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왜 ‘동정녀’야 하는가?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540 추천 수 0 2015.02.14 23:45:42
.........
성경본문 : 마1:23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4.12.26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왜 ‘동정녀’야 하는가?
마1:23

지난 성탄절에 우리는 ‘왜 베들레헴 이어야 하는가?’란 물음에 대한 답을 통해서 성탄이 왜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축복이 되는지 알았습니다. 이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오늘은 기독교가 왜 ‘동정녀에서의 예수 탄생’을 믿음으로 받아 들였는지에 대해서 지혜를 얻으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23은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동정녀’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 성서를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의 이 표현은 ‘동정녀’가 아니라 ‘젊은 여자’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다시  ‘젊은 여자’가 ‘동정녀’로 발전을 합니다. 아마도 마태복음 시대의 교회 사람들은 메시아를 잉태하려면 남자와 성관계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카톨릭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황 비오 12세가 1950년에 ‘항상 처녀’라는 더욱 발전된 개념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에도 처녀고 그 이후에도 마리아는 처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표현들을 가만히 보세요. 뭔가 구린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젊은 여자’-‘동정녀’-‘항상 처녀’ 이런 표현들은 모두 남자와 여자의 성 즉, 섹스와 연관되어서 파생되는 단어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 이데올로기를 뒷받침 하는 하나의 근거로 작동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모론에 따르면 ‘처녀성’이라는 뜻은 ‘아직 죄에 물들지 않은 여성’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여자의 육체는 성적인 존재라는 의미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여자라는 존재는 육체적인 존재다’그런 겁니다. 반대로 남자는 육체가 아닌 ‘정신적인 존재’가 되겠죠. 여기서 이미 여성 비하적인 의중이 깔려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와의 육체적인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가 확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오로지 남자에 의해 육체가 점거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입니다. 한 남자에게 육체가 소유되고, 그 남자를 복제하기 위한 육체, 애를 낳기 위해 보존되는 존재가 바로 여자라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남자들은 여자를 물건 취급하듯 대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람 숫자에도 들지 않는 사람 아닌 사람이었던 거죠.

이렇다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려면 ‘여자’를 근본적으로 건너 뛰어 태어날 수는 없겠으니까, 그러면 어떤 남자에게도 성적으로 점거되지 않은 육체여야 하겠다는 결론에 이른 겁니다. 물론 이 때도 하나님은 남성적인 이미지로 투영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해 잉태 되었다’는 말이 바로 그런 거죠. 결과적으로 카톨릭의 성모신학은 이렇게 성에관한 신학적인 이데올로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개신교는 어떻습니까? ‘항상 처녀’라는 것과, 죄에서 자유롭다는 카톨릭의 교리를 제외하고는 역시 개신교도 ‘동정녀’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믿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카톨릭과  다를 바 없이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성서본문을 역사 속에 다시 위치 시켜놓고 읽으려고 합니다. 예수의 탄생 당시에도 ‘처녀수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현몽한 천사의 이야기에서 그 실마리가 풀립니다. 뭐라고 천사가 말하는가 하면, ‘....임마누엘이라고 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라는 거, ‘임나누엘’이 그런 뜻이라는 거 아시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다시 우리말로 풀면 ‘하늘은 무심하시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의 반대 ‘하나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은 어느 때 사용합니까? 탄식할 때, 불의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이 말을 씁니다. 즉 하나남의 부재를 탄식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그런 부재의 탄식을 뒤바꿔 놓는 것입니다. 얼마나 현실의 고통과 상황이 암울한지 ‘하나님이 무심하다’고 여길 정도로 힘든 그런 때에 그런 억울한 일이 뒤집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게 ‘임마누엘’입니다. 그에 ‘처녀에게서 나는 아이’입니다.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억울한 삶을 뒤바꿔 놓는 메시아가 처녀에게서 났다는 것입니다.  마1:19에서 요셉은 그로 인하여 고민하다가 남몰래 파혼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이걸 우리는 요셉의 배려이며 의인다운 처신이라고 합니다. 아니, 그러면 신명기 22:20-21에 나오듯이 이스라엘이 법으로 지키는 돌로 때려죽이는 조항에 대해서는 위배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법을 위배하는 게 의로운 게 된다는 겁니까? 만약 요셉이 정말로 마리아를 위하는 길이라면 파혼이 아니라 그냥 결혼을 해서 덮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학은 1:20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는 말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특별히 고귀한 존재로 여겨지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이야기를 역사적 시점으로 끌고 들어가야 합니다. 요셉은 괴로워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는 하늘이 주신 아이다’고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은 남자 아이가 생기면 당연히 ‘하늘이 주신 아이’라고 여겼습니다. 천사는 계속 요셉에게 말합니다. “이 아이는 너 요셉에게 주는 하늘의 선물이다.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 들여라.” 이 말을 잘 새겨들어 보세요. 여러분에게 하는 말로 들어 보세요. 이 천사의 말이 자기하고는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은 여자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요셉의 입장을 고려한 말인지, 아니면 마리아의 입장을 고려하라는 말인지 생각해 보시라는 겁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하는 말을 확대해 보세요.

“지금 너의 아내가 될 여자에게와 그와 같은 여인들에게, 세상에 지금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참으로 처참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밖에 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렇게 생각지 말라. 이제 너와 약혼자에게 벌어진 그 참담함을 오히려 내가 그 반대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 아이는 그래서 수치와 폭력으로 잉태된 존재가 아니라 ‘임마누엘’이 될 것이다. 그걸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요셉의 몫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 즉 ‘임마누엘’은 마리아의 몫이 되는 겁니다.

초기에(바울의 말에도 동정녀에 관한 말이 없는 것처럼)이 말 ‘동정녀 수태’는 단지 남자 없이 임신한 가엾은 여인, 아니 폭력에 의해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채 태어날 아기의 불행, 불의의 상징으로 읽혀졌습니다. 비참한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때는 결코 한 남자의 성기가 닿지 않았다는 식의, 특별한 여인에게 특별하게 축복이 임했다는 텍스트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동정녀 이야기는 그녀의, 그 시대의 여자들의, 고난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진실이 생략된 채 사실만 남아서 지금까지 굴러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만 남고 진실은 사라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그 때, 나사렛에 인접한 성읍인 세포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로마는 잔혹하게 진압했습니다. 2000명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여 길거리에 걸렸습니다. 대부분 그들은 남자들이었고, 여자들은 로마군들에 의해 온갖 성적인 폭력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물론 요셉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태어나기 직전 이스라엘 사회에서 겪는 사람들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하나님도 무심하시지’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부재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닥친 하나님 부재의 현실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그게 ‘임마누엘’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소재가 바로 ‘어떤 처녀의 슬픈 임신에 대한’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바로 요셉의 약혼자 였구요.

세상은 늘 여자에게만 처녀성을 강조합니다. 순결은 남자의 몫이 아닙니다. 애초에 남자들은 ‘순결’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예외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처녀성을 강간한 폭력을 두둔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온갖 힘 있는 남자들에 의해서 ‘항상 처녀’를 종용받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 스스로 그 처녀성을 폭력으로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마리아가 살던 시대 상황에서 그리 크게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걱정을 내심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이런 거겠죠. 목사님 말씀대로라면 아기 예수가 전쟁 통에 생긴 사생아이고, 사생아를 잉태한 한 여인의 고통이 ‘임마누엘’로 역전된 것이라는 말이 아니냐? 그러면 지금껏 우리가 배워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 없이 오셔야 했기 때문에 동정녀의 몸을 빌었다’고 배워온 건 뭐냐는 것이겠지요?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기독교의 핵심은 동정녀 신학이 아니라 성육신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었고 이 땅에 오셨죠? 그러나 그가 오심은 왕이 아닙니다. 높은 학식을 가진 존재로도 아닙니다. 고귀한 성직자도 아닌 천민 이었습니다. 또 아비 없는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말은 세상에서는 아비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없음이 가장 두드러진 곳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나약함 속에서, 세상 고난에 찌든 현장에서 인간이 되신다는 겁니다. 이게 성육신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깨끗하고 고결한 곳에서 인간이 되지 않습니다. 죄 없는 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통해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죄 많은 곳에서, 죄 많은 사람을 통해 성육신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성육신 신학에 있어서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걸 믿는 것이지, 이래서 그분이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시는 것이지 동정녀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는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동정녀’라는 언어는 남자들의 성적 이데올로기의 희생물로 고착되어 온 것이지 성서의 기본적인 생명 정신으로 이어져 온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소통이 잘 이루어지려면 잘난 사람보다는, 한 뼘도 흠이 없는 사람보다는 허점이 많고 자기의 허물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과 소통이 가능한 것입니다. 허물이 있고 그 허물을 드러내는 사람과 가까워 질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고 소통하게 됩니다. 그럴 때 희망도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동정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남성중심의 성적사회를 은폐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동정녀’에게 집중할 게 아니라 ‘성육신’의 역사적 현장을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사회가 어지러워서 감당할 수 없는 생존의 무게에 짓눌린 여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그런 여자를 매장하지 않고 되레 거룩으로 승화시켜 ‘임마누엘’을 선언하게 하신 하나님, 마리아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어 주신 하나님을 되새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역사의 현장이 ‘임마누엘’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댓글 '2'

김태위

2015.02.15 11:30:19

그렇다면 성경이 진리를 왜곡했다는 말인가요?
마태복음에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라고 말한 것은 마리아가 사실 강간당해서 임신한 아이이지만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말한건가요? 이사야에 나와있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사실 처녀가 강간당해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었던가요? 성경이 과연 그런 의도로 '처녀'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 목사님의 주장은 도저히 납득이 안되네요. 신학이라는 교만에 빠져서 성경을 판단하지는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씨나락

2015.02.16 09:48:19

성경을 읽을 때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며,
성경을 읽을 때 방점을 보며, 그에게서 벗어나지 말지니...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에게는 오직 은혜로다.
그저 감사합니다. 문설주에 피를 뿌리는 것 밖에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1706 마태복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삶 마1:7-17  이한규 목사  2015-02-17 647
11705 고린도전 신령한 자가 되자 고전3:1-2  강종수목사  2015-02-15 447
» 마태복음 왜 ‘동정녀’야 하는가? [2] 마1:23  허태수 목사  2015-02-14 540
11703 미가 왜 꼭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했나? 미5:1  허태수 목사  2015-02-14 499
11702 사도행전 이제는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행23:1-10  허태수 목사  2015-02-14 479
11701 마태복음 진리, 깨달음, 변화, 자유 마12:24-26  허태수 목사  2015-02-14 415
11700 마태복음 우리에게 존재하는 두 개의 시간 마8:2-4  허태수 목사  2015-02-14 447
11699 요한복음 제발 다시 좀 태어나시오, 성령으로! 요3:8  허태수 목사  2015-02-14 483
11698 갈라디아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 갈4:4-5  허태수 목사  2015-02-14 559
11697 마태복음 교회’에 갇혀 버린 예수 [1] 마24:1-2  허태수 목사  2015-02-14 445
11696 갈라디아 십자가에 못 박은 것 갈5:24  김남준 목사  2015-02-13 806
11695 로마서 죄에 종 노릇 하지 말라 롬6:6~7  김남준 목사  2015-02-13 720
11694 에배소서 사랑받는 자녀같이 엡5:1  김남준 목사  2015-02-13 552
11693 시편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시145:18  김남준 목사  2015-02-13 719
11692 시편 통촉하시는 하나님 시5:1  김남준 목사  2015-02-13 565
11691 시편 영혼을 강하게 하실 때 시138:3  김남준 목사  2015-02-13 544
11690 시편 말씀으로 살리심 시119:81  김남준 목사  2015-02-13 452
11689 이사야 때가 되면 사60:22  강승호 목사  2015-02-14 664
11688 잠언 찾는 자의 하나님 잠8:17  김남준 목사  2015-02-13 794
11687 열왕기하 하나님의 영으로 이어지는 사역 왕하2:1-12  강승호 목사  2015-02-13 602
11686 야고보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히11:1-2  한태완 목사  2015-02-12 1912
11685 말라기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말3:18-4:4  김경형 목사  2015-02-12 693
11684 예레미야 가장 귀한 것 렘27:1-22  최장환 목사  2015-02-12 583
11683 이사야 변함없는 사랑 사31:1-9  최장환 목사  2015-02-12 603
11682 고린도후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냅시다. 고후2:14-17  한태완 목사  2015-02-11 1372
11681 디모데후 주와 함께 죽으면 딤후2:11-12  강승호 목사  2015-02-11 659
11680 이사야 전능하신 하나님 사40:12  조용기 목사  2015-02-11 532
11679 고린도후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라 고후4:7-11  조용기 목사  2015-02-10 623
11678 히브리서 찢어진 성소의 휘장 히9:1-12  조용기 목사  2015-02-10 579
11677 출애굽기 유월절 출12:1-14  조용기 목사  2015-02-10 463
11676 여호수아 이겨놓은 싸움을 싸워라 수1:1-9  조용기 목사  2015-02-10 648
11675 누가복음 나도 탕자인가? 눅15:11-32  조용기 목사  2015-02-10 532
11674 히브리서 믿음 히11:1-3  조용기 목사  2015-02-10 513
11673 시편 하나님이 이르시되 시91:14-16  조용기 목사  2015-02-10 416
11672 사사기 내 이름은 기묘자니라(3) 삿13:1-25  이정수 목사  2015-02-07 363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