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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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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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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의 정체
몇 년 전 글루미 선데이라는 영화를 아주 흥미롭게 본 기억이 난다."당신을 잃느니 반쪽이라도 갖겠어." 라고 말하며 한 여자(일로나)의 정신과 육체를 공동으로 소유함에 합의하는 두 사람(자보와 안드라스)과 그 반쪽 사랑을 완전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여인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추하지 않게 잘 묘사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영화는 배경 음악인 글루미 선데이 (Gloomy Sunday)의 전설적인 실화...즉 수백 명 이상을 자살에 이르게 한 역사적 사실이 더욱 흥미를 유발시킨 영화이기도 했다. 그렇다. 음악은 군중들을 세뇌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의 하나가 아닌가...
기독교인들 역시 알게 모르게 찬송가에 마인드 컨트롤되고 있다는 게 정확한 진실이 되겠다. 그러나 이 찬송가에는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신론자가 작곡한 것도 있고 독일의 신화가 배경이 된 작품도 있다. 기독인들이 잘 모르는 찬송가에 숨겨진 비밀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1)무신론자가 작곡한 찬송가
[94장:예수님은 누구신가]
* 프랑스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가 1752년 작곡한 것
*주지하는바 루소는 대표적인 무신론자(범신론자)였지 않은가?....기독인 여러분들은 무신론자가 작곡한 노래를 열심히도 부르고 있다.
2)독일의 신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
[431장:내 주여 뜻대로]
*이 노래는 독일의 작곡가 베버의 오페라 중 "마탄의 사수"서곡이 되겠다.
*독일의 신화와 예수의 뜻은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3)유럽제국의 국가
[245장:시온성과 같은 교회]
*여러분은 오늘도 열심히 독일 국가를 목청껏 부르고 있는 셈이다.
*유럽 사람들에게 이 노래는 엄청난 악몽을 떠 올리게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치가 독일 주변 국가를 점령할 때 부른 독일국가이기 때문에 그 노래만 들어도 악몽 같은 세계대전이 생각나서 그런다고 한다.
[79장:피난처 있으니]
*이 곡은 영국국가가 되겠다.
[77장:전능의 하나님]
*제정 러시아의 국가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 남의 나라 국가는 왜 그렇게 목청껏 불러야할까?
4)민요
[545장:하늘가는 밝은길이]....이외 [533장]
*아일랜드의 세속민요
[430장:내 선한 목자]
*벨기에의 세속민요
[338장:천부여 의지 없어서]....이외 [545장,78장,149장,173장]
*영국의 민요
[28장:복의 근원 강림하사]....이외 [229장,190장,405장]
*미국의 민요
[125장:천사들의 노래가]....이외 [160장,520장]
*프랑스 민요
[14장:구세주를 아는 이들]....이외 57장,309장
*독일 민요
[32장,39장,517장]
*네델란드 민요
[29장]
*스페인 민요
[515장]
*웨일즈 민요
기독인 여러분들은 우리나라 민요는 몰라도 유럽 각국의 민요는 열심히도 불러주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웃기지도 않는 것은 338장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미국 소방대원 행진곡이라 한다. 이 노래는 남북전쟁 때에는 북군이 "남군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신 사과나무에 목을 달고"라는 가사로 부른 전투곡이기도 하였다 한다. 그대들이 목 놓아 부르며 저주하고 있는 그 마귀의 정체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5)연애 노래가 찬송가로 둔갑한 경우
[145장: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는 경건하고 숙연한 분위기의 수난절 찬송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 노래는 원래 17세기의 독일 대중가요였다고 하는 데 원 가사를 아래에 인용하겠다.
<<내 마음이 안절부절이네, 그 처녀 때문일세
나는 아주 안절부절하고 있네. 내 마음은 중병이 들었네
낮이고 밤이고 안식이 없고 언제나 탄식뿐일세
한숨과 눈물뿐이고 슬픔 속에서 자포자기 상태에 있네
그녀의 마음을 녹일 수만 있다면
내가 곧바로 다시 건강해질 것이라고...>>
*소위 "노가바"가 되겠다.
현행 찬송가 가사를 분석해 보면 "성도의 삶"이 41.5%로 가장 많고, "성자" 15.6%, "예배" 12.9%, "성부"와 "성령"이 합하여 3.3% 순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성도의 삶"은 우리의 찬양과 헌신과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에게 베풀겠다는 의미의 가사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내용이 더 많다. 죄 용서함 받고, 은혜도 받고, 사랑도 받고, 복도 받고, 위로도 받고, 재물도 받고, 건강도 받고, 소원도 이룬다는 내용의 가사가 많이 있는 것이다.
이웃의 아픔과 민족의 고난은 내가 알 바 아니요, 오직 내가 받을 복과 죄 사함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신앙과 기복적 신앙에 기초한 현행 찬송가를 부르는 한국 기독인들의 신앙은 자연히 나 외에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참 제자 됨과 공동체성이 결여되고, 역사와 민족의 요구에 무관심한 탈 역사성을 나타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구원받은 이들의 사랑과 헌신과 나눔, 더불어 살아가는 구체적인 신앙적 삶의 모습은 없고 피안적, 탈 역사적인 개인 영혼 구원의 신앙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부르고 있는 찬송가가 이렇게 개인주의적이요 기복적인 신앙을 담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현행 찬송가가 우리 한국인의 삶의 자리와 거리가 먼 서양의 17세기 경건주의와 19세기 근본주의 신학이 발흥할 때 만들어진 찬송가들이기 때문이다. 17, 19세기 신앙전통은 개인의 구원과 내적 체험을 강조하며, 문자적이고 교조적인 획일적 신앙관을 절대화하는, 다분히 그리스도 신앙의 한 부분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신앙관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지녔던 신앙의 근본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신앙을 기준으로 삼아 이 땅의 문화 유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비역사적인 신앙관을 주입시켰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정리를 하면서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용기를 주는 찬송은 왜 없을까?
*민족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는 찬송은 왜 없을까?
*농촌교회 교인을 위한 찬송은 왜 없을까?
*민족절기 때 부를 수 있는 찬송은 왜 없을까?
*한국의 자연을 느끼고 보존하는 찬송은 왜 없을까?
*일터에서 부르는 찬송은 왜 없을까?
*여성을 위한 찬송은 왜 없을까?
*어린이, 청소년, 젊은이들을 위한 찬송은 왜 없을까?
사족: 현 미국장로교의 찬송가 346장은 한국민요 아리랑(Arirang)이라고 하는데 그 가사는 골로새서 1장 15∼18절의 내용을 시로 지어 찬송가로 만들었다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선 왜 우리 민요가 찬송가로 채택되는 경우는 전혀 없을까?
몇 년 전 글루미 선데이라는 영화를 아주 흥미롭게 본 기억이 난다."당신을 잃느니 반쪽이라도 갖겠어." 라고 말하며 한 여자(일로나)의 정신과 육체를 공동으로 소유함에 합의하는 두 사람(자보와 안드라스)과 그 반쪽 사랑을 완전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여인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추하지 않게 잘 묘사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영화는 배경 음악인 글루미 선데이 (Gloomy Sunday)의 전설적인 실화...즉 수백 명 이상을 자살에 이르게 한 역사적 사실이 더욱 흥미를 유발시킨 영화이기도 했다. 그렇다. 음악은 군중들을 세뇌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의 하나가 아닌가...
기독교인들 역시 알게 모르게 찬송가에 마인드 컨트롤되고 있다는 게 정확한 진실이 되겠다. 그러나 이 찬송가에는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신론자가 작곡한 것도 있고 독일의 신화가 배경이 된 작품도 있다. 기독인들이 잘 모르는 찬송가에 숨겨진 비밀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1)무신론자가 작곡한 찬송가
[94장:예수님은 누구신가]
* 프랑스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가 1752년 작곡한 것
*주지하는바 루소는 대표적인 무신론자(범신론자)였지 않은가?....기독인 여러분들은 무신론자가 작곡한 노래를 열심히도 부르고 있다.
2)독일의 신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
[431장:내 주여 뜻대로]
*이 노래는 독일의 작곡가 베버의 오페라 중 "마탄의 사수"서곡이 되겠다.
*독일의 신화와 예수의 뜻은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3)유럽제국의 국가
[245장:시온성과 같은 교회]
*여러분은 오늘도 열심히 독일 국가를 목청껏 부르고 있는 셈이다.
*유럽 사람들에게 이 노래는 엄청난 악몽을 떠 올리게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치가 독일 주변 국가를 점령할 때 부른 독일국가이기 때문에 그 노래만 들어도 악몽 같은 세계대전이 생각나서 그런다고 한다.
[79장:피난처 있으니]
*이 곡은 영국국가가 되겠다.
[77장:전능의 하나님]
*제정 러시아의 국가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 남의 나라 국가는 왜 그렇게 목청껏 불러야할까?
4)민요
[545장:하늘가는 밝은길이]....이외 [533장]
*아일랜드의 세속민요
[430장:내 선한 목자]
*벨기에의 세속민요
[338장:천부여 의지 없어서]....이외 [545장,78장,149장,173장]
*영국의 민요
[28장:복의 근원 강림하사]....이외 [229장,190장,405장]
*미국의 민요
[125장:천사들의 노래가]....이외 [160장,520장]
*프랑스 민요
[14장:구세주를 아는 이들]....이외 57장,309장
*독일 민요
[32장,39장,517장]
*네델란드 민요
[29장]
*스페인 민요
[515장]
*웨일즈 민요
기독인 여러분들은 우리나라 민요는 몰라도 유럽 각국의 민요는 열심히도 불러주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웃기지도 않는 것은 338장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미국 소방대원 행진곡이라 한다. 이 노래는 남북전쟁 때에는 북군이 "남군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신 사과나무에 목을 달고"라는 가사로 부른 전투곡이기도 하였다 한다. 그대들이 목 놓아 부르며 저주하고 있는 그 마귀의 정체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5)연애 노래가 찬송가로 둔갑한 경우
[145장: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는 경건하고 숙연한 분위기의 수난절 찬송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 노래는 원래 17세기의 독일 대중가요였다고 하는 데 원 가사를 아래에 인용하겠다.
<<내 마음이 안절부절이네, 그 처녀 때문일세
나는 아주 안절부절하고 있네. 내 마음은 중병이 들었네
낮이고 밤이고 안식이 없고 언제나 탄식뿐일세
한숨과 눈물뿐이고 슬픔 속에서 자포자기 상태에 있네
그녀의 마음을 녹일 수만 있다면
내가 곧바로 다시 건강해질 것이라고...>>
*소위 "노가바"가 되겠다.
현행 찬송가 가사를 분석해 보면 "성도의 삶"이 41.5%로 가장 많고, "성자" 15.6%, "예배" 12.9%, "성부"와 "성령"이 합하여 3.3% 순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성도의 삶"은 우리의 찬양과 헌신과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에게 베풀겠다는 의미의 가사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내용이 더 많다. 죄 용서함 받고, 은혜도 받고, 사랑도 받고, 복도 받고, 위로도 받고, 재물도 받고, 건강도 받고, 소원도 이룬다는 내용의 가사가 많이 있는 것이다.
이웃의 아픔과 민족의 고난은 내가 알 바 아니요, 오직 내가 받을 복과 죄 사함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신앙과 기복적 신앙에 기초한 현행 찬송가를 부르는 한국 기독인들의 신앙은 자연히 나 외에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참 제자 됨과 공동체성이 결여되고, 역사와 민족의 요구에 무관심한 탈 역사성을 나타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구원받은 이들의 사랑과 헌신과 나눔, 더불어 살아가는 구체적인 신앙적 삶의 모습은 없고 피안적, 탈 역사적인 개인 영혼 구원의 신앙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부르고 있는 찬송가가 이렇게 개인주의적이요 기복적인 신앙을 담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현행 찬송가가 우리 한국인의 삶의 자리와 거리가 먼 서양의 17세기 경건주의와 19세기 근본주의 신학이 발흥할 때 만들어진 찬송가들이기 때문이다. 17, 19세기 신앙전통은 개인의 구원과 내적 체험을 강조하며, 문자적이고 교조적인 획일적 신앙관을 절대화하는, 다분히 그리스도 신앙의 한 부분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신앙관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지녔던 신앙의 근본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신앙을 기준으로 삼아 이 땅의 문화 유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비역사적인 신앙관을 주입시켰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정리를 하면서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용기를 주는 찬송은 왜 없을까?
*민족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는 찬송은 왜 없을까?
*농촌교회 교인을 위한 찬송은 왜 없을까?
*민족절기 때 부를 수 있는 찬송은 왜 없을까?
*한국의 자연을 느끼고 보존하는 찬송은 왜 없을까?
*일터에서 부르는 찬송은 왜 없을까?
*여성을 위한 찬송은 왜 없을까?
*어린이, 청소년, 젊은이들을 위한 찬송은 왜 없을까?
사족: 현 미국장로교의 찬송가 346장은 한국민요 아리랑(Arirang)이라고 하는데 그 가사는 골로새서 1장 15∼18절의 내용을 시로 지어 찬송가로 만들었다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선 왜 우리 민요가 찬송가로 채택되는 경우는 전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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