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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홀로 있기의 훈련

수도관상피정 테레사............... 조회 수 2690 추천 수 0 2008.08.28 22:33:16
.........
출처 :  
당신이 홀로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고독과는 다른 홀로 있기를 요청하신다. 혼자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활기를 잃도록 한다.
  이웃에 새로 이사 온 어린이는 어머니에게 "나하고 같이 노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라면서 운다. 대학에 입학한 한 여학생은 과거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한다. 자신의 사무실에 않아 있는 한 기업인은 세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독을 느낀다. 요양원에 누워 있는 한 연로한 할머니는 본향에 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혼자 있기를 무서워하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소음과 군중 속으로 몰아 넣는다. 우리는 공허한 말일지라도 계속해서 말을 하며 우리 곁에 가까이 둘 수 있는 라디오를 구입한다. 그래서 우리들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하든지 고요한 가운데 처해 있지 않으려고 한다.
  엘리어트(T. S. Eliot)는 다음과 같은 글로 우리의 문화를 잘 분석하였다. "세계가 발견되고 그리고 말이 들리는 곳이 어디일까? 그곳은 이곳이 아니다. 이곳은 충분히 고요하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고독과 소음 중에서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고독과 공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내적 홀로 있기"와 "고요함"을 개발할 수 있다. 고독은 내적 공허이다. 홀로 있기는 내적 충만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장소라기보다는 마음과 정신의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어느 때든지 마음의 홀로 있기를 할 수 있다. 사람이 많다거나 혹은 사람이 적다는 것은 이 내적 주의 집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황야에서 혼자 수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홀로 있기(내적 주의 집중)를 체험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내적 홀로 있기를 하고 있다면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다-그것은 우리가 항상 혼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소음과 혼란 중에서도 깊은 내적 고요함 속에서 안정을 갖는다.

  내적 홀로 있기는 외적으로 나타난다. 내적 홀로 있기에는 혼자있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서 떠나 잇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보다 더 잘 듣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내적으로 홀로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사셨다. 그분은 또한 외적으로도 홀로 있기를 자주 체험하셨다. 예수님은 홀로 광야에서 40일 동안을 보내심으로써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마 4:1-11). 또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에 홀로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셨다(눅 6;12).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으셨을 때.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셨다"(마 14:13). 예수님은 5천 명을 기적적으로 먹이신 후에 제자들을 앞서 보내시고, 무리를 떠나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혼자 계셨다"(마 14:23). 밤에 오랜 시간 일을 하신 후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막 1:35) 가셨다. 열두 제자가 복음 전파와 병 고치는 사역을 하고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셨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막 6:31). 예수님은 한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눅 5:16). 세 제자와 함께 예수님은 한적하고 고요한 변화산을 찾으셨다(마 17:1-9). 예수님은 자신의 가장 고귀하고 가장 거룩한 일을 준비하실 때 홀로 겟세마네 동산의 고요한 곳을 찾으셨다(마 26:36-46).
  이와 같은 에는 얼마든지 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만하면 예수님께 있어서 홀로 조용한 곳을 찾으신 일은 규칙적인 습관이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홀로 조용한 곳을 찾는 일이 규칙적인 습관이 되어야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함께 사는 생활(Life Togethe)에서 한 장의 제목을 "함께 있는 날"이라고 붙였는데, 바로 그 다음장의 제목은 "홀로 있는 날"이라고 붙였다. "함께 있는 날"과 "홀로 있는 날"은 둘 다 영적인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하다.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섰다.
  "홀로 있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공동 생활을 조심하도록 하라.....공동 생활 속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홀로 있기를 조심하도록 하라.....공동 생활과 홀로 있기는 각각 다 깊은 함정과 위험을 가지고 있다. 홀로 있기가 없이 친굘르 원하는 사람은 공허한 말과 감정에 빠진다. 그리고 친교 없이 홀로 있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공허한 깊은 수렁과 자기 도취와 절망에 빠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게 지내기를 원한다면 홀로 있기의 고요함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평안하게 홀로 있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순종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 둘을 모두 개발해야 한다.

  홀로 있기와 고요함

  고요함이 없으면 홀로 있기도 없다. 고요함은 때때로 말이 없는 것과 연관되지만 듣는 행위와는 항상 연관이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마음 없이 단순히 말을 금한다는 것은 고요함이 아니다.
  "소리와 음성으로 가득 찬 날이 고요함이 날이 될 수 있다. 만약 그 소리가 하나님의 임재의 메아리가 된다면, 그 음성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된다면 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말할 때,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고요함을 떠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들 속에 두신 그 친밀한 말씀을 되풀이할 때 우리의 고요함은 완전하게 된다."
  우리는 "내적 홀로 있기"와 "내적 고요함"의 관계를 이해해야한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내면적인 생활에 특별히 뛰어난 모든 인물들은 이 둘을 같은 맥락에서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500년 동안 경건 서적 분야에서 추종을 불허한 명작이었던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생명의 말씀사 역간)에는 "홀로 있기와 고요함을 사랑하는 일에 대하여"라는 부분이 있다.
  본회퍼는 함께 사는 생활에서 이 둘을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토마스 머톤도 역시 혼자 있을 때의 상념(Thoughts in Solitude)이란 책에서 그렇게 보았다. 사실상 나는 본장의 명칭을 "홀로 있기의 훈련"으로 하느냐 "고요함의 훈련"으로 하느냐를 놓고 얼마 동안 씨름하였다. 모든 위대한 경건 문학에서 이 둘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홀로 있기를 알려면 변화시키는 고요함의 능력을 반드시 체험하고 알아야 한다.
  "입을 여는 사람은 눈을 감는다"라는 옛 격언이 있다. 고요함과 홀로 있기의 목적은 볼 수 있기 위함에 있다. 고요함의 열쇠는 소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데에 있다.
  야고보는 자신의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약 3:1-12). "고요함과 홀로 있기의 훈련"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 말을 해야되고 언제 말을 하지 않아야 되는지를 배운다. 훈련을 율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고요함을 어리석은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나는 이제부터 40일 동안 말을 하지 않겠다." 고요함과 홀로 있기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진실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어리석음은 항상 어려운 시험이 된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전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적절하게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전도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전 3:7). 다스리는 것이 열쇠이다.

  야고보가 말에서 재갈을 물리는 비유와 배의 키에 대한 비유를 말한 것은, 혀가 우리의 방향을 이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혀는 여러 방법으로 우리의 방향을 이끈다. 만약에 거짓말을 할 경우에 우리는 처음 거짓말을 은폐하기 위하여 더 많은 거짓말을 하도록 이끌리게 된다. 또 그 다음에는 우리가 거짓말에다가 신임을 부여하기 위하여 어떤 방향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야고보가 "혀는 곧 불이요"(약 3:6)라고 선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훈련된 사람은 필요한 일을 필요한 때에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수한 농구팀은 그들이 필요로 할 때에 점수를 가산할 수 있는 팀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농구공을 골 안에 넣을 수 있지만 꼭 필요한 때에 넣을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요함의 훈련을 통과한 사람은 말해야 할필요가 있는 것을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 때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우리가 만약 말해야 할 때에 말하지 않는다면 고요함의 훈련 가운데 사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만약 말하지 않아야 할 때에 말을 한다면 우리는 역시 과녁에서 빗나간 사람이다.

  우매자의 제사

  전도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전 5:1). 우매자의 제사는 인간에게서 시작된 종교적 말이다. 전도서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타나 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예수님께서 배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셔서 그들 앞에서 변형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였다. 그 다음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셋을 짓되....."(마 17:4). 이것은 급한 마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때 베드로에게 말을 하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드로는 우매자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존 울만의 일기에는 혀를 다스리는 일에 대한 감동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그의 말은 너무나도 생생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나는 엄숙한 기분으로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참목자의 말을
    내적으로 철저히 알려고 노력하였다. 어느 날 나는 성령의 강한 감동을 받고
    어떤 모임에서 일어서서 얼마간의 말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는 바를 따르지 못하고 나에게 요청되는 것 이사의 것을 말하였다.
    나는 곧 나의 과오를 자각하였다. 그래서 몇 주간 동안 아무런 빛도 위로도
    없이 마음의 고통을 겪었다. 나는 그 무엇에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워하였는데, 내가 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위로의 성령을 보내 주셨다. 그때 나는 나의 죄를 용서받은
    것을 느꼈고 나의 마음은 평온하고 조용해졌다. 나는 나의 대속주가 되시는
    주님의 자비하심에 진심으로 감사하였다. 그 후 약6주간이 지나서, 하나님의
    사랑의 셈이 열리는 것을 느꼈고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강한 의욕을 느꼈는데
    그때 나는 모임에서 약간의 말을 하였다. 그 결과 평화를 찾았다. 이렇게 내가
    낮아지고 십자가 아래에서 훈련을 받았을 때, 나의 지력은 더 강화되어 마음속에
    운행하는 순전한 영을 분간하였다. 그리고 그 순전한 영은 내가 때에 따라서는
    여러 주간 동안 고요함 가운데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마치 나팔과 같은 역할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주님은 그 나팔을 통하여 그의 양떼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고요함의 훈련을 통과하는 배움의 과정을 얼마나 잘 설명하고 있는가! 특별히 중요한 것은 그가 이 체험을 통하여 "마음속에 운행하는 순전한 영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증대된 데 있다.
  우리가 고요함 가운데 머무르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고요함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우리는 말을 의지하여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는 데 습관이 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고요한 가운데 있다면 누가 다스리는 일을 할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 전에는 그 다스리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을 것이다. 고요함은 이 신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혀는 우리의 가장 위력 있는 조작 무기이기도 하다. 우리에게서 몹시 흥분한 말이 흘러나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공적 이미지를 계속적으로 조정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속을 들여다본다는 생각을 하면서 무서워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이해를 고치기 위한 말을 한다. 만약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 후에 당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느끼면, 나는 당신이 나의 행동을 이해해 주도록 만들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고요함이 그와 같은 유혹을 방지한다. 그러므로 고요함은 성령의 가장 심오한 훈련 가운데 하나이다.
  고요함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당성을 입증하시게 하는 자유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바로잡으려 할 필요가 없다. 어떤 행동에 대하여 부당한 비난을 받은 중세기의 한 수도사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는데, 마침 말리려고 내어 걸어 둔 융단을 개가 물어뜯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바로 저것이 너의 명성에 대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네가 만약 나를 신뢰한다면 내가 너를-너의 명성과 모든 것을-돌볼 것이다"
  아마 이 사실을 우리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는 것 가운데 고요함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조지 폭스는 "종의 영"(룸 8:15)에 대하여 자주 말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이 영에 매여 있는 지를 이야기하였다. 그는 자주 종의 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아첨하는 영과 결부시켰다. 또한 그의 일기에서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종의 영에 매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을 말하였다. 고요함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 자유를 가지도록 하는 한 통로이다.

  혀는 온도계이다-혀는 우리의 영적 온도를 말해 준다. 혀는 또한 온도 조절 장치이다-혀는 우리의 영적 온도를 조절한다.
  혀를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혀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가?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진정한 고요함, 즉 우리의 혀를 멈추는 일은 오직 영적 고요함의 결과로 온다."
  도미니크(Dominic)는 프란시스를 방문하였는데 그 만남에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진실로 고요함 가운데 있기를 터득하였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필요한 말을 필요한 때에 할 수 있게 된다.
  도허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은 고요함이다.....나는 하나님의 고요함을 체험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갈망하는 내적 고요함을 얻게 된다.

  영혼의 어두운 밤

  홀로 있기의 훈련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순례의 길을 가는 어느 시절에 영혼의 어두운 밤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이 생생하게 설명한 영혼의 어두운 밤 말이다. 그가 우리를 초대한 어두운 밤은 불쾌하거나 혹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마치 병든 사람이 건강과 행복을 약속하는 수술을 환영해야 하는 것과 같이 환영해야 할 체험이다. 어두움의 목적은 우리를 벌하거나 괴롭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하는 데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어두운 밤을 하늘이 정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영예로운 기회로 받아들였다. 그는 어두운 밤을 "순전한 은혜"라고 일컬으면서 다음과 같이 옲었다.

    오 인도하는 밤이여!
    새벽보다 더 좋은 밤이여!
    사랑하시는 분과 사랑받는 자를 연합시킨 밤이여!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사랑받는 자가 변화되는 밤이여!
  
  영혼의 어두운 밤은 어떤 것일까? 메마르고 침울하며 길을 잃은 것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감정적인 생활을 지나치게 의존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와 같은 일을 피하고 평화롭고 즐거운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고는 현대인의 많은 체험이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그 어두운 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요함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 영혼에 내적 변화를 일으키실 수 있다.
  일상 생활에서 이 어두운 밤은 어떻게 나타날까? 홀로 있기를 진지하게 추구할 때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성공의 감격이 있고 그 다음에 이어서 반드시 실망이 따른다. 그 실망으로 말미암아 그 추구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감정은 메마르고 우이라 하나님께 이르지 못한다고 하는 생각이 나타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여기에서 언급한 영혼의 어두움은 감각적, 영적
    욕구를 잠재운다.....또 영혼의 어두움은 상상력을 속박
    함으로 유익한 추론적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영혼의 어두움은 기억을 그치게 만든다. 그래서 지력은
    어둡게 되고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리하여
    영혼의 어두움은 의지도 메마르고 거북하게 만들게 되어
    모든 재능이 공하하고 무익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짙고 무거운 구름이 덮인다. 그것은 영혼을 괴롭게
    하고 영혼을 하나님에게 물너라게 하는 짙고 무거운
    구름인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의 시 영혼의 선언(Canciones del Alma)에서 "나의 집은 지금 고요한다" 라는 어구를 두 차례 사용하였다. 이 사실적인 시구에서 그는 육체적, 정서적, 심리적 그리고 정신적 모든 지각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그 심오한 일이 영혼에 발생하려면 그전에 먼저 몸과 마음과 정신의 모든 산만함이 가사 상태에 놓여야한다.
  수술을 단행하려면 먼저 마취의 효력이 나타나야 한다. 그때 고요함과 평화가 임한다. 이러한 어두움이 있는 동안에는 성경 읽기, 설교, 지적 토의 등 이 모두가 감동이나 감격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영혼의 어두운 밤에 들어가게 하실 때는 우리의 내적 침체에서 벗어나려는 유혹이 우리에게 자주 나타난다. 이때에는 목사도 아주싫증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는 것도 아주 약해진다. 이리하여 우리는 영적 자극을 주는 다른 교회나 혹은 새로운 체험을 찾기 시작하는 일이 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과오이다. 어두운 밤이 온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당신을 모든 산만한 상태에서 떠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복 수 있게 하시는 데 대하여 감사하기 바란다. 화를 내거나 싸우지 말고 고요한 가운데 기다리기 바란다.
  죄나 혹은 불순종의 결과로 오는 영적인 일의 침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자신의 마음속에 알고 있는 죄를 품고 있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어두움)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이 성경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며 신뢰하고 의지하면서도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잇지만 영혼의 어두운 밤에 들어간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체험을 하는 기간에는 악에 대한 은혜의 보호가 있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놀라운 전진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어두움 속에 있을 때 세밀한 관
    찰을 한다면 그는 무익하고 해로운 것으로 말미암아 욕
    구와 재능이 혼란하게 되지 않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허영과 교만과 허무와 거짖
    기쁨과 그밖에 많은 악에서 떠나 안전하게 보호받는 것
    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두움 속에서 걸음으
    로써 영혼은 길을 잃지 않고 피하게 될 뿐만 아니라 신
    속하게 전진하게 된다. 그것은 어두움 속에서 걷는 것이
    유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어두움 속에 있는 동안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먼저 거기서 빠져 나오라고 하는 친구들의 호의의 권면을 무시하기 바란다. 그들은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시대는 이러한 일에 대하여 너무나도 무지하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친구들에게 설명하라는 권면도 하지 않겠다. 당신이 왜 그렇게 침울한 가운데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거나 혹은 증명하려고 시도하지 말기 바란다. 하나님이 당신의 변호자이다. 당신의 진상을 하나님께 맡기라. 당신이 얼마 동안 한적한 곳에 따로 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기 바란다.
  만약 그와 같은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일상적인 과업을 그대로 이행하라. 그러나 한적한 곳에 있든지 혹은 집에 있든지 마음속 깊은 곳에 고요히 귀를 기울이고 듣기 바란다. 그래서 홀로 있기의 과업이 달성될 때까지 그렇게 고요한 가운데 있기 바란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를, 우리들이 들어가고자 생각하는 물 속보다 더 깊은 물 속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는 우리들 대부분이 어둡게 보는 세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눈으로 덮인 영혼의 산봉우리에 오르기를 무서워하는 우리의 소심함을 꾸짖을 필요는 없다. 이 일은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의 노력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분명히 우리들로 하여금 보다 더 높고 보다 더 깊은 체험에 들어가도록 자극하였다. 그 체험은 우리가 과거에 어둡게 보던 그 세계로 들어가는 우리의 삶의 문을 항상 아주 미소하게 여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전부이며,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전부이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 들어가는 여정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위하여 그의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말을 묵상해 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당신의 의욕이 침체되고, 당신의 의향이 메마르고 부자연스럽게 된 것을 알 때, 그러고 당신의 능력이 내적인 모든 운동에 무력하게 된 것을 알 때 괴로워하지 말라. 다만 그것을 하나의 은혜로 생각하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당신 자신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계시기 때문이며 당신에게서 당신 자신의 행위를 제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홀로 있기의 방법

  영적 훈련은 우리가 행하는 일이다. 바로 이 사실을 직시하는 시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마음의 홀로 있기"에 대하여 경건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만약 마음의 홀로 있기가 우리의 체험에서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훈련의 목적을 잊고 있다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마음의 상태뿐만 아니라 행동도 다루고 있다.
  "내가 내적 홀로 있기와 고요함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행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면 큰 잘못이다. 그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진실로 고요함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다 어떤 일을 성취한 사람들이며 자신들의 삶을 특정 방향으로 정의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얻었다. 우리가 성공을 하려면 이론을 뛰어넘어 실제 상황에 들어가야 한다.
  홀로 있기의 방법을 보기로 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첫째 일은 일상 생활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짧은 시간의 홀로 있기를 이용하는 일이다. 가족이 일어나기 전에 아침 일찍 침실에서 가지는 홀로 있기를 생각해 보라.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커피를 마시는 짧은 시간의 홀로 있기를 생각해 보라. 아침 출근 시간에 교통이 밀려 자동차가 자주 멈추는 시간의 홀로 있기도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꽃이나 혹은 나무를 볼 때에도 휴식과 원기 회복의 짧은 순간을 가질 수 있다. 식사하기 전에 말로 나타내어 기도하는 대신에 가족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잠시 고요한 시간을 가지는 일을 생각해 보라.

  한번은 자동차 안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잡담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가 비행장에 도착할 때까지 모두들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 어디 한번 시험해 봅시다"(약 5분이 걸리는 길이었다). 그때 대단히 좋은 효과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퇴근길에 차에서 내려 집까지 걷는 동안의 짧은 시간에 새 기쁨과 의미를 찾아보라.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밖에 나가 고요한 밤을 접해 보기 바란다.
  이러한 짧은 시간들을 우리는 흔히 놓치고 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와 같은 짧은 시간의 가치를 우리는 찾아야 하겠다. 그 시간이 내적 고요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내적 고요함은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그러하듯이 우리 삶의 방향을 가리켜 준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우리가 현재 어떠한 자리에 처해 있는지를 진실하게 알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밖에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요한 장소, 곧 홀로 있기 위해 설계된 고요한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다. 주택은 계속적으로 건축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홀로 있기를 위한 고요한 장소이자 우리의 가족 가운데 누구든지 홀로 가서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작은 장소는 설계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와 같은 장소를 마련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금이 부족한 때문일까? 그러나 우리는 가족을 위해 여러 방을 설계하고 또 넓은 마루를 단장하면서 그곳에는 자금을 사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이미 집을 소유하고 있다면 안뜰 같은 곳을 막아서 작은 장소를 만드는 일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당신이 만약 아파트에서 산다면 창의력을 발휘해서 어떤 다른 방법으로 홀로 있기를 위한 장소를 마련하기 바란다. 내가 아는 한 가정은 특별한 의자를 마련해 두었는데 가족 가운데서 누구든지 그 의자에 앉으면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고 다만 혼자 있도록 해주게 되어 있었다.
  또한 집 밖에서도 고요한 장소를 찾을 수 있다. 공원 안에 있는 어떤 지점도 좋다. 또 교회 건물 안에 있는 어떤 장소도 좋다. 수양회를 주관하는 단체에서는 특별히 개인적인 묵상과 홀로 있기를 위해 적합한 방을 마련한 건물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교회들은 교회 건물을 짓는 데 거액의 자금을 사용한다. 그런데 개인이 며칠 동안 혼자 조용히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를 교회가 건축해 두는 일은 어떠한지?
  캐더린 디헤크 도허티는 복아메리카에 "뿌스띄냐"(Poustinias,광야를 의미하는 러시아어)를 개발한 선구자이다. 그가 개발한 장소들은 특별히 홀로 있기와 고요함을 위해 설계된 곳이다.

  학습에 관한 장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관찰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우리가 얼마나 자주 우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려는 말을 열심히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만약 당신에게서도 이 같은 행동이 나타난다면 무엇이든 장황한 성명 없이 실행으로 입증하기 바란다. 당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공포심을 가지는 일은 없는지 자신을 유의해 보기 바란다.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변호자가 되시도록 힘쓰라.
  말이 간결하고 충실하도록 자신을 훈련시키라.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항상 명백한 말을 하라. 한 말은 실행에 옮겨야 한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전 5:5). 우리의 혀를 우리가 다스릴 수 있을 때 본회퍼의 다음과 같은 말이 우리에게서 실제로 입증된다. "불필요한 일은 말로 발설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그러나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일은 간략한 말로 언급될 수 있다."

  홀로 있기의 또 다른 방법을 보자. 하루 종일 한마디의 말도 없이 생활하기를 시도해 보자. 율법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실험으로 그렇게 해보자는 것이다.
  무력감을 유의해 보고 전달 수단으로서 말이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지 유의해 보자. 말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길을 찾도록 해보자. 하루의 생활을 즐기고 기뻐하자. 그러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배우자.
  일년에 네 차례 정도 삶의 목표를 재정비하기 위해 세 시간 내지 네 시간 동안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자. 이 일은 하루저녁에 충분히 달성될 수 있다. 사무실에 늦게 머무르든지 혹은 집에서 그와 같은 시간을 가지도록 하라. 혹은 공중 도서관에서 조용한 장소를 찾을 수 있을 줄로 안다. 당신의 삶의 목적과 중간 목표들을 평가해 보도록 하라. 지금부터 앞으로 일년 동안 당신은 어떤 일을 달성하기를 원하고 있는가? 또한 지금부터 앞으로 10년 동안의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우리들에게는 일년 동안에 달성할 수 있는 일은 과대 평가하고, 십 년 동안에 달성할 수 있는 일은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적인 목표를 세우되 꿈을 가지고 세우도록 하라(이 책을 쓰는 일이 나의 마음의 꿈이었는데 몇 년이 지나서 그 꿈은 실현되었다). 그와 같은 조용한 시간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라. 당신에게 발생한 것을 일기로 기록해 두기 바란다.
  재정비하고 목표를 세우는 일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냉정하고 타산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시장 분석을 하듯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고요한 시간을 가지고 귀를 기울일 때 기쁨의 감동이 나타나고 일년 동안을 어떻게 계획해야 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이 너무 현세적이고 신령하지 못한 목표인 것처럼 들리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은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당신도 그와 같은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또한 당신은 기적, 신유, 방언 등의 은사에 관하여 보다 더 많이 알기를(체험하기를)원할 수도 있다. 혹은 당신은 조력하는 은사를 체험하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사람을 도와서 일하는 조력자가 되기를 원할 수도 있다. 혹은 당신이 일년 동안 루이스(C. S. Lewis)난 엘튼 트루블러드(D. Eiton Trueblood)의 모든 저서를 읽기를 원할 수도 있다. hr은 지금부터 5년 이내에 자격을 갖추어서 장애 아동들을 위해 일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을 선택하여 목표를 정하는 것이 마치 관매사원이 조각하는 계획처럼 들리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당신의 일생을 위한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디엔가 목적지를 정해 놓고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까 고요한 시간에 하나님과 교통함으로써 목적지와 방향을 정하는 것이 얼마나 더 나은가!
  "학습의 훈련"에서 우리는 2일 내지 3일 동안 오직 혼자 학습하는 계획을 검토해 본 바 있다. 이러한 계획은 하나님과 더불어 고요한 시간을 가지는 "홀로 있기"와 결합될 때 보다 큰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들도 사람들을 떠나 홀로 있는 고요한 시간을 가짐으로써,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진정한 교제를 할 수 있다. 오직 홀로 있기의 그 목적만을 위하여 일년에 한 차례는 집을 떠나 조용한 곳을 찾기 바란다.
  홀로 있기의 열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관심을 증대시켜 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자유를 가지게 되며,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하여 새로운 반응의 행동을 가지게 된다. 토마스 머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나의 형제들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온유함을 찾은 것은 홀로 있기를 통해서였다. 홀로 있기에 깊이 들어갈수록 나는 나의 형제들에 대하여 보다 더 많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홀로 있기와 고요함은 나의 형제들을 사랑하되 그들의 말에 의거하여 사랑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에 의거하여 사랑할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고요하게 홀로 있는 그 자리에 들어가기를 열망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가? 당신은 무엇인가 보다 더 나은 것을 갈망하지 않는가? 당신의 모든 호흡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다 더 깊이, 보다 더 온전히 느끼기를 갈망하지 않는가? 그 문을 열어 주는 것이 바로 홀로 있기의 훈련이다. 당신은 홀로 있기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이하고 놀랍고 부드럽고 너그러운 고요함 속에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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