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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를 찍지 마십시오

레위기 이한규 목사............... 조회 수 743 추천 수 0 2014.12.22 02: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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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레23:33-44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실 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448) 2014.9.10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십시오 (레23:33-44)

 

< 마침표를 찍지 마십시오 >

 최근 각 국가의 행복도 조사를 보면 한국은 주요국가 중에서 꼴찌였고 국민소득이 한참 낮은 인도나 필리핀보다도 더 행복도가 낮았습니다. 일전에 한 기관에서 부자와 박사에 대해 “행복하십니까?”란 설문조사를 했는데 응답자 중 87%가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행복은 경제력이나 학력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1960년대에는 어느 집에 흑백 TV가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구경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컬러 TV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컬러 TV들은 줘도 안 받습니다. 작은 행복의 조건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삶이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이나 문명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행복은 겸손하면서도 마음이 부자인 사람의 것이고 작은 은혜의 조건과 문제 속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기도소리가 없는 궁궐보다 기도소리가 넘치는 초막이 낫습니다. 진주는 아픔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문제와 고통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기도와 행복의 문이 열릴 때가 많습니다. 믿음 안에서 문제는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믿음과 감사를 잃지 않으면 인맥이 끊어질 때 신맥이 생기고 세상줄이 끊어질 때 하늘의 굵은 동아줄이 내려옵니다.

 살면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 대해 마침표를 찍지 마십시오. “이제 나는 끝났어! 기도해도 소용없어!” 남에 대해서도 쉽게 마침표를 찍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틀렸어! 이제 기대를 접었어!”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은 물론 누군가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말고 어떤 문제를 만나도 부정적인 마침표를 찍지 마십시오. 성도에게 문제는 끝난 표식이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표식입니다.

 인생에서 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얇은 대나무가 왜 그렇게 높이 자라면서도 휘어지지 않습니까? 중간에 있는 마디들 때문입니다. 큰 인물이 되려면 마디들이 필요합니다. 문제와 상처는 인생의 쉼표이자 마디입니다. 그것 때문에 기도와 기다림을 배우고 쉼의 기회를 얻고 쉼 속에서 창조적인 지혜를 얻어서 큰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처럼 인생도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끝장난 성도는 한 명도 없습니다. 사탄이 마침표를 찍으려고 해도 성도는 늘 마침표를 쉼표로 변환시켜야 합니다. 가진 것이 적다고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제일 큰 자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끝난 삶도 없고 늦은 삶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 대해 넘치는 기대를 하고 계십니다. 성도에게 문제는 휴식 싸인이고 안식 수단입니다. 왜 하나님이 일 년에 몇 번의 절기를 제정해 지키게 하셨습니까? 그때 하나님 안에서 잘 쉬고 새롭게 출발하라는 뜻입니다. 쉼의 의미를 잘 깨닫고 활용하면 인생여정을 인생역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절기는 단순히 몸이 쉬는 날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 쉬고 새롭게 시작하는 재창조의 날입니다. 명절도 그런 날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 초막절은 어떤 날입니까? >

 본문에는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에 관한 규례가 나옵니다. 초막절은 유월절(무교절), 오순절(칠칠절) 등과 함께 이스라엘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초막절은 어떤 날입니까?

1. 감사하는 날

 초막절은 일곱째 달 열 닷샛날부터 7일 동안 지켰습니다(34절). 초막절은 수확물을 창고에 저장한 후 지켰기에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때 한해의 수확물을 저장한 후 힘들게 살았던 광야생활을 기억함과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렸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절기는 이제까지의 삶을 감사하고 앞으로도 감사하며 살겠다고 새롭게 다짐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초막절 첫째 날과 마지막 여덟째 날은 안식일로 지키면서 모든 노동을 금지했고 큰 성회로 모여 화제를 드렸습니다(36절). 그때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특별 성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7일 동안 초막절을 지킨 후 8일째 날에 다시 성회를 연 것은 초막절 행사를 끝으로 일 년 동안의 모든 절기를 마무리하면서 새롭게 감사를 다짐하고 새 출발하는 날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 성회가 끝나면 초막을 거두고 각자의 집과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초막절 때 경제활동은 금지했지만 일을 완전히 금지한 안식일이나 대속죄일 때와는 달리 사소한 잡무들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7일 동안 매일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드렸는데 그때는 안식일 제물이나 헌물이나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 외에 추가로 감사 제물을 드렸습니다(37-38절). 그처럼 초막절은 백성들의 감사하는 마음을 일깨우며 하나님께 감사예배와 감사제물을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2. 축제하는 날

 당시 초막절 첫 날인 7월 15일에는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해 초막을 만들었습니다. 그 초막에서 7일 간 지내며 광야 생활 중에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올리브와 포도 등을 수확하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 축제를 벌이고 즐거워했습니다(40절).

 그때 팔레스타인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감사 헌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길거리나 성전 마당이나 지붕 위에 초막을 짓고 거기서 지내며 7일 동안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때 성전 주변은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졌고 성가대의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호산나 외침소리도 수시로 들려왔습니다.

 축제 첫날 동트기 전에 제사장들이 은 나팔을 길게 불면 화답하는 나팔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고 사람들은 즐겁게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때부터 감사 제사와 성전 의식을 통해 7일 동안 수시로 할렐루야 찬성을 부르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렇게 7일 동안 같이 즐기다보면 우울했던 사람도 같이 즐거워졌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고독감과 소외감과 슬픔과 서러움을 다 날려 보냈습니다. 그처럼 초막절은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왜 성경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명령문이 많습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의무라는 뜻입니다. 살다 보면 즐겁지 않은 때도 많습니다. 살기도 힘들고 사람이 실망시키고 환경과 상황은 별로 나아질 조심이 없는데 어떻게 즐거워합니까? 그때 의지적인 믿음을 가지고 내일의 소망을 가지면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울한 감정을 압도하는 감정적인 믿음도 필요한데 초막절 축제는 그런 감정적인 믿음을 불러 일으켰고 그 감정적인 믿음이 의지적인 믿음으로 승화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감정적인 믿음이 의지적인 믿음으로 승화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무엇보다 말씀이 필요합니다. 축제는 술 마시고 화기애애하게 가족끼리 고스톱을 치는 날이 아닙니다. 축제가 진짜 축제가 되려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회당에 가서 모세오경이 적힌 두루마리를 궤에서 꺼내 들고 회당 주변을 돌며 춤추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런 축제를 통해 말씀을 높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무언으로 익히고 교육한 것입니다. 축제의 중심에는 항상 말씀이 있어야 참된 축제가 됩니다.

3. 체험하는 날

 초막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주일 동안 모두 광야의 초막에 거주해야 했습니다(42절). 광야에 나가지 못하면 집 앞이나 집 지붕에라도 초막을 만들고 거기서 지내야 했습니다. 초막은 바닥에 나무판자를 깔고 나뭇가지로 엉성하게 만들었는데 그 초막 안에서는 별빛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지내려면 얼마나 불편합니까? 그래도 그렇게 한 것은 광야생활의 고통을 실제로 체험하면서 그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히 느끼기 위해서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초막절은 신앙교육을 위한 체험학습의 날이었습니다.

 현대인에게도 그런 초막체험이 가끔 필요합니다. 초막 체험은 무언의 많은 교훈을 줍니다. 이번에 여름 가족캠프 때 숙소가 불편했지만 편리한 것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일 년 중 한 주일 정도는 그런 체험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도는 천국 가나안을 향해 나가는 광야의 순례자란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불편함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불편했던 체험은 좋은 교훈이 될 때가 많습니다. 불편한 체험을 했던 사람이 누군가를 잘 섬기고 돌볼 줄 압니다. 불편 체험은 일상에서 잊고 살았던 공동체성을 강화시켜주고 그때 나눔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도 맛보게 됩니다. 그처럼 불편함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삶에서 적용시키며 사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불편함을 체험해보고 더 나아가 불편함을 각오한 사람은 고난훈련이 없어도 중간 마디가 튼튼한 인생이 되기에 큰 고난을 면제받으면서도 큰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4. 기억하는 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의 초막에서 지낼 때를 대대로 기억하게 하려고 초막절을 지키게 했습니다(43절). 허름한 초막에서 지내면 밤에는 별빛이 보이고 비가 오면 비가 샙니다. 그런 초막에 거하게 하신 것은 광야의 힘들었던 역사를 잊지 말고 화려한 삶에 매몰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풍요와 편리에 길들여지면 자신의 실체와 본분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초막시절에 은혜 받았던 때를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죄악은 대개 ‘망각’을 통해 옵니다. 물질이 많아지고 몸이 편안해지면 마음이 높아지면서 하나님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부유하고 편하면서도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는 겸손한 사람은 적습니다. 잘 나가고 잘 살면 자기를 대단하게 여기다가 하나님을 망각하게 되고 나중에는 스스로 하나님인 줄 착각하게 됩니다. 착각은 망각에서 옵니다.

 옛날에 어려웠던 시절에는 얼마나 감사와 포용과 이해가 넘쳤습니까? 그런데 부해지고 편해지면서 감사는 줄고 원망은 늘고 있습니다. 부와 편리는 하나님을 망각하게 하고 결국 멸망으로 이끌 때가 많습니다. 부와 편리를 무조건 정죄하고 거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수시로 나눔을 실천하고 초막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해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절기라는 말의 ‘절’ 자는 한자로 ‘마디 절(節)’ 자입니다. 고난이 인생의 마디와 같다면 절기는 실생활의 마디와 같습니다. 그 마디가 있기에 크게 자랄 수 있습니다. 그 마디가 튼튼해지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고 부모님의 은혜와 누군가의 은혜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절기는 과거의 삶을 감사로 돌아보며 하나님을 새롭게 기억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를 새롭게 확인하는 계기로 삼는 날입니다.

5. 찾아가는 날

 당시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면서 순례자들은 깊은 안도감과 소속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은 식물이 뿌리를 내리려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절기와 순례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과거의 시련의 역사와 은혜의 역사를 기억해내며 자신들의 뿌리를 찾고 재확인했습니다. 또한 그때 사회적 약자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부름 받은 자신의 소명도 재확인했습니다. 그처럼 절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리로 찾아가는 날입니다.

 왜 현대인들은 옛날보다 잘 살면서도 공허함을 더 느낍니까? 너무 사회가 복잡해졌고 그런 사회에 살면서 마음이 분주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혼자만 있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혼자 말씀 앞에 서고 혼자 기도하고 혼자 여행할 때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삶이 각박해지는 것은 내면의 빈터와 쉼터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절기를 통한 초막 찾기는 내면의 빈터와 쉼터 찾기와 같습니다.

 저의 한 지인 목사님은 기회만 생기면 예루살렘을 찾습니다. 지금까지 10번 이상 갔다 왔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성도들이 싫어하지 않나요?” 힘들게 사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잘 이해해준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교회가 어느 정도 규모가 되기에 가능한 일이지 99%의 목회자는 꿈도 못 꾸는 일입니다.

 돈은 생각보다 많이 안 든다고 합니다. 3번까지 갈아타는 싼 비행기를 찾으면 백만 원짜리도 표도 찾습니다. 숙소는 아무 데나 잡니다. 그리고 10일 정도 머물면서 매일 예루살렘 성을 남한산성 걷듯이 홀로 죽 걸으면서 예수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그분은 시간이 나면 순교자들의 성지를 찾아 걸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내면의 빈터 찾기와 쉼터 찾기입니다. 절기는 내면의 빈터와 쉼터를 찾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십시오 >

 마음에 빈터와 쉼터를 마련하고 깊이 생각하면 무엇이 생깁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가 생깁니다. 그처럼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면 은혜를 갚으며 살겠다는 사명도 뚜렷해지면서 나누려는 마음도 커집니다. 그처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눔을 실천하십시오. 넉넉하지 못해도 힘써 나누려고 하십시오. 넉넉하지 못할 때의 나눔은 더욱 깊은 의미와 울림을 줍니다. 자기 것을 덜어내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다가 보면 십자가를 지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더 깨닫게 됩니다.

 개인도 잘 나눠야 하지만 교회는 더욱 잘 나눠야 합니다. 교회도 재물이 많아지면 타락 가능성이 커지기에 선교와 분립과 나눔을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외형이 커지고 숫자가 많아져도 힘써 나누면 초막 시절을 잊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나누지 않으면 곧 초막 시절을 잊게 되면서 하나님도 잊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마음까지 잃게 됩니다. 교회는 덩치가 커지기보다 나눔이 커져야 건강을 잃지 않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대중 앞에서 말을 많이 더듬었습니다. 그 현상이 40대 초반에 노안이 오면서 더 심해졌습니다. 안경을 껴도 말씀 원고가 희미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2003년에 샛별마을로 교회를 이전했을 때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교회에 처음 찾아온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원고에 충실하게 매여 설교하는 사람에게 원고가 잘 보이지 않아 말을 가끔 더듬고 초점을 맞추려고 안경을 자주 만지며 설교의 유려함이 없게 보인 것은 큰 약점이었습니다.

 몇 년에 지난 어느 날, 한 권사님이 아들에게 맞춰주니 좋아했다고 하면서 제게 30만 원짜리 다초점 안경을 맞춰주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원고가 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연히 말을 더듬고 안경을 만지는 일도 크게 줄었습니다. 그러나 버스는 이미 많이 떠난 뒤였습니다. 이사 초창기에 종종 찾아오던 주일예배 참석자가 그때는 많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유려해진 설교를 선보일 기회가 크게 줄어든 것이 참 아쉬웠습니다. 그때 생각을 하면서 가끔 “다초점 안경을 조금 일찍 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때 다초점 안경조차 살 수 없는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안경에 그런 돈을 쓰는 것이 아까워서 몇 만 원짜리 안경을 그냥 쓰고 희미한 원고를 보며 더듬으며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때 은밀히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한 달 후원금으로도 다초점 안경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아깝다고 안 사고 또한 성도들에게도 “제 노안 문제를 위해 기도해주세요.”하고 알리지도 않고 더듬으며 설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의 더듬는 설교가 교인 등록과 교회부흥에 장애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자기 것을 챙기지 못해 겉으로 손해를 본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본당의 앰프 소리가 원인을 모른 채 몇 달째 커졌다가 꺼졌다가 제멋대로 작동합니다. 그래도 앰프 시스템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얘기는 전혀 안 하고 어느 선교사님에게 무엇이 필요하다는 얘기만 하니까 얼마나 챙기지 못하는 모습입니까? 앰프 시스템 때문에 예배의 집중력이 떨어지면 교인 등록에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큰 손해입니다. 마치 성공하는 길과는 반대되는 길로만 가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것이 성공과 반대되는 길로 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인 숫자가 적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교회가 커져도 제 특성상 금방 나눠버릴 텐데 결국은 그게 그겁니다. 숫자를 추구하는 것 대신에 성공과 성장 세미나 등에 집착해서 길을 잃어버린 한국 교회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물의 길을 닦기 위해서 제가 가진 달란트를 활용해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숫자와 물질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숫자와 물질이 하나님과의 거리를 오히려 멀게 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러시아에 한 가난한 농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새벽부터 밭에 나가 열심히 일했고 시장하면 나무 밑에 둔 빵을 먹었습니다. 어느 날, 그 빵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맹물로 허기를 달래며 중얼거렸습니다. “오늘 하루 굶는다고 죽지는 않겠지. 누군가 그 빵이 필요했으니 가져갔겠지. 그라도 잘 먹었으면 좋겠다.” 사실 그 빵은 농부가 죄를 짓게 만들려고 악마가 훔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악담을 퍼붓기는커녕 오히려 축복의 말을 하자 그 악마는 대장 악마에게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때 악마는 뭔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농부의 빵을 훔치는 대신 하인으로 변장해 농부의 빵을 늘려주었습니다. 그 하인 악마의 도움으로 수확이 많아지고 곡식이 남아돌자 하인 악마는 남는 곡식으로 술을 만들라고 부추겼습니다. 결국 일용할 양식이 쾌락의 도구로 바뀌었고 농부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점차 짐승이 되어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대장 악마가 좋은 비책을 썼다고 그 악마를 크게 칭찬했습니다.

 너무 남아돌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쾌락의 도구로 악용하면서 사람이 짐승처럼 될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교인 숫자가 많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 숫자가 많아져서 타락하고 무너진 교회와 목회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있게 되면 감사하면서 힘써 덜어내고 나누십시오. 반대로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게 합니다. 절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불편이 불행의 원인은 아닙니다. 반대로 편안이 행복의 원인도 아닙니다. 지금 컴퓨터, 디지털 TV, 핸드폰, 세탁기 등의 도구로 얼마나 옛날보다 편하게 삽니까? 그래도 옛 시절의 맛과 멋이 그리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편리함이 행복지수까지 높이지는 않습니다. 사실상 세상의 변하는 것은 행복의 항수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편리함에 대한 집착을 포기해야 행복지수도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편안함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믿음은 환경과 상관이 없이 행복을 노래하게 합니다. “예수님 믿으면 부자 됩니다!”란 말에 솔깃해서 믿으면 행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님 믿으면 부자입니다!”란 믿음을 가지고 살면 늘 행복을 노래하며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한 환경보다 행복한 생각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불행한 환경보다 불행한 생각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믿음이란 불행한 환경에서 행복한 생각을 하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역사하실 때가 많습니다. 큰일을 이룰 힘을 구하면 겸손하게 살라고 힘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많은 일을 할 건강을 구하면 뜻 깊게 살라고 병을 주시기도 합니다. 편안하게 살고 싶어 물질을 구하면 겸손하게 살라고 물질 축복을 유보하기도 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 성공을 구하면 지혜롭게 살라고 실패를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과 소명을 아시고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것을 때에 맞춰 주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고 감사하며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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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33 열왕기하 회복의 은혜 왕하5:1-6  한태완 목사  2014-12-20 1423
11432 누가복음 사가랴와 마리아 눅1:26-38  강승호 목사  2014-12-19 893
11431 말라기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말1:7-10  김경형 목사  2014-12-19 754
11430 시편 하나님은 성도를 지키십니다. 시121:1-8  한태완 목사  2014-12-18 1047
11429 이사야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사61:1-4,8-11  강승호 목사  2014-12-17 617
11428 시편 하나님의 배려 시40:1-17  최장환 목사  2014-12-17 788
11427 시편 승리는 내 것이다 시21:1-13  최장환 목사  2014-12-17 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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