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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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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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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eulsoritimes.co.kr 2004.5.3
종교다원을 두려워 말라
언제부턴가 기독교의 순수파 성도들은 ‘종교다원주의’를 생각할 때 징그럽고 고약한 뱀들이나 문둥병처럼 생각해 오고 있다. 한 때는 모 신학 대학에서 고발 또 추방사태가 일어나는 일까지 있었다.
요즈음은 잠잠해 진 듯 하지만 실상은 잠복기라고 할까, 아니면 조용히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마치 승자나 되는 듯이 그들을 기피하고 혐오하는 순수한 기독교 신자들을 깔보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사람들이여, 종교다원주의들의 이론을 두려워하지 마라. 애시당초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더구나 현실은 문명과 통신의 발달로 이제는 타종교와 만남 자체를 기피할 수 없다.
그리고 기독교 그 어떤 이유로도 그 무슨 사상들과의 부딪침도 기피하지 않아야 한다. 헬레니즘과 휴머니즘이 세계를 집어 삼키려 했던 때, 알렉산더의 혼합주의 횡포가 극치를 이룰 그 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의 혼합 속에서 유일자로 마치 진흙탕 속의 한 송이 청아한 꽃처럼 피어 올랐다. 불교에서 연꽃을 말하지만 사실은 헬레니즘과 노스틱(Gnostic) 사상의 무자비한 폭력(횡포)을 이겨내고 그 더러운 시대의 탁류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유일자는 예수(그리스도)뿐이시다.
다만 기독교가 3세기, 4세기, 그리고 5세기, 6∼7세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저들 헬레니즘과 영지주의(Gnosticism)에 속아 넘어가 중세기 1천년 동안 고전을 했을 뿐, 본디 기독교의 예수 정신만이 혼합주의와 영지주의를 이겨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여, 기독교 신자여, 다시 예수를 보라. 예수로 옷 입으라.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라. 예수로 살아라. 그리고 담대하게 저들 다원주의자들에게 대문을 활짝 열고 필요하다면 안방 문도 열어라. 하늘같은 마음의 소유자들이 지킬 마당이 따로 있으며 또 안방이 따로 있으랴. 그렇다면 문도 없다. 문 없는 문이다. 어디 문 뿐이더냐, 기독교에는 기독교 없다. 종교도 없다. 언제 누가 기독교를 종교라고 하더냐.
며칠 전 신문에 하바드 출신 승려 미국인 현각이 불란서 작가 베르베르와 대화중, 베르베르가 종교철학을 전공한 미국인 엘리트가 기독교를 떠나 한국 불교에 귀의한 배경이 궁금하다고 하니까 현각은, ‘나는 아직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비행기에 앉아 있는 것처럼 나는 움직이지 않는데 (사실은) 움직이고 있다’고 아리송한 대답을 한 내용의 신문을 읽었다.
이는 언어의 유희이며 희롱이다. 그가 누구를 웃기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그 자신을 그 스스로가 희롱하는 혼돈의 상황인 듯 하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은 알 수 있다. 현각이 아직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 말뜻은 교회나 사찰, 예수나 부처가 다를바 없노라는 표현을 조금 멋부려서 했을 것이다.
기독교여, 종교다원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기독교는 본래 예수의 경지를 지켜라. 그리하여 아직 종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불교나 유대교, 또 이슬람이 그들끼리 어울리게 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한 단계 어른스러운 위치에서 그들의 앞날을 위해 훈수를 두어주면 좋을 것이다.〈無然>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100
종교다원을 두려워 말라
언제부턴가 기독교의 순수파 성도들은 ‘종교다원주의’를 생각할 때 징그럽고 고약한 뱀들이나 문둥병처럼 생각해 오고 있다. 한 때는 모 신학 대학에서 고발 또 추방사태가 일어나는 일까지 있었다.
요즈음은 잠잠해 진 듯 하지만 실상은 잠복기라고 할까, 아니면 조용히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마치 승자나 되는 듯이 그들을 기피하고 혐오하는 순수한 기독교 신자들을 깔보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사람들이여, 종교다원주의들의 이론을 두려워하지 마라. 애시당초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더구나 현실은 문명과 통신의 발달로 이제는 타종교와 만남 자체를 기피할 수 없다.
그리고 기독교 그 어떤 이유로도 그 무슨 사상들과의 부딪침도 기피하지 않아야 한다. 헬레니즘과 휴머니즘이 세계를 집어 삼키려 했던 때, 알렉산더의 혼합주의 횡포가 극치를 이룰 그 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의 혼합 속에서 유일자로 마치 진흙탕 속의 한 송이 청아한 꽃처럼 피어 올랐다. 불교에서 연꽃을 말하지만 사실은 헬레니즘과 노스틱(Gnostic) 사상의 무자비한 폭력(횡포)을 이겨내고 그 더러운 시대의 탁류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유일자는 예수(그리스도)뿐이시다.
다만 기독교가 3세기, 4세기, 그리고 5세기, 6∼7세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저들 헬레니즘과 영지주의(Gnosticism)에 속아 넘어가 중세기 1천년 동안 고전을 했을 뿐, 본디 기독교의 예수 정신만이 혼합주의와 영지주의를 이겨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여, 기독교 신자여, 다시 예수를 보라. 예수로 옷 입으라.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라. 예수로 살아라. 그리고 담대하게 저들 다원주의자들에게 대문을 활짝 열고 필요하다면 안방 문도 열어라. 하늘같은 마음의 소유자들이 지킬 마당이 따로 있으며 또 안방이 따로 있으랴. 그렇다면 문도 없다. 문 없는 문이다. 어디 문 뿐이더냐, 기독교에는 기독교 없다. 종교도 없다. 언제 누가 기독교를 종교라고 하더냐.
며칠 전 신문에 하바드 출신 승려 미국인 현각이 불란서 작가 베르베르와 대화중, 베르베르가 종교철학을 전공한 미국인 엘리트가 기독교를 떠나 한국 불교에 귀의한 배경이 궁금하다고 하니까 현각은, ‘나는 아직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비행기에 앉아 있는 것처럼 나는 움직이지 않는데 (사실은) 움직이고 있다’고 아리송한 대답을 한 내용의 신문을 읽었다.
이는 언어의 유희이며 희롱이다. 그가 누구를 웃기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그 자신을 그 스스로가 희롱하는 혼돈의 상황인 듯 하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은 알 수 있다. 현각이 아직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 말뜻은 교회나 사찰, 예수나 부처가 다를바 없노라는 표현을 조금 멋부려서 했을 것이다.
기독교여, 종교다원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기독교는 본래 예수의 경지를 지켜라. 그리하여 아직 종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불교나 유대교, 또 이슬람이 그들끼리 어울리게 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한 단계 어른스러운 위치에서 그들의 앞날을 위해 훈수를 두어주면 좋을 것이다.〈無然>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pa&nnew=2&y_number=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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