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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3: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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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4.12.15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이제는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행전23:1-10
지난 화요일에 서울의 종교교회에서 ‘감리교개혁특별위원회’가 주관하는 감리교회와 감리교단의 개혁을 위한 심포지움이 있었습니다. 한 명의 신학자가 역사 속에서의 교회개혁을 발표하고, 한 명의 개혁위원이 감리교 개혁의 방향성에 대해서 발표를 한 다음에 장로 두 분(감리교 전국 남선교회장, 전국 여선교회장)과 목사인 내가 질의 응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제 거기서 못 다한 이야기, 그러나 여러분과 꼭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결론은 들으시면 아시겠지만, 이제는 우리가 새로운 신앙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시대 한국의 교회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허울만 기독교인이지 실상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느냐? 그리스도교라는 게 애초부터 알맹이가 없는 허상의 믿음체계였기 때문에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껍데기만 남은 기독교 신앙이 된 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신앙 형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 방식이 잘못되어서 기독교가 오늘날 껍데기만 남았다는 겁니다. 예수에게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방식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제일 많은 부류가 ‘제도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제도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제도적인 종교에 몸담은 성직자의 교리적인 가르침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인들은 제도적인 성직자와 교리를 매우 강하게 신뢰합니다. 제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은 헌신과 봉사도 교회 안에 국한하고, 사람이 사는 바른 태도에 대한 가치보다는 교권이나 교리를 지키는 것에 더 큰 신앙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정직하지 않은 성직자라도 영적 리더쉽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사회의 지탄을 받는 목사인데도 여전히 순종하고 신뢰를 보내고 복종합니다. 제도적인 교인들은 행위와 인격의 변화에 관심하기 보다는 교리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교인들의 신앙은 복음에 의해 구원을 받았으므로 성도가 누려야 할 물질적인 축복을 강조합니다. 이 제도적인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구원과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이게 기독교의 가치이며 목표라고 여깁니다. 왜 교회 나가느냐, 구원받고 축복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제도 안에 모든 가치와 목표를 두고 신앙하다보니 자신의 영성적인 삶을 교회의 성취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기대하는 바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성장이 멈추게 되면 이런 변화를 체험하기 어렵게 되고, 그러면 영성적인 침체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 제도적인 교인의 치명적인 단점이 뭔지 아십니까?
신앙의 증거를 자기 내면의 세계에서 얻으려고 하기 보다는 집단 속이나 가시 적인 외적 조건들 속에서 확증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권력과 물질의 비판정신이 결여되고, 허위의식과 위선적 과장에 익숙해 졌습니다. 그러니 작고 초라한 것에는 신성도 영성도 없다고 여겨서 크고 화려하고 많은 것을 따라가게 됩니다. 크고 화려하고 위대해야 거기 하나님도 계시다는 의식화가 만들어지는 거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구원을 위한 교리적인 도구일 뿐 낮고 겸비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과는 무관하게 생각을 합니다. 이게 대다수 교인들의 신앙 형태입니다. 영적 진화의 수준으로 보면 문맹 단계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제도에 속한 제도적 교인들입니다. 이런 교인들이 오늘날 예수 없는 제도교회를 만들어 버린 겁니다.
제도적 그리스도인에 대한 거부감 혹은 이탈로 등장한 신앙이 개혁적인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제도적 그리스도인들은 제도 교회 안에서만 봉사하고 헌신합니다. 그러나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시대의 사조와 이성적 이해에 탁월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대부분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제도적인 교인과는 달리 기존 교회의 교리와 제의에 대해서 개혁적이고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제도적인 교인들이 교리적 일치를 강조한 반면 진보적인 교인들은 자의적이거나 개인 중심의 체험적인 신앙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일치의 해체를 불러 왔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는 수백 개의 교단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진보적인 교인들은 자유를 지나치게 남용해서 참된 진리에 대한 헌신과 봉사와 희생의 길을 약화 시켰습니다. 그러다보니 진보적인 신앙에 과오가 발생했습니다. 루터는 재세례파 교도들을 처형하고, 칼빈은 카톨릭의 이단자 처형이 두려워 스위스로 갔다가 거기서 세르베투스를 비롯한 58명을 화형시키는데 동의합니다. 진보적인 이들이 또 다른 종교권력을 지향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제도적인 그리스도인이나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이나 평화적이기 보다는 호전적이고, 방어적이기보다는 침략적인 사회윤리 의식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로마 카톨릭 교회나 개신교회는 근본주의적 신앙인들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근본주의적 신앙 의식이란 하나님은 제국적이고, 지배적이며, 폭력도 불사하는 하나님이라는 이해하는 겁니다. 제도적인 신앙이 자신의 신앙과 판단을 교회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경우라면,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교리적 신앙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그 이상의 자리를 찾지 못해 방랑하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세상은 엄청나게 변화합니다. 엊그제 심포지움에서 어느 질문자가 ‘인터스텔라’영화를 말하면서 ‘세상에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미 저 우주 너머로 시선을 돌리고 사는데 우리만 이 모양 이 꼴로 싸움질이나 하고 있다’고 하는 걸 들었습니다. 세상이 엄청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방식만 고집하고, 그게 아니면 모두 틀렸다고 우겨댑니다. 이제는 믿음의 양태 즉, 신앙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에게 이제 부터는 제도적인 교인에서 벗어나고, 진보적인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지 말고 다시 믿으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새로운 신앙 방식이란 뭘 말하는 걸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도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진보적인 신앙도 아닙니다.
바로 이겁니다. 이제부터는 양심적으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걸 ‘양심적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제발 교리에도 매이지 말고, 사회나 인간 개인의 사상에도 매이지 말고 자신의 성실한 양심에 바탕을 두고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겁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제도적인 교회의 가치에서 진리의 현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또 인간의 합리적인 사유의 연장선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해명된다고 믿지 않는 겁니다. 물론 양심이란 게 다양한 이해관계를 따라 굴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성적인 삶을 통해 보다 보편적인 가치들을 자신의 삶에서 실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23:23을 보십시다. 거기 예수가 말합니다. 제도에 충실하다고 자만하는 무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따위로 믿고 살지 말라는 겁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정의, 긍휼, 믿음으로 믿고 살라고 합니다. 그 정의, 긍휼이 뭡니까? 그게 바로 양심입니다. 그런데 ‘양심적으로 신앙하라’고 하니까 걱정들을 합니다. 양심이 이랬다저랬다 하는데 어떻게 그걸 기준으로 믿음을 사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이랬다저랬다 하는 그것은 양심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감정과 양심을 구분하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양심은 그럼 어떤 겁니까? 어렵지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외부로부터 오는 억압과 구속에 맞서 싸우는 힘이며, 마음이 욕망으로 치닫지 않도록 스스로 조율하는 내적 에너지’가 바로 양심입니다.
예수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양심적인 신앙의 뿌리는 로마의 폭력성에 젖어들지 않았던 예수로부터 출발한다는 말입니다. 서기 1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초대교회, 이들 신앙인들이 어디에 기초해서 믿음을 지켰습니까?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진보적인 이성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그리스도와 같은, 연결된 선한 양심에 그들의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이는 16세기 소종파의 신앙인들의 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교의 제도적 종교인이 되기를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인간의 죄를 깊이 헤아리고 있었지만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예언자적 양심을 지키며 하나님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제도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제도적 교회이전의 예수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제도적인 교회들은 우리가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의로운 삶을 살기 어렵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원죄를 지닌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안내자가 아니라 신앙의 주님일 뿐입니다. 예수가 교리 화 된 거지요. 그래서 예수를 제도적 교회 안에서 만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민족, 인종,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연계시켜 해석함으로 자신들의 편에 서는 배타적인 존재로 해석해 왔습니다. 해방신학이라든지, 유태인 학살 같은 행위들이 이런 이해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나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제도적인 종교나 합리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평화를 실천합니다. 교회의 목사가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겁니다. 평화를 실천하고, 폭력을 멀리하고, 모든 관계를 자기 유익과 쾌락의 기회로 삼지 않습니다.
한스 큉이라는 신학자는 교회의 만성적인 고질병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건 진리를 독점하는 것, 제국주의적 속성, 성을 속된 것으로 보는 것, 여성에 대한 차별,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고 하면서 은근히 권력을 탐하는 것, 그리고 변혁과 개혁을 거부하는 보수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고칠 수 있는 신앙은 제도적 신앙이나, 진보적 신앙으로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했듯이 “예수는 우리를 새로운 종교로 부르시는 게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양심적인 그리스도인 들 만이 이런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양심을 그리스도에게 비춰 거기서 나오는 신앙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그걸 우리의 신앙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신앙으로 바꿔야 합니다.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나서는 길에 머뭇거리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제도적인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근거를 둔 예수님의 제자들과도 다른 신앙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 유대교의 제도신앙 속에 있던 존재입니다. 그런 그가 오로지 양심의 거울에 비추면서 예수를 따라 살고 있는 겁니다. 그는 양심을 따라 제도적인 신앙인들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길 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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