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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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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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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필로 쓰는 최완택목사의 민들레교회 이야기 제 629호 중에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사랑하는 민들레 자매・형제 여러분.
절기가 어느새 여름의 마지막 절기인 대서(大暑, 7월 23일)에 들어 있습니다.
기상대의 발표에 의하면 이제 장마도 대충 끝나가고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8월 8일이 입추(立秋)이긴 합니다만 앞으로 15일 가량은 무더위 가운데 살아야 될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는 더위를 이야기할 때 삼복(三伏)을 말하는 데 올해 초복이 7월 15일이었고 말복이 8월 14일이니 우리는 시방 삼복의 한가운데 있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때부터 휴가를 얻어 집을 떠나 시원한 곳을 찾아갑니다. 휴가는 ‘자유’로 가는 길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육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마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갈라디아 5장 13-14절)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2007년 한여름을 살아가는 화두(話頭)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사랑하여라”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사랑하여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을 받잡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사랑하여라”
과연 그대는 그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아, 나는 ‘내 몸같이’라는 말이 무섭습니다. 나는 천만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내 몸이 그대 몸이 될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네 이웃을 ‘네 몸같이’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방이 춥거든 불을 때게. 장작 있는 곳은 알고 있지?” 그러는데도 요한 모리츠는 여전히 문을 등진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고해를 하듯 사건의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 하지 않고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 수잔나가 마을과 시내의 중간지점에 있는 길 복판에 혼자 앉아 있다는 말을 하자 트라이안 코루카는 벌떡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차를 몰아 요한 모리츠와 같이 길을 떠났다. 30분쯤 후에 그들이 돌아왔다.
다시 발코니 앞에 차자 멎자 수잔나를 팔에 안은 요한 모리츠가 나타났다. 검사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트라이안의 부모가 양쪽에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처녀는 잠자는 아이처럼 모리츠의 팔에 늘어져 있었다. 젖어서 몸이 찰싹 달라붙은 하늘색 옷이 보였다. 트라이안이 방에 들어가자 검사가 뒤따라갔다.
“흠뻑 젖었군!” 검사가 말하자 트라이안은 낯을 붉히며 흙이 잔뜩 묻은 신발을 쳐다보았다. 옷에서 물이 골을 지어 흘러내려 마루를 적시고 있었다. 모리츠가 혼자 여자를 안아 차에 태웠기 때문에 그는 괜히 옷만 적신 셈이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 없는데도 그는 여전히 모리츠 곁에 서서 비를 맞았던 것이다.
자기가 한 짓을 되새겨 보며 트라이안은 만약 앞날에 또 이런 환경에 놓이게 되면 자기는 역시 지금처럼 행동하리라고 혼자 다짐했다. 실지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웃의 고통을 나누어 가진다는 의미에서 그건 필요한 행위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신부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도 흠뻑 젖어 있었다. 이마와 뺨과 수염에서 빗물이 흘러내렸다. 그도 트라이안처럼 아무런 필요가 없는데도 요한 모리츠와 함께 빗속에서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할 적에 하느님도 이처럼 무익한 행동을 하셨을 것이고 실지로 유용하지 않은 많은 사물을 창조하셨는데, 그 무익한 행동과 그 무용한 물건들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라고 트라이안은 생각했다. (비르질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에서)
이 글은 바르질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에서 그렇게 중요한 대목은 아닙니다. 그러나 ‘25시’(최후의 시간인 ‘24시’ 다음에 오는 시간, 즉 메시아의 구원으로도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시간인 ‘25시’)를 처음으로 말하는 작품속의 소설가가 트라이안 코류카입니다.
그는 소설 ‘25시’에서 억울하게 포로수용소를 전전해온 요한 모리츠를 대신하여 몸으로, 글로 진정서를 쓰면서 죽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낡은 소설 ‘25시’이지만, 나는 50여년전 중학생 때부터 이 소설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잘 살펴보면 인류는 여전히 헤어날 수 없는 거대한 포로수용소(지구 전체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상태가 아닙니까?
내가 ‘25’시 소설의 이 대목을 좋아하는 것은, 트라이안 코루카가 실지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요한 모리츠 곁에 서서 비를 맞으며 서 있었고, 후에 자기가 한 짓을 되새겨 보며 만약 앞날에 또 이런 환경에 놓이게 되면 자기는 역시 지금처럼 ‘무익한 행동’을 하리라고 다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성경에 “네 이웃을 ‘네 몸같이’사랑하여라”고 하셨는데, 나는 이 말씀을 트라이안 코루카의 말을 빌려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시방 고통을 겪으며 비를 맞고 있는 그 사람 곁에 서서 비를 맞고 있는 것이다. 실지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웃의 고통을 나누어 가진다는 의미에서 꼭 필요한 행위이다.”
이웃의 곁에 서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길의 첫걸음입니다. 이 첫걸음부터 걸음을 자꾸 옮기게 되면 트라이안 코루카처럼 그 이웃을 위하여 몸으로 진정서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민들레 정오 기도 연대’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대상과 함께 같은 시간에 그 옆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부르면서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조지훈, 민들레 꽃)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사도 바울로는, 모든 율법을 “네 이웃을 ‘네 몸같이’사랑하여라”하신 한 마디 말씀으로 요약했습니다.(갈라디아 5장 14절)
나는 그대를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다만 그대 곁에 서겠습니다. “주가 베푸신 중에 / 사람에게 이웃을 주신 / 그 뜻 하나만을 헤아리며”(김남조, ‘이 이웃들을’) 그대 곁에 서겠습니다.
아아. 그대 또한 내 몸처럼 사랑하고, 그대 또한 나를 그대 자신처럼 사랑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사랑하는 민들레 자매・형제 여러분.
절기가 어느새 여름의 마지막 절기인 대서(大暑, 7월 23일)에 들어 있습니다.
기상대의 발표에 의하면 이제 장마도 대충 끝나가고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8월 8일이 입추(立秋)이긴 합니다만 앞으로 15일 가량은 무더위 가운데 살아야 될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는 더위를 이야기할 때 삼복(三伏)을 말하는 데 올해 초복이 7월 15일이었고 말복이 8월 14일이니 우리는 시방 삼복의 한가운데 있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때부터 휴가를 얻어 집을 떠나 시원한 곳을 찾아갑니다. 휴가는 ‘자유’로 가는 길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육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마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갈라디아 5장 13-14절)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2007년 한여름을 살아가는 화두(話頭)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사랑하여라”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사랑하여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을 받잡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사랑하여라”
과연 그대는 그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아, 나는 ‘내 몸같이’라는 말이 무섭습니다. 나는 천만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내 몸이 그대 몸이 될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네 이웃을 ‘네 몸같이’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방이 춥거든 불을 때게. 장작 있는 곳은 알고 있지?” 그러는데도 요한 모리츠는 여전히 문을 등진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고해를 하듯 사건의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 하지 않고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 수잔나가 마을과 시내의 중간지점에 있는 길 복판에 혼자 앉아 있다는 말을 하자 트라이안 코루카는 벌떡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차를 몰아 요한 모리츠와 같이 길을 떠났다. 30분쯤 후에 그들이 돌아왔다.
다시 발코니 앞에 차자 멎자 수잔나를 팔에 안은 요한 모리츠가 나타났다. 검사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트라이안의 부모가 양쪽에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처녀는 잠자는 아이처럼 모리츠의 팔에 늘어져 있었다. 젖어서 몸이 찰싹 달라붙은 하늘색 옷이 보였다. 트라이안이 방에 들어가자 검사가 뒤따라갔다.
“흠뻑 젖었군!” 검사가 말하자 트라이안은 낯을 붉히며 흙이 잔뜩 묻은 신발을 쳐다보았다. 옷에서 물이 골을 지어 흘러내려 마루를 적시고 있었다. 모리츠가 혼자 여자를 안아 차에 태웠기 때문에 그는 괜히 옷만 적신 셈이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 없는데도 그는 여전히 모리츠 곁에 서서 비를 맞았던 것이다.
자기가 한 짓을 되새겨 보며 트라이안은 만약 앞날에 또 이런 환경에 놓이게 되면 자기는 역시 지금처럼 행동하리라고 혼자 다짐했다. 실지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웃의 고통을 나누어 가진다는 의미에서 그건 필요한 행위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신부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도 흠뻑 젖어 있었다. 이마와 뺨과 수염에서 빗물이 흘러내렸다. 그도 트라이안처럼 아무런 필요가 없는데도 요한 모리츠와 함께 빗속에서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할 적에 하느님도 이처럼 무익한 행동을 하셨을 것이고 실지로 유용하지 않은 많은 사물을 창조하셨는데, 그 무익한 행동과 그 무용한 물건들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라고 트라이안은 생각했다. (비르질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에서)
이 글은 바르질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에서 그렇게 중요한 대목은 아닙니다. 그러나 ‘25시’(최후의 시간인 ‘24시’ 다음에 오는 시간, 즉 메시아의 구원으로도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시간인 ‘25시’)를 처음으로 말하는 작품속의 소설가가 트라이안 코류카입니다.
그는 소설 ‘25시’에서 억울하게 포로수용소를 전전해온 요한 모리츠를 대신하여 몸으로, 글로 진정서를 쓰면서 죽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낡은 소설 ‘25시’이지만, 나는 50여년전 중학생 때부터 이 소설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잘 살펴보면 인류는 여전히 헤어날 수 없는 거대한 포로수용소(지구 전체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상태가 아닙니까?
내가 ‘25’시 소설의 이 대목을 좋아하는 것은, 트라이안 코루카가 실지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요한 모리츠 곁에 서서 비를 맞으며 서 있었고, 후에 자기가 한 짓을 되새겨 보며 만약 앞날에 또 이런 환경에 놓이게 되면 자기는 역시 지금처럼 ‘무익한 행동’을 하리라고 다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성경에 “네 이웃을 ‘네 몸같이’사랑하여라”고 하셨는데, 나는 이 말씀을 트라이안 코루카의 말을 빌려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시방 고통을 겪으며 비를 맞고 있는 그 사람 곁에 서서 비를 맞고 있는 것이다. 실지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웃의 고통을 나누어 가진다는 의미에서 꼭 필요한 행위이다.”
이웃의 곁에 서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길의 첫걸음입니다. 이 첫걸음부터 걸음을 자꾸 옮기게 되면 트라이안 코루카처럼 그 이웃을 위하여 몸으로 진정서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민들레 정오 기도 연대’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대상과 함께 같은 시간에 그 옆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부르면서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조지훈, 민들레 꽃)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사도 바울로는, 모든 율법을 “네 이웃을 ‘네 몸같이’사랑하여라”하신 한 마디 말씀으로 요약했습니다.(갈라디아 5장 14절)
나는 그대를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다만 그대 곁에 서겠습니다. “주가 베푸신 중에 / 사람에게 이웃을 주신 / 그 뜻 하나만을 헤아리며”(김남조, ‘이 이웃들을’) 그대 곁에 서겠습니다.
아아. 그대 또한 내 몸처럼 사랑하고, 그대 또한 나를 그대 자신처럼 사랑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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