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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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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4.9.2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어제 내일 그리고 우리
막131-2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내려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사람이 희망하는 도시입니다. 권력과 욕망을 꽃 피울 수 있는, 요즘으로 치면 서울의 강남과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긴 내 노라 하는 이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엔 성전 당국자들(종교기득권)과 정치 귀족들, 권력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머무를 직장이나 집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항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예수의 말에 귀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예루살렘의 모든 기득권층이 예수를 주시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언제 그를 공격하여 예수를 쫓아낼까 궁리하게 되었습니다. 명분만 있으면, 아니 힘 있는 자들은 언제나 자기들에게 필요한 명분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고조될수록 예수님은 자기의 때가 다 된 것을 직감합니다. 바로 그 즈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에서 나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거처로 가려고 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낮에는 성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교하시다가 저녁이 되면 성을 나와서 한갓진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곤 하셨습니다. 잠시 우리가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안에서 설교하시던 ‘하나님의 나라’는 예루살렘에 살면서 기득권자들이 세운 정치 종교권력의 나라에 반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노골적으로 그들이 세운 ‘예루살렘 같은 나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여하간, 성전을 나와 언덕을 올라 시골로 들어서던 무리들 중에 제자 하나가 그들이 방금 까지 있었던 성전을 보면서 이러는 겁니다. “선생님, 저것 보세요. 저 돌들이며 건물들이 얼마나 웅장하고 볼만 합니까?”그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에게 대답합니다. “지금은 저 건물들이 웅장하게 보이겠지만 그러나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어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이 대화의 앞뒤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은 낮이 되면 그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는 말은 ‘이 나라는 곧 망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제도나 조직이나 보이지 않는 권력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부터 예수님의 그 선언에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 지내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건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쯤이야, 풍랑을 잠잠케 하시던 그 위력이면, 음식을 나눠 수천 명을 먹이던 그 신비한 능력이면,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는 그 마술 같은 예수를 보건데 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뭐 그런 어떤 것일 것이며,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 같은 건 깡그리 뭉게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며칠간 머물러 활동하면서 그네들은 점점 그 힘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만찬이 있었던 그날 저녁에 한 제자는 드디어 이탈을 하고 만 것입니다. 막상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갈릴리에서 확신하던 예수의 말씀에 대한 자기 신념에 회의가 드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화려하고 웅장한 조직과 시스템, 건축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 하나가 이탈한 것이고, 이탈은 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의 위엄 앞에 공포를 가지고 있던 제자가 힐끗힐끗 예수의 눈치를 보면서 같잖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 저 건물들을 보세요.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합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이 무슨 생각으로 한 것 같습니까? 어떤 마음에서 나온 물음 같습니까?
이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것이다.” 겁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하고 웅장한 위용에 속지 말하는 것입니다. 정치권력과 종교적인 제도의 견고함과 물질의 융숭함에 기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확립한 새로운 믿음과 신념을 꺾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나이 마흔 언저리에 미국엘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개인적으로 정수리가 터져서 세상 무엇도 겁나거나 부럽지 않다고 자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몇 명의 한국 감리교 목사들과 미국 감리교단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뉴욕의 맨허탄을 가게 되었습니다. 중심가에 들어서서 자동차에서 내렸을 때 저는 도시의 건물과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압도를 지나 도시의 무게 앞에서 나는 초라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내 생전 처음 뭔가의 앞에서 초라함을 느끼는 일이 처음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내 존재에 비해 맨허탄은 너무 화려하고 웅장하고 견고한 힘이었습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무게감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시는 이 동네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력감 때문에 일어난 자기붕괴의 선언과 다를 바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어머 어마한 위력을 지닌 도시의 상징인 건물 하나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맨허탄도 무너진다는 것을 보인 실례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맨허탄이라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나를 굴복시켰다면 그 도시의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힘, 웅장함, 화려함은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꼭 무너지고 말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웅장하고 화려함에 기죽지 말고, 지나치게 예루살렘의 힘을 맹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생을 걸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생활, 예루살렘의 권력, 예루살렘의 종교에 기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인생의 희망이 있다는 착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토건국가입니다. 건설업이 국민총생산의 10%를 차지합니다. 이런 예는 OECD 국가 중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정부 총 지출의 30%를 건설관련 항목에 지출하는 나라도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쉽게 만들고 빨리 부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이런 우리나라는 보고 세계는 ‘돌진적 산업사회’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근대사 40여년은 부수고 짓고 하는 사이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무너지고 짓는 일들을 밤낮으로 보며 살아 왔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무너뜨리고 짓는 사이에 돈도 좀 벌고 밥술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또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우리의 돌진적인 삶, 부수고 짓는 삶의 양식 때문에 많은 친구를 잃지 않았습니까? 많은 이웃과 헤어져야 하지 않았습니까? 고향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추억을 담은 숱한 장소들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장소가 사라지면서 ‘기억과 추억이 삭제’된 것입니다. 오죽하면 40-50대 연령층에서 한동안 ‘친구 찾기’가 유행 했겠습니까? 이것은 삭제된 기억과 추억을 복원하고자 했던 사회현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대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들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나’와 ‘우리’를 설정하는 ‘기억’과 ‘고향’을 삭제하면서 추구하는 토건적 삶, ‘돌진적 사회’가 추구하는 지향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를 바탕으로 하자면 ‘예루살렘의 가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로 치자면 서울이겠고, 분당이거나 강남이겠고 맨허탄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회의 현상 앞에서 기가 죽거나 기를 펴거나 하는 것입니다. 기를 펴는 자는 성공한 사람일 테고, 기가 죽는 사람은 돌진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그런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세상을 향해, 기가 죽었거나 반대로 기가 살아서 제 세상인 것처럼 으스대며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에게 말합니다. “다 망한다.”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작 가치 있는 네 자신을 삭제하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향, 어린 시절의 벗, 이웃을 팽개치는 삶의 구조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추석이라는 명절을 맞아 사라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라지진 않았어도 이미 타향처럼 변한 고향으로 가고자 하는, ‘물질문명에 삭제된 옛 기억을 향해 떠나는’여러분들에게 제자들의 현실적인 심정과, 그것을 뛰어넘는 예수의 새로운 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을 나온 제자들의 불안한 질문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새 질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예수의 답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상실한 그 본질의 획득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필요합니다. 필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목숨을 걸고 추구해야 할 가치이며 방향이고 목표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들이 견고해서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강남이 늘 강남이고 청담동이 늘 청담동인 줄 알지만, 세상에 모든 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괜히 그거에 기죽지 말라는 겁니다. 그 대신 그런 걸 얻느라고 잃어버린 ‘고향’, ‘벗’, ‘이웃’을 되찾는 것과 같은 삶의 방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게 ‘토건나라’ 또는 ‘물질문명의 나라’ ‘돈의 나라’ ‘정치 종교 권력의 나라’ ‘예루살렘의 나라’에 반대인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어제 여러분의 고향, 이웃, 벗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영적이고 심리적인 보물인 추억도 이미 무너졌습니다. 아니, 삭제 된 겁니다. 그래서 정신과 영혼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건국가를 지향한 탓이고, 무너뜨리고 세우는 게 삶의 이상향인 줄 알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서울, 청담동, 맨허탄이 인생의 최종 목적지로 여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이런 나라는 모두 언젠가는 망합니다. 나라가 망한다는 말은, 무너지지 않는 건물이 없다는 것이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며, 영원한 도시가 없다는 것이고, 무너지지 않는 권력이나 제도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방향성(하나님의 나라)과 논리로 우리를 감금하고 있는 허상의 울타리를 해체시키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진다는 말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무너진다는 말이지요. 붕괴 말입니다. 여러분, 근자에 도처에서 발생하는 붕괴를 보십니까? 무너지지 않을 거 같은 세상을 무너뜨리는 일 그게 ‘하나님의 나라’도래입니다.
정말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속에, 이 땅에, 이 사회에 임하길 바라십니까? 그러면 먼저 삭제된 여러분의 기억을 회복하십시오. 그러려면 삶의 방향과 가치를 바꾸십시오. 그게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우선 중의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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