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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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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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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속의 종교, 종교속의 삶]엄두섭 목사 | 인터뷰 2004/11/17 19:34
엄두섭 목사(85)는 저녁 7시에 잠자리에 든 후 밤 12시에 기상한다. 25년동안 은성수도원 일을 하면서 지켜온 원칙이다. 엄목사는 1979년 국내 개신교사상 유일하게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교회의 세속화를 자탄하면서 이 땅의 교회는 하루빨리 영성을 찾아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개신교에 기도원은 많지만 수도원은 없습니다. 가톨릭에는 40개의 남자수도회와 100개의 여자수도회가 있고 불교·원불교에도 수도원이 많아요. 종교분야에서 수도원이 없는 곳은 개신교뿐이에요. 천주교와 정교회의 경우 수도원이 영성의 발원지인데, 정작 영성적 흐름이 필요한 교회에는 수도원이 없으니….”
엄목사는 1517년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판매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을 하면서 수도생활을 중단하고 수도원의 의미를 배척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수도원이 사라지면서 약 500년동안 교회는 신령한 기운을 잃어버린 채 분열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후 기독교가 제 길을 가지 못하자 유럽에선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지요. 그 영향을 받아 아직까지 유럽 개신교회에서는 수도원을 운영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엄목사는 49년 나주 남평교회에서 목사안수후 43년동안 목회생활을 하면서 교회만으론 진정한 믿음을 찾을 수 없다는 깨달음과 고민이 계속됐다고 했다. 경기 포천군 화현면 화현 2리 1,300여평에 세워진 수도원은 고민의 결과였다. 60평짜리 슬레이트지붕 건물 한 채와 15개의 기도실이 기도원의 전부.
“수도원을 건립하면서 오해도 받았지요. ‘목사라면 전도와 선교 등 할 일이 많은데 왜 산 속으로 들어가 수도원을 세우냐’며 저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79년 수도원 설립후 교회 사목활동과 수도원 운영을 겸하던 엄목사는 70세가 되던 89년부터 수도원 일만 도맡아했다. 2000년 이후는 수도원 운영도 장로신학대학교에 위임하고 매달 이틀씩 수도원에서 예배인도와 강의를 하고 있다.
“초창기엔 10여명의 남성들이 수도사가 되겠다고 수도원을 찾았지요. 그런데 세상을 버리고 혼자 살아야 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요. 1년의 청원기간후 2년의 유기서원이 있고 다음엔 일생 수도자가 되겠다는 종신서원의 절차가 있는데, 2~3년 지나면 대부분 환속합니다.”
엄목사는 옥천 나시릿수도원에 2명의 남성수사와 5명의 여성 수사를, 강원 화천 사창리산 성빈수녀원에 2명의 여성 수사를 파견보내는 등 결실도 거두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수도사 양성을 하지 못했다며 이젠 수도원도 시대적 환경에 따라 변신해야 한다고 했다.
은성수도원에선 장기 영성훈련보다 신학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매주 3박4일 일정의 미니 영성훈련을 지도하고 있다. 엄목사의 뜻이다.
“기독교 신자들의 경우 성령운동은 열심히 하는데, 도덕적으로 바른신앙을 얻는 영성운동을 몰라요. 내면이 빈 채 부풀어 오른 고무풍선이 되어 버렸답니다. 목사들도 교회를 회사운영하듯 경영마인드로 이끌고 있으니…. 제가 수도원 운영에 성공했으면 좋았을텐데….”
엄목사는 자신의 실패로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이 갈 길을 찾지 못했다고 말을 흐렸다. 30년동안 요가와 흡사한 베네트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해온 엄목사는 오전 7시 미숫가루, 낮 12시 국수, 오후 5시 저녁식사시간을 제외하고 기도와 묵상 등 수도자의 생활을 지킨 후 취침한다. 그러나 강숙희 사모(76)는 보통사람들과 같은 일과를 살며 목사남편을 내조하고 있다.
〈유인화기자 rhe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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