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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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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60420986 |
2009년 1월 18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창세기 1장 1절~2절, 2장 7절
설교제목 : “하느님의 영이 깃든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 1:1~2)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
<영화 그리고 책 이야기>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외국 영화 중에 ‘21그램’(21 Grams)이라는 영화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21그램은 소위 영혼의 무게로 추정되는 수치입니다. 어떤 박사가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몸에서 영혼이 나간다는 가정 하에 아주 민감한 계량기로 곧 죽게 될 환자의 몸무게와 죽고 난 직후의 몸무게를 달았는데, 그 차이가 21그램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인간의 육체 가운데 영혼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인간 육체 중에서 어느 곳에 있는가” 하는 점을 논쟁거리로 삼곤 합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에 『영혼의 동반자』(존 오도나휴 지음, 류시화 번역, 이끌리오출판사)를 읽으면서, “인간의 육체에 영혼이 있다”는 생각이 잘못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제 말씀은 인간의 육체에 영혼이 없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천천히 끝까지 잘 읽어주시면, 깊이 생각해볼만한 메시지를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이 책의 저자 존 오도나휴에 대해서 소개의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존 오도나휴는 켈트의 문화가 살아 있는 아일랜드 태생입니다. 즉 그는 ‘합리주의와 물질문명’으로 특징지어지는 서양의 주류문명과는 분명한 구분이 서는, ‘감성주의와 정신문명’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켈트문화의 후예였습니다. 아일랜드 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 신학을 공부한 오도나휴는 1990년 독일의 튀빙겐대학에서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켈트문화의 토양에서 자라나서 서양 주류문명의 정신적(철학적, 사상적, 신학적) 세례를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조상인 고대 켈트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독특한 사상에 눈을 떴습니다. 여전히 기독교 신학자로서 살아갔지만, 그는 서양문화의 주류 신학과는 달리 대단히 영적이고 감성적이고 신비적인 ‘켈트 기독교의 영성’을 조명하는 남다른 신학자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는 “고향에서 안개 속에 어른거리는 정신적인 풍경, 삶과 죽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등을 고대 켈트인의 언어로, 곧 켈트 기독교의 상상력으로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들은 대단히 독특하고 기발합니다. 무엇보다 영감어립니다.
이 책 『영혼의 동반자』의 내용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는 어록은 “영혼은 육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영혼 속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의 켈트식 통찰에 따르면, 영혼은 육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육체가 영혼 속에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육체가 속해 있는 모든 곳이 영혼으로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영혼이 육체 속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혼이 몸속의 어떤 특별하고, 작고 우아한 지역에 갇혀 있다고 여겼습니다. 영혼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고대인들은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정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육체가 영혼 속에 있는 것입니다.”(110쪽). “우리는 영혼을 육체와 분리시키는 거짓된 이원론을 피해야 합니다. 영혼은 단순히 육체 속에 있지 않습니다. 육체 깊은 곳 어딘가에 숨어 있지도 않습니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육체가 영혼 속에 있으며, 영혼이 그대를 완전히 감싸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대의 육체 둘레에 신비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빛이 서려 있습니다.”(63쪽~64쪽).
저는 존 오도나휴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인간의 육체 속 어딘가에 영혼이 있다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는 ‘이성(理性)과 물질(物質)’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는 서양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왜곡된 인간형이라고 봅니다. 아주 심하게 이야기하면, 괴물 같은 인간이해입니다. 진실은 그 반대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간의 육체는 영혼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 즉 인간육체를 포함한 지구별 전체가 곧 거룩한 영혼입니다. 저 하늘과 저 땅, 저 바다와 숲, 나무와 풀, 거리와 빌딩,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들 속에 신령한 하느님의 영혼이 서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육체 속에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육체가 영혼 속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 1:1~2)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
창세기 말씀이 증거하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건 이 하늘과 땅이 “물질적이며 기계적인 실체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하늘과 땅이 “정신적이며 영적이며 살아있는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저 하늘과 이 땅은 하나님의 영이 서려 있는 신령한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그게 창세기의 핵심적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 하늘 아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은 신령한 하나님의 영을 간직한 존재라는 메시지입니다. 그게 창세기가 일깨워주고 있는 인간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특히 서구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저 하늘과 이 땅, 지구별와 우주는 다만 ‘물질적이며 기계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도 다만 ‘물질로만 채워져 있는 우연한 생명체’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발전시키다보니, 인간의 육체 한 곳에 영혼이 있다는 어거지식 생각으로 인간론이 왜곡 변질되는 것입니다.
제가 평소에 “기독교는 동양의 종교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만, 이는 기독교를 어거지로 동양적 사상으로 해석하자는 취지가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의 더 깊고 높은 메시지를 성찰해보니까, 거기에는 동양적 감수성의 메시지들이 살아있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즉 서양사람들이 잘못되게, 왜곡 변형시킨 기독교의 복음을 제대로 살펴보면, 그 속에는 사실 동양적 감수성의 진리들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더라 하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도 마찬가지 차원입니다. 동양적 감수성이 살아있는 켈트문화를 통해서 기독교의 메시지를 살펴보면, 그 메시지의 핵심을 제대로 볼 수 있겠다 하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느님의 영이 깃든 …”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저 하늘과 이 땅에, 저 별과 달에, 나무와 풀과 숲과 태양에, 이 사람과 저 사람들에게, 이 민족과 역사에, 정치문화교육 등의 제반 분야에 …… 하느님의 신령한 영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를 깨닫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제일먼저 깨달아야할 삶의 진실입니다.
그런 깨달음 위에서 △정치도 하고, △경제활동도 하고, △대학도 가고,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사회정의운동도 하고, △사회활동도 하고, △여행도 하고, △병치료도 받고, △미래를 꿈꾸기도 하고, △노후생활을 구상하기도 하고 … 그러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하느님의 영이 깃든 …”이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신령한 깨달음 속에서 각기 다양한 삶의 활동들을 영위해 나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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