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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 위대성과 위험성

수도관상피정 박석............... 조회 수 3355 추천 수 0 2008.11.02 08:4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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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본글은 관상기도를 지도하시는 권명수 교수께서 자신의 홈 자료실에 올리신 것을 본인이 다운 받아 온것입니다.  박석 교수님은 종교성 연구원 원장으로서, 본글의 서론부분에서 명상이라는 용어 안에 모든 종교를 포용하고 그 중에 기독교의 명상은 관상기도, 다른 종교의 각각의 명상법이 있음을 수평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후에 명상의 위대한 가능성과 위험성을 제시하고 있다. 명상의 위대성 뿐만 아니라 위험성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문건이므로,  관상기도를 하는 우리들이 귀담아 듣고 마음에 담아야 할 부분이 많다.  꼭 한번씩 읽어 주시길 추천하는 바 입니다.
    복사(c)  인쇄(p)가능하며 다운받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명상의 위대성과 위험성
- 명상계의 성숙을 위하여 -

박석 | 상명대 교수, 미래사회와종교성연구원 원장

1. 명상의 어제와 오늘

요즈음 우리 사회에 명상에 관심가지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명상이라는 말은 영어 ‘Meditation’의 일본식 번역어이다. ‘Meditation’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라는 의미이다.1) 그러나 오늘날 흔히 사용되고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Meditation’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동서문화의 교류 이후에 새롭게 추가된 의미로서 조용히 눈을 감은 상태에서 정신 집중과 깊은 호흡을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힌두교의 요가명상이나 불교의 명상에서 마음이 산란함이 없이 하나의 대상에 전념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인 ‘Dhyana’의 번역어이다.2)

명상은 초기에는 주로 인도에서 나온 힌두교나 불교의 명상법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지만 후기로 갈수록 그 의미가 점차 확장되어 각 종교의 전문적인 수도법을 총칭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유대교에는 고대의 선지자들과 랍비들이 자신들의 의식세계를 깊게 하여 야훼와 교통하기 위하여 까발라라고 하는 명상을 하였으며, 기독교의 수사들 또한 묵상 기도와 아울러 보다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현전을 체험하기 위한 관상 기도법이라는 명상을 수행하였으며, 이슬람교에도 많은 수피들이 알라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위한 명상법들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도교에서도 단순한 건강의 차원을 넘어 불로장생을 얻기 위하여 단전호흡과 아울러 고도의 정신집중법을 이용한 명상법이 있으며, 사회적인 윤리를 중시하는 유교에서도 외물의 유혹에서 벗어나 본래적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한 명상법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명상이라고 하면 요가나 불교의 명상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제는 명상의 의미를 좀 더 넓게 바라볼 필요성이 있다.

원래 명상은 해당 종교의 핵심적인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고급스러운 심신수련법이기 때문에 사제계급이나 전문적인 수도자들 사이에서만 비밀리에 전수되는 경향이 있었다. 주로 구전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았고 간혹 책으로 남겨지는 경우에도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적인 표현으로 기록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일반인들의 접근이 금지되었던 것은 명상법 속에 금욕이나 특이한 호흡법 내지는 정신 집중법들이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함부로 따라하는 경우 여러 가지 부작용을 발생할 수도 있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도 있지만 종교권력의 독점을 위하여 혹은 명상의 권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부러 정보를 제한하였던 측면도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서구인들이 동양의 정신세계인 힌두교와 불교의 명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깊은 산중과 수도원에 있던 명상은 서서히 속세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인도의 선구적인 요가 스승들이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면서 힌두교의 명상의 세계를 서구인들에게 널리 전하기 시작하였고 일본의 선승들도 선불교의 참선명상법들을 서양인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명상은 서구 사회에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부터 서서히 전래되기 시작한 명상은 60년대 말의 68혁명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68혁명은 처음에는 정치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근대서구문명 전반에 대한 통렬한 비판운동으로 나아갔다. 이에 진보적 지식인들과 학생들 사이에 근대서양문명에 대한 대안의 하나로 동양의 종교나 명상에 대한 관심이 대폭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만트라 명상을 응용하여 TM 명상법을 창시한 마헤쉬 마하리시, 고대 탄트라의 가르침을 현대화하여 성에 대한 파격적 가르침을 펼친 라즈니쉬, 신지학회에서 메시아의 역할을 포기하고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부르짖은 크리슈나무르띠, 중국의 침략으로 망명길에 올라 히말라야의 비경속에 감추어졌던 티벳명상법을 전수한 달라이 라마, 베트남전쟁 중 반전운동과 명상을 결합시켜 실천적 명상가로 이름을 드높인 틱냣한 등의 동양의 구루들이 많은 서양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서구인들 중에는 단순히 낯선 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동양사상과 명상에 심취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근대 서구문명의 폐단을 치유하는 대안운동의 하나로 동양사상과 명상에 관심을 지니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환경운동이나 공동체 운동 영성 운동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은 단순히 명상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를 넘어 명상을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고 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아래의 에살렌 연구소, 뉴멕시코주의 록키산맥 한 가운데 있는 라마파운데이션 등은 바로 이러한 운동의 중심지였다.3)

명상에 대한 관심이 점차 증가하자 명상을 신비의 상자 속에서 끄집어내어 그 속에 있는 심리적 생리적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노력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명상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고 육체의 이완을 가져온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명상을 실용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4) 초기에는 이국 문물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명상이 점차 실용적 관심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특히 건강과 미용 차원에서는 하타요가가 일찍부터 널리 유행하였고 최근에는 중국의 태극권 또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본격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 또한 지속적으로 서양인들의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도심 속에서도 명상센터가 늘고 있는 추세이며 교외나 산중의 명상 센터에는 여름 휴가철이면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조용히 휴식을 취하면서 명상을 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근래에는 웰빙의 유행으로 명상에 대한 수요가 더욱 늘고 있는 추세이다.  

명상은 일반인들의 웰빙 차원만이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 질병을 치료하는 차원에서도 널리 응용되고 있다. 7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게슈탈트 심리치료는 원래 탄생과정에서 동양사상과 명상의 요소를 대거 유입하였기 때문에 명상적인 기법이 많이 있으며 최근에는 미국의 심리치료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가장 실증적인 태도를 고집하는 인지행동심리치료에서도 위빠사나 명상이 심리치료에 미치는 효과에 주목하고 있는 실정이다. 명상은 정신질환뿐만 아니라 일반 환자의 치료에도 응용되고 있다. 그 중에서 존 카밧진은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를 서양인들의 체질에 맞게끔 개선한 MBSR 프로그램5)을 운용하여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여 명성을 떨치고 있다. 현재 그의 MBSR 프로그램은 미국 전역의 수백 개의 대학병원과 개인클리닉에서 환자치료에 사용되고 있고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병원에서도 이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동양의 명상을 서구 문화에 맞게 재해석하고 응용하려는 시도 외에 명상의 원리를 이용하여 서구적인 스타일의 새로운 명상법을 창안하는 경우도 있다. 60년대에 호세 실버가 창안한 실버 마인드 콘트롤이나 80년대에 해리 팔머가 창안한 아바타 의식개발프로그램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마인드 콘트롤이 뇌파와 최면술 및 명상의 상관관계에 착안하여 개발한 일종의 자기암시 프로그램으로서 잠재능력개발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아바타 코스는 사람은 자신이 믿는 대로 경험한다는 전제 아래 자신의 숨겨진 신념체계를 조율하는 의식개발프로그램으로서 삶의 창조성을 높이는 데에 더 비중을 많이 두고 있다. 힌두교에서 신의 화신을 뜻하는 ‘아바타’라는 명칭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후자가 명상적 요소가 훨씬 많다.

서양에 동양의 명상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60년대 후반에 우리는 근대화를 막 시작하였기 때문에 동양의 전통에 대해서는 살펴볼 겨를도 없이 근대서구문명을 좇아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나라에 명상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반부터이다. 라즈니쉬와 크리슈나무르띠의 명상서적이 서점가에서 반응을 얻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명상 서적붐은 바바 하리다스, 요가난다, 라마크리슈나, 라마나 마하리쉬 등의 인도 명상의 대가들의 명상서적들의 출간으로 이어지면서 서점에 인도 명상서적코너를 만들게 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요가 명상이 유행하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선승들에게만 개방되어 있던 선도 일반 시민들에게도 개방되기 시작하였으며 시내에 시민선방이 생기기도 하였다.  

80년대 후반에는 《단》이라고 하는 소설의 유행을 통해 수련계에 민족주의 바람이 불면서 민족비전의 기수련을 통한 건강증진과 마음수양을 표방하는 선도 내지는 단학계열의 수련단체들이 급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일찍부터 자리를 잡은 국선도를 위시하여 후발주자이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놀랄만한 속도로 급성장한 단학선원6)외에 천도선법, 도화재, 수선재 등의 단체들이 전국적으로 체인을 두고 있다.

90년대 후반에는 단기간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생사일여 해탈을 체험할 수 있다는 단체가 등장하였다. 마음수련원이 바로 그것인데 자신의 과거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상상으로 자신을 죽이는 것을 기본 테크닉으로 삼아 짧은 시간 내에 마음을 비우고 자기의 참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가야산의 어느 고시원에서 출발하였는데 지금은 계룡산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인 지점을 둔 거대단체로 성장하였다. 건강을 위한 수련원이 아닌 마음 닦기를 표방하는 단체로서는 현재 가장 큰 단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에는 인터넷 사이트의 온라인 모임에서 출발하여 온라인을 중심으로 깨달음을 전파하는 단체가 등장하였다. 붓다필드가 바로 그것인데 자신이 생각의 노예가 아니라 생각의 주인임을 자각하는 것을 가르침의 종지로 삼아서 세력을 점차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이 단체의 구루로서 게이트라는 별칭을 사용하는 신종현은 젠풀이라고 하는 인터넷 명상사이트에서 <신비의 문>이라고 하는 코너를 맡으면서 인터넷을 통해서 텔리파시, UFO, 사라진 신비의 대륙, 전생과 윤회 등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점차 인지도를 넓혀가다가 마침내 온라인의 모임을 오프라인으로 이끌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2002년 겨울에 처음으로 붓다 인가를 받은 제자가 탄생한 이래 현재 약 400명 정도의 제자들이 붓다를 인가받았다. 명상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온라인 중심의 모임에서 오프라인 모임으로 발달한 케이스이다. 최근에는 출판사도 만들고 잡지도 출간하고 뉴질랜드에 센터를 건립하는 것도 활발히 추진 중에 있다.

이상 세계 명상계의 흐름과 한국의 명상계의 움직임을 간략히 소개하였다. 근자에 이르러 웰빙의 유행으로 일반인들의 명상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가하였으며 최근에는 언론에서도 심심치 않게 다루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명상 단체에서는 자신의 단체를 기업화하고 명상을 웰빙과 연계시켜 하나의 새로운 산업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너도 나도 명상센터를 건립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깊은 산중의 수도원에서 은밀히 전해지던 명상이 이제는 상업화의 길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2. 명상의 위대한 가능성

명상은 개인적 관점에서 스트레스 해소와 건강증진 내지는 마음의 여유와 평화를 줄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의 가능성이 그것에 그치지는 않는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상을 개인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지만 일부 선각자들은 명상 속에서 현 인류문명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문명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자본주의문명은 인류의 생산력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지만 아울러 여러 가지 병폐도 많이 낳았다. 산업화과정에서 나타난 엄청난 빈부의 격차, 제국주의의 확장 과정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세계 전쟁,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해 생긴 제3세계의 종족 내지는 민족 갈등, 산업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극도의 물신주의, 도덕성 상실, 인간 소외 등의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환경파괴, 자원고갈, 핵전쟁의 위협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들은 인류의 사활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심각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자본주의문명의 위험성에 대해 자각한 선각자들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환경운동, 공동체 운동, 영성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운동을 추진하는 많은 사람들이 명상적인 삶의 양식을 새로운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 명상에 어떠한 면들이 지금 현재 자본주의 문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인류문명의 흐름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일까?

일단 먼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신적 가치의 중시이다.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중시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성적 가치를 추구하는 명상은 오로지 외면적 가치 물질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이 시대 문명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지나치게 외면적 가치를 중시한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숨 가쁜 경쟁사회 속에서 자신의 내면의 평화와 영성적 가치를 돌 볼 틈이 없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분명 생산력이 증대하였고 모든 것이 풍성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경쟁심리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신자유주의를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전지구촌적인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제어기를 놓쳐버린 채 끊임없이 앞으로만 향해 달릴 것을 강조하는 자본주의문명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도 방향감각을 잃고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렇게 물질적 가치를 향해 무작정 이렇게 계속 달리기만 하는 것은 언젠가는 무리를 가져오고 병을 일으키게 한다.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다. 경쟁으로 인한 만성적 스트레스, 인간성의 황폐화, 물신주의적 풍토 속에서 경제적으로 소외받은 자들의 절망감 등이 점차 심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회적 불안감도 점차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상의 문제들은 단순히 지엽적인 제도적 보완으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와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명상은 바로 이러한 사회와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반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물론 물질주의 편향의 사회를 교정하는 데는 종교가 어느 정도의 역할은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제도권 종교들은 대부분 자본주의적인 논리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도시에 그렇게 많은 교회가 늘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사찰에도 찾아가지만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가 않고 오히려 더욱 혼탁스러워지고 있다. 사실 소수의 깨어있는 종교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의 교세를 확장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별로 없다. 더 큰 문제들은 많은 성직자들 또한 물질적 유혹에 쉽게 넘어갈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교세와 확장과 팽창을 꾀할 뿐 진정한 영성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상이 이들 종교와 다른 점은 경전이나 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감각과 욕구를 조절해서 자연스럽게 영성을 발견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명상을 하게 되면 몸과 마음이 깨어나고 조악한 감각적 차원의 욕구가 정화된다. 그것은 경전이나 교리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우리의 영성을 일깨운다. 많은 종교인들이 마음은 진리를 향하지만 몸은 항상 물질적 욕구에 시달리고 쾌락을 향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바로 실제적 수행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다. 실제적인 명상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같이 정화시킬 수 있을 때 영성이란 단순히 마음속을 떠도는 이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함께 하는 현실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는 기본적으로 물질적 욕구를 부추기는 사회이다. 감각적 쾌락과 편리라는 미끼로 끊임없이 새로운 소비를 창출해야만 성장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축적된 부는 일부 계층에게만 편중되어 사회적 불협화음을 증대시키고 있다. 그것은 한 나라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문제이다.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에서는 비만환자가 사회문제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지만 빈곤국가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더욱 필요한 것은 살 빼기가 아니라 욕구 줄이기이다. 이제는 적절한 소비와 적절한 생산이 미덕이 되는 사회시스템으로 나아가야 한다. 제대로 된 명상을 하면 자율적으로 적게 먹고 적게 소비하게 된다. 내면에서 깊은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에 필요이상의 욕구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이 욕구의 조절이야말로 자본주의 문명의 폐단을 치유할 수 있는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인의 욕구 조절이 사회의 욕구 조절로 바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는 사회 나름대로의 메커니즘이 있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데는 또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통하여 적절한 소비와 소유가 보다 아름다운 삶의 양식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 사회적 시스템을 개혁하는 일도 훨씬 용이할 것이다.  

현 자본주의 문명의 또 하나의 문제이자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바로 환경문제이다. 오로지 경제적 이익 하나 때문에 계속적으로 자행되는 환경파괴는 머지않아 인류전체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최근 몇십년 동안 자연은 심각한 수준의 환경재앙으로 우리에게 여러 차례 경고를 하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의 물질적 가치 경제적 이익에 눈이 멀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물질편향의 가치체계, 경제성장 위주의 사회시스템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되는 문제이자 그 결과로 나타나는 치명적 폐단이다.

환경문제는 또한 기본적인 세계관과도 많은 관련이 있다. 서구문명, 특히 데까르트 이후의 과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서구문명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켜서 자연을 관찰의 대상,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서구인들은 자연을 이익추구의 대상으로 삼아서 어떻게 하면 자연을 더욱 착취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양인들, 특히 명상적 전통이 풍부한 동양인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 관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범신론적 전통이 강한 힌두이즘에서는 자연은 그 자체가 바로 신이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모든 만물은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라고 여겼다. 그들은 돌멩이 하나 잡초 하나에서도 신의 모습과 불성을 보려고 하였고 그들과 교감하려고 하였다. 동북아 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도가사상은 물론이거니와 유가사상 또한 기본적으로 자연은 우리의 삶의 터이지 우리가 돌아갈 귀의처라고 인식하였다. 그들은 자연과 대화하며 교감하는 삶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특히 명상을 직접적으로 수련하는 사람은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명상은 자연의 포근함과 소중함을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게 되면 우리의 감각기관은 점차 민감하게 되고 인공에 찌든 삶과 자연 속의 삶의 차이를 더욱 잘 느끼게 만들어준다. 매연과 소음이 가득 찬 도심 한 가운데의 명상과 울창한 숲과 맑은 공기가 있는 대자연에서 명상하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이다. 바위 위나 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거나 오솔길을 천천히 산책하면서 걷기 명상을 해보면 자연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속삭이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의 몸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들려오는 새소리와 벌레소리에 나의 귀가 얼마나 환희에 차게 되는지 은은히 번지는 꽃향기에 나의 코가 얼마나 황홀해지는 알 수가 있다.

명상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태주의자가 된다. 자연이 주는 기쁨이 자연을 포기해서 얻은 물질적 풍요보다 훨씬 소중한 것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생태공동체 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명상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을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명상은 지금의 물질 편향적 가치관을 교정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추구해야 새로운 삶의 양식인 인간과 자연이 교감하는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렇게 명상 속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 거론되고 있는 명상단체의 기업화, 명상의 산업화는 상당히 많은 문제점이 있다. 특히 일부 기업형 명상단체에서는 겉으로는 그럴싸한 문구로 포장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윤의 추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어 양식 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러한 것은 명상의 본령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명상은 다종교의 사회에서 생기는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은 부분적으로는 고대로부터 있어온 것이지만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이르러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선을 추구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다. 선의 추구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보편적인 가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는 제각기 그것이 속한 문화권에 따르는 특유의 우주관과 인생관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라기보다는 그 문화권 특유의 집단주관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소수의 깨어있는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도들은 그 집단주관적인 진리를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인다. 자신들이 속한 종교의 집단주관적인 진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굳게 믿을 때 타종교에 대한 관용의 여지는 적어진다. 그것은 바로 종교 간의 갈등을 낳는다. 특히 유일신에 대한 배타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냉전이 사라진 후 세계 곳곳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 상당수가 종교전쟁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중동지방에서는 종교 간의 대립이 화약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종교 간의 갈등은 21세기에 인류가 풀어야할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이므로 종교 간의 화해와 대화가 더욱 중요하다. 물론 다행히도 종교 간의 심각한 갈등과 대립은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소소한 갈등과 대립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물론 종교간의 갈등은 단순히 종교 자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의 문제, 정치 경제적 문제와도 맞물려 있어 실로 복잡한 문제이지만 역시 그 뿌리는 종교적 문제이다. 여기서는 종교적 차원에서의 해결책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종교다원주의는 이러한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고는 있다. 사실 동양의 종교에서는 종교다원주의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종교 간의 공존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주로 유일신에 대한 배타적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 특히 기독교 신학에서 새로운 화두로 등장한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에서도 여러 차원의 이론들이 있지만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진리의 다양한 표현이고 기독교도 그 중의 하나라는 주장이 가장 진보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은 또 다른 차원에서 종교 간의 화해와 공존에 도움을 줄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명상은 원래 각 종교의 핵심적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종교의 알맹이였다. 대부분 종교의 창시자들은 선천적 내지는 후천적인 노력에 의한 위대한 명상가이다. 그들은 깊은 명상 상태에서 신의 계시를 받거나 혹은 우주의 진리를 깨쳤던 것이다. 그들의 진리는 언어화 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틀에 갇히게 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도그마화 되어 갔던 것이다. 명상을 하게 되면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언어와 이미지로 고착화된 종교의 외각지대에서 점차 더 깊은 본질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더 깊은 내부로 들어갈수록 도그마화 된 교리로부터 더욱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명상의 대가들이 타종교에 대해서 훨씬 관용적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카톨릭의 관상명상의 대가 토머스 머튼 신부 같은 이는 참선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서 선사들의 깨달음의 경지가 위대한 수사들이 관상을 통해 하나님의 현전을 체험하는 그 자리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명상의 대가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비유로 들자면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인데 초입부의 계곡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길만이 전부인 줄 알지만 정상에 가까이 올라온 사람은 모든 길이 하나로 통하는 것임을 저절로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명상의 또 하나의 주요한 장점은 종교인들의 성숙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세계종교로서 고도의 철학과 윤리체계를 갖춘 고등종교도 있고 어느 특정한 민족들 사이에서만 국한되는 민족종교도 있고 특별한 교리체계나 종교철학이 없이 무속적이고 주술적인 무속적인 민간종교도 있다. 그러나 그가 믿는 종교의 수준에 상관없이 그 사람 자체의 종교행위만을 가지고 본다면 또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기복적 종교행위이고, 하나는 내적으로 진정한 삶의 가치와 우주의 실상을 탐구하고 외적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구도적 종교행위이다.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행위 차원에 머무르고 있으면 복을 비는 대상이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고목나무이든 상관없이 그것은 기복적인 종교행위인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기복적 신앙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

종교가 이렇게 기복적 신앙 차원에 머무르고 있을 때 사회적 정화기능은 그다지 크지 않다. 더욱 나쁜 것은 기복적 신앙을 이용하여 계속 양적 팽창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와 사찰이 늘어나고 종교인이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그다지 아름다워지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종교 간의 갈등이 생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명상을 하게 되면 자신의 종교행위를 기복적 차원에서 구도적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원래 명상은 종교적 구도행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명상을 통해 종교행위의 차원이 한 단계 승화되었을 때 종교의 사회적 기능도 더욱 강화될 수 있고 종교 간의 갈등도 훨씬 감소될 수 있다.

그 외에 명상은 건전한 전인교육의 한 방편으로 활용될 수 있다. 명상은 기본적으로 지성보다는 감성과 영성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지식탐구 중심의 근대 서구 교육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지식 중심의 근대 서구교육의 폐단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절감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대안교육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는데 명상은 대안교육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대상이다. 특히 자기 성찰 능력과 자기 절제 능력을 배양할 수 있고 자연과의 친화력을 향상시켜준다는 점에서 건전한 민주시민교육, 생태교육 등의 분야에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명상은 대중문화의 성숙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의 대중문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철저하게 말초적 쾌감을 중시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의 대중문화산업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산업이나 음악 산업을 보면 이러한 경향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영화나 음악이나 할 것 없이 날이 갈수록 템포는 빨라지고 화면과 음향 또한 날이 갈수록 자극적이고 강렬하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자극이 강해질수록 무디어진다. 그래서 웬만한 자극에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더욱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된다.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생명에너지의 낭비와 감성의 피폐를 가져오고 결국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된다.

명상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조용한 곳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는 가운데 말초적인 자극에 중독 되어 피폐해진 우리의 감각기관은 조금씩 순화되고 되살아날 수 있다. 창작자나 감상자나 모두 감각기관이 정화되면 말초적인 자극보다는 깊은 울림과 감동을 찾게 된다. 이로 인해 대중문화의 차원이 한 단계 성숙될 수 있다.  

3. 명상의 위험성

이상 명상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가능성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명상 속에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명상 속에는 여러 가지 위험성도 있다. 발표자는 오랫동안 명상을 하면서 가까운 사람 중에 잘못된 명상에 심취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고 간접적으로 그러한 사례에 대해서 많이 들어왔다. 신체상의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현실도피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다.

최근 인터넷에서는 사이비종교나 명상에 반대하는 안티사이비 사이트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데 그중 사이비명상단체로 지명한 단체들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명상단체로 성공한 대부분의 단체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단월드, 수선재, 도화재, 법륜공, 마음수련원, 붓다필드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7) 이 사이트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고발내용은 교묘한 방법에 의한 금전적 피해, 리더의 부도덕성, 리더의 교주화, 신비적 세계관이나 미래의 재앙에 대한 예언, 수련으로 인한 심신의 부작용, 수련으로 인한 가정불화 등등이다. 이러한 고발 중에는 객관적인 태도를 상실한 감정적 인신공격적 내용도 다소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일리가 있는 부분도 많다.

교묘한 방법에 의한 금전적 피해의 경우 모든 단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지나치게 영리를 추구하는 소수의 단체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 이것은 경영의 문제이지 명상의 위험성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따지고 보면 그 금전적 피해라고 하는 것이 나름대로의 적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의 주관적인 억울함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피해사례라고 하는 것이 단체에서 회원들에게 평생회비를 권유하거나 엄청나게 높은 가격의 특별프로그램의 회원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거나 집안의 화평을 위해 고액의 천도제를 지낼 것을 권유하거나 영성적 기운이 강한 해외의 명소에서 해외수련여행을 권유하거나 잦은 특별 수련을 권유하거나 명상에 관련된 특별한 물품이나 약품을 판매하는 경우 등등인데 사실 이것들은 모두 강요가 아니라 권유이기 때문에 고객이 응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적으로 명상의 위험성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리더의 부도덕성에 대한 문제도 명상의 위험성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다. 사실 리더에 대한 도덕성의 요구는 일반적인 단체에서도 해당되는 것이지만 명상단체의 경우에는 영성을 추구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그 기대치가 더욱 높을 수가 있다. 명상 단체의 리더가 부도덕적일 경우 그 단체에서 제공하는 수련법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그 단체의 전체적인 이미지에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상단체 리더가 도덕적 결함이 있을 경우 그 단체에서 그것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티단체에서는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부분에 대해 비리를 폭로하려고 하는 것이다. 리더의 부도덕성에 대한 문제도 위에서 거론한 모든 단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 리더의 교주화는 명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거론한 대부분의 단체에 해당되는 사항이기도 한다. 겉으로 볼 때는 심신의 건강을 위주로 하는 건전한 단체를 표방하고 표면적으로는 전혀 리더를 교주화 하지 않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리더를 절대적인 스승으로 추앙하여 종교조직의 냄새를 풍기는 단체도 있다. 어떤 단체에서는 수련의 과정 중에 그 단체의 리더를 석가나 예수보다 더 위대하며 인류가 낳은 최고의 스승으로 인정해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리더가 빛의 주님과 삼세제불을 대신해서 제자들의 붓다됨을 인가해주는 붓다필드의 경우 제자들의 스승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다.  

리더를 최고의 영적 스승으로 추앙하는 것 자체는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므로 명상의 위험성과 직접적으로 상관관계는 없는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로 인해 불합리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이 결국 여러 가지 폐단을 낳게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사이비 종교단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금전적 피해나 성폭력 피해 같은 것도 리더에 대한 절대적 신봉이 바로 그 전제가 된다. 그러므로 명상단체에서의 스승에 대한 필요이상의 추앙이나 숭배는 명상을 불건전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소지가 많다.

또 하나 신비적 세계관이나 미래의 재앙에 대한 예언 또한 여러 단체의 공통점 중의 하나이다. 수선재의 리더인 문화영은 『오 메시아 노』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이 깊은 명상상태에서 예수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고 또한 명상상태에서 황진이와의 대화를 통해 황진이가 선도 수련을 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붓다필드의 리더인 신종현 역시『신비의 문』이라는 저서를 통해 UFO, 아틀란티스대륙과 무대륙 등이 실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태양계의 11번째 행성인 니비루 행성에는 1500미터의 거인들이 살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예수의 전생이 중국의 노자였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단월드의 리더인 이승헌은 공개적으로 신비적 예언이나 세계관을 펼친 적은 없지만 내부멤버들 사이에서는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도화재, 천도선법 등의 리더 또한 신비적 세계관이나 예언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고 한다.

신비적 세계관이나 미래의 재앙에 대한 예언 또한 명상의 위험성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는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때로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도 하고 명상 리더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이비 단체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의 하나로 여겨진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허황된 예언이나 신비적 세계관에 심취하거나 때로 그것을 실제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 현실감각이 무디어지고 집단구성원을 제외한 일반사람과의 소통이 점차 힘들어지고 심한 경우 건전한 삶을 부정하여 여러 가지 심각한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몇 년 전 기독교단체 가운데서 휴거를 실제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구체적인 날짜까지 예언한 다미선교회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열렬한 신도들 가운데서는 직장도 그만두고 집도 팔고 심지어 대입 수능시험을 앞둔 자녀의 수능시험도 그만두게 하고 매일 교회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다가 예언 당일 아무 일이 없자 정신적 공황에 빠져 정신병원에 간 사람도 많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허황된 예언이나 신비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단체에는 이러한 위험성의 소지가 항상 있다.

잘못된 명상 수련을 하다가 심신에 부작용이 일어나는 경우는 명상의 위험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명상을 하게 되면 우선적으로 심신을 이완시키고 집중력을 향상시켜주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감각을 일깨워 민감성을 높여주고 자신에 대한 성찰능력을 키워준다. 그러나 때로는 몸과 마음에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호흡이 답답하고 머리가 무거워지는 경우도 있고, 몸의 특정부위에 원인 모를 통증을 느끼거나 몸 전체가 무기력해지는 경우도 있고, 감정이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극도로 좋은 상태와 극도로 나쁜 상태가 반복되는 경우도 있고, 심한 경우 환청이나 환시 등의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지나치게 영리를 추구하는 단체에서 이러한 부작용이 많이 나타나는 경향이 많은데 그 이유는 단기간에 빠른 효과를 보기 위해 자극적인 명상법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주로 특이한 호흡법이나 주문, 자극적인 상상이나 무리한 집중법 등을 사용하는 단체에서 이러한 부작용이 많이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그러한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심신이 허약하거나 어떤 육체적 정신적 질병이 있는 경우에 이러한 부작용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수련하는 당사자의 자세와도 많은 관련이 있다. 빠른 시간에 어떤 경지를 체험하고픈 욕심에 무리하게 수련을 해서 피해를 자초하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명상단체에서는 이러한 피해에 대해 명상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수련자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피해가 나타나는 경우 물론 당사자에게도 일정부분의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러한 특이한 수련법을 지도하고 분위기상으로 열심히 수련할 것을 강조하는 수련원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제약회사에 약을 개발할 때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개발을 강행하는 것과 같다. 일반적인 경우 제약회사에서 약을 개발할 때는 부작용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야 하고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 미리 경고를 하는 것이 법적 의무로 되어 있다. 그런데 명상계는 그렇지가 않다. 명상의 효과에 대해서 과장광고만 할 뿐, 부작용의 가능성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수련으로 인한 가정불화의 문제를 다루도록 하자. 이 문제는 매우 포괄적인데, 심신의 부작용이 문제가 되어 주변의 가족에게 정신적 경제적 부담을 주어 가정불화가 생기는 경우도 있고, 수련에 과도한 비용을 지출하여 가정불화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수련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현실감각이 저하되어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가정불화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앞의 두 경우는 이미 거론하였던 위험성과 중복이 되므로 여기서는 마지막 항목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사실 명상에 심취하여 가정에 불화가 생기는 문제는 위에서 거론한 명상단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명상 전체의 패러다임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원래 명상은 종교적 수도를 위한 것이었고 오랫동안 깊은 산중의 암자나 높은 담으로 격리된 수도원에서 수련되어지던 것이었다. 그래서 명상의 전반적인 시스템이나 지향점은 속세를 초월한 종교적 깨달음에 맞추어져있다. 물론 간혹 현실과의 조화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초월 세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힌두교의 사마디 내지는 우주의식, 불교의 니르바나, 유대교나 기독교나 이슬람 등의 명상에서 추구하는 유일신과의 합일 내지는 유일신의 현전의 체험 등 거의 모든 명상법에서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것은 현실 너머의 세계이다.

명상이 도시의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도시의 일반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로 육체적인 건강과 미용 다이어트, 스트레스 감소와 마음의 평화 정도이다. 그래서 이러한 목적 아래 명상테크닉의 일부, 특히 초입 단계의 테크닉을 활용하는 편이다. 비록 현대인의 구미에 맞게끔 명상을 약간씩 개량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기본적인 틀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입 단계의 테크닉을 통해 명상에 맛을 느끼고 점차 명상에 깊게 들어갈수록 명상이 원래 추구하던 초월적 영성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초월적 영역의 각성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경우 아무래도 현실감각이 점차 저하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마음의 에너지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출가자의 신분으로 수행을 하거나 종교적 울타리의 보호를 받는 경우에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장려를 받을 수 있지만 일반인, 특히 가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서는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기가 쉽다. 앞에서 명상은 원래 종교의 알맹이였기 때문에 명상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면 종교를 성숙시키는 힘이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명상 속의 담겨져 있는 종교적 성스러움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상으로 시중의 명상단체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명상이 지니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해 보았다. 이중 어떤 것들은 명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고 어떤 것들은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어떤 것들은 일부 명상단체에만 해당되고 어떤 것은 전체 명상계의 문제점이다. 물론 사안에 따라 그 위험성이 심각하게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 위험성이 뚜렷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피해자 수나 피해상황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정도의 심각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비록 그 위험성이 뚜렷하지 않고 피해상황도 심각하지 않지만 점차 명상이 대중화될 때는 상당한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많다. 더 중요한 것은 명상이 문명전환과 사회변혁의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4. 명상계의 성숙을 위하여

앞에서 명상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명상 속에 아무리 긍정적인 측면이 많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해도 명상이 지니고 있는 위험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명상이 보다 많은 대중에게 다가서기는 쉽지 않다. 설령 상업적으로 일시적인 붐을 일으킬지는 몰라도 그것이 운동의 차원으로 승화되기는 힘들다. 발표자는 명상이 지니고 있는 위험성의 해결이라는 차원의 넘어 성숙의 방편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가 명상의 민주화이다. 지금의 시대는 민주주의 시대이다. 그것은 단순한 시대조류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 진보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명상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지지를 얻으려면 명상 또한 민주주의 시대의 조류에 부응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각 영역을 민주화시켰고 종교 또한 옛날에 비해서는 많이 민주화되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원에서 보면 아직도 종교권력이 신부, 목사, 승려 등의 성직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봉건체제에 머무르고 있다. 물론 퀘이커교 같이 목회자를 따로 두지 않는 진보성을 보이는 종파도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여전히 성직자에 대한 권위가 절대적이다. 특히 목회자에 대한 비판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가운데 하나임을 강조하는 일부 몰지각한 목사들의 설교나 재가자에 대한 출가수도자의 절대적인 우위를 강조하는 오만한 승려나 신부들의 행위들을 보고 있으면 종교의 민주화는 참으로 머나먼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것은 지도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성직자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신도들의 의식수준과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관행이 어우러져 나타난 현상이다.

원래 명상은 종교에서 나온 것이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종교보다는 훨씬 민주적이다. 인도사상사를 보면 초기의 베다 시대의 종교행위는 제사장인 브라만계급 중심이 되어 희생제의와 기복행위를 위주로 하였는데 범아일여사상8)을 제창한 우파니샤드 시대에 이르러 희생제의와 기복행위보다는 스스로 눈을 감고 자아를 탐구하는 명상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범아일여사상이란 우주의 실재인 브라만과 내 속의 진아인 아트만은 서로 하나라는 것을 주장하는 사상이다. 여기서 브라만이니 아트만이니 하는 개념은 힌두이즘의 코스몰로지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속에는 보편적 측면이 있다. 범아일여 사상의 핵심은 우리의 내면에는 절대적 진리가 내재해있다는 것으로서 그것은 힌두이즘 외에 다른 종교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9) 범아일여 사상이 유행하면서 사람들은 제사의식을 통해 외재적 초월자에 복을 구하기보다는 자기 속에 내재하는 참나를 발견하는 데 마음을 쏟게 되고 이것은 바로 명상의 발달을 낳았던 것이다.  

명상의 발달은 제사행위를 하는 사제에게 집중되어 있던 종교권력을 개인에게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의 명상을 통해서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은 사실 혁명적인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당시에 종교권력이 일반 민중에게까지 분산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사를 담당하던 소수의 브라만 계층에 국한되어 있던 종교권력이 보다 많은 대중에게 확산된 것은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명상은 그 태생부터 민주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제대로 된 명상에서는 외재적인 종교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스승에 대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도의 요가 명상에서도 본질적인 스승은 자기 속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고 중국의 선사들은 살불살조10)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볼 때 명상계에서는 스승에 대해 상당한 권위를 부여하고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종교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성직자가 단순히 진리의 전달자라는 차원에 머무르는 반면 명상스승은 직접적으로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는 영혼의 스승으로 추앙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명상스승은 중간단계의 스승이 아니라 최고단계의 스승을 가리킨다.    

위에서 언급한 명상리더의 교주화의 문제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물론 모든 명상 단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명상 단체의 리더들은 노골적으로 교주화의 양태를 보여주고 있지만 어떤 명상단체 리더들은 상당히 민주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친구와 같은 스승임을 강조하면서 매우 민주적이고 서민적인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명상 단체에서는 스승의 깨달음에 대한 권위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분위기이다. 물론 그것은 노골적인 강요가 아니라 암묵적인 강요이다. 그래서 많은 명상 단체에서 스승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위대한 스승이 서민적인 모습을 보일 때 제자들의 감동은 더욱 커지고 그래서 비이성적인 헌신도 각오하게 만든다.  

명상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의 벗이 되려면 이제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명상을 민주화시킬 필요성이 있다. 이제는 봉건적인 차원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차원의 선생과 학생의 관계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본질적인 스승은 결국 자기 속에 있다는 관점이나 스스로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관점이 좀 새롭게 조명되고 부각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또 한 가지 주의를 기울려야 할 부분은 개인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이란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스승은 여러 가지 인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각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승에 대한 비판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제는 깨달음의 절대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발표자는 어떠한 깨달음도 절대적이지는 않고 어떠한 대각자도 완전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대적 우위가 있을 뿐 실제 삶에 있어서는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못한 면이 많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명상계의 스승들 중에서 그의 삶이 그 집단의 제자들의 눈만이 아니라 일반인의 눈에도 건전하고 아름답게 비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튼 이제는 명상의 스승에게 주어지는 맹목적인 권위를 타파하고 명상계 전체의 분위기를 좀 더 민주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다음으로는 명상의 과학화이다. 명상의 세계는 아직도 필요 이상의 신비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고 서로 상충되는 부분도 많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상의 과학화 체계화가 시급하다. 근래에 들어 구미에서는 명상의 생리적 심리적 효과를 밝히는 논문과 저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명상의 과학화에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개별 명상에 대한 효과를 부분적으로 밝히는 데 그치고 있을 뿐 다양한 명상을 체계적으로 비교 연구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보편적인 원리를 밝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하나의 문제는 어떠한 명상법을 하면 어떠한 심리적 생리적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대부분의 특정 단체의 홍보용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어떠한 명상법도 열심히 수련하면 일정 부분의 심리적 생리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 속에는 그 수련법 자체가 가지고 있는 효과도 있지만 플라세보 효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플라세보 효과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부분을 배제한 채 수련을 통해 얻은 심리적 생리적 효과들이 특정한 수련법 자체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편향된 연구결과이다.

명상의 심리적 생리적 효과에 대한 계량적 통계적 차원에서의 과학화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명상에 대한 합리적 사고를 가지는 것이다. 과학의 기본은 합리적 사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합리적 사유의 기초는 맹신보다는 회의를 중시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데까르뜨의 회의야말로 중세의 신비주의와 맹목적 신앙을 넘어서 근대과학을 낳게 한 철학적 기초였다. 명상계에도 아직도 중세적인 신비주의와 맹목적 신앙이 많이 남아있다. 명상의 과학화를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회의가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현재 수준의 과학의 능력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든 현상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편협한 성격의 합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밝힐 수는 없는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무조건 부정할 때 우리의 안목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좀 더 차원 높은 중도적 합리성을 추구해야 할 때이다. 어설픈 신비주의나 맹목적 신앙에 대해서는 회의의 힘으로 냉정하게 비판하되 현재의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회의하면서도 미지의 영역으로 보류하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태도가 확립되었을 때 명상법의 효과에 대해서도 훨씬 더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명상법에 대해서도 장점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단점도 보게 되고 부분적이고 가시적인 효과에만 집착하지 않고 좀더 전체적인 관점에서 어떤 생리적 심리적 영향을 끼치는가를 바라볼 수 있다. 이런 안목이 있을 때 잘못된 명상으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또 하나 필요한 과학적 태도는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는 합리성이다. 명상 속에는 주관적 현상과 객관적 현상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을 할 때 깊은 이완을 체험하면서 몸과 마음의 휴식과 재충전을 체험하거나 집중력이 향상되는 것 등은 객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을 하다보면 그 속에 담긴 특정한 세계관이나 인생관에 대해 강력한 확신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것들은 집단주관적인 착각의 소지가 있다.  명상의 초기 단계에서는 별로 못 느끼지만 명상에 본격적으로 심취하게 되면 대체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명상 중에 체험하게 되는 우주관이나 인생관 속에는 분명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요소도 있지만 주관적이고 특수한 요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을 체험하는 당사자는 그 체험의 강렬함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어떤 집단의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그러한 확신에 빠지게 되는 경우 그 확신은 더욱 강해진다. 즉, 개개인의 주관적 확신은 쉽게 깨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집단 전체의 주관적 확신이 될 경우에는 잘 깨어지지 않는다. 그 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집단주관적 확신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로 착각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렇게 집단주관적인 착각에 빠지는 경우 가장 크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소통기능의 저하이다. 물론 집단구성원들 사이의 소통은 더욱 원활해진다. 문제는 타 집단과의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사회적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리에 대해서도 잘 소통하지 못하기도 한다.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는 합리성이 확보될 때 타인과 타집관과의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명상 전체의 틀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서로의 소통이 원활해지고 다양한 명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틀이 나올 때 명상은 훨씬 더 대중화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명상의 범상화이다. 범상화에서의 범은 범속함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성스러움의 반대어이고 상은 일상을 가리키는 말로서 초월세계의 반대어이다. 일반적으로 명상에 심취하게 될 때 성스러움과 초속성에 함몰되어 점차 현실과 괴리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명상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건전하게 일상생활을 잘 하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현실도피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이 지닌 이러한 성향 때문에 명상에 뛰어드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명상은 좀더 평범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고 또한 일상과 더 많은 조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명상은 기본적으로 내면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몇 차례 언급하였듯이 명상은 전통적으로 현실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서 발달되어왔다. 비록 현대인의 구미에 맞게끔 명상을 약간씩 개량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기본적인 틀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상의 세계에 깊게 들어갈수록 현실적인 감각이 떨어지고 그것이 집단주관적인 착각과 동반될 때는 현실과 소통이 힘들어지고 심한 경우에는 현실검증능력을 상실하기도 한다.

물론 현실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를 체험하기를 강렬히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현실의 세계를 몽환의 세계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현실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그들에게는 일상의 생활이나 현실의 문명과 역사에 대한 관심은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궁극적인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관점은 미성숙한 관점이다. 세상과 괴리된 깨달음은 자칫 주관적인 착각에 머물기가 쉽다. 사실 명상은 원래 주관적인 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본인은 깊은 깨달음을 체험하였다고 하지만 주관적인 착각의 소지가 많다. 그래서 많은 명상단체나 종교단체에서는 스승의 검증이나 인가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주관적인 착각의 여지가 있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상단체마다 구루마다 깨달음의 기준이 조금씩 다르다. 이제는 집단주관적 기준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인 기준이 필요할 때이다. 보다 보편적인 기준을 이야기하자면 현실의 삶의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이제는 내면적 깨달음 일변도에서 외면 현실 속에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나는가도 보아야 한다.  

또 하나, 자신의 내면적 초월적 깨달음에만 머물러 있고 현실의 일상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미완의 깨달음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번데기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필요한 것이지만 계속 번데기 속에만 갇혀있으면 그것은 성장의 멈춤이다. 다시 나비가 되어 꽃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명상가가 오로지 성스러움과 초월의 세계만을 지향하는 것은 번데기의 과정과 같은 것이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올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노자가 말한 화광동진11) 또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화광동진은 노자 수양의 최후의 단계로서 노자의 깨달음의 깊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12) 화광동진이란 성스러움과 초월의 반대말이 아니라 그것을 포괄하면서 다시 범속함과 일상의 세계로 돌아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노자 화광동진의 영향을 받은 선종13) 또한 깨달음의 마지막 경지를 현실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십우도에서도 깨달음의 마지막 경지는 다시 저자거리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제는 명상계도 좀 더 범상화의 길을 갈 필요성이 있다. 내면의 성스럽고 지고한 기쁨과 시공을 초월한 깨달음만 추구할 게 아니라 희노애락이 일렁이는 일상의 세계로 돌아오고 이 역사와 현실 속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물론 성스러움과 초속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범속함과 일상성과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실 진정한 성스러움이란 범속함과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괄하는 것이고 진정한 초월의 세계 또한 일상의 현실과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의 현실을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일상의 현실을 포괄하지 않는 초월이란 사실 현실도피의 한 형태일 뿐이다.

이상으로 명상의 민주화, 과학화, 범상화를 이야기하였는데 사실 이 세 가지는 자세히 보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이다. 삶의 전체성을 보지 못하고 특정한 내면의 의식상태를 체험에만 경도될 때 현실과 괴리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집단주관적 착각에 빠지게 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단체의 리더와 구성원간의 관계도 봉건적인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민주화, 과학과, 범상화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할 때 명상은 단순히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내면의 성장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사회의 많은 병폐들을 해결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나아가 문명의 전환에도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수많은 가능을 지니고 있는 명상을 좀 더 성숙시키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명상의 전문가들이 개인의 내면적인 황홀경에 도취되어 현실을 무시하거나 집단주관적 착각 속에서 봉건적 왕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만 열을 올릴 게 아니라 현실로 다시 돌아와서 사회적 안목을 키워야 하고 보다 민주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로써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며 보다 큰 공동선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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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의 묵상 또한 ‘Meditation’이라고 하는데 바로 신학적 주제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2) 사실 ‘Dhyana’라는 말은 禪宗의 ‘禪’字의 어원이다. 원래는 禪이란 ‘禪那’의 줄임말인데 이는 바로 ‘Dhyana’의 음역어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선이란 말이 인도의 ‘Dhyana’를 직접 수입한 말이라면 명상이라는 말은 인도에서 구미를 거쳐 수입된 말이다.

3) 에살렌은 인간의 내면속에 숨겨져 있는 무한한 영성적 잠재력을 각성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설립된 단체로서 명상, 심리치료, 예술치료 등의 다양한 실험적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기관으로 유명하고 라마파운데이션은 보다 친환경적인 영성공동체 마을로서 명성을 날렸다.

4) 하바드 대학의 허버트 벤슨 교수의 『The Relaxation Response』는 TM명상이 미치는 생리적 효과에 대한 저술로서 사반세기 이상 베스트 셀러로 널리 알려져 있다.

5) ‘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Program’의 약자인데 위빠사나는 ‘Insight Meditation’으로 번역되기도 하였으나 ‘Mindfulness Meditation’이 가장 널리 쓰인 번역어이다.  

6) 근래에 단월드로 개칭하였다.

7) 현재 단월드 게시판은 단월드에서는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어 잠정적으로 폐쇄된 상태이고 이에 대해 공방이 오고가는 중이다.

8) 우주의 근원자이자 궁극적인 실상인 브라만이 각 개인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불변의 진아인 아트만과 하나라는 사상.

9) 불교에서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기독교에서 천국은 바로 마음속에 있다는 주장 또한 진리의 내재성을 강조한 것이다.

10) 殺佛殺祖란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는 뜻이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부처나 조사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깨침을 중시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11) 和光同塵이란 『도덕경』56장의 “和其光, 同其塵.”에서 나온 말로서 성스러움의 빛을 감추고 속세로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12) 노자 수양의 삼단계에 대해서는 박석, <老子 修養의 삼단계>, 2004.12. 한국중국문화학회, 『중국학논총』18집 참조

13) 선종은 노장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화광동진으로부터 많은 자양분을 취하였다. 박석, <화광동진이 선종 깨달음에 미친 영향> 1999.2  상명대어문학연구소 《어문학연구》8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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