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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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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4 년 2 월 16 일 주일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나무처럼"(Like a Tree)
고린도전서(1 Corinthians) 3:1-9
저는 지난 2 월 3 일부터 7 일까지 아리조나의 피닉스에서 '목회자 학교'를 인도하고 주말에 잠시 쉬고돌아왔습니다. 이미 목회 칼럼에서 간단히 나누었습니다만, 귀한 직분을 맡겨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정성을다해 섬겼습니다. 교우 여러분의 기도와 지원이 있기에 제가 이 일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저만의사역이 아니라 와싱톤한인교회의 사역이기도 합니다.
목회자들이 만나면 주로 목회자, 교인 그리고 교회 이야기를 나눕니다. 대개는 좋은 이야기보다는나쁜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됩니다. 목사답지 않게 살아가는 목사들 이야기, 목사와 교회를 괴롭게 하는교인들 이야기, 그리고 분란과 분열을 겪고 있는 교회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과연, 믿는다는 것이무엇인가?"라는 회의감이 듭니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고, 교회가 세상과별로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세상보다 훨씬 더합니다.
교회력을 따라 읽은 오늘의 말씀에서 바울 사도 역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 편지를쓸 당시에 고린도교회는 심한 분열을 겪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에서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바울입니다.그래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스스로 설 수 있게 되었을 때, 바울은 다른 도시에서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린도를 떠납니다. 그 이후, 아볼로라는 전도자와 게바 즉 베드로가 고린도 교회에와서 잠시 목회를 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만,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가 사분오열되었고 갈등과 싸움이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세 파로 갈라졌습니다. 세 파는 각각 자신들이 추종하는 지도자 이름을내세웠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그리고 게바파. 나중에 한 파가 더 생겼는데, 갖다 붙일 이름이 없었는지,그리스도파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나뉘어 서로 비판하고 정죄하고 싸웠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일 아닙니까? 이민 교회에서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습니다. 여러분중에도 그런 분열과 갈등을 겪어 본 분들이 적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 교회가 30 년도 넘게 분란과 갈등없이 지내다 보니, 우리 교회만 다닌 분들은 그런 일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일단 분열에 빠지면믿는다는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비정해지고 때로 잔인해집니다. 그럴 때면, "교회라고 다른 것이무엇인가?" 혹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회의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물론, 그런 회의감에 속아 진실을 그르치면 안 됩니다. 교회답지 않아 보이는 교회가 있다 하여교회는 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상관 없이 주님의 임재가 약속된곳이며 또한 주님께서 몸으로 사용하십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하나도 없지만, 그 불완전한 공동체안에서 주님께서는 구원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음의 문들이 그것이 이기지 못할것이다"(마 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믿는다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못한 모습으로 사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겉모습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차원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근본적인 차원에서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기에 '신분'이 다릅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기에 '존재'가다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 되었기에 '소속'이 다릅니다. 영원에 잇대어 있기에 '차원'이다릅니다.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보고 "믿어 보았자 소용이 없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이 만들어내는 그 '다름'이 말과 행동으로도 드러나기를 소원하고 또한 그렇게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그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분증을 보여주지않아도 우리의 신분이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소속을 밝히지 않아도 우리가 어디에 소속된사람인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의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에서 '글로벌리서치'라는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시행한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2013 년에 조사한 것인데, 그 결과는참담하다 할만합니다. 이 조사에 의하면, 무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는 4.4% 신뢰하고, 개신교목사에 대해서는 11.5% 신뢰하며, 교회에 대해서는 18.8%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왜 신뢰하지못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24.8%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연구 조사에서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무종교인들이 교회와 교인과 목사의 신뢰성에대해서는 매우 낮은 점수를 주었지만, 사회 봉사 활동에 있어서는 천주교나 불교보다 훨씬 잘 하고 있다고인정했습니다. 사회 봉사를 가장 잘 하는 종교가 어느 종교인가를 묻는 질문에 41.3%가 개신교를 꼽았고,32.1%가 천주교를 꼽았으며, 6.8%만이 불교를 꼽았습니다. 사회 통합과 발전에 가장 공헌한 종교가 어떤종교인가를 묻는 질문에도 58.6%가 개신교를 꼽았습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결과가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일은 좋은 일은 많이 하는데, 믿지는못하겠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봉사 활동에는 적극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정작 그들을신뢰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되시나요? 여러분도 그런 사람을 겪어 보셨지요? 일은 아주 열심히 잘 하는데,도대체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 교회가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직업 현장에서는 일 잘하는 사람을 원할지 몰라도, 세상은 아직도 일 잘하는 사람보다 믿을만한 사람을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일을 '잘' 하고 '많이' 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의 능력으로변화되어 믿을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고린도교회의 형편도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사도는 작심한 듯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뿐,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지금도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가운데에서 시기와 다툼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사는 살고 있는것이 아닙니까? (1-3 절)
지금, 바울 사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으며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특별히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광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영에 속한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바울 사도가 말합니다. 당신들은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당신들은 아직도젖이나 찾는 어린 아이라고."육에 속했다"는 말은 "세속적이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땅에 속했다" 혹은 "자연에속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물질만을 보고, 육체적인 만족만을 위해 살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을가리킵니다. 영적인 것을 부정하고 눈에 보이는 것인 전부라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교인들에게는 딱 맞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믿었고 성령의 은사도 받았으며 영적인 것들이존재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그런데, 말과 행동은 영 달랐습니다. 영적인 것을 전혀 믿지 않는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이 "육에 속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인들과 결별할 것을 각오하고 이 글을 썼음에 분명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다른사람이 자신의 믿음의 정도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을 가장 견디지 못하기 떄문입니다. 믿음이 좋다고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더욱 그것을 참지 못합니다. 바울 사도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사도는 더 이상 좋은 말로 넘어갈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의 영적 실상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으면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영에 속했다고 자만했지만, 영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 해서는안 되는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믿음의 식구들이한 분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요 자매라고 믿는다면, 서로 갈라지고 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주님으로 섬기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아무리 탁월한 사람이라해도 그 사람을 우상처럼 받들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요,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5-7 절)
바울 사도는 진실로 영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랬기에그는 고린도교인들의 일부가 "우리는 바울편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가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자기의 추종자들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을 만들려는 데 있었기때문입니다. 아마도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의 분열 소식을 듣고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고가르쳤는데, 결과가 겨우 이것인가?" 하는 생각에 낙심했을 것입니다.바울 사도를 낙심케 한 소식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결별할 것을 각오하고고린도교인들에게 이렇게 심한 말을 한 이유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5 장에나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일까지 있다고하니, 그러한 음행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내'는 그 사람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랬다면 "자기 어머니를 데리고사는 일까지 있다고 하니"라고 표현했겠죠. 아버지의 후처를 가리키는 말임에 분명합니다. 아마도, 아버지가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후처와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이 젊은 계모와 동거하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 사람이 주일 예배에도 나오고 속회 모임에도 나오는 겁니다. 다른 교인들은 그 사실을 뻔히알면서도 쉬쉬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질 당시에 고린도는 오늘의 라스 베가스나 아틀랜틱 시티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성인남자가 "고린도에 놀러갔다 왔다"고 말하면, 다들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훑어 보았습니다. 그 도시의 도덕적부패가 유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위기였기에 젊은 계모와 동거하는 사람도 생긴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에회심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회심이 진실한 것이었다면, 그는 마땅히 그 부도덕한 생활을청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것이 새로와져야 하는데, 그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회심이 진정한 것이었는지를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 장에서 바울 사도는 신전 창녀들을 찾는 습성을 청산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말씀합니다.고린도시에는 수 많은 이교 신전이 있었고, 신전마다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이교들은 교묘한 교리와제사 의식을 개발하여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음란을 즐기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그런 것을 즐기던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그 습관을 청산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 중에그런 습성을 청산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사실을 전해 듣고 경악합니다. 이 모든일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망각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느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적습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되었습니다. (6:11)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6:19-20)
이 대목에서 잠시 멈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 보십시다.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육에속한 사람들입니까?먼저, 우리 교회에 이 질문을 적용해 보십시다. 와싱톤한인교회는 '영에 속한 교회'입니까? 아니면'육에 속한 교회'입니까? 고린도교회가 당하고 있던 분열과 갈등이 우리 교회에는 없으니 영에 속한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영에 속한 증거는 분열과 갈등의 요소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할 수도있지만, 더 중요한 판단 근거는 그런 요소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의해 판가름 납니다. 분열을겪고 있는 교회에서 발생한 일이 우리 교회에서 발생한다면, 우리 교회는 과연 영에 속한 교회로판명나겠습니까? 자신있게 "예!"라고 답할 수 있습니까?
그 외에, 우리 교회가 영에 속한 교회라고 말할만한 요소가 무엇이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많이있습니다. 영적인 성숙성에서 우리 교회는 상당히 좋은 점수를 받을만 합니다. 하지만 부족한 점도많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강림하셔서 우리 교회를 한 바퀴 돌아보신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분에 체크리스트에 걸릴 것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저에게만 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 스스로 판단해 보아도육에 속한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우리 교회를 '성숙한 교회' 혹은 '수준 있는교회'라고 부르는데, 그 말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가 '영에 속한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더진지하게 공부하고 그 모습으로 자라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각자에게 이 질문을 적용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육에속한 사람입니까? 한국의 무종교인 100 명 중에 기독교인을 신뢰한다고 답한 사람이 네 사람 뿐이라는참담한 성적표 앞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스스로를 평가하십니까? "나는 영에 속한 사람이야"라고 판단할만한요소가 무엇인지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다니니까요? 직분을 받았으니까요? 성령 체험을 했으니까요? 성경을 많이 아니까요? 과연그것이 영에 속한 증거일까요? 그런 것은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압니다. 우리의 생각과말과 행실에서 영에 속한 사람의 증거가 드러나고 있느냐를 물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계모와 살아가는 사람과 같지는 않을지라도 혹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기적으로 신전에 가서음행을 범하는 사람같이 심하지는 않을지라도, 영에 속한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옛 습관들이 아직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 제가 섬기는 '목회멘토링사역원'에서 한국의 미자립교회 목회자 자녀 열명을 선발하여'비전투어'를 시켜 주었습니다. 가정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꿈'을 여러 교회와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실현시켜주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여러 교우들께서 드러나지 않게 이들을 도와 주셨습니다. 그 아이들이 한 주간동안 와싱톤을 방문했는데, 우리 교회의 목회자 자녀 교우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때, 한 학생이한 말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목사인 아버지 때문에 신앙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제엄마도 그러십니다. 아버지가 제 신앙에 가장 큰 도전이고 걸림돌입니다."
저는 그 학생의 아버지를 정죄할 마음은 없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그 학생의아버지가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목사로 부름받고 목사로 살면서도육에 속한 모습을 너무도 많이, 너무도 자주 보여 주니, 목사인 아버지가 신앙 생활을 유지하는 데 가장 큰걸림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일 우리가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산다면, 우리는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육에 속한 사람의 모습만 보여준다면,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어 버립니다.
육에 속한 모습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가 대답을 줍니다.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갈 5:19-21)
어떻습니까? 이 말씀을 듣고도 "나는 역시 영에 속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분이 계십니까?그렇다면 병이 깊습니다. 저를 찾아 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대부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에 속한 일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에 너무도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됩니다.
이 모든 생각과 반성은 우리에게 아주 큰 질문 하나를 던져 줍니다. "어떻게 하면 영에 속한 상태에머물러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영에 속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영에 속한 상태에 계속 머물러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육에 속한 악습을 내려놓을 수 있고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영에 속한 상태에 머물러 사는 길을찾아야 합니다.
첫째, 영에 속한 상태에 머물러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영접하지 못한 사람이라면진실하게 그분 앞에 무릎 꿇고 주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이미 그렇게 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자신의 신분과 소속과 존재가 달려졌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바울 사도의 말씀을다시 보십시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되었습니다. (6:11)
여기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인들이 성령으로 씻겨질 것이고, 거룩하게 될 것이며, 의롭게 될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씻겨졌고 이미 거룩하게 되었고 이미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편지를 읽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내가 무슨?" 하면서 의심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중에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영에 속한 사람이면서도 육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고 사십니까? 그렇다면, 이미 영에 속한 존재임을 믿으십시오. 이미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며, 영생을 받았음을 믿으십시오. 이미 의인이 되었고, 이미 성도가 되었음을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옛 사람이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고,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었음을 믿으십시오. 그것을의심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여러분에게 이미 일어난 일을 의심하지마시기 바랍니다. 매일, 매 순간, 그 사실을 고백하고 확인하고 선포하십시오.
둘째, 영에 속한 상태에 머물러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 안에 머물러 있도록힘써야 합니다. 지난 며칠 동안 눈에 갇혀 살더니, 제 아내가 "Snowed-in 의 상태에 갇혀 살다 보니, Jesusin의 상태에 갇히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갇힌 상태에 머물러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영적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돋는다"고 했는데, 저는 "하루라도 영적 생활을 하지 않으면 영혼에 가시가 돋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 주부터 성인 신앙 교육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새로이 개편한 속회를 섬길 속장님들을세우는 순서를 가집니다. 3 월 5 일부터는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를 가집니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를Jesus-in 되도록 돕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교우들이 영에 속한 상태에 머무러 살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도표로 그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표)
언젠가, 캐나다 벤쿠버에 있는 Capilano Provincial Park 에서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들을 보고 감탄한적이 있습니다. 토양이 비옥하고 기후가 좋아서 그런지, 소나무들이 까마득할 정도로 높이 솟아 올랐습니다.어쩌면 그렇게 곧게 자랐는지요! 어쩌면 그렇게 높이 솟아 올랐는지요! 도대체 그 작은 소나무 씨앗 안에무엇을 숨겨 두셨기에 저렇게 큰 나무로 자라 오르는지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소나무들을올려다 보면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너는 정말 하늘에 속한 존재로구나!" 하늘까지 다 닿을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자원을 다 모아 한 뼘이라도 높이 자라오르는 나무들을 보면서 저자신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발을 땅에 디디고 살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소나무가 뿌리를 땅에 깊이 내리고끊임없이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 하늘로 솟아 오르듯, 우리도 하늘로 솟아 올라야 합니다. 우리는 소나무씨앗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늘로 솟아오를 모든 것이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소속이 바뀌었습니다. 신분도 바뀌었습니다. 차원도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미 씻기셨고 거룩하게 하셨고 의롭게 하셨습니다.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매일 그 영적 진실을 기억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교회에서제공하는 여러 가지의 안내를 받아 Jesus-in 상태에 갇혀 살아가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진실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살 때 우리는 참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맛볼것이고, 이웃에게 주님의 빛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나무처럼 하늘을향해 끊임없이 솟아 오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 주님,
저희의 눈을 열어 주소서.
주님 안에서
저희에게 일어난 신분의 변화를 알게 하소서.
저희로 하여금
나무처럼
땅에 굳게 뿌리를 두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오르게 하소서.
저희 안에 일어난 그 변화가
저희의 생각에서
말에서
행동에서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4 년 2 월 16 일 주일 설교
"나무처럼"(Like a Tree)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435 장(통 492)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고린도전서 3 장을 읽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봅니다. (10 분)
4. 말씀의 요약 (웹싸이트에 있는 말씀 요약을 읽습니다. 10 분)
5.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 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 분을 넘지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으면 한 가지만 나누어 주십시오.
2) 우리 교회는 어떤 점에서 영에 속했고 어떤 점에서 육에 속했다고 생각합니까?
3) 당신은 어떤 점에서 영에 속했고 어떤 점에서 육에 속했다고 생각합니까?
4) 영에 속한 상태에 머물러 살기 위해 당신에게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6. 기도
1) 우리 교회가 영에 속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2) 당신이 영에 속한 상태에 머물러 살게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7.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8.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436 장(통 493)
9.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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