좋아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속엣말을 많이 하게 되요.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다 어디로 가는지 많이 알게 되었어요. 내 속에 있는 많은 것들, 많은 은사들을 끄집어 낼 수 있었고요. 여러분도 아마 그렇게 될 거예요. 말이 다 노래가 되고 삶이 다 기도가 되고 슬픔이 다 회개가 되는...
또, 시골살이는 보다 좋은 먹을거리로 배를 채우게 돼서 좋아요. 생명평화의 음식! 예수님과 갈릴리 제자들이 나눴던 그 탁발의 밥상을 시골서는 받을 수 있어요. 더구나 목사는 성미를 받아 먹잖아요. 정성이 담긴 쌀, 나눔의 쌀, 그런 거로 배를 채우며 사니까 행복해요. 비싼 호텔 음식은 팔자에도 없고, 그래도 반찬 없으면 참기름에 비벼 먹으면서 흡족해 해요.
저는 종말론으로 벌어먹고 사는 부흥사가 아니니까 오해들 마세요. 지금은, 참말 숨도 한번크게 들이키기 무서운 마지막 시대같아요. 이 마지막을 뒤로 미룰 수도 있고, 탄두를 제거 할 수도 있지요. 우리가 해야 해요. 신앙적 열심으로 우리가 해야해요. 이렇게 공기가 망할 공기가 된 일이 있었나요? 이렇게 물이 망할 물이 된 적이 있었나요. 먹을거리가 몽땅으로 오염됐고 "소비자들이 모자란 정부만 믿고 그렇게 모자라게 눈감고 살았으니까 그럴만두 하지" 하는 허무적인 만두이야기, 쓰레기 만두이야기가 나오고요. 먹을거리 잘못 먹으니까 병이 걸리고, 병이 걸리면 불행하고, 내가 안걸려도 이웃이 걸리면 고생은 똑같아요.
생명농업! 이 수고를 통해 나오는 좋은 먹을거리, 농약에 절지 않은 먹을거리를 온누리 겨레에게 안겨주는 일!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가장 필요되는 복음실천이예요. 사랑하는 일, 바로 생명농산물을 안겨주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예요. 거룩한 사랑행! 을 실천하는 농민이 되는 거, 그건 사제의 역할이랑 다를바 없지요. 생명농업을 실천하는 농민들은 성직자고 신자예요. 알프레드 울러가 그랬지요. "땅에 씨앗을 심는 이는 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리고 그들의 손으로, 땅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청을 들어주고 이 모든 것은 이즈르엘의 청을 들어주리라" (호세아 2, 24)
그리고 시골은 규율에 벗어나서 자유로운 춤을 추는 공간이예요. 도시라는 물건이 생긴 뒤로 사람들은 눈치보며 두려워 떨며 항상 감시속에 사는 불안한 삶이 되었지요. 위에서 아랫것들^^을 관리하는 분들은 도시라는 공간이 아주 편리하지요.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누르기가 쉽잖아요. 전기 끊고 수도 끊고 카드 정지해 버리면 그만이지요. 멀리 변방에서 홍길동이나 임꺽정이가 소매를 걷어 부치고 한판 붙자 하면 골치 아프잖아요. 놈들은 전기도 필요없고 수돗물도 필요없고 지하수 퍼서 먹으니까요. 도시는 먼저 권력자들에게 좋은 압제의 장소예요. 여기서 적당히 누리게 해주고, 공원도 만들어서 자연도 느끼게 해주고 그러면 계속 눌러 살고 소비도 열심히 하고 세금도 잘내요. 도시에서 못도망치게 새로운 전자제품, 새로운 통장, 새로운 놀이기구를 끊임없이 만들어주죠. 요즘은 초정밀 카메라와 휴대폰과 개봉영화와 대형 할인마트와 유명학원과 일류대학과 술집과 거기서 거기지만 없으면 못사는 친구들, 징그런 인간관계가 꼬드기지요.
헤어나올 수 없는 시멘트 공간, 소비공간, 다중적 이해관계의 공간에서 전인적인 구원의 춤을 추는 건 불가능해요. 자유의 함성을 지르기에 도시는 메아리도 살지 않아요.
도시를 자연과 가깝게 만들던지 그런 방법이 없지 않지요. 그런데 그게 우리나라에선 쉽지 않아요. 그래서 이름하여 개발도상국이라 하잖아요. 개발이 최우선인데...국시가 반공, 그 다음이 개발이라고 알고 살았는데...
그래서 포기했다는 건 아니고, 어떤 이들은 등을 지고 도실 떠나서, 시골 여기에 사는 즐거움을 노래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고작 노인의 기억에 담긴 것으로 명맥이 끊어진다면, 시골살이 영성은 오늘 이렇게 노래가 되지도 못할 거예요. 머리로 하는 영성, 몸으로 하는 영성의 기교만 전파될 거고, 그건 뿌리가 없는 허깨비춤일 수 있거든요.
도시가, 더구나 도시가 집중된 수도권은 우리 영성을 고갈 시키고 우리 심성을 마구 할퀴고 그래요. 가끔이라도 우리는 도시를 벗어나서 자연과 교감해야 되요. 하다못해 도시에서라도 푸르름을 눈에 담아주어야 해요. 이 별은 한생명체이고, 그 초록빛은 우리의 몸빛이거든요, 초록빛깔 물감에 나를 담그는 것이 예배이고 그것이 수행이예요.
은빛색깔 도회에서 몸을 빼내어 변방의 삶으로, 비껴선 자의 서늘함으로, 자기를 한번 추스리고 깊은 호흡을 하고 하- 하면서 먼산을 보는 일, 반역은 그렇게 준비하는 거예요. 거룩한 반역! 우리는 이 기계문명 전체, 제국의 파쇼적 탐닉에 반역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예수님이 올리브산에 오르시고 게쎄마니 골짜기에서 기도하시던 일을 잊지 못해요. 비껴선 자의 기도! 아 얼마나 통렬했을까. 조금 비껴서서 지금 이 상황을 보아야 되요. 그러면 어떤 해답이 주어질 거예요.
언제부터 가지 않았지 시계는 새벽 두시에
멈췄고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
어떻게 시계가 멈췄는데
내가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장난 시계)
그냥 딱 끊어버려도 되는데, 어리석게도 우린 시계 시침에 쫓기며 살아가지요. 그거 없어도 사는데 말이죠. 애들 먹여 살리고 돈도 많이 필요하죠. 그러나 밥 세끼 먹고 사는 거 마찬가지고, 잘난 애들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애들은 못난 대로 산다! 야야야들아!!! 그렇게 어서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편한 거지요. 슈퍼라지 사이즈, 빅 사이즈, 패스트 푸드... 대형 교회, 부흥 성장, 발전 개발.... 참 다들 좋은 말들인데, 그거 하려면 머리 싸매야 되고 사람들 꼬드겨야 되고 가끔 속이기도 해야 하고 거추장스러워도 질질 끌려다니며 고생 죽어라 하기도 할 거고 여하튼 불편한 마음이 많이 생길 거예요. 손쉽게 얻고 입고 먹는 것은 죄다 나중에 탈이 날 거고요.
시골에 칩거하면, 그런 안거의 정신으로 히피(히프? 세상을 향해 엉덩이를 돌린 사람, 비껴선 사람)가 되면, 변방에서 변죽이나 울리고 살면,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라니까요. 그런 삶도 의미가 충분히 있다는 말씀이예요.
요즘은 인터넷도 연결되어 심심하지도 않고 대통령 선거하는데 시골 촌놈은 하지 말아라 그러지도 안잖아요. 돈벌이 없어도 세끼 밥은 어떻게 먹을 수 있고...
수도원 따로 갈 것 없이, 내가 있는 자리가 수도원 아닐까요. 더구나 자연속에 몸을 들이밀고, 합일하여 자연이 되면 난쟁이붓꽃, 광대나물꽃 피어나는 그 어느 들길에 그대도 저도 피어있을 테지요, 하느님의 아리따운 자녀로... 시골뜨기 촌뜨기 갈릴리 친구로...
인디언 엄마가 아들에게 그랬대요
"얘야! 산을 향해 손가락질 하면 안된다. 산은 아버지다!"
그건 대자연에 대해서 경외를 가르치는 거예요.
우리는 경외를 많이 잃어 버렸어요. 감격, 감탄 그런 거하고 거리가 멀어요. 꽃이 피면 발을 동동구르고 좋아해야 하는데, 무심히 지나치고 말죠. 일에 쫓기니까요.
우리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잃어버렸어요. 시골에 살게 되니 적어도 그런 잘못들은 고쳐지더군요. 시골살이의 큰 유익 중 하나가 내 마음이 감탄사 '!' 느낌표가 되었다는 거예요. 느낌표 책보다 느낌표 마음이 되어야 해요. 그게 더 선약이어야 해요.
어떤 사내가요. 여행을 다녀왔는대요. 집이 떠내려 갔다고 이웃 주민들이 그러는거예요. 사내가 하는 말이 "그럴리가요. 열쇠는 내가 이렇게 가지고 있는댑쇼." 집 열쇠를 짤랑거리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집이 떠내려갔는데 열쇠만 믿고 이러고 사는 거예요. 인류는 자연속의 삶, 시골의 삶, 자발적 가난과 투신의 삶, 겸양과 겸손의 삶, 게으름이나 관대함(게으르면 만사 오케이가 되잖아요)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야 해요. 지금 이런 고속주행은 돌 하나 앞에 떨어져 있으면 뒤집어지는 거 삽시간일 거예요. 경외를 잃고 경시와 파괴와 외면의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거예요. 자멸하러 가는 거예요.
한 스님은 함박눈을 뭉쳐 불상을 만들고 하루 종일 절을 했다고 해요. 눈밭에서요. 이 한시적인 경배의 나날들, 우리 생명의 한 철을 보내기에 자연이라는 장소는, 시골이라는 장소는 참말 고맙고 소중한 장소에요. 김지하 시인의 시구처럼 하늘 아래 예배당, 지붕없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거죠. 그런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우주심을 가두지 말고, 건너편으로 가는 돛배에 마음을 띄워보세요. 그러면 지붕 없는 예배당이 강 건너편에 보일 거예요.
연민의 강산에 우리 살아요. 자주 그 연민의 바람에 몸을 내맡겨야 해요. 지금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고 게쎄마니 동산을 찾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되요. 특별한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과 둘이 산책하는 그 오솔길이 필요한 거예요. 적절한 떠남, 녹색 푸르름의 위안, 신선한 공기, 외로움이나 쓸쓸함, 여행자의 우수... 이런 것들이 필요해요, 이런 것들이 바로 기도이고 은총이고 소통이예요.
다음에는 들판에서, 산비탈에서 꽃피는 강산에서 만나요. 그러면 더 예뻐보일 거예요. 우리 눈이 더 깊어지고, 포도주도 안마셨지만 포도밭에서 신비롭게도 일찍 취하고, 행위가 없이도 기도가 되고 실천이 없이도 궁극의 실천에 이르러 버린, 생명평화운동과 민주 자주 해방 평등 자유 모든 아름다운 말들의 주인공으로 태어나 있을 거예요.
말을 많이 하니까 퓨즈가 타버렸어요. 그러면 이 시멘트나라 전기에너지 동네사람들은 막막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양초가 있답니다.
여기 이렇게 초를 들고 다녀요. 이제 고요히 촛불을 켜고 있을래요. 다음에 인연있으면 앵두꽃이 붉은 시골 어느 골목길에서 반갑게 마주칩시다.
"좁은 문 작은 몸짓으로 가거라. 큰 문 큰 길은 말이다, 사람 죽이는 길이다. " 예수님의 말씀을 되뇌입니다
참, 앞서 노래를 나눠주신 자유혼의 음유시인 김두수 형께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노래에 싱그런 시골 바람이 묻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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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 남녘교회 목사, 시인, 수필가
전남 강진에 살며 [참꽃피는마을], [종소리], [예수동화] 등의
책과 [여행자의 노래], [보헤미안], [산]등의
음반을 냈다. 월간 '기독교 사상' 등에 글을 연재중이고
여러 대학과 종교모임에 강연을 다니고 있다.
홈페이지 www.sunmoodang.com
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강당
2004년 6월 25일 오후 1시 강연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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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여기에 사는 즐거움
임의진
발바닥이 따가워도 맨발로 걷고는 한다
우물가에서 한번 씻으면 되는 거니까
왜 맨발로 마당을 싸돌아 다니는 거냐고
멱살을 잡고 고소 고발을 할 사람은 없다
아래마당에서 내가 옷을 다 벗고 돌아댕겨도
도망칠 사람들은 젊은 동네여자나 그렇겠지
딛고 서 있는 이 별이 언제부턴가
스킨쉽을 요구한다
주책없이 더 이상을 요구한다면 나는
코끼리와 개미의 연애가 가당하겠냐고
거절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뭐 이 정도쯤
못해준다면 인정머리 없는 거라서
발바닥으로, 살갗으로 이 별과
나는 적절한 관계다 청춘을 불사르며
별이 사람을 사랑하여 만지고 싶어서
뜨거운 날 용암과 화산과 지진의 원인은
발바닥으로 이 별을 어루만져 주지 않아서다
한동안 이 나라에 유황불이 솟구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전 국민들이여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오늘도 누군가 맨발이다
(맨발의 청춘)
목사 아니랄까봐 처음부터 성경이냐시겠지만,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보면요. 신발을 벗으라고 그러시잖아요. 모세한테 하느님께서요. 너는 말이야 신발을 벗고 나를 만나라구! 대지의 신이 그렇게 속삭이잖아요. 저는 양말을 잘 안 신어요. 교회 설교하러 올라가는데 양말 안 신고 올라가기도 해요. 뭐 우리교회는 맨바닥이고 슬리퍼도 구비되어 있으니까 맨발이 들키지 않아요. 양말이 있어도 빵구난 것이 많고 혼자 지내니까 꼬매기도 성가시고 아예 포기하고 안 신어요. 양말 그거 정말 피곤하잖아요. 신고 벗고 냄새나고... 여름에 샌달 신고 살면 되게 편해요.
맨발로 땅을 걸어보세요. 얼마나 즐거웁고 신난지 몰라요.
그런 홀가분함으로 이 지상을 거닐어야 해요. 보헤미안 집시가 된다면, 국경이 없이 떠돈다면, 소유가 없다면 얼마나 행복해 질까요. 맨발의 청춘들이 많아졌으면 해요.
오늘 저도 맨발로 여러분 곁에 섰어요. 인디언들은요 땅별의 촉감을 느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대요. 저는 산에서 살 듯 들에서 살 듯 강물가에서 거닐 듯 그렇게 편하게 지금 맨발로 서 있어요. 예의도 차리고 범절도 모르는 바 아니나, 이젠 정말 편하고 다정하게 살고 싶어요. 거꾸로 생각해보면 다정하면 편해지잖아요. 싹수머리 없어지기도 하지만, 조금 삐딱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가만있나요. 남 참견하기 얼마나 좋아하고 충고 많이들 하잖아요. 그래도요 적당히 맞춰는 주겠지만, 횡포에는 주눅들지 않을래요. 아랑곳 않고, 이제 좀 편하게 살고 싶어요. 물건 많이 들여서, 기계를 빌려 그렇게 사는 편한 거 말고, 나에게 있었던 원시의 자유로움, 때로는 맨발의 편함, 지구별과의 교감으로 말이예요.
서울을 떠나 시골에, 그것도 전라남도 땅끝 바닷가에 낙향한지가 10년세월이 되었네요. 도시에서 줄곧 학교 댕기고, 몇가지 노동으로 벌어먹고 살고(뭐 돈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도시에 가끔 찾아가 몇푼 안되는 돈을 사장님들께 약탈해 가지만(저는 글도 쓰고 말도 하고 남하는 일도 돕고 그런 일로 먹고 살아요. 교회가 가난해서 돈을 안주시네요^^) 그 이유 말고는 도시가 내 삶의 반경하고는 아주 멀어졌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요, 무조건하고 고향을 떠나잖아요. 난 그게 참 이상하구 궁금해요. 공부하겠단 인간들은 꼭 고향을 떠나요. 많이 배워서 고향에 음덕을 지피고 보은하는 것이 아니라 배반 배신을 돌려주지요^^. 잘 되고 성공하면 현수막도 걸어주고 지역신문에도 나고 박수도 쳐주는데 말이예요. 고시 합격하면 뭐 그러잖아요.
외국 이야기해보면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배우고 고향에서 평생 살다 죽는 사람 많더군요. 우린 무슨 연유로 고향을 떠나는게 잘난 친구들 전형적인 스토리가 되었는지 몰라요. 고향을 떠나 살아가니까 다들 사이코가 되는 거 같아요. 정서적으로 무척 불안한거죠. 어떤 상실감도 있을 거구요. 저는 안 미칠려고(?) 고향으로 돌아가, 지금 고향에서 눌러 살고 있네요. 아마 특별한 경우 없으면 거기서 다른 별로 헤엄쳐갈 예정이예요. 고향에서 푸대접도 많지만, 가끔 나와서 돌아다니면 되고, 사람이 그런 편안한 푸대접도 받아야 마음결이 고와지잖아요.
더구나,시골 동네는 핵발전소만 없다면 어디나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이지요. 몇해전 휘트먼 다리를 지나 필라델피아에 갔었는데, 나무숲 아래 도시가 숨어 있어서 거기 등불을 밝히지 않으면 도시가 있는지도 모르겠더라구요. 그런 나무숲 아래의 도시는 우리나라에 없잖아요. 여긴 시멘트로 이뤄진 나라같아요. 걸리버는 이런 나라에 여행을 오고 싶지 않을거예요. 예수님도 서른살 이전에 암으로 스트레스로 돌아가셨을 거예요.
나무에 대고 오줌을 누고 싶어서라도, 서울에서의 며칠은 참 견디기가 힘들어요. 그래도 친구들이 살고 있으니까 오고 후회하고 또 오고를 반복해요. 나무가 우거지고, 수선화가 만발하고, 여름 깊은 날 쏙독새가 울고 개구리소리에 시끄러워 잠을 설치는 편이 좋아요. 차소리에 경적소리에 술꾼들 싸움소리에 아파트 주차하는 소리... 그런 소리는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감나무를 흔드는 소리랑 견줄수가 없지요.
한번 사는 세상이예요. 부귀영화의 환락도 그때뿐이죠. 웅숭깊은 심성으로 맞이하는 생명, 생명의 하루를 회복해야 해요. 이 공것인 공일의 평화를 누려야 해요. 인생은 여백을 채우는 놀이인데ㅡ이 놀이를 생명과 평화로 물들여야 해요.
도시와 멀리 떨어져, 도시적 라이프스타일을 걷어치우고 사막의 교부님들이나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로빈슨 크루소나 허균의 한정록에 등장하는 은자들처럼, 친자연적으로 살아가지요. 기름보일러가 아닌 장작불 모으고 사는 일은 이제 생활습관이 되어 힘들지가 않아요. 시골에선 가족과 떨어져 혼자살이라서 쓸쓸도 하지만 나름대로 묘한 치기도 생기도 재밌는 살맛도 느껴요. 인류의 스승들은 변방에서, 주변부에서, 지방에서 외로움을 곱씹으며 희망의 들불을 지피셨다지요. 뭐 거기까지는 제 능력밖이고요, 그래도 저도요 변방 살이로 십년을 지내왔어요. 사람이 그립고 사람을 좋아하지만 사람을 떠나 살줄도 알아야 한다고 뇌알이면서... 그리고 조그맣게 밭농사도 일궈보고 잘난체 않고 의식이라는 벽을 치지 않는 순박하고 청초한 시골 동네 사람들이랑 아옹다옹 말따먹기 놀이를 즐기고,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산책도 다니고, 권위적인 목사로 군림하기 보다는 흐리멍텅 목사 친구로 어깨동무하면서, 나누고 아껴주면서... 그렇게 지내고 있지요.
동네 이장님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위대한 농촌 지도자도 내 몫이 아니고, 성공한 농촌 교회는 내가 아는 성공이란 뜻과 그쪽의 성공이란 뜻이 다른 말일테니까 되우 어긋난 소리고요.
시골살이가 어찌 기쁘기만 하겠어요. 이웃 어떤 인간은 시골살이 질렸노라고 못살겠다고 하소연을 뿜어대고, 빚문제로 목숨도 끊고, 돈 때문에 그놈의 돈 때문에 온집구석이 풍비박산이 나고, 도시에 살던 애갱이들을 모두 할매에게 맡기고 연락이 끊어지고, 농약중독에 엄청난 약물중독... 독거자들의 천국, 나의 살던 꽃피는 고향이 아닌 폐가 흉가의 전설의 고향......
그러나 절망보다는요 시골엔 아직 푸근한 할매들 이야기가 있고요, 논밭에 개구리 울어대고, 이웃집 누가 어떻게 살며 어떤 밥 지어 먹고 어떤 거 먹어서 어떤 방귀 뀌는지 죄- 아는 다정함과 오붓함이 있지요.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풋풋한 정분이 남아 있지요. 사람의 정, 사람의 평화, 자연과의 의사소통, 자연과의 평화 그런 것이 아직 있지요. 그래서 그거 하나 있는 것 감격해하며 오늘까지 살고 있네요. 그것마저 없어질까 굴삭기와 맞서기도 하고 여러몸짓으로 무등산을 지키기도 하고...
영성, 영성--- 많이들 노래하지요. 깨달음에 대한 갈망, 학문적 접근, 감성적 수도 정진... 어떤이들의, 겁 없는 용맹정진... 다 좋아요. 다 고마워요. 그런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합류... 또는 합일... 또는 겸양이 아닐까요. 저는 천성이 부족해서 그렇고 머리가 나빠서도 그렇고 그냥 시골구석에 틀어박혀 특출나지 않게 동네의 일원으로 고요히 지내요. 위대한 깨달음을 얻어 영성을 왕창 받아버리고 누리고 얻고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럼 벗들과 멀어질테니까요. 그렇담 시골동네의 미리부터 있어왔던 공동체! 그 공동체에 대한 신뢰는 없어지고 요상망상한, 자기가 지도자가 된 공동체를 꿈꾸겠지요. 그런 자기만의 공화국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늦더라도, 조금 기다리더라도, 하느님께 일을 맡기고 게으른(?) 종은 합일과 합체와 합류의 영성으로 어우러졌어요.
동네 벗들과 위화감 없는 합일을 즐기는 일! 그것으로 벽을 무너뜨리고 종교간의 완강한 담벼락도 문을 하나 틀 수가 있었지요. 저는 무슨 비빌언덕, 무슨 백그라운드 조직도 없고(제가 담임하고 있는 남녘교회는 조직 교회^^이긴 하지만, 할머니들 돌아가시면 교인이 없어서 문 닫아야 해요. 그러니까 지금 상태로는 끝간이 보이는 교회지요) 뭐 기운센 천하장사! 느닷없이 명성을 드날리며 근방을 석권하면서 으뜸으로 꼽히는 자랑거리가 되고 싶지도 않고요. 그저 고요히, 조용히, 하는 일 없이 ,핑핑 놀면서,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오늘에 이르렀으며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요. 이름하여 낮잠의 영성으로요. 난 거북이예요. 내 스피드가 있거든요. 도시의 토끼 스피드는 못따라가겠어요. 여러분도 지치지 않나요? 숨가쁘지 않나요?
고무신 신고 들판을 홰홰 걸어댕기고, 운동화 신고 아주 멀리도 여행을 다니고, 햇볕이 쨍쨍하면 나무그늘에 숨고 비가 우루루 내려싸면 우산에 꼭 숨고. 나에게 어떤 삶이 피어날까 무척 궁금해 하면서 살지요. 그간 하나도 이룬 것이 없으니까 뭔가 이룰 기대에도 젖어 보고요. 그런데 그런 욕심은 금방 인어공주가 물거품으로 날아가듯 사라져 버리는 욕심이예요. 그냥 물 흐르듯 살고 싶거든요. 내놓을 것이 없으니까 내 속에 무엇이 있는지 자주 서랍을 열어봐요. 별 거 없는 놈이라 있는 거를 소중히 알고 살아가자는 다짐이죠.
바다에 가면 갈매기가 살지
산에 가면 뻐꾸기가 울고
당신의 집엔 해당화가 피었더군
우체국에 가면 빨간 우체통이 있고
만두집에 가면 방금 찐 만두가
쩝-쩝- 군침을 돌게 하지
그렇담 난 무엇을 지니고 있나
뒷호주머니에 꿍쳐 놓은 지폐야 뭐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거 말고 나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대체 그것은 무엇일까
(나만이 가지고 있는 그것)
고요히 나에게 자주 물어봐요. 시골에서 살다보니까 나와 무척 친해졌어요. 도시에선 친구들이랑 많이 친해져요. 오늘도 여러분과 친해질 거고, 저랑 친하기 싫은 분 계시면 다음 기회로 미루죠. 여하튼 그런 것이 도시 생리인데, 시골은 자기 자신이랑 많이 대화하게 되요.
시골살이는 명상시간이 많아서 좋아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속엣말을 많이 하게 되요.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다 어디로 가는지 많이 알게 되었어요. 내 속에 있는 많은 것들, 많은 은사들을 끄집어 낼 수 있었고요. 여러분도 아마 그렇게 될 거예요. 말이 다 노래가 되고 삶이 다 기도가 되고 슬픔이 다 회개가 되는...
또, 시골살이는 보다 좋은 먹을거리로 배를 채우게 돼서 좋아요. 생명평화의 음식! 예수님과 갈릴리 제자들이 나눴던 그 탁발의 밥상을 시골서는 받을 수 있어요. 더구나 목사는 성미를 받아 먹잖아요. 정성이 담긴 쌀, 나눔의 쌀, 그런 거로 배를 채우며 사니까 행복해요. 비싼 호텔 음식은 팔자에도 없고, 그래도 반찬 없으면 참기름에 비벼 먹으면서 흡족해 해요.
저는 종말론으로 벌어먹고 사는 부흥사가 아니니까 오해들 마세요. 지금은, 참말 숨도 한번크게 들이키기 무서운 마지막 시대같아요. 이 마지막을 뒤로 미룰 수도 있고, 탄두를 제거 할 수도 있지요. 우리가 해야 해요. 신앙적 열심으로 우리가 해야해요. 이렇게 공기가 망할 공기가 된 일이 있었나요? 이렇게 물이 망할 물이 된 적이 있었나요. 먹을거리가 몽땅으로 오염됐고 "소비자들이 모자란 정부만 믿고 그렇게 모자라게 눈감고 살았으니까 그럴만두 하지" 하는 허무적인 만두이야기, 쓰레기 만두이야기가 나오고요. 먹을거리 잘못 먹으니까 병이 걸리고, 병이 걸리면 불행하고, 내가 안걸려도 이웃이 걸리면 고생은 똑같아요.
생명농업! 이 수고를 통해 나오는 좋은 먹을거리, 농약에 절지 않은 먹을거리를 온누리 겨레에게 안겨주는 일!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가장 필요되는 복음실천이예요. 사랑하는 일, 바로 생명농산물을 안겨주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예요. 거룩한 사랑행! 을 실천하는 농민이 되는 거, 그건 사제의 역할이랑 다를바 없지요. 생명농업을 실천하는 농민들은 성직자고 신자예요. 알프레드 울러가 그랬지요. "땅에 씨앗을 심는 이는 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리고 그들의 손으로, 땅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청을 들어주고 이 모든 것은 이즈르엘의 청을 들어주리라" (호세아 2, 24)
그리고 시골은 규율에 벗어나서 자유로운 춤을 추는 공간이예요. 도시라는 물건이 생긴 뒤로 사람들은 눈치보며 두려워 떨며 항상 감시속에 사는 불안한 삶이 되었지요. 위에서 아랫것들^^을 관리하는 분들은 도시라는 공간이 아주 편리하지요.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누르기가 쉽잖아요. 전기 끊고 수도 끊고 카드 정지해 버리면 그만이지요. 멀리 변방에서 홍길동이나 임꺽정이가 소매를 걷어 부치고 한판 붙자 하면 골치 아프잖아요. 놈들은 전기도 필요없고 수돗물도 필요없고 지하수 퍼서 먹으니까요. 도시는 먼저 권력자들에게 좋은 압제의 장소예요. 여기서 적당히 누리게 해주고, 공원도 만들어서 자연도 느끼게 해주고 그러면 계속 눌러 살고 소비도 열심히 하고 세금도 잘내요. 도시에서 못도망치게 새로운 전자제품, 새로운 통장, 새로운 놀이기구를 끊임없이 만들어주죠. 요즘은 초정밀 카메라와 휴대폰과 개봉영화와 대형 할인마트와 유명학원과 일류대학과 술집과 거기서 거기지만 없으면 못사는 친구들, 징그런 인간관계가 꼬드기지요.
헤어나올 수 없는 시멘트 공간, 소비공간, 다중적 이해관계의 공간에서 전인적인 구원의 춤을 추는 건 불가능해요. 자유의 함성을 지르기에 도시는 메아리도 살지 않아요.
도시를 자연과 가깝게 만들던지 그런 방법이 없지 않지요. 그런데 그게 우리나라에선 쉽지 않아요. 그래서 이름하여 개발도상국이라 하잖아요. 개발이 최우선인데...국시가 반공, 그 다음이 개발이라고 알고 살았는데...
그래서 포기했다는 건 아니고, 어떤 이들은 등을 지고 도실 떠나서, 시골 여기에 사는 즐거움을 노래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고작 노인의 기억에 담긴 것으로 명맥이 끊어진다면, 시골살이 영성은 오늘 이렇게 노래가 되지도 못할 거예요. 머리로 하는 영성, 몸으로 하는 영성의 기교만 전파될 거고, 그건 뿌리가 없는 허깨비춤일 수 있거든요.
도시가, 더구나 도시가 집중된 수도권은 우리 영성을 고갈 시키고 우리 심성을 마구 할퀴고 그래요. 가끔이라도 우리는 도시를 벗어나서 자연과 교감해야 되요. 하다못해 도시에서라도 푸르름을 눈에 담아주어야 해요. 이 별은 한생명체이고, 그 초록빛은 우리의 몸빛이거든요, 초록빛깔 물감에 나를 담그는 것이 예배이고 그것이 수행이예요.
은빛색깔 도회에서 몸을 빼내어 변방의 삶으로, 비껴선 자의 서늘함으로, 자기를 한번 추스리고 깊은 호흡을 하고 하- 하면서 먼산을 보는 일, 반역은 그렇게 준비하는 거예요. 거룩한 반역! 우리는 이 기계문명 전체, 제국의 파쇼적 탐닉에 반역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예수님이 올리브산에 오르시고 게쎄마니 골짜기에서 기도하시던 일을 잊지 못해요. 비껴선 자의 기도! 아 얼마나 통렬했을까. 조금 비껴서서 지금 이 상황을 보아야 되요. 그러면 어떤 해답이 주어질 거예요.
언제부터 가지 않았지 시계는 새벽 두시에
멈췄고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
어떻게 시계가 멈췄는데
내가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장난 시계)
그냥 딱 끊어버려도 되는데, 어리석게도 우린 시계 시침에 쫓기며 살아가지요. 그거 없어도 사는데 말이죠. 애들 먹여 살리고 돈도 많이 필요하죠. 그러나 밥 세끼 먹고 사는 거 마찬가지고, 잘난 애들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애들은 못난 대로 산다! 야야야들아!!! 그렇게 어서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편한 거지요. 슈퍼라지 사이즈, 빅 사이즈, 패스트 푸드... 대형 교회, 부흥 성장, 발전 개발.... 참 다들 좋은 말들인데, 그거 하려면 머리 싸매야 되고 사람들 꼬드겨야 되고 가끔 속이기도 해야 하고 거추장스러워도 질질 끌려다니며 고생 죽어라 하기도 할 거고 여하튼 불편한 마음이 많이 생길 거예요. 손쉽게 얻고 입고 먹는 것은 죄다 나중에 탈이 날 거고요.
시골에 칩거하면, 그런 안거의 정신으로 히피(히프? 세상을 향해 엉덩이를 돌린 사람, 비껴선 사람)가 되면, 변방에서 변죽이나 울리고 살면,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라니까요. 그런 삶도 의미가 충분히 있다는 말씀이예요.
요즘은 인터넷도 연결되어 심심하지도 않고 대통령 선거하는데 시골 촌놈은 하지 말아라 그러지도 안잖아요. 돈벌이 없어도 세끼 밥은 어떻게 먹을 수 있고...
수도원 따로 갈 것 없이, 내가 있는 자리가 수도원 아닐까요. 더구나 자연속에 몸을 들이밀고, 합일하여 자연이 되면 난쟁이붓꽃, 광대나물꽃 피어나는 그 어느 들길에 그대도 저도 피어있을 테지요, 하느님의 아리따운 자녀로... 시골뜨기 촌뜨기 갈릴리 친구로...
인디언 엄마가 아들에게 그랬대요
"얘야! 산을 향해 손가락질 하면 안된다. 산은 아버지다!"
그건 대자연에 대해서 경외를 가르치는 거예요.
우리는 경외를 많이 잃어 버렸어요. 감격, 감탄 그런 거하고 거리가 멀어요. 꽃이 피면 발을 동동구르고 좋아해야 하는데, 무심히 지나치고 말죠. 일에 쫓기니까요.
우리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잃어버렸어요. 시골에 살게 되니 적어도 그런 잘못들은 고쳐지더군요. 시골살이의 큰 유익 중 하나가 내 마음이 감탄사 '!' 느낌표가 되었다는 거예요. 느낌표 책보다 느낌표 마음이 되어야 해요. 그게 더 선약이어야 해요.
어떤 사내가요. 여행을 다녀왔는대요. 집이 떠내려 갔다고 이웃 주민들이 그러는거예요. 사내가 하는 말이 "그럴리가요. 열쇠는 내가 이렇게 가지고 있는댑쇼." 집 열쇠를 짤랑거리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집이 떠내려갔는데 열쇠만 믿고 이러고 사는 거예요. 인류는 자연속의 삶, 시골의 삶, 자발적 가난과 투신의 삶, 겸양과 겸손의 삶, 게으름이나 관대함(게으르면 만사 오케이가 되잖아요)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야 해요. 지금 이런 고속주행은 돌 하나 앞에 떨어져 있으면 뒤집어지는 거 삽시간일 거예요. 경외를 잃고 경시와 파괴와 외면의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거예요. 자멸하러 가는 거예요.
한 스님은 함박눈을 뭉쳐 불상을 만들고 하루 종일 절을 했다고 해요. 눈밭에서요. 이 한시적인 경배의 나날들, 우리 생명의 한 철을 보내기에 자연이라는 장소는, 시골이라는 장소는 참말 고맙고 소중한 장소에요. 김지하 시인의 시구처럼 하늘 아래 예배당, 지붕없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거죠. 그런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우주심을 가두지 말고, 건너편으로 가는 돛배에 마음을 띄워보세요. 그러면 지붕 없는 예배당이 강 건너편에 보일 거예요.
연민의 강산에 우리 살아요. 자주 그 연민의 바람에 몸을 내맡겨야 해요. 지금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고 게쎄마니 동산을 찾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되요. 특별한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과 둘이 산책하는 그 오솔길이 필요한 거예요. 적절한 떠남, 녹색 푸르름의 위안, 신선한 공기, 외로움이나 쓸쓸함, 여행자의 우수... 이런 것들이 필요해요, 이런 것들이 바로 기도이고 은총이고 소통이예요.
다음에는 들판에서, 산비탈에서 꽃피는 강산에서 만나요. 그러면 더 예뻐보일 거예요. 우리 눈이 더 깊어지고, 포도주도 안마셨지만 포도밭에서 신비롭게도 일찍 취하고, 행위가 없이도 기도가 되고 실천이 없이도 궁극의 실천에 이르러 버린, 생명평화운동과 민주 자주 해방 평등 자유 모든 아름다운 말들의 주인공으로 태어나 있을 거예요.
말을 많이 하니까 퓨즈가 타버렸어요. 그러면 이 시멘트나라 전기에너지 동네사람들은 막막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양초가 있답니다.
여기 이렇게 초를 들고 다녀요. 이제 고요히 촛불을 켜고 있을래요. 다음에 인연있으면 앵두꽃이 붉은 시골 어느 골목길에서 반갑게 마주칩시다.
"좁은 문 작은 몸짓으로 가거라. 큰 문 큰 길은 말이다, 사람 죽이는 길이다. " 예수님의 말씀을 되뇌입니다
참, 앞서 노래를 나눠주신 자유혼의 음유시인 김두수 형께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노래에 싱그런 시골 바람이 묻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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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진/ 남녘교회 목사, 시인, 수필가
전남 강진에 살며 [참꽃피는마을], [종소리], [예수동화] 등의
책과 [여행자의 노래], [보헤미안], [산]등의
음반을 냈다. 월간 '기독교 사상' 등에 글을 연재중이고
여러 대학과 종교모임에 강연을 다니고 있다.
홈페이지 www.sunmood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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