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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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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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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 명수 목사(bearfoot@kg21.net)
출처 : http://home.freechal.com/ctprayer/
성서에서 관상(묵상, 침묵)기도를 의미하는 구절을 찾아본다(성서는 개역을 주로 사용하고, 어떤 때는 새번역 개정판을 쓰기도 함).
계시록 2: 20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로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문을 열면'이란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주님을 초대하면 내 영혼 안에 들어오시겠다는 말씀. 곧, 마음을 비우고자하는 것은 주님께서 오시라는 초대를 의미한다.
롬 8: 26-8, "이와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관상기도는 성령께서 당신이 하시고져 하시는 일을 마음껏 하시도록 자리를 만들어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의 몸과 영혼을 시공간적으로 비워드리려고 하는 것이다. 내재적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열왕기 상 19: 4, 8-10, 12-13, 18(18-19장) 4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8-10,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도착하였다. 엘리야는 거기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거기에서 밤을 지냈다. 그 때에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2-3,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서, 외투 자락으로 얼굴을 감싸고 나가서, 동굴 어귀에 섰다. 바로 그 때에 그에게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8,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엘리야가 동굴에서 있을 때에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이다. 그처럼 우리도 홀로 있어 들려오는 조용한 음성을 듣고져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 1: 9, "마음을 담대히 하라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좀더 분명히 인식하기 위한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려는 기도의 행위가 관상기도이다.
갈2: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났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 속에 그리스도가 임하여 역사하도록 하기 위해 '거룩한 독서'(Lectio Dinina)을 성서를 읽고 명상과 묵상을 하는 것이다.
잠언 4: 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여기서 남이니라"
여기서 마음은 우리의 영혼을 의미한다. 융에 의하면,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깨닫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치이다.
시46: 10, "너희는 잠잠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찌어다"
여기서 '잠잠히'란 영어로 silent로서 침묵을 지키고 있어 주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체험적으로 알라는 말씀으로 해석됨.
호 4: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여기서 '지식'은 소위 말하는 머리에 담는 인지적 지식이 아니라, 가슴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체험적' 지식을 말하여,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앎을 의미한다.
요 18: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나웬이 가장 많이 인용한 말씀이란다. 그가 왜 이 말씀을 가장 많이 인용했을까? '주가 누구이신가'를 증거하는 것은 믿은 자들을 보면 된다는 뜻일 것이다. 요즘처럼 믿은 자들이 변변치 못한 소리를 듣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이 변변치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향심기도(관상기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기도할 때의 체험보다, 일상 생활에서 당신이 "큰 평화와 겸손과 사랑을 갖게 된 것과 같이 장기적으로 맺어지는 기도의 열매"가 중요하다. 이런 삶에서 맺어지는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열매가 한국의 신자들에게 부족한 것이어서이지 아닐까?
히 11: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 시 16: 2, "주밖에 나의 복이 없나이다"
침묵가운데 아무런 느낌, 소리, 영상 등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꾸준히 그런 시간을 갖고 있는 다는 것은 그야 말로 주님께 대한 엄청난 믿음이 아니고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이런 행위야말로 교리에 대한 논의 이전에 주밖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그야말로 그분에 대한 '참다운 믿음'이 있지 않고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살전 5: 17, "쉬지말고 기도하라"; 갈 5: 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이 명령은 관상기도를 생각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명령이다. 관상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이 '관상적'이 되어 삶 속에서 일에 '푹 빠져' 일에만 우리의 온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일을 보면서도 일 주위에 있는 다른 상황, 곧 주님의 손길, 다른 사람에 대한 고려 등을 하게 되며, 이런 일이 가능해야 '오래 참고' '양선' '온유' '사랑' 등이 좀 더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요한 1서 3: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말씀이 제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관상기도와 관련있는 다른 성서 구절을 발견하시는 분은 여기에 올려주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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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권명수 교수님의 글에 첨부한 글인데 삽입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관상기도의 가장 중요한 성경적 근거는 히브리서 12장 2절이 아닐까 해요.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looking to Jesus the pioneer and perfecter of our faith,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에서의 "바라보자"는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쓰였지요.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So we fix our eyes not on what is seen, but on what is unseen.
While we look not at the things which are seen, but at the things which are not seen: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출처 : http://home.freechal.com/ctprayer/
성서에서 관상(묵상, 침묵)기도를 의미하는 구절을 찾아본다(성서는 개역을 주로 사용하고, 어떤 때는 새번역 개정판을 쓰기도 함).
계시록 2: 20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로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문을 열면'이란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주님을 초대하면 내 영혼 안에 들어오시겠다는 말씀. 곧, 마음을 비우고자하는 것은 주님께서 오시라는 초대를 의미한다.
롬 8: 26-8, "이와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관상기도는 성령께서 당신이 하시고져 하시는 일을 마음껏 하시도록 자리를 만들어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의 몸과 영혼을 시공간적으로 비워드리려고 하는 것이다. 내재적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열왕기 상 19: 4, 8-10, 12-13, 18(18-19장) 4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8-10,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도착하였다. 엘리야는 거기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거기에서 밤을 지냈다. 그 때에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2-3,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서, 외투 자락으로 얼굴을 감싸고 나가서, 동굴 어귀에 섰다. 바로 그 때에 그에게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8,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엘리야가 동굴에서 있을 때에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이다. 그처럼 우리도 홀로 있어 들려오는 조용한 음성을 듣고져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 1: 9, "마음을 담대히 하라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좀더 분명히 인식하기 위한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려는 기도의 행위가 관상기도이다.
갈2: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났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 속에 그리스도가 임하여 역사하도록 하기 위해 '거룩한 독서'(Lectio Dinina)을 성서를 읽고 명상과 묵상을 하는 것이다.
잠언 4: 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여기서 남이니라"
여기서 마음은 우리의 영혼을 의미한다. 융에 의하면,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깨닫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치이다.
시46: 10, "너희는 잠잠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찌어다"
여기서 '잠잠히'란 영어로 silent로서 침묵을 지키고 있어 주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체험적으로 알라는 말씀으로 해석됨.
호 4: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여기서 '지식'은 소위 말하는 머리에 담는 인지적 지식이 아니라, 가슴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체험적' 지식을 말하여,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앎을 의미한다.
요 18: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나웬이 가장 많이 인용한 말씀이란다. 그가 왜 이 말씀을 가장 많이 인용했을까? '주가 누구이신가'를 증거하는 것은 믿은 자들을 보면 된다는 뜻일 것이다. 요즘처럼 믿은 자들이 변변치 못한 소리를 듣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이 변변치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향심기도(관상기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기도할 때의 체험보다, 일상 생활에서 당신이 "큰 평화와 겸손과 사랑을 갖게 된 것과 같이 장기적으로 맺어지는 기도의 열매"가 중요하다. 이런 삶에서 맺어지는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열매가 한국의 신자들에게 부족한 것이어서이지 아닐까?
히 11: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 시 16: 2, "주밖에 나의 복이 없나이다"
침묵가운데 아무런 느낌, 소리, 영상 등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꾸준히 그런 시간을 갖고 있는 다는 것은 그야 말로 주님께 대한 엄청난 믿음이 아니고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이런 행위야말로 교리에 대한 논의 이전에 주밖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그야말로 그분에 대한 '참다운 믿음'이 있지 않고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살전 5: 17, "쉬지말고 기도하라"; 갈 5: 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이 명령은 관상기도를 생각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명령이다. 관상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이 '관상적'이 되어 삶 속에서 일에 '푹 빠져' 일에만 우리의 온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일을 보면서도 일 주위에 있는 다른 상황, 곧 주님의 손길, 다른 사람에 대한 고려 등을 하게 되며, 이런 일이 가능해야 '오래 참고' '양선' '온유' '사랑' 등이 좀 더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요한 1서 3: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말씀이 제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관상기도와 관련있는 다른 성서 구절을 발견하시는 분은 여기에 올려주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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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권명수 교수님의 글에 첨부한 글인데 삽입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관상기도의 가장 중요한 성경적 근거는 히브리서 12장 2절이 아닐까 해요.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looking to Jesus the pioneer and perfecter of our faith,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에서의 "바라보자"는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쓰였지요.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So we fix our eyes not on what is seen, but on what is unseen.
While we look not at the things which are seen, but at the things which are not seen: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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