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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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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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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필로 쓰는 최완택목사의 민들레교회 이야기
2008.2.24 제 638호 중에서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하느님의 빛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됩니다. 사람끼리만 친교를 나누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있는 모든 생명체가 다 ‘함께 가는 동행’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 하느님의 창조 세계 안의 생명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해 형, 달 누이, 바람 형제, 불 형제, 물 누이, 심지어 죽음까지도 죽음 누이라고 부르며 친교를 이루고 있습니다.
만일 한강 누이, 낙동강 누이를 마구 헤쳐버린다면 강누이들과 이 땅의 생명들은 평화를 이룰 수 없고, 소위 ‘한반도 대운하 건설운운’은 이 땅의 조상들과 또 오고오는 후손들에게 큰 죄를 짓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든지 창조의 원형을 파괴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반역입니다.
만일 하느님의 빛 가운데 살고 있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또 다른 생명들과 친교를 나누지 않고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시방 빛을 등지고 있는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고 우리 환경의 모든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친교가 이루어지면 그 가운데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친교가 이루어지려면 서로 함께 가는 동행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함께 가는 동행’이라고 하면서 모든 일에 제멋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한다면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는 커녕 지옥처럼 괴롭기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함께 가는 동행의 길(道)은 물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물은 본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그 생리입니다. 물 누이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가장 잘 따르고 있습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기에 도에 가깝다.”(노자)
예수께서 사순절 길 떠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8장 33절, 공동번역)
사도 바울은 복음의 축복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하여 ‘자기 모양을 버렸다’고 고백합니다.(고린도전서 9장 19-23절)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貌樣)이 된 것은...(개역)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고전 9장 22절, 새번역)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이 되었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자기 모양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복음의 축복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하여 그랬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사도 바울은 대단한 스타일리스트인데 복음의 축복을 위하여, 코이노니아를 위하여 자기 모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함께 가는 동행의 길’은 자기 모양을 버리고 물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물은 본디 모양이 없었습니다. 그릇따라 환경따라 모양이 만들어지면서 만물을 이롭게 합니다. 우리가 서로서로 물처럼 흐른다면 ‘함께 가는 동행’으로 아름답게 흐르게 될 것입니다.(민)
2008.2.24 제 638호 중에서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하느님의 빛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됩니다. 사람끼리만 친교를 나누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있는 모든 생명체가 다 ‘함께 가는 동행’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 하느님의 창조 세계 안의 생명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해 형, 달 누이, 바람 형제, 불 형제, 물 누이, 심지어 죽음까지도 죽음 누이라고 부르며 친교를 이루고 있습니다.
만일 한강 누이, 낙동강 누이를 마구 헤쳐버린다면 강누이들과 이 땅의 생명들은 평화를 이룰 수 없고, 소위 ‘한반도 대운하 건설운운’은 이 땅의 조상들과 또 오고오는 후손들에게 큰 죄를 짓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든지 창조의 원형을 파괴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반역입니다.
만일 하느님의 빛 가운데 살고 있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또 다른 생명들과 친교를 나누지 않고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시방 빛을 등지고 있는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고 우리 환경의 모든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친교가 이루어지면 그 가운데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친교가 이루어지려면 서로 함께 가는 동행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함께 가는 동행’이라고 하면서 모든 일에 제멋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한다면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는 커녕 지옥처럼 괴롭기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함께 가는 동행의 길(道)은 물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물은 본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그 생리입니다. 물 누이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가장 잘 따르고 있습니다.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기에 도에 가깝다.”(노자)
예수께서 사순절 길 떠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8장 33절, 공동번역)
사도 바울은 복음의 축복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하여 ‘자기 모양을 버렸다’고 고백합니다.(고린도전서 9장 19-23절)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貌樣)이 된 것은...(개역)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고전 9장 22절, 새번역)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이 되었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자기 모양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복음의 축복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하여 그랬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사도 바울은 대단한 스타일리스트인데 복음의 축복을 위하여, 코이노니아를 위하여 자기 모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민들레 식구 여러분
‘함께 가는 동행의 길’은 자기 모양을 버리고 물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물은 본디 모양이 없었습니다. 그릇따라 환경따라 모양이 만들어지면서 만물을 이롭게 합니다. 우리가 서로서로 물처럼 흐른다면 ‘함께 가는 동행’으로 아름답게 흐르게 될 것입니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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