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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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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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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용 목사/ 명지대 겸임 교수 )
이른바 ‘기(氣)바람’이 불면서 현대인의 유약한 기질에 기(氣)가 구원주처럼 등장했다. 1980년대 이후 기 사상(思想), 기 물결은 거세게 쇄도하면서 우리를 혼돈케 하고 있다. 기(氣), 단(丹), 선(禪), 기공(氣功)이란 개념으로 포장된 이 미혹의 얼굴은 여러 양들을 현혹하고 있다.
특히 이것은 이른바 기공이란 이름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데 기공을 통한 수련으로 단전수련의 대가인 단학노인은 8미터를 뛰어 올랐다고 한다. 또 부산의 어떤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집단 진동체험을 했다고 보도가 되면서 더 한층 기(氣)는 현대의 종교로 대치되는 국면이다.
이런 기풍(氣風)을 타고 스포츠 신문 등에서는 “당신도 기능력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영역에 작용하고 초능력을 포함한 의식의 힘을 증폭시키는 불가사의한 에너지를 가지게 된다.” “당신은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라고 하면서 기의 광신도를 모으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에 심대한 도전이 되고 있는 이런 기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하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 현대인들은 이 기에 열광하게 되는가?
먼저 ‘포스트모던’적 흐름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의 흐름은 한 세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함으로 한 세기의 의식과 가치관을 결정해 버린다.
적어도 기독교의 한 패러다임의 변천에서 보면 초대 유대주의적 틀에서, 중세 로마카톨릭적인 예전주의를 지나, 종교개혁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을 맞이하게 된다. 이어 나타난 새로운 파도가 계몽주의를 앞세운 현대주의의 물결이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등장으로 다원적인 도전을 맞게 되었다.
포스트모던적 세계관은 다양성을 중시하고, 절대적 진리보다 상대적인 진리를 주목한다. 이것을 통해 비합리, 비논리, 비과학성이 한 시대의 해체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어느 한 패션이 등장하는 것은 역사발전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노림수는 결국 콘텍스트(context)로 텍스트(text)를 흔드는 국면으로 나타남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기 사상의 배경은 이런 포스트모던적 역사적 정황을 타고 기생한 현대의 바이러스인 셈이다. 그것은 이단에 빠지는 것과 거의 유사하다.
둘째는 사람의 깊은 종교성은 초인적 지도자를 갈망하거나 자신이 초인된다는 유혹에 쉽게 미혹된다. 특히 현대인들은 공해, 핵전쟁의 위협, 엘리뇨, 라니뇨 현상 같은 기상변화에 노출되어 있고, 각종 공해물질로 생존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며, 첨단 과학기술로 인해 비인간화되어 깊은 종교적, 사회적 소외감을 메꾸어 보려는 생존본능이 이런 기 사상에 쉽게 매료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는 건강한 권위질서에 순종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다원적 유혹에 쉽게 노출이 되어 있다. 부모와 만성적으로 관계가 악화된 사람이거나, 권위적 질서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기 사상의 유혹에 옥토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런 사람 가운데 정통 교회에서 시험을 받고, 특히 교회공동체, 교회지도자들에게서 상처를 받은 경우가 적지 않다.
넷째, 부부간의 문제가 있는 가정이거나 독특한 친밀공동체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방향을 상실한 현대인에겐 지푸라기 같은 기 사상이 다림줄 같다.
다섯째, 한국인의 토양과 체질에 맞는 흐름이다. 이 기(氣) 자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국의 은주의 갑골문자에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 후 유교의 속에 내재되어 전수되다가 도교가 이 샘에 빨대를 꼽고 기 사상을 빨아들여 도선사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도교의 단정파는 단전호흡으로 불로불사의 양생술을 추구한다. 여기서 풍수지리설이 나오고, 음양이나 오행의 개념을 수용하여 더욱 정교한 이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고려말의 성리학 논쟁으로 더욱 세련되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인에는 기(氣)하면 토양적으로 고개가 돌려지는 생활 속의 스며든 먹물이요 체질인 셈이다. 기세올리다, 기가 막혀, 기절했어, 기가 센 여자, 기가 흐르는 명당, 기력, 기백, 기맥, 기상, 기세, 기신, 기염, 기우, 공기, 대기, 곡기, 자기, 전기 등의 용어로 번역을 한 것은 흥미롭다. 처음 서양에는 이원론적 개념에 입각해서 물질, 질료, 에테르 등으로 번역했지만 우리에게는 기(氣)라는 정신적, 생물적, 물리적 용어로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용되는 것을 보아도 얼마나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사상인지 알 수 있다.
여섯째, 한의학에서 의학과 스피릿이 혼재되어 있어 우리에게 갈등을 안겨준다. 한의학은 대우주에 상응하는 소우주로 간주하는 유기체론에 입각해 있으며 국부적 해부학적 발전에 바탕을 둔 서양의학과 상이한 시각적 차이를 안고 출발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의학은 단순히 인간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의학에 머무르지 않고 기의 세계관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의학은 이런 면에서 경험과학이전에 형이상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셈인데 인체 내에 기가 흐르는 통로가 있다고 하며 그것을 경락(經絡)이라 부른다. 한의학에선 경락이상을 질병으로 본다. 그래서 침, 뜸을 통해 경락이상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기와 경락, 그 어떤 표현이라도 우리 몸의 힘의 유통은 수용할 수 있으나, 한의학은 우주의 기를 끌어들여 신선을 추구하려는 신비주의와의 연결고리를 끊지 못하기에 문제가 있다. 한의학은 경험의학으로 남아야지 도나 불로불사의 신비술로 나가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기 사상은 한의학의 배후에 숨어서 도교의 메시지를 전하는 미혹의 얼굴이 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일곱째, 이것은 증산도라는 유, 불, 도교의 종지(宗旨) 일부를 혼합한 형태로 오늘날 나타나 우리의 고유정서를 파고들고 있다. 그러므로 기(氣)는 신인동일(神人同一) 철학의 배경을 안고 있어 우리의 신앙에 침해를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보는가?
첫째, 기 사상의 시도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도선이 되고, 불로불사를 추구하는 신비술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창 3:24에서 보듯 인간의 자생적 노력으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임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쿤달리니, 에너지, 챠크라 수련으로 통치되는 반 기독교적인 뉴에지 사상과 맞닿아 있다. 도교, 불교, 유교 등 이미 존재하는 율법 종교가 자기의 힘으로 신선, 불사의 경지에 이르겠다는 것으로 복음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둘째, 무엇보다 초능력의 추구는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은혜구원에 대한 도전이다. 이 말은 사탄이 ‘인간은 모두 신적 존재(창 3:5)’라고 거짓말한 데서 드러난다.
특히 이 기 사상은 본질적으로 신비술에 연결되어 초혼술과 같은 심령술이나 점성술 등을 지지하고 추구하는 경우로 드러나는데 이는 성경에서 엄격히 금한 귀신을 부르는 초혼행위로서 용납지 않고 있다(신 18:10∼11, 17:3; 사 47:13∼14).
우주의 기를 추구하면서 잘못해도 귀신들리는 경우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들도 이를 사기(邪氣)라고 인정하고 있다. 사무엘서에서도 사울이 엔돌의 무당을 만나러 간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렸음을 지적하고 있다.
셋째, 기수련의 한 양식인 요가의 공중부양(le-vitation)은 참신이 아닌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을 보고 애굽의 술사들이 행한 미혹적 표적이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에 자유하시다. 성경에는 엘리사가 물 밑에 가라앉은 도끼를 수면위로 떠오르게 한 일(왕하 6:5∼6),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간 일(마 14:29), 에스겔의 육체가 공중으로 들려 올려진 일(겔 8:3), 사람들이 보는 데 주님의 몸이 공중으로 떠가신 일(행 1:9) 등등 이미 성령으로 세우신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창 1:2), 흙으로 지어진 아담에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기(창 2:7)는 성령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없는 기는 모든 범신론적 미혹의 미소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른바 ‘기(氣)바람’이 불면서 현대인의 유약한 기질에 기(氣)가 구원주처럼 등장했다. 1980년대 이후 기 사상(思想), 기 물결은 거세게 쇄도하면서 우리를 혼돈케 하고 있다. 기(氣), 단(丹), 선(禪), 기공(氣功)이란 개념으로 포장된 이 미혹의 얼굴은 여러 양들을 현혹하고 있다.
특히 이것은 이른바 기공이란 이름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데 기공을 통한 수련으로 단전수련의 대가인 단학노인은 8미터를 뛰어 올랐다고 한다. 또 부산의 어떤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집단 진동체험을 했다고 보도가 되면서 더 한층 기(氣)는 현대의 종교로 대치되는 국면이다.
이런 기풍(氣風)을 타고 스포츠 신문 등에서는 “당신도 기능력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영역에 작용하고 초능력을 포함한 의식의 힘을 증폭시키는 불가사의한 에너지를 가지게 된다.” “당신은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라고 하면서 기의 광신도를 모으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에 심대한 도전이 되고 있는 이런 기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하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 현대인들은 이 기에 열광하게 되는가?
먼저 ‘포스트모던’적 흐름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의 흐름은 한 세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함으로 한 세기의 의식과 가치관을 결정해 버린다.
적어도 기독교의 한 패러다임의 변천에서 보면 초대 유대주의적 틀에서, 중세 로마카톨릭적인 예전주의를 지나, 종교개혁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을 맞이하게 된다. 이어 나타난 새로운 파도가 계몽주의를 앞세운 현대주의의 물결이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등장으로 다원적인 도전을 맞게 되었다.
포스트모던적 세계관은 다양성을 중시하고, 절대적 진리보다 상대적인 진리를 주목한다. 이것을 통해 비합리, 비논리, 비과학성이 한 시대의 해체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어느 한 패션이 등장하는 것은 역사발전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노림수는 결국 콘텍스트(context)로 텍스트(text)를 흔드는 국면으로 나타남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기 사상의 배경은 이런 포스트모던적 역사적 정황을 타고 기생한 현대의 바이러스인 셈이다. 그것은 이단에 빠지는 것과 거의 유사하다.
둘째는 사람의 깊은 종교성은 초인적 지도자를 갈망하거나 자신이 초인된다는 유혹에 쉽게 미혹된다. 특히 현대인들은 공해, 핵전쟁의 위협, 엘리뇨, 라니뇨 현상 같은 기상변화에 노출되어 있고, 각종 공해물질로 생존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며, 첨단 과학기술로 인해 비인간화되어 깊은 종교적, 사회적 소외감을 메꾸어 보려는 생존본능이 이런 기 사상에 쉽게 매료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는 건강한 권위질서에 순종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다원적 유혹에 쉽게 노출이 되어 있다. 부모와 만성적으로 관계가 악화된 사람이거나, 권위적 질서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기 사상의 유혹에 옥토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런 사람 가운데 정통 교회에서 시험을 받고, 특히 교회공동체, 교회지도자들에게서 상처를 받은 경우가 적지 않다.
넷째, 부부간의 문제가 있는 가정이거나 독특한 친밀공동체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방향을 상실한 현대인에겐 지푸라기 같은 기 사상이 다림줄 같다.
다섯째, 한국인의 토양과 체질에 맞는 흐름이다. 이 기(氣) 자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국의 은주의 갑골문자에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 후 유교의 속에 내재되어 전수되다가 도교가 이 샘에 빨대를 꼽고 기 사상을 빨아들여 도선사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도교의 단정파는 단전호흡으로 불로불사의 양생술을 추구한다. 여기서 풍수지리설이 나오고, 음양이나 오행의 개념을 수용하여 더욱 정교한 이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고려말의 성리학 논쟁으로 더욱 세련되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인에는 기(氣)하면 토양적으로 고개가 돌려지는 생활 속의 스며든 먹물이요 체질인 셈이다. 기세올리다, 기가 막혀, 기절했어, 기가 센 여자, 기가 흐르는 명당, 기력, 기백, 기맥, 기상, 기세, 기신, 기염, 기우, 공기, 대기, 곡기, 자기, 전기 등의 용어로 번역을 한 것은 흥미롭다. 처음 서양에는 이원론적 개념에 입각해서 물질, 질료, 에테르 등으로 번역했지만 우리에게는 기(氣)라는 정신적, 생물적, 물리적 용어로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용되는 것을 보아도 얼마나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사상인지 알 수 있다.
여섯째, 한의학에서 의학과 스피릿이 혼재되어 있어 우리에게 갈등을 안겨준다. 한의학은 대우주에 상응하는 소우주로 간주하는 유기체론에 입각해 있으며 국부적 해부학적 발전에 바탕을 둔 서양의학과 상이한 시각적 차이를 안고 출발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의학은 단순히 인간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의학에 머무르지 않고 기의 세계관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의학은 이런 면에서 경험과학이전에 형이상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셈인데 인체 내에 기가 흐르는 통로가 있다고 하며 그것을 경락(經絡)이라 부른다. 한의학에선 경락이상을 질병으로 본다. 그래서 침, 뜸을 통해 경락이상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기와 경락, 그 어떤 표현이라도 우리 몸의 힘의 유통은 수용할 수 있으나, 한의학은 우주의 기를 끌어들여 신선을 추구하려는 신비주의와의 연결고리를 끊지 못하기에 문제가 있다. 한의학은 경험의학으로 남아야지 도나 불로불사의 신비술로 나가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기 사상은 한의학의 배후에 숨어서 도교의 메시지를 전하는 미혹의 얼굴이 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일곱째, 이것은 증산도라는 유, 불, 도교의 종지(宗旨) 일부를 혼합한 형태로 오늘날 나타나 우리의 고유정서를 파고들고 있다. 그러므로 기(氣)는 신인동일(神人同一) 철학의 배경을 안고 있어 우리의 신앙에 침해를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보는가?
첫째, 기 사상의 시도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도선이 되고, 불로불사를 추구하는 신비술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창 3:24에서 보듯 인간의 자생적 노력으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임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쿤달리니, 에너지, 챠크라 수련으로 통치되는 반 기독교적인 뉴에지 사상과 맞닿아 있다. 도교, 불교, 유교 등 이미 존재하는 율법 종교가 자기의 힘으로 신선, 불사의 경지에 이르겠다는 것으로 복음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둘째, 무엇보다 초능력의 추구는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은혜구원에 대한 도전이다. 이 말은 사탄이 ‘인간은 모두 신적 존재(창 3:5)’라고 거짓말한 데서 드러난다.
특히 이 기 사상은 본질적으로 신비술에 연결되어 초혼술과 같은 심령술이나 점성술 등을 지지하고 추구하는 경우로 드러나는데 이는 성경에서 엄격히 금한 귀신을 부르는 초혼행위로서 용납지 않고 있다(신 18:10∼11, 17:3; 사 47:13∼14).
우주의 기를 추구하면서 잘못해도 귀신들리는 경우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들도 이를 사기(邪氣)라고 인정하고 있다. 사무엘서에서도 사울이 엔돌의 무당을 만나러 간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렸음을 지적하고 있다.
셋째, 기수련의 한 양식인 요가의 공중부양(le-vitation)은 참신이 아닌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을 보고 애굽의 술사들이 행한 미혹적 표적이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에 자유하시다. 성경에는 엘리사가 물 밑에 가라앉은 도끼를 수면위로 떠오르게 한 일(왕하 6:5∼6),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간 일(마 14:29), 에스겔의 육체가 공중으로 들려 올려진 일(겔 8:3), 사람들이 보는 데 주님의 몸이 공중으로 떠가신 일(행 1:9) 등등 이미 성령으로 세우신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창 1:2), 흙으로 지어진 아담에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기(창 2:7)는 성령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없는 기는 모든 범신론적 미혹의 미소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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