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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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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4.12.26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왜 ‘동정녀’야 하는가?
마1:23
지난 성탄절에 우리는 ‘왜 베들레헴 이어야 하는가?’란 물음에 대한 답을 통해서 성탄이 왜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축복이 되는지 알았습니다. 이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오늘은 기독교가 왜 ‘동정녀에서의 예수 탄생’을 믿음으로 받아 들였는지에 대해서 지혜를 얻으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23은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동정녀’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 성서를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의 이 표현은 ‘동정녀’가 아니라 ‘젊은 여자’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다시 ‘젊은 여자’가 ‘동정녀’로 발전을 합니다. 아마도 마태복음 시대의 교회 사람들은 메시아를 잉태하려면 남자와 성관계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카톨릭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황 비오 12세가 1950년에 ‘항상 처녀’라는 더욱 발전된 개념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에도 처녀고 그 이후에도 마리아는 처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표현들을 가만히 보세요. 뭔가 구린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젊은 여자’-‘동정녀’-‘항상 처녀’ 이런 표현들은 모두 남자와 여자의 성 즉, 섹스와 연관되어서 파생되는 단어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 이데올로기를 뒷받침 하는 하나의 근거로 작동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모론에 따르면 ‘처녀성’이라는 뜻은 ‘아직 죄에 물들지 않은 여성’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여자의 육체는 성적인 존재라는 의미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여자라는 존재는 육체적인 존재다’그런 겁니다. 반대로 남자는 육체가 아닌 ‘정신적인 존재’가 되겠죠. 여기서 이미 여성 비하적인 의중이 깔려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와의 육체적인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가 확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오로지 남자에 의해 육체가 점거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입니다. 한 남자에게 육체가 소유되고, 그 남자를 복제하기 위한 육체, 애를 낳기 위해 보존되는 존재가 바로 여자라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남자들은 여자를 물건 취급하듯 대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람 숫자에도 들지 않는 사람 아닌 사람이었던 거죠.
이렇다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려면 ‘여자’를 근본적으로 건너 뛰어 태어날 수는 없겠으니까, 그러면 어떤 남자에게도 성적으로 점거되지 않은 육체여야 하겠다는 결론에 이른 겁니다. 물론 이 때도 하나님은 남성적인 이미지로 투영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해 잉태 되었다’는 말이 바로 그런 거죠. 결과적으로 카톨릭의 성모신학은 이렇게 성에관한 신학적인 이데올로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개신교는 어떻습니까? ‘항상 처녀’라는 것과, 죄에서 자유롭다는 카톨릭의 교리를 제외하고는 역시 개신교도 ‘동정녀’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믿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카톨릭과 다를 바 없이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성서본문을 역사 속에 다시 위치 시켜놓고 읽으려고 합니다. 예수의 탄생 당시에도 ‘처녀수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현몽한 천사의 이야기에서 그 실마리가 풀립니다. 뭐라고 천사가 말하는가 하면, ‘....임마누엘이라고 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라는 거, ‘임나누엘’이 그런 뜻이라는 거 아시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다시 우리말로 풀면 ‘하늘은 무심하시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의 반대 ‘하나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은 어느 때 사용합니까? 탄식할 때, 불의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이 말을 씁니다. 즉 하나남의 부재를 탄식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그런 부재의 탄식을 뒤바꿔 놓는 것입니다. 얼마나 현실의 고통과 상황이 암울한지 ‘하나님이 무심하다’고 여길 정도로 힘든 그런 때에 그런 억울한 일이 뒤집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게 ‘임마누엘’입니다. 그에 ‘처녀에게서 나는 아이’입니다.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억울한 삶을 뒤바꿔 놓는 메시아가 처녀에게서 났다는 것입니다. 마1:19에서 요셉은 그로 인하여 고민하다가 남몰래 파혼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이걸 우리는 요셉의 배려이며 의인다운 처신이라고 합니다. 아니, 그러면 신명기 22:20-21에 나오듯이 이스라엘이 법으로 지키는 돌로 때려죽이는 조항에 대해서는 위배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법을 위배하는 게 의로운 게 된다는 겁니까? 만약 요셉이 정말로 마리아를 위하는 길이라면 파혼이 아니라 그냥 결혼을 해서 덮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학은 1:20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는 말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특별히 고귀한 존재로 여겨지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이야기를 역사적 시점으로 끌고 들어가야 합니다. 요셉은 괴로워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는 하늘이 주신 아이다’고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은 남자 아이가 생기면 당연히 ‘하늘이 주신 아이’라고 여겼습니다. 천사는 계속 요셉에게 말합니다. “이 아이는 너 요셉에게 주는 하늘의 선물이다.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 들여라.” 이 말을 잘 새겨들어 보세요. 여러분에게 하는 말로 들어 보세요. 이 천사의 말이 자기하고는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은 여자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요셉의 입장을 고려한 말인지, 아니면 마리아의 입장을 고려하라는 말인지 생각해 보시라는 겁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하는 말을 확대해 보세요.
“지금 너의 아내가 될 여자에게와 그와 같은 여인들에게, 세상에 지금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참으로 처참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밖에 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렇게 생각지 말라. 이제 너와 약혼자에게 벌어진 그 참담함을 오히려 내가 그 반대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 아이는 그래서 수치와 폭력으로 잉태된 존재가 아니라 ‘임마누엘’이 될 것이다. 그걸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요셉의 몫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 즉 ‘임마누엘’은 마리아의 몫이 되는 겁니다.
초기에(바울의 말에도 동정녀에 관한 말이 없는 것처럼)이 말 ‘동정녀 수태’는 단지 남자 없이 임신한 가엾은 여인, 아니 폭력에 의해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채 태어날 아기의 불행, 불의의 상징으로 읽혀졌습니다. 비참한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때는 결코 한 남자의 성기가 닿지 않았다는 식의, 특별한 여인에게 특별하게 축복이 임했다는 텍스트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동정녀 이야기는 그녀의, 그 시대의 여자들의, 고난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진실이 생략된 채 사실만 남아서 지금까지 굴러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만 남고 진실은 사라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그 때, 나사렛에 인접한 성읍인 세포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로마는 잔혹하게 진압했습니다. 2000명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여 길거리에 걸렸습니다. 대부분 그들은 남자들이었고, 여자들은 로마군들에 의해 온갖 성적인 폭력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물론 요셉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태어나기 직전 이스라엘 사회에서 겪는 사람들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하나님도 무심하시지’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부재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닥친 하나님 부재의 현실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그게 ‘임마누엘’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소재가 바로 ‘어떤 처녀의 슬픈 임신에 대한’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바로 요셉의 약혼자 였구요.
세상은 늘 여자에게만 처녀성을 강조합니다. 순결은 남자의 몫이 아닙니다. 애초에 남자들은 ‘순결’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예외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처녀성을 강간한 폭력을 두둔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온갖 힘 있는 남자들에 의해서 ‘항상 처녀’를 종용받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 스스로 그 처녀성을 폭력으로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마리아가 살던 시대 상황에서 그리 크게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걱정을 내심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이런 거겠죠. 목사님 말씀대로라면 아기 예수가 전쟁 통에 생긴 사생아이고, 사생아를 잉태한 한 여인의 고통이 ‘임마누엘’로 역전된 것이라는 말이 아니냐? 그러면 지금껏 우리가 배워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 없이 오셔야 했기 때문에 동정녀의 몸을 빌었다’고 배워온 건 뭐냐는 것이겠지요?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기독교의 핵심은 동정녀 신학이 아니라 성육신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었고 이 땅에 오셨죠? 그러나 그가 오심은 왕이 아닙니다. 높은 학식을 가진 존재로도 아닙니다. 고귀한 성직자도 아닌 천민 이었습니다. 또 아비 없는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말은 세상에서는 아비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없음이 가장 두드러진 곳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나약함 속에서, 세상 고난에 찌든 현장에서 인간이 되신다는 겁니다. 이게 성육신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깨끗하고 고결한 곳에서 인간이 되지 않습니다. 죄 없는 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통해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죄 많은 곳에서, 죄 많은 사람을 통해 성육신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성육신 신학에 있어서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걸 믿는 것이지, 이래서 그분이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시는 것이지 동정녀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는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동정녀’라는 언어는 남자들의 성적 이데올로기의 희생물로 고착되어 온 것이지 성서의 기본적인 생명 정신으로 이어져 온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소통이 잘 이루어지려면 잘난 사람보다는, 한 뼘도 흠이 없는 사람보다는 허점이 많고 자기의 허물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과 소통이 가능한 것입니다. 허물이 있고 그 허물을 드러내는 사람과 가까워 질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고 소통하게 됩니다. 그럴 때 희망도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동정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남성중심의 성적사회를 은폐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동정녀’에게 집중할 게 아니라 ‘성육신’의 역사적 현장을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사회가 어지러워서 감당할 수 없는 생존의 무게에 짓눌린 여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그런 여자를 매장하지 않고 되레 거룩으로 승화시켜 ‘임마누엘’을 선언하게 하신 하나님, 마리아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어 주신 하나님을 되새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역사의 현장이 ‘임마누엘’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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