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Anger)
서민(庶民) 경기를 가장 빨리 체감할 수
있는 사람은 택시기사 분들이다.
그들은 날마다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데,
요즘엔 경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그 흔한
정치애기를 해도 손님들이 별 반응도 없고
거의 자포자기(自暴自棄)한 사람처럼
말수가 적어졌다고 한다.
반면에 휴대전화를 통화하다가도
갑자기 흥분하고 짜증내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요즘 자주 보는 풍경이라고 덧붙인다.
문제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처럼,
어떤 원인이 되었든 화(anger)란
전염성이 강해서 누군가에게 제 2차
피해를 주게 되는데 대체로 그 과정에서
약한 사람이나 가족에게 옮겨지면서
가정폭력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물리적인 피해보다
더 심각한 일은 과거든 현재든
화나는 시점과 대상보다는 ‘화’라는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는 일이다.
만약에 그것을 신속하게 처리(處理)하지 않으면
그 사람과 그 일과는 비할 수 없이 소중한
자신의 인생이 허비되는 동시에
평생 운명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이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화(anger)’라는 감정을
어떻게 제어하고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결정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화는 인생의 난제가 되고 있다.
작년에 어떤 일로 오랫동안 화를 감당치
못하고 있을 때에 아내가 먼저 읽었던 틱낫한의
<화,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를 읽으면서,
화란 단순한 감정에서 끝나지 않고
모든 죄(罪)를 짓게 하는 가장 위험한
이단아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던 것이다.
화(anger)란 시기와 절망, 두려움의 복합체로
모든 불행(不幸)의 근원이 되는 것이므로,
그것을 안고 사는 것은 독(毒)을 품고
사는 사람처럼 무서운 일이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화를
과연 어떤 방법으로 처리해야만 한단 말인가.
먼저 화에 대한 태도(態度)부터 짚어 보자.
화는 바로 표현하는 것이 능사일까
아니면 태연한 척하는 것이 해결에 도움이 될까.
틱낫한은 화는 옮기는 것도 문제지만
참는 일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기에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은
화라는 감정은 신체 장기(臟器)처럼 어느 덧
자신의 일부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화가 나면 먹는 것으로,
운동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든지
아니면 또 친구를 만나 위로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
일시적인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그런 행동들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므로 좀 더 근본적인 방법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화가 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화(anger)와 자신을 분리시키는 일이다.
만약에 이유 없이 갑자기 어떤 사람에게 맞거나
욕을 얻어먹었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
그런 일에 화를 내는 일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화 자체가 아니라 자신을
화나게 했던 대상(對象)에게
원인을 따지는 순간부터,
‘화’라는 현상 속에 개입되면서
객관적이었던 화가 주관적으로 바뀌면서
상대에게 미움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한다.
‘당신이 뭔데 나를 화나게 하는 거야’
‘당신은 그렇게 잘 난 사람인가’
‘나를 우습게 아는구먼,
두고 보자 가만있지 않을 거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시작되었건만
갈수록 처음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상황들이
연출되며 ‘화’는 이미 인격체가 되어
피해(被害)의식과 열등감까지
누적시키면서 고통을 주기 시작한다.
바로 이 때 중요한 점은
화와 자아를 분리(分離)시킴으로
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화는 화고
‘나는 그 화와 아무 상관이 없다.’ 라는
마음으로 ‘화’나게 했던 객관적인
현상 속에 자신을 더 이상
개입(介入)시켜서는 안 된다.
어느 글을 보니,
화도 중립(中立)이요
괴로움도 중립이라고 했다.
그 자체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
순진하게 금방 감정에 개입되면서
한 쪽으로 치우쳐 고통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라는 말을
나는 오래 전부터 이렇게 적용했다.
‘화는 화요, 나는 나요’
허나 말이 쉽지 현실 속에서 화가 날 때,
이렇게 분리하기가 쉽지 않기에 늘
명상(瞑想)이 필요한 것이다.
그동안 나는 성인들의 명상은
인생과 철학에 관한 묵상인줄 알았는데,
최근에 어떤 성인의 책을 읽으며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은 그들의 묵상은 자신 안에
있는 미움과 분노를 처리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도하면 할수록 자신 안에 있는 것은
선이 아니라 분노(憤怒)임을 알고,
스스로 파산자라 선언하고 비움과
겸손의 삶을 살다간 사람들이 성인이었다.
이렇게 화가 날 때
화와 자신을 분리하는 일이
첫 번째 할 일이라면 그 다음으로는
마음 관리(管理)와 용서에 있다.
요즘 사람들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열 받네!’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렇다면 정말로 요즘 세상은 화를 참지
못할 정도로 악한 시기일까하는 의문도 가지만
전문가들은 화내는 일은 훈련하기 나름이라고 했다.
곧 화가 날 때 화의 존재(存在)를
인정해 준 후 아이처럼 세밀하게 다루면
얼마든지 조기에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면
우리는 화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인이 되어 화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물론 상황에 따라 화를 낼 때는
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화(Anger)는
약(藥)처럼 잘 사용해야 한다.
대체로 화가 나는 것은 상대의 부당성도
물론 크겠지만 많은 부분에서는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나
오해로 인해 화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유능한 사람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기에 문제가 없다.
-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나는 항상 옳기에 다른 뜻을 가진 사람이 비정상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精神)건강은 좋을지 몰라도,
관계(關係)건강은 빵점이므로
가만있어도 화 날 일만 쌓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관리란 밭가는 농부처럼
이러한 아집과 교만의 풀을 뽑고
그리고 용서(容恕)라는 씨를 뿌려야 한다.
용서란 상대를 이해하려는 모습에서 출발된다.
상대가 왜 그런 행동(行動)을 했을까하고
상황을 돌이켜 보고 다시 한 번
상대의 입장(立場)에서 생각해 보는 일이다.
그러면 분노는 연민의 정으로 바뀌고,
연민(憐憫)은 이해로 이해는
결국 축복(祝福)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복(福) 받는 사람들의 특징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복 받을 그릇 즉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 상대에 대한 그러한 마음들은
자신을 향한 용서의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은
정죄한 사람들의 두 얼굴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눈앞의 이기적인 욕망 앞에
아무 갈등 없이 무릎을 꿇기에,
약속은 허무하게 무너지며
두 얼굴로 살아가기에
용서가 필요한 자는 자신이다.
또 하나 마음관리에서
짚고 넘어야 할 일은 어떤 상황이든
그 일은 그 자체로 끝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에 그것을 대인관계까지 이어오면
화의 노예가 아니라
화의 화신(化身)이 될 수가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화’라는 잘못과 ‘대상’이라는
관계를 연류 시켜서는 안 되다는 점이다.
어떤 ‘화’든지 빨리 떨어버려야
자신도 건강하고 관계도
건강하여 어떤 일이든
쉽게 대처 할 수 있게 된다.
주여,
저는 어리석게
내가 화를 내는 것은
세상과 돈에 눈이 먼 사람들
탓으로만 돌렸는데,
이제 보니
내 안에 이렇게 많은
분노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자신이 곧
분노임을 깨닫고
당신 앞에 엎드립니다.
날마다 자신의
실체를 보게 하시어,
저들과 원수(怨讐)가 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祝福)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2007년 1월 14일 강릉에서 피러한이 보냅니다.
사진허락작가ꁾ 심영권님 서락샘님 크로스맵사이트 해와달사이트
^경포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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