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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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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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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택목사의 기독교고전산책 (21)] 개신교 성도들 위한 버나드의 정수
◇하나님의 사랑/성 버나드/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클레르보의 수도원장 버나드(1090∼1153)는 그의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두 세계, 즉 봉건적 가치관의 시대와 도시와 대학이 등장하는 시대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그는 중세의 위대한 신비주의자들 중 최초의 인물이었고, 금욕적 단순성과 개인적 헌신의 새로운 정신을 가르친 지도자였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버나드는 21세에 시토 수도원에 들어갔다. 1097년 시토에 의해 창설된 이 수도회는 수도회 규칙에 따라 학문 대신에 노동, 공동의 기도보다는 개인 기도를 강조하였다. 그들은 겨울에 7시간, 여름에는 6시간을 잤으며, 손으로 하는 일과 묵상과 독서 그리고 예배를 위해 남은 시간을 사용하였다. 이 엄격한 규칙은 큰 성공을 거두어 12세기말까지 수백 개의 시토 수도원이 세워졌다.
버나드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수도원에 들어오게 하는 데 아주 능하였다. 그래서 그가 사람들의 영혼을 낚으러 올 때 어머니는 아들을, 아내는 남편을 숨겼다고 한다. 그는 안락한 세상의 삶에 등을 돌리기를 원하였고, 기도와 자아부정의 삶을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알게 된다고 믿었다. 버나드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자연적 사랑이 기도와 영적 훈련에 의해서 영적인 사랑과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버나드의 대표적 저술들 중 가장훌륭한 부분들을 뽑아 특별히 개신교 성도들을 위해 편집한 것이다. 즉, 버나드의 정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곡을 쓴 단테는 버나드를 아주 높이 평가해 그를 낙원으로의 인도자로 묘사했다. 15세기 플로렌스 인문주의 학자 트라벨사리(Traversari)는 버나드의 아가서 설교가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힘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버금간다고 평가했다. 루터는 말하기를 “나는 버나드를 모든 수도사 중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누구보다도, 심지어 성 도미닉보다도 그를 좋아한다. 그만이 ‘교부’라 일컬음 받을 수 있고, 열심히 연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는 버나드를 모든 작가들 중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매력적으로 설교한 사람으로 사랑한다. 그가 그리스도를 설교한 것은 무엇이든지 따르며, 그가 그리스도께 기도한 믿음 안에서 나도 그리스도께 기도한다”고 했다. 영국에서도 청교도들은 거의 어거스틴만큼 자주 버나드를 인용하고 있다. 존 오웬, 리차드 백스터, 존 프라벨 같은 대표적 청교도들이 모두 버나드를 자주 인용했다.
그러나 버나드의 불후의 명성은 그가 경건 가운데서 열정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눈 사람이라는 데 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버나드는 1153년 8월 분투적인 금욕주의로 인해 죽을 때까지 가장 엄격한 자아부정을 실천하였다. 그의 글은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하나님의 사랑/성 버나드/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클레르보의 수도원장 버나드(1090∼1153)는 그의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두 세계, 즉 봉건적 가치관의 시대와 도시와 대학이 등장하는 시대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그는 중세의 위대한 신비주의자들 중 최초의 인물이었고, 금욕적 단순성과 개인적 헌신의 새로운 정신을 가르친 지도자였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버나드는 21세에 시토 수도원에 들어갔다. 1097년 시토에 의해 창설된 이 수도회는 수도회 규칙에 따라 학문 대신에 노동, 공동의 기도보다는 개인 기도를 강조하였다. 그들은 겨울에 7시간, 여름에는 6시간을 잤으며, 손으로 하는 일과 묵상과 독서 그리고 예배를 위해 남은 시간을 사용하였다. 이 엄격한 규칙은 큰 성공을 거두어 12세기말까지 수백 개의 시토 수도원이 세워졌다.
버나드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수도원에 들어오게 하는 데 아주 능하였다. 그래서 그가 사람들의 영혼을 낚으러 올 때 어머니는 아들을, 아내는 남편을 숨겼다고 한다. 그는 안락한 세상의 삶에 등을 돌리기를 원하였고, 기도와 자아부정의 삶을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알게 된다고 믿었다. 버나드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자연적 사랑이 기도와 영적 훈련에 의해서 영적인 사랑과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버나드의 대표적 저술들 중 가장훌륭한 부분들을 뽑아 특별히 개신교 성도들을 위해 편집한 것이다. 즉, 버나드의 정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곡을 쓴 단테는 버나드를 아주 높이 평가해 그를 낙원으로의 인도자로 묘사했다. 15세기 플로렌스 인문주의 학자 트라벨사리(Traversari)는 버나드의 아가서 설교가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힘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버금간다고 평가했다. 루터는 말하기를 “나는 버나드를 모든 수도사 중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누구보다도, 심지어 성 도미닉보다도 그를 좋아한다. 그만이 ‘교부’라 일컬음 받을 수 있고, 열심히 연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는 버나드를 모든 작가들 중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매력적으로 설교한 사람으로 사랑한다. 그가 그리스도를 설교한 것은 무엇이든지 따르며, 그가 그리스도께 기도한 믿음 안에서 나도 그리스도께 기도한다”고 했다. 영국에서도 청교도들은 거의 어거스틴만큼 자주 버나드를 인용하고 있다. 존 오웬, 리차드 백스터, 존 프라벨 같은 대표적 청교도들이 모두 버나드를 자주 인용했다.
그러나 버나드의 불후의 명성은 그가 경건 가운데서 열정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눈 사람이라는 데 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버나드는 1153년 8월 분투적인 금욕주의로 인해 죽을 때까지 가장 엄격한 자아부정을 실천하였다. 그의 글은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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