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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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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4.10.1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
갈4:4-5
지금 스위스에 살고 있는 제 큰 딸애가 유학을 가던 2002년의 일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독일에 있는 선배의 집에 보름쯤 머물다가 딸애를 스위스의 레만호에 있는 학교 기숙사에 남겨두고 선배와 같이 자동차로 유럽 여행을 했었습니다. 그 선배가 그의 집인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로 1시간가량 걸리는 곳에 있는 [에버바흐]수도원으로 저를 데려 갔습니다. 이 수도원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이 영화가 될 때 그 내부촬영 장소로 사용된 장소이기도 하고, 중세 이후 맛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수도원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지금도 수도원의 지하는 와인공장, 전시장, 판매장, 시음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중세 시대에는 유럽의 대부분 좋은 와인은 수도원에서 생산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버바흐]수도원엘 가기 이전에 이미 저는 에코의 소설인 2권으로 된 ‘정미의 이름’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 많은 생각을 가지게 했던지라 소설의 무대가 된 수도원을 둘러본다는 게 흥미도 흥미지만 예사스럽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그 때 저는 수도원 이곳저곳에 머물다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긴 문장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게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그 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저는 이 말에 범상치 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관은 ‘진리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이것이 진리요’라고 외쳐야만 비로소 진리가 되는 게 아니라 진리는 ‘누가 외치던 말 던 거기 그대로 있는 무엇’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진리라고 믿거나 말거나 확고부동하게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의 수사인 윌리암 수사는 이런 진리 관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진리는, 자신을 위해 죽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진리라고 할 때, 그 무엇인가가 진리가 되려면, ‘누군가 그걸 위해 죽어 줘야’그때 그것이 진리가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수를 진리라고 한다면, 그걸 진리라고 믿는 그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예수를 위해 죽을 때, 그 때 예수는 진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그냥 저절로 진리가 되거나 진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그것 또는 그를 위해자기를 위해 죽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순교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냥 있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에코의 소설에서 수도사가 말하는 진리란, 진리란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 그 자체가 진리이지 항상 같은 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진리의 내용이 뭐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진리를 진리가 되게 만들어가는 사람의 태도가 문제라는 겁니다.
‘진리라고 믿는 걸 위해 죽을 수 있을 때 그게 진리다’라는 말은 또 하나의 비밀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그게 뭔고 하면, 진리란 그 내용이 뭐냐 하는 걸로 담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어떤 것을 진리라고 믿는 자들이 그걸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은 곧 ‘그런 진리를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는 진리다’합시다, 그건 그의 가르침 삶 교훈 모든 게 인간에게 진리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누구도 그 자신이 말하는 그 진리 곧 예수를 위해 죽지 않는다면 그건 조심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는 허접하기 그지없는 신념이거나 관념이라는 뜻입니다. 이 때 그 ‘예수’는 진리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진리란 진리라고 믿는 이가 그걸 실천할 때 진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그 수호자들의 실천 과정 그 자체라고 한다면, 기존의 진리라고 하는 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광분하는 수호자들의 통념적인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끊임없이 새로운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자기들이 하는 말이 진리고 지금까지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주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다를 게 없는데 그저 주장을 새로 바꾸는 것이죠. 그러므로 순교란 진리가 거짓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가 되려면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그걸 위해 순교를 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 이런 사람은 조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조심’이란 경계를 두고 가까이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죠. 반대로 이런 믿음, 이런 삶,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역설입니다. 이쯤에서 성서 속에서 윌리암 수도사의 진리에 관한 이 말을 증명해 봅시다.
갈라디아서 4:4-5을 한 번 더 읽어 볼까요?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단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다’라는 거죠. 그런데 그 예수는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한데 바울에게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주장 자체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분신을 여자 몸에서 태어나게 해 가지고 스스로 율법 아래 놓아 두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이란 명문으로 된 법률이 아니지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율법은 그들의 전통, 그네들의 삶의 방식에 관한 진리였습니다. 이건 당시대의 양심이기도 했습니다. 율법아래 사는 사람만이 양심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당시 진리란, 율법대로 살아야 의로워 진다는 게 진리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거짓이고, 그렇게 살면 참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면 의롭고 그렇지 못하면 불의였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진리였죠. 율법이 곧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태어났는데, 여자 몸에서 태어났고, 그런데다가 당시의 진리라고 하는 율법아래 놓인 존재로 태어났다는 거예요. 이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바울의 이 말은, 예수의 탄생은 당시의 진리였던 율법과는 다른 어떤 진리가 아니라 기존의 진리라고 믿던 진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하나님, 그리고 그가 기존의 진리였던 율법아래 놓였다는 말은 기존의 진리가 지닌 독선에 눌린 자들을 해방 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새로운 진리를 주창한 게 아닙니다. 그저 당시의 진리였던 율법에 눌린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살았던 모든 것, 공생애와 죽음과 부활이 바로 예수의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그의 실천이 곧 진리라는 말이 됩니다. 성서는 율법과 다르게 살면 진리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과거의 율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율법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면 의로워진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런 진리를 부정하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이의 실천을 잊지 말라는 뜻이 바울의 의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게 아니라,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의 실천을 잊지 말라는 기억의 장치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 장치인 믿음이 자신에게 진리가 되려면 예수처럼 실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예수의 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시대의 진리였던 율법의 수호자가 되어 통념적인 율법을 주장만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통념이 되어버린 진리를 해체하기 위해 죽었습니다. 진리를 위해 죽은 게 아니라 진리를 넘어서기 위해 죽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두 가지 숙제가 주어진 것입니다. 우선은 내가 믿는 예수의 진리를 위해,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믿는 진리가 참이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게 다시 통념이 되어서 그만 수호자로 전락할 수 있으니 그걸 넘어서기 위해 또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오늘 설교의 제목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진리를 위해 죽고, 진리를 넘어서기 위해 또 다시 죽을 수 있는 자를 부러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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