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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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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
본문: 누가복음 11: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오늘 21세기에 세계 인구 절반에 가까운 28억 명이 하루 생계비 2달러 미만이고,그 중 11억 명은 하루 생계비 1달러 미만인 절대빈곤층이라고 밝혔습니다. 세계식량기구(FAO)에 따르면 인류는 이미 120억 명이 먹고 살 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해 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아선생에서 허덕이고 있는 그들은 왜 먹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인간의 끝없는 탐욕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온 인류가 공존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법을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명하신 그 앞에 『누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는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나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하라 하시지 않고 『우리에게』라는 공동체가 그 대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는,인간에게 필요한 양식은 축적의 대상이 아니라 나눔과 공존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이입니다.
두 번째는,온 인류의 생존과 공존은 『밥상공동체』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밥상에 나와 우리 가족만 앉을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과 죽음에 내몰리는 이웃도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밥상공동체적인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명령입니다.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이란 책을 보면 그 집안 가훈 중에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했습니다. 덕을 베풀고 몸으로 실천합시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매일 먹는 양식을 뜻합니다. 이는 영혼의 양식 즉 영혼의 생명을 키워가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와 성만찬을 포함한다고 확대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선은 육신을 위한 먹을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 간구문의 첫 번째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점입니다. 이는 기독교란 영혼만이 선하고 육신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사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신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값진 선물입니다. 그러하기에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구하는 양식은 참으로 정당한 일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생명의 소중함을 기억해야 하며, 나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어야 합니다. 이는 곧 생명의 주인이신 주께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날 일용할 양식』이라고 번역했으나, 오늘 날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이는 하루하루의 양식을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오늘 먹을 것이 있다면 족한 줄 알고 감사함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정신은 자기의 창고만을 채워 남들의 양식을 빼앗고 욕심스럽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양식을 구하되, 오늘 먹을 것이 있다면 족한 줄 알고 감사히 살아야 합니다.
한 구역모임에서 성도들이 서로 교제를 하다가, 지난 신앙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모임에는 신앙생활을 20-30년 씩 오래한 성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이상한 것은 지난 30년간 들었던 설교 중에서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1년에 100번이 넘는 설교를 들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 말을 듣고 다른 성도도 대답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1, 2주도 기억하기 버겁습니다. 사실 요새는 이런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가 듭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묵묵히 듣고 이던 한 성도가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중요한 사실을 잊고 계십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쩔 땐 바로 전날 먹었던 메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억은 못해도 그 음식들이 있었기에 제가 살아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지금 건강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우리가 비록 모든 말씀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들었던 말씀들은 모두 우리가 영혼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말씀마다 최선을 다해 듣고 실천을 하는데 집중하십시오. 콩나물을 키워보셨습니까? 매일 물을 부을 때는 그냥 흘러 내려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매일 콩은 조금씩 자라납니다.
말씀의 맛은 성장의 능력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은 성장합니다. 성장을 통해 번식하고 종적을 유지합니다. 육신적인 성장과 같이 영적인 성장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적인 성장을 해야 합니다. 밥을 먹으면 건강을 유지하고 자라듯이 성도들도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먹고 건강을 유지하며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씨는 싹을 틔워야 하고 새싹은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믿음의 씨앗이 싹을 내고 자라서 꽃과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5)
이 모든 일은 말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과 권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영의 양식이요, 생명의 씨입니다. 생명의 씨는 심겨지기만 하면 싹을 티우고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13:11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죄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말씀으로 변화되어 성장하고 성숙한 성도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영의 양식인 말씀을 사모하고 많이 읽고 듣는 일에 열심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들을 때 집중하여 듣고 말씀 속에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지금 세상 사람들이 생명의 양식, 영의 양식을 외면하고, 허탄하고 썩어질 것을 구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2)
어떤 사람은 설교를 뭐 그리 자주 들어야 하느냐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설교보다 행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행함이 중요하다는 말은 옳은 말이며 또 그것이 말씀의 열매이기에 열매 맺지 아니하는 말씀은 무가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열매도 맺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밥이 한 번 먹고 끝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영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도 한 번 먹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주리고 영혼이 메말르고 영양실조에 걸려 영의 일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과 힘으로만 살게 됩니다.
육의 양식은 포만이 되면 배가 불러 못 먹는데 영의 양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먹을수록 맛이 있고 진하고 새로운 맛을 느낍니다. 그 뿐 아니라 하늘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갖게 되고 기쁨을 얻습니다. 그래서 영의 양식은 매일 먹어야 합니다. 따라서 육의 양식만 찾지 말고, 영의 양식을 찾고,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마24:45)
생명의 양식을 - 복음성가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마음이 빈 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보시사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주님이 해변에서 떡을 떼심 같이
하늘의 양식을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보시사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성경 레위기11장과 신명기14장 2- 21절에 보면 먹지 말아야 할 음식과 부정한 짐승에 관해 나옵니다. 이것은 육의 양식이던, 영의 양식이던 함부로 먹거나, 아무 교리나 말씀을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먹는 것을 신중하게 선별하여야 합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합니다.(요일4:1, 롬12:2)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레10:10)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9)
성경에 특별한 음식에 관련된 사건이 여러 번 나옵니다. 둘째아들 야곱이 대접하는 별미를 아버지 이삭이 먹고 축복한 사건이 있습니다(창 27: 17~19).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시장할 때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떡을 먹고도 죽지 않는 사건이 있었으며(삼상 21: 1~6),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광야를 통과하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기도 했지요(출16: 35). 선지자 엘리야는 까마귀를 통해 특별한 음식을 제공받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왕상17: 4~6).
요한복음 6장 1- 15절에 보면 벳새다 들녘에서 한 어린이가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린이와 여자를 제외한 남자만 5,000여 명을 먹이신 사건이 나옵니다. 아마 어린이와 여자가 그곳에 더 많았겠지요? 남은 부스러기만으로도 열두 바구니를 채워 거두었으니 이 음식이야말로 특별한 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 6:11)
성경에서 떡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이제 머지않아 설날(구정)을 맞이하게 됩니다. 설날에는 온 가족이 함께 먹을 특별한 음식을 만드느라 오늘 집집마다 모두 분주하게 지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요6: 35).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 33). 진정으로 특별한 음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는 줄로 믿습니다.
육신이 살아 있으려면 숨을 쉬어야 하고, 음식을 먹어야 하고, 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이 살아 있으려면 기도(찬송: 시150:6)를 해야 하고, 영의 양식을 공급받아야 하고,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기도(찬송)하지 않고, 영의 양식을 먹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영의 사람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 영은 과연 살아있는가 돌아봅시다.
마지막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영의 양식을 갈급하며 찾아 나설 것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아모스8:11)
* 기도: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기르시는 하나님, 쌓아두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구하는 탐욕을 버리게 하옵소서.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케 하시고 남는 자도 없고 부족한 자도 없는 공평한 세상을 이루어 주옵소서. 우리에게 날마다 주시는 양식이 밥상공동체를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영의 양식인 말씀을 사모하고 들음으로 깨달음이 생기고 믿음이 성장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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