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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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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순례 계간 새길이야기 2003년 여름(9호) 자연 속의 대동세상 - 시골교회 김문음(작가 · 문우넷 대표)
혼탁한 공기와 소음, 거짓이 참 같고 참이 무기력해 보이는 혼돈 속을 살다가, 가끔 뙤약볕 아래의 이상한 정적, 영원과 현재를 잇는 시간 속으로 편입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생의 진실과 직면하는 순간, 우리는 생활의 많은 부분이 군더더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내 말의 많은 부분이 허언(虛言)이요, 식언(食言)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성인(聖人)이나 철인(哲人), 정신이 참으로 건강한 이들은 생의 대부분을 깨어 살겠지만, 유약한 대중과 다중은 자꾸 깜박 깜빡 깨침으로부터 뒷걸음질치며 숨어 살다가, 일주일에 한번쯤이나 교회에 나와 '주여, 주여' 잠꼬대하듯 면죄부를 받고자 하니, 기막힐 일이다.
나는 시골교회의 임락경 목사를 두 번 찾아 갔는데, 두 번 다 구도가 아주 큰 삶의 영상 앞에 조아리는 상태가 되었다.
"목사님, 도대체 말(言)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음, 어느 목사님이 그런 말씀하시데. 은퇴 후에 평생 했던 설교말씀집을 정리하다 보니, 말과 글이라는 게 사람 하나 발목 삔 것 고쳐준 것만도 못하지 않았나 싶더라는 거야."
시골교회로 가는 길
서울에서 경기도 포천, 백운산 계곡을 지나 강원도 화천, 광덕고개를 넘으면 광덕 주유소가 보이고 헌병 검문소가 나온다. 헌병의 수신호를 받아 우회전해서 들어서다 보면 왼쪽으로 논밭과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곧 실개천과 다리가 나오는데, 이 다리 건너편에 보이는 돌집이 '시골교회'다.
시골교회의 주소는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 3리'로 되어 있지만, 어쩌면 '시골교회로 가는 길'은 이렇게 물리적으로만 생각할 일이 아닐는지 모른다.
- 당신은 어깨의 힘을 빼고, 당신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 정직해지겠는가? 습관이 되어버린 당신의 알량한 기준을 내려놓겠는가? - 당신은 당신이 쌓아올린 지식이나, 그밖에 그 동안 유효했던 자기보호 프로그램, 가족의 울타리 등을 잠시 물리겠는가?
최소한 그렇게 들어오시라. 시골교회로 가는 길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임락경 목사
세상에 기댈 곳이 없는 이들, 장애인과 노인 등 30여명이 모여 힘을 합해 살아가는 공동체-시골교회에 가서, 유난히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이를 찾으면, 그가 바로 임락경 목사다. 이면지를 삐뚤빼뚤 오려서 만든 명함에는 '촌놈 임락경'이라고 적혀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생각했지요. 남은 인생을 60년이라 치고, 365를 곱하면, 2만날 남짓인데, 뭘 하고 살 것인가. 그때, 농부가 되기로 했지."
그 후 지금까지, 그는 농부가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임락경 목사의 책,〈돌파리 잔소리〉에 적힌 저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그대로 옮겨본다.
1945년 전북 순창에서 출생해서, 1958년 유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6세에 이현필 선생님 제자가 되고자 무등산의 동광원에 찾아갔다. 동광원에서 최홍종 목사님, 이현필, 오북환, 김준호, 유영모 선생님, 백춘성 장로님의 가르침을 받다가 낙제하여 환속하였다. 하루 두 시간 일하면 혼자는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농민이고, 얽매임이 없는 가족관, 가족 혈연에서 해방된 자유인이며, 면허증 만든 지 하루밖에 안 되는 운전수에게 몸을 맡기고도 잠을 잘 수 있는 태평인이다. 현재 정농회(正農會) 이사, 북한강유기농업운동연합 의장, NGO 녹색연합 발기인 중 한 사람이며, 강원도 화천의 시골교회 목사로 있다.
임락경 목사는 언제나 힘없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었다. 결핵환자가 많았던 60년대에는 무등산에서 결핵환자들을 돌보았고, 산업화가 가속화되던 70년대에는 경기도로 와서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실직자들과 살았다. 그리고 80년대부터는 장애인들과 지낸다. 강원도 화천 사창리에서 마을 목회를 했었는데, 하나 둘 모여 살기 시작한 노인, 장애인들이 늘어가면서 불편한 일들이 생겨났다.
"명절 같은 때 '가족끼리 화목해라, 부모 공경해라' 해야 하는데, 아예 가족이 없거나 버림받은 이들에겐 맞지 않는 얘기거든."
결국 임락경 목사는 마을 목회는 다른 이에게 맡기고, 노인, 장애인 가족들과 함께 산 밑으로 들어와 '시골교회'를 꾸렸다. 마을 사람들과는 그 후로도 돈독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임락경 목사가 20여 년 전부터 특히 신경을 써온 분야는 환경농업. 화천군 사창리는 농가 대부분이 유기 농사를 짓는 환경 우수마을이고, 마을 초등학교의 급식을 유기 농산물로만 공급할 정도로 환경 의식이 높다.
"그거 다 목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일제 시대 땐 독립운동하고, 지금은 환경운동하고..."
임락경 목사는 또한 민간의학의 대가요, 집터, 수맥을 봐주는 전문가로 알만한 사람에겐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전화로 조언을 해 주고, 부르는 곳에 달려가 강의해 주고 하다가 뒤늦게 책도 냈다. 그는 요즘도 수맥을 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길을 나서지만, 온천수는 봐주지 않는다고 한다.
"온천을 봐주면 평화로운 마을이 황폐해지더군요. 주민들은 고향을 잃고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때밀이나 주차 관리인이 되어 살고 있어요. 마을 개울에 물이 마르고... 이제는 마을의 공동 우물을 찾아 주거나 정신병원 같은 곳에서 부탁을 할 때만 일을 하지요."
임 목사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의 말은 끝까지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얘기가 곁길로 계속 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되다가, 그 걱정을 잊을만하면, 처음 질문했던 자리로 정확하게 되돌아온다. 그 또한 어딘가 자연을 닮았다.
외국에 다닌 경험이 있느냐, 감회가 어떻더냐고 물었더니, 역시 우리 풍속은 우리가 지켜야 하겠더라는 것, 그리고 지하수를 찾으러 다녀보니까, 이스라엘이든 미국이든, 물 찾는 이치는 같더라는 말씀이었다.
"중국에 가서는 경극을 봤지. 거기 지팡이가 나오더라고. 버드나무 있지. 젖은 나무는 쉽게 물을 감지하지만, 물 찾는 고수들은 둔한 나무를 써요. 마른 나무는 굵을수록 둔하거든. 바로 '지팡이'야. 옛날부터, 어느 지역이든 종교 지도자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잖아. 그게 걸어 다니기 힘들어서 짚고 다니는 게 아니었거든. 물 찾는 거지. 중국 경극에 지팡이가 나오니까 재미있게 봤지. 지팡이 중에도 봉이 달린 것, 구슬 달린 것, 링이 달린 것들이 나오는데... 왜, 교황도 링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잖아... 하하, 나중엔 세 가지 다 가진 사람이 이기더라구. 같이 갔던 교수들에게 얘기했더니, 목사님은 정말 희한한 것만 보시네요, 하데."
아마 임목사가 평생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한국 사람은 한국 땅에서 나온 음식을 먹고, 한국의 정신과 문화를 바탕으로 종교를 받아들여, 종교의 참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처음 기독교가 들어와 속회, 구역 예배를 할 때에는 호박죽, 식혜, 수정과 그리고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으로 대접을 했다. 그랬었는데 선교사를 통해 교회에 가장 먼저 정착된 커피 따위 가공 식품이 우리의 밥상을 변화시켜 마침내 우리의 심성과 체질을 바꾸어 놓게 되었고, 산업사회 유형의 갖가지 질병을 유발시키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시골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심지어 그 두 가지 일을 위해 산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자식들 큰 학교 보내고, 둘째는 가족들 병원에 가는 일이다. 큰 학교와 병원에 안 가면 소나 논밭을 팔 일이 없다. 아무리 농촌이 살기 힘들다, 못산다고 하나, 학비와 병원비 아니면 부자는 안 되더라도, 사니 못 사니 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다. 또한 오늘날 농촌의 빈곤은 도시 사람들에 비한 상대적 빈곤이지 절대적 빈곤은 아니다. 우리는 정말 이렇게 많은 학교와 병원이 필요한 것인지 의문을 가져봐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학교, 병원만 설립했다 하면 돈을 번다. 병원이 망했다는 이야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이렇게 돈벌었다는 것은 그만큼 돈을 많이 쓰고 망한 사람이 많다는 계산이다. 꼭 의사나 교수는 월급을 많이 받고 편히 살아야 되고, 노동자나 농민은 어렵게 살아야 되는지. 지구상에서 이렇게 학교 많고 병원 많은 나라가 또 있으랴! 예수님이 언제 큰 학교에 다니셨고, 베드로는 또 언제 전문학교라도 다니셨는지! -『돌파리 잔소리』중에서
그러면서 임 목사는 현대사회와 문명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거대한 자멸의 쳇바퀴를 벗어나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삶으로 증거하고 있다.
사전에 보면, '돌팔이'라는 단어는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며 점을 치거나 기술, 또는 물건을 파는 사람'으로 되어 있고, 우리에겐 그 동안 실력 없는 사기꾼쯤으로 알려져 있다. 책제목으로 쓰인 '돌파리(突破理)'에 대한 이현주 목사의 설명을 보면, '진짜 사람 사는 일을 걱정하며 나무 심고 땅 거두고 짐승 돌보는 일에서 우주의 큰 이치를 찾던 선비'라 한다. 누가 우리의 삶을 기만하는 '돌팔이'이고, 누가 진정으로 중생의 삶을 돕는 '돌파리'인가?
시골교회 사람들
생명이 있는 모든 이가 시골교회에 오면 '혈연'을 넘어 가족이 된다. 시골교회에 들어서면, 그 공간에 자연스럽게 숨쉬고 있는 평등과 평화의 기운에 절로 마음이 편안해 진다. 이곳에선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산다. 노인들은 몸의 기력이 없는 대신 시간 맞춰 배설시켜 주어야 하는 이들을 챙기는 등 관리와 지시를 하고, 머리는 부족한데 체력이 좋은 젊은이는 할머니나 지체 장애인이 시키는 대로 노동을 한다. 병원에서 포기했던 이들이 이곳에 와서 건강이 좋아지는 데는 완전 자연식을 하는 것 외에, 자기 나름의 최선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표정이 하나같이 밝고 곱다. 말을 한 마디도 할 수 없지만 눈치는 백단인 김주연(23), 갓난아기 수준의 지능을 가진, 임 목사만 보면 볼을 비비려 덤벼드는 송태은(22), 성격 좋고 노래 잘하는 시골교회의 스타 최봉수 씨(33) 등 30여명이 제 개성대로 산다. 나이도 7살 어린이에서 80대 고령까지 다양하다.
척추를 크게 다친 지 11년. 앉아 있기도 힘들어 욕창이 가장 무섭다는 임수정(31, 가명)씨는 물론 시골교회 공동체의 참모 격이다. 예배 때 설교도 곧잘 하는 그녀는 시골교회에서 생활한지 5년여 만에, 임 목사의 유쾌한 말투까지 닮았다.
"여기 있어보면 재미 있어요. 코미디가 따로 없어요. " "너무 동동하다 보니까 어떨 땐 제가 막 소리 질러요. 씻는 것도 모르는 이들한테. 너나 나나 똑같다, 이거죠. 그리고 밤에 후회해요. 내가 요거 밖에 안 되는구나..." "너무 자꾸 나 고쳐 달라. 나 안 아프게 해 달라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전체를 위해 기도해야지... 하하."
시골교회에서는 잡곡과 배추, 무, 당근, 감자 등 채소와 양념 등을 모두 이곳에서 유기 농사를 지어 조달한다. 5천 평 밭에 43종의 채소를 기르고, 사슴, 돼지, 닭 등도 직접 기른다. 집도 돌과 흙, 나무로 지었다. 중증 장애인이 많지만, 지난해에 병원비로는 회충약 사는 데 7천원을 썼을 뿐이다. 10년 전부터는 유기농 콩을 사용해 전통 방식으로 간장과 된장을 만들어 팔고 있다. 이 된장과 양봉 꿀이 시골교회의 제법 짭짤한 수입원이다. 18년 전에 역시 몸이 아파 들어왔다 눌러 앉게 된 된장공장의 이애리 원장(47)은 시골교회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숨은 일꾼이다.
지난 연말에 시골교회를 잠시 소개했던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시골교회의 풍경을, 국악 캐롤에 맞추어 이렇게 표현했다.
시골교회에서는 누구나 자기 능력만큼 일한다. 정신이 부족한 사람은 몸으로 몸이 부실한 사람은 머리로, 시골교회에서는 서로 사랑한다. 없는 사람은 있는 듯이 있는 사람은 없는 듯이, 높고 낮음의 구별 없이 제 모습대로 산다. 마을에서 산으로 산에서 마을로, 막힘없이 서로 통하는 세상. 기준을 요구하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던 이들에게 시골교회는 하늘나라와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현재, 시골교회에는 건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임 목사가 오래 전부터, 첨탑에 뾰족 지붕이 아닌, 순 우리 식으로 교회당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여러 교회에 조언도 해왔었는데, 이번에 직접 짓게 되었다. 뜻을 같이 하는 도편수들이 강진, 평창 등지에서 달려와 봉사를 하고 있다. 5월의 햇]살 아래, 자기 가진 능력을 다해 땀 흘리며 함께 일하는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골짜기를 평탄케 하고 굽은 길을 곧게 하시는...
어느 시인의 말대로, 나무는 온몸으로 나무이다. 누구나 환영을 하고, 자연과 조화롭게 산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거나 태만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임락경 목사의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려는 노력은 준열하고, 종교의 역할에 대한 비판은 매섭다.
"성철 스님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3선 개헌하지 마라. 한 마디 했어야 했는데 그거 못했거든. 그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만 했지. 그게 아쉬워요. 또 전두환, 노태우씨가 5천억인가 도둑질하는 거, 귀신은 몰라도 귀신 애비는 알거든, 신부는 모른다 해도 추기경은 안단 말이에요. 종교 지도자는 그런 얘길 했어야지요."
임 목사는, 한곳에 안주하지 않았던 '길선비의 정신'을 강조한다. 삼국시대 때, 고려시대 때, 불교가 우리나라를 망쳤는데도 망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주지스님이 아닌 선승 덕분이라는 것이다.
"떠돌이 승려들은 이집 저집 탁발을 구실 삼아 찾아다니며 복 빌어주고 어려운 일 해결해 주고 병 고쳐 주고 집안 운세 점쳐 주고, 동냥 주어도 받지 않고 정중히 합장 배례하지요. 애들이 건드리고 욕하고 도망쳐도 화내시는 스님 못 봤어요. 밤 되면 사랑방 찾아 이곳저곳 이야기 전해 주고 어려운 일 해결해 주고 날 밝으면 전송 없이 떠나는 게 선승이지."
유교 또한 나라를 망쳤지만, 그것은 못된 '양반'들 때문이고, 청렴결백하게 살아온 선비는 민중에게 도움을 주었다. 한편 정착생활 하는 '집선비'는 마을의 대소사는 처리해도 양반의 부조리를 들추어낼 수는 없는데, 지역이나 가정에 얽매어 있지 않은 '길선비'는 할 수 있었다.
"... 이들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이곳저곳 옮겨가면서 단련을 했지요. 산적들과는 달라 길렀던 힘을 정의로운 데 사용했고, 힘이 필요한 곳이면 어느 곳이든 찾아다녔어요. 그러나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려 했고 힘 자랑 하지도 않았지요."
그렇다면, 예수야말로 길선비의 표상이 아니겠는가.
... 우선 목사들이 못된 주지 스님처럼 공양미 삼백 석에 정신 팔지 말고, 선승처럼 살아야 되겠다. 헌금봉투 두터우면 손 높이 올리고 우렁차게 축도해 주고, 헌금 바구니 비어 있으면 힘없이 축도하며 '찌어다' 찾지 말아야겠다. 백팔번뇌, 십팔번뇌 안 찾아도 정직하게 살면 성불할 수 있다. 교회로 교인 끌어들여 교회 크게 짓고, 부목, 전도사 많이 두고 당회 구성해서 목회 성공한 목사님들도 있고, 선승들처럼 찾아다니며 어려운 사람들 상담해 주고 간호해 주고 무식하고 힘없는 노인들 대필해 주고 심부름해 주고 도와가면서 사는 선교사들도 있다. 높고 거룩한 양반 목사들보다 낮고 천한 서민 목사들을 많이 배출한 신학교가 생겨나거나 교육이 바뀌어야 되겠다. 학위 많은 사람들 글을 많이 편집한 잡지사보다는, 좀 무식하고 보잘것없고 목회 잘 못하는 이들이지만 하느님, 자연, 사람이 숨쉬는, 그와 맞는 삶을 사는 이들이 글을 더 써야 되고, 엮어 내는 글일꾼이 더 많아져야 되겠다.
예수는 골짜기를 평탄케 하고 굽은 길을 곧게 하러 오셨다 했다. 무엇이 참인지, 나는 예수를 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 무엇보다, 나는 '다 함께 잘 살기'를 진정 원하는지, 내가 남보다 좀 더 특권을 누리고, '남을 돕는 역할'이나 적당히 하고 싶다는 뿌리 깊은 욕망-'양반 의식'이 또아리를 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지속적으로 성찰해 볼 일이다. - 예수 따르미로서, 나는 내 집에 헐벗은 이를 들여, 더불어 살 의사가 있는지? - 또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살려내는 일에 얼마나 투신하고 있는지?
시골교회는 그렇게, 가깝고도 멀다.
시골교회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3리 ☎ 033) 441-4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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