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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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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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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ngdangnews.com/news/read.php최완택목사의 민들레교회 이야기, 2006. 3. 26 제601호
사랑하는 민들레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시방 ‘봄의 한가운데’인 춘분(春分)을 살고 있습니다.
때가 춘분에 이르면 해가 적도(赤道)위를 똑바로 비추어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집니다. 해가 춘분점(春分點)을 통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춘분점이란 해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행하여 적도를 통과하는 점을 말하는데, 이날 마침내 그도안 짧았던 낮의 길이가 길었던 밤의 길이와 같아집니다.
그리고 이 날을 기점으로 다음 날 부터는 낮의 길이가 차츰차츰 길어집니다. 그러니 춘분은 ‘봄의 한가운데’입니다.
춘분(春分)은 추분(秋分)과 더불어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음으로 모든 절기의 분기점(分岐點)입니다.
분기점(分岐點)은 ‘갈림길’입니다. 갈림길은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거기를 기점(起點)으로 해서 새롭게 길을 떠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발걸음이 분기점에 이르면 거기서 정김(精氣)를 새롭게 호흡하고 새롭게 길을 떠나야 합니다.
나는 ‘춘분 언덕’이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언덕’이란 말은 ‘땅이 비탈지고 조금 높은 곳’을 말합니다. 춘분을 기점으로 우리는 위(上)로 오르고 밝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추분, 秋分은 반대로 아래(下)로 내리고 어둠으로 들게 됩니다.)
1997년부터 나는 춘분 절기를 맞이할 때마다 위와 같이 춘분․분기점을 이야기했습니다. ‘춘분(春分) 곧 분기점(分岐點)’으로 일깨워주신 성령의 은총에 깊이 감사합니다.
우리는 시방 교회력으로 ‘사순절 한가운데’에 춘분절기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부활절 날짜 계산법을 잘 아시지요? 니캐아 총회의(서기325년) 이후 부활절 제정법은 ‘춘분(3월21일경)후의 최초의 만월 후에 오는 첫째 주일’로 되어 있습니다. 올해는 춘분 후의 첫 보름이 4월 12일(수, 음력 3월 15일)이니까 4월 16일이 부활절입니다.
교회력에서도 춘분은 어김없는 분기점입니다. 어둠과 죽음에서 밝음과 다시 사는 기쁨을 맛보는 부활절로 가는 분기점입니다.
저는 2002년 춘분절기에, 춘분을 중(中)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글을 썼지요.
날마다 춘분을 기억하고 살아라.
춘분은 중(中)이다.
낮으로 치우치지 않고
밤으로 치우치지 않는 날, 춘분(春分)!
그러나 얼마나 기나 긴 ‘밤으로의 긴 여로’를 걸어왔던가.
그리고 또 얼마나 기나 긴 ‘낮으로의 긴 여로’를 걸어가야만 하는가
(민들레 이야기 511호, 2002년 3월 17일)
이 말씀을 화두(話頭)로 새기는 가운데 ‘2002년 부활절 아침’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 글의 한 구절,
당신은 내게로 와서
치우치지 않는 중(中)의 스승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번 본때있게 치우치심으로써 나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예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민들레 이야기 512호, 2002년 3월 31일)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나는 2002년 춘분 절기에 춘분을 중(중)으로 깨닫고, 부활하신 예수도 중(중)으로 깨닫게 된 은총을 지금껏 깊이 감격, 감사하고 있습니다.
중(中)은 ‘한가운데’라는 뜻도 있지만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지간(天地間)의 정기(正氣)), 정기(精氣)라는 뜻도 되겠습니다. 중(中)을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법이요 섭리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제 감히 나는 중(中)의 신앙을 산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2006년 ‘춘분 언덕’에서 ‘춘분 곧 평화’임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일찍이 중용(中庸)을 읽다가 사로잡힌 구절이 있습니다.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라.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그것들이 (때와 자리에 따라) 적절하게 다 드러나 맞아 떨어지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中)이란 이 세상을 이루는 천하의 대본(大本)이요
화(和)란 천하의 달도(達道)이다.
致中和면 天地이 位焉하며 萬物이 育焉이니라.
중화(中和)가 이루어지면 천지가 다 제자리를 바로 하게 되며 만물이 제대로 자라난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지난, 36년 세월 동안 나는 ‘치중화(致中和)의 대본(大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10년여 세월동안 24절기를 끊임없이 이야기 해오다보니 ‘치중화(致中和)의 대본(大本)’으로 춘분(春分)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아, 이 감격과 감사!
성인 바울로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000과 000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에베소 2장 14-17절)
아아, 나의 주님이 ‘한번 본때있게 치우치심으로써’ 나의 주님이 되시고 나의 평화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치중화(致中和)의 대본(大本)’은 치우쳐도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져도 기울지 않고 오히려 평화를 이룹니다. 그 안에 중(中)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 바울로가 말씀합니다.
“너의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 2장 5절)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춘분 언덕에서 ‘춘분 = 평화’의 정기를 깊이 호흡하고 품으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치중화(致中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평화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시방 ‘봄의 한가운데’인 춘분(春分)을 살고 있습니다.
때가 춘분에 이르면 해가 적도(赤道)위를 똑바로 비추어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집니다. 해가 춘분점(春分點)을 통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춘분점이란 해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행하여 적도를 통과하는 점을 말하는데, 이날 마침내 그도안 짧았던 낮의 길이가 길었던 밤의 길이와 같아집니다.
그리고 이 날을 기점으로 다음 날 부터는 낮의 길이가 차츰차츰 길어집니다. 그러니 춘분은 ‘봄의 한가운데’입니다.
춘분(春分)은 추분(秋分)과 더불어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음으로 모든 절기의 분기점(分岐點)입니다.
분기점(分岐點)은 ‘갈림길’입니다. 갈림길은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거기를 기점(起點)으로 해서 새롭게 길을 떠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발걸음이 분기점에 이르면 거기서 정김(精氣)를 새롭게 호흡하고 새롭게 길을 떠나야 합니다.
나는 ‘춘분 언덕’이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언덕’이란 말은 ‘땅이 비탈지고 조금 높은 곳’을 말합니다. 춘분을 기점으로 우리는 위(上)로 오르고 밝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추분, 秋分은 반대로 아래(下)로 내리고 어둠으로 들게 됩니다.)
1997년부터 나는 춘분 절기를 맞이할 때마다 위와 같이 춘분․분기점을 이야기했습니다. ‘춘분(春分) 곧 분기점(分岐點)’으로 일깨워주신 성령의 은총에 깊이 감사합니다.
우리는 시방 교회력으로 ‘사순절 한가운데’에 춘분절기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부활절 날짜 계산법을 잘 아시지요? 니캐아 총회의(서기325년) 이후 부활절 제정법은 ‘춘분(3월21일경)후의 최초의 만월 후에 오는 첫째 주일’로 되어 있습니다. 올해는 춘분 후의 첫 보름이 4월 12일(수, 음력 3월 15일)이니까 4월 16일이 부활절입니다.
교회력에서도 춘분은 어김없는 분기점입니다. 어둠과 죽음에서 밝음과 다시 사는 기쁨을 맛보는 부활절로 가는 분기점입니다.
저는 2002년 춘분절기에, 춘분을 중(中)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글을 썼지요.
날마다 춘분을 기억하고 살아라.
춘분은 중(中)이다.
낮으로 치우치지 않고
밤으로 치우치지 않는 날, 춘분(春分)!
그러나 얼마나 기나 긴 ‘밤으로의 긴 여로’를 걸어왔던가.
그리고 또 얼마나 기나 긴 ‘낮으로의 긴 여로’를 걸어가야만 하는가
(민들레 이야기 511호, 2002년 3월 17일)
이 말씀을 화두(話頭)로 새기는 가운데 ‘2002년 부활절 아침’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 글의 한 구절,
당신은 내게로 와서
치우치지 않는 중(中)의 스승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번 본때있게 치우치심으로써 나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예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민들레 이야기 512호, 2002년 3월 31일)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나는 2002년 춘분 절기에 춘분을 중(중)으로 깨닫고, 부활하신 예수도 중(중)으로 깨닫게 된 은총을 지금껏 깊이 감격, 감사하고 있습니다.
중(中)은 ‘한가운데’라는 뜻도 있지만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지간(天地間)의 정기(正氣)), 정기(精氣)라는 뜻도 되겠습니다. 중(中)을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법이요 섭리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제 감히 나는 중(中)의 신앙을 산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2006년 ‘춘분 언덕’에서 ‘춘분 곧 평화’임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일찍이 중용(中庸)을 읽다가 사로잡힌 구절이 있습니다.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라.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그것들이 (때와 자리에 따라) 적절하게 다 드러나 맞아 떨어지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中)이란 이 세상을 이루는 천하의 대본(大本)이요
화(和)란 천하의 달도(達道)이다.
致中和면 天地이 位焉하며 萬物이 育焉이니라.
중화(中和)가 이루어지면 천지가 다 제자리를 바로 하게 되며 만물이 제대로 자라난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지난, 36년 세월 동안 나는 ‘치중화(致中和)의 대본(大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10년여 세월동안 24절기를 끊임없이 이야기 해오다보니 ‘치중화(致中和)의 대본(大本)’으로 춘분(春分)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아, 이 감격과 감사!
성인 바울로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000과 000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에베소 2장 14-17절)
아아, 나의 주님이 ‘한번 본때있게 치우치심으로써’ 나의 주님이 되시고 나의 평화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치중화(致中和)의 대본(大本)’은 치우쳐도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져도 기울지 않고 오히려 평화를 이룹니다. 그 안에 중(中)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 바울로가 말씀합니다.
“너의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 2장 5절)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춘분 언덕에서 ‘춘분 = 평화’의 정기를 깊이 호흡하고 품으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치중화(致中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평화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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