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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의 사람이 사는 법(The Way of the Kingdom People)
고린도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989 추천 수 0 2015.01.27 23:51:45성경본문 : | 고전1:1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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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4 년 2 월 2 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그 나라의 사람이 사는 법(The Way of the Kingdom People)
고린도전서(1 Corinthians) 1:18-25
1.
지난 주일, 저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지만, 결국에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 즉 천국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대한 믿음에는 세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가 실재한다는 것을 믿는 차원입니다. 물질만이 전부가 아니며, 육신만이 전부가 아니고, 이
세상만이 다가 아님을 알고 믿습니다. 현미경으로 볼 수 있고 망원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 이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보아 아는 이 물질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의 일부임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한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눅 17:20-21)
"너희 가운데"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으로 풀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즉 "너희 마음 안에"라는 뜻으로 풀 수도
있고, "너희 가운데" 혹은 "너희 중에"라고 풀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있고 또한 우리가 그 나라
안에 살고 있습니다. 눈이 어두워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그 나라를 보고 듣고 살고 체험하는 차원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 즉 천국은 믿음을 통해 지금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으며 또한 해야 합니다. 이 차원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롬 14:17)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하는 중에 혹은 주님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깨끗이 씻김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가 있습니다. 내면과 외면이 완전 살균 처리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압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입니다. 때로는 그 무엇도 흔들지 못할 평화를
경험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이유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듣고 맛보고 사는 겁니다.
셋째,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사모하는 차원입니다. 지금은 믿음으로만 맛보는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완전하게
누리게 될 것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 품에서 누리게 될 행복을 안다면 그것을 소망하고 열망하게 되며
또한 사모하게 됩니다. 그 나라에 대해서 알고 믿는 것만큼 그 나라를 사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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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믿음이 자라는 과정은 임신의 과정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임신이 확인되었을 때는 아무런 느낌도 없고
확증도 없습니다. 의사의 말을 믿고 그런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도 임신 사실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로부터 몇
주일이 지나면 뱃속에 아이가 있음을 직접 느낍니다. 배가 점점 커집니다. 아이가 움직이는 것도 느끼고 몸부림 치는
것도 느낍니다.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의심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뱃속에 있는 아이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르면 아이가 태어날 날을
설레임으로 기다립니다.
여러분은 임신 몇 개월째입니까? 임신 초기인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나라가 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런 줄 아는 상태입니다.
임신 중기에 와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나라 안에 있음을 체험으로 확인합니다. 그 나라로 인해 감당해야 하는 희생과 고난이 있지만, 그로
인해 경험하는 기쁨이 더 큽니다. 이 즈음이 되면, 다른 사람들도 내가 '그 나라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 차립니다.
그런가 하면, 임신 말기에 와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다 큰 태아가 언제든 밀고 나올 것처럼 꿈틀거리듯, 내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너무도 분명하여 언제든지 그 나라가 환히 나타날 것같은 기분으로 사는 분들입니다. 이
즈음에 이르면 주님 품에 안길 것을 사모하고 또한 그 나라가 환히 임할 날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마라나 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체험과 사모함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믿음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에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히브리서 12 장 말씀을 근거로 하여 두 가지의 중요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첫째, 어떤 상황에서든 기뻐하고 감사하는 변화가 생깁니다. 우리가 보통 '상황' 혹은 '조건'을 말할 때는
물질적인 형편 그리고 육신적인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은 상황이나 조건이 좋지 않을 때
기뻐할 수도,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그 나라의 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상황이나
조건에 상관 없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들은 모두 '흔들리는 것들'임을 알기 때문이며,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이미 주어졌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수백만 달러의 재산가가 지갑에 현금이 없다고 해서
걱정한다면 제 정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는 변화가 생깁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 싶은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자식 교육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사업에서의
성공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눈 뜬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그 나라가 가장 중요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습니다.
과거에는 어떻게 하면 자식을 잘 키울까를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사람은 "내 자식을 어떻게 키우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를 묻습니다. 과거에는 어떻게 하면 직장 상사를 기쁘게 할까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사람이 되면 "상사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를 묻습니다. 과거에는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를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써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삶의 모든 질문이 하나님 중심으로 뒤집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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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고 경험하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셋째, 그 나라에
대해 전하고 싶어지는 변화가 그것입니다. '흔들리는 것들'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붙들고 사는 것이 안타깝기에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내가 믿고 알고 경험하고 사모하는 그 나라에 대해 전하는 것을
'전도'(evangelism)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분명하고 그 나라에 대한 우리의 체험이 진실하며 그 나라에 대한 우리의
사모함이 진실하다면, 그 나라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본 체 만 체 할 수는 없습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1800 년대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부흥사요 목사입니다. 그의 설교집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읽힐 정도로 탁월합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스펄전 목사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그럴 수 없다고 믿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예수님을 안다는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구원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흔들리는
것들'만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0 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 사도는 더 이상 그들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마치 유언을 하듯 설교합니다. 그 고별
설교의 한 대목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여러분 모두가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하게 증언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행 20:25-27)
바울 사도는 실로 '그 나라의 사람'이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진정으로 믿었고 보았고 경험했으며 또한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나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최선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그 나라에
눈을 뜨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누구 앞에서도 혹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전도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할 것이 없습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이런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징벌이
두려워서 하는 것이어도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를 키우자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전도가 교회를 키우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우리가 이미 믿고 보고 듣고 사모하는 것을 전하고 싶은
간절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4.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면 전도는 우리의 일상 생활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 나라에 대한 믿음과 체험과 사모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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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런 저런 핑게를 대기도 합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도하겠다"고 핑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자신을 제대로 알고나 하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그렇게도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모습을 보고 "나도 믿어야지!"하고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말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보이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행실은 전도의 기초 작업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롬 10:14)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롬 10:17)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전도하지 못하겠다"고 핑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철학이라면, 이념이라면, 혹은 사상이라면, 말주변이 필요합니다. 논리가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이 나에게 일으킨 사건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말주변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을 사흘만에 부활시키셨으며,
그로 인해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모든 이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했더니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 그 나라를 보고 나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졌다는 것, 그리고 그 나라에 이를 것과 그 나라가 환히 나타날 것을 사모하게 되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대단한 논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말주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말이 넌센스로 들릴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바울 시대도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력에 따라 고린도전서 1 장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8 절)
여기서 바울 사도는 '복음' 즉 '십자가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치하게 들리고, 사상을 탐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능력은 복음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능력을 믿고 투박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바울
사도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1-24 절)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십니까? 깊은 사상을 찾으십니까? 고매한 철학을 찾으십니까? 문학적 아름다움을
찾으십니까? 그것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마침내 갈구하는 것은 삶을 변화시킬 능력이 아닙니까?
죄의 굴레 안에서 해방시켜 줄 능력이 아닙니까? 영원한 것을 보게 하고 또한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능력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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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깊은 곳까지 적셔주고 밝혀주며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아닙니까? 죽음의 문턱에서 환한 빛을 비춰 줄 능력이
아닙니까? 그 능력은 오직 복음에만 있습니다.
5.
알고 보면, 이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만일 우리의 구원이 철학이나 사상을 이해하고 습득하는 것에
달려 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공부하고 연구하고 고민해야만 구원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렇다면 구원은 명석한 두뇌를 소유한 소수에게만 가능할 것입니다. 머리가 나빠서 학교에서 당한 수모만도
억울한데, 구원 받는 것도 IQ 순으로 결판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소식이라면 가장 지능이 낮은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철학이나 사상이나 이념을 구원의 도구로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사건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 사건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 단순한 사람일수록 더 잘 받아들입니다. 머리가 복잡한
사람들은 따지느라고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복음 앞에서는 머리가 좋지 못한 것이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아, 얼마나 공평한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읽은 말씀에 이어지는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7-29 절)
가끔, 임종을 앞 둔 부모님에게 어떻게 전도하면 되겠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가장 좋은 것은 돌아가시기
전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는 것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복음을 전하라고, 저는 말씀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사해 주셨으니 그분의 이름을 부르라고 말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시니, 언제라도 그분의 이름을 부르라고 말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면, 삶과 죽음의
마지막 경계선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들은 복음이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 일입니다. 의식이 있을 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여 실망하지도 말
일입니다. 복음의 능력에 맡기고 또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맡기면 됩니다.
살아있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혀 그 앞에 무릎 꿇기까지는 많고 많은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한 송이 국화꽃이 피기까지에도 소쩍새가 수 없이 울어야 했다면, 한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그 사람을 위한 기도가 쌓이고 쌓여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때가 무르익어 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에겐가 복음을 전했을 때, 그것이 바닥을 닦는 것일 수도 있고, 중간층을 쌓는 것일 수도
있으며, 마지막 벽돌 한 장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에 대해 괘념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주저하지 말고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그것이 어느 때 어떻게 열매 맺을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전도하십시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전도하십시다.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고
싶어질만큼 우리의 믿음이 깊어지도록 힘쓰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붙잡고 복음이 우리 안에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깊어질수록 하나님 나라를 더 분명히 보게 되고 더 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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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하게 되며 더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한 것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그 나라의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 나라를 알지 못하고 썩어 없어질 것을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에게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기도하고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지난
2 천년 동안 권력으로, 돈의 힘으로 혹은 군사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고 확장시키기 위해 애써 왔습니다만,
그럴수록 하나님 나라에 해만 끼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은 오직 전도를
통해서입니다. 한 사람이 전도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의 사람으로 변화되면 하나님 나라는 그만큼
확장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중에 있습니다. 전도는 우리 중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눈을 뜨도록 돕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능력을 진실로 경험하셨다면, 모든 핑게를 내려 놓고 전도합시다.
전도하되 제대로 하십시다. 지난 해까지 전도부와 선교부를 합하여 '복음증거와 선교 사역부'로 운영했는데, 올
해부터는 '전도부'를 따로 독립시켰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전도부에서 섬길 분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직접
전도하기도 할 뿐 아니라, 교우들의 전도 활동을 돕기 위한 부서입니다. 앞으로 전도부에서는 제대로 전도하는 길을
찾고 기도하고 실천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중에 있으며, 장차 우리가 그 나라에 이를 것이며, 또한 그
나라가 완전히 드러날 것이라는 이 기가막힌 소식을 제대로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가 먼저 그 나라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에 힘쓰십시다. 어떤 상황에서든 늘 감사하고
기뻐하며, 그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십시다. 그리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딤후 4:2) 꾸준히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의 사람을 더 많아지게 하십시다. 그것이 그
나라의 사람이 사는 법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의 왕이신 주님,
저희로 하여금
그 나라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 나라를 믿게 하시고
그 나라를 살게 하시며
또한 그 나라를 사모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서 그 나라의 사람으로 살고
죽어 그 나라에 이르게 하소서.
주저함 없이 그 나라를 전하도록
저희의 믿음이 깊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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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회자료> 2014 년 2 월 2 일 주일 설교
"그 나라의 사람이 사는 법"(The Way of the Kingdom People)
고린도전서 1:18-25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486 장(통 474)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고린도전서 1 장 18-31 절을 읽습니다. 복음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10 분)
4. 말씀의 요약 (웹싸이트에 있는 말씀 요약을 읽습니다. 10 분)
5.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 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 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으면 한 가지만 나누어 주십시오.
2)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의 세 차원에 대해 당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십시오. 임신한 사람으로
따지면 당신의 믿음은 어느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3)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 내는 세 가지 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에게는 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무엇이고 약한 것은 무엇입니까?
4) 전도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으며 또한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전도가 자연스러운 믿음의
행동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6. 기도
1) 전도가 자연스럽고 즐거운 일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2) 전도 대상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8.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508 장(통 270)
9.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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