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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2:2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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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60833523 |
2009년 1월 25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창세기 32장 22절~32절, 마가복음 1장 9절~11절
설교제목 : “하느님의 마음을 품으세요”
<책 이야기>
최근 『님의 침묵과 禪(선)의 세계』(새문사, 김광원)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소중한 지혜의 말씀들을 배웠습니다. 이 책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쓰신 시집 『님의 침묵』을 선시(禪詩)의 차원에서 해설한 책인데, 참 유익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만해 한용운의 시들을 선시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훌륭한 시해석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감동한 부분은 수행자들의 득도체험에 대한 구절들이었습니다. 몇 구절 소개해보면 이렇습니다. “수행을 통한 참선의 경지에서 만해의 마음은 거울처럼 맑아질 수 있었다. … 그 체험시의 개오(開悟 : 지혜를 얻어 진리를 깨닫는 일) 작용은 무심지경의 삼매상태에서 ‘나’와 우주가 합일되는 것을 말한다고 할 때, 모든 수행자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다할 것이다. … 모든 부처의 법신이 내 성품에 들어오매, 내 성품이 여래와 하나로 합한다. 공안(公案 : 석가모니의 말과 행동)을 풀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극한에 처해야 한다. … 바로 이것이다. 나는 정말로 무(無)의 뿌리를 본 것이다. 3년의 수행 끝에 나는 내 본래면목을 보았다. … 선의 체험은 자신 내부의 생명력과 우주의 생명력, 즉 내부의 기(氣)와 외부(宇宙)의 기가 완전한 합일을 이루면서 일어난다. … 무심의 수동적 상태에서 내부의 기는 우주의 기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 순간 합일되면서 머리 위로 솟구치는 기의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선사는 개안(開眼)되고, 직관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가 눈앞에 열리게 된다.”
그러나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건 제 능력 밖의 일이고, 저는 종교다원의 입장이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동양적 패러다임을 갖고 있는 기독교가 서양의 패러다임으로 윤색되는 과정 속에서 잃어버리게 된 ‘영성의 본질’을 되찾자는 것이고, 그런 작업의 과정 속에서 동양적 영성을 간직하고 있는 종교와 사상으로부터 배울 것은 지혜롭게 배우자는 입장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이나 불교의 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님의 침묵과 禪(선)의 세계』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구절은 “나는 정말로 무(無)의 뿌리를 본 것이다”는 구절입니다. 무, 즉 없음의 세계의 뿌리를 본 깊고 높은 세계에 대한 눈뜸(開眼), 그 일을 통해서 얻어지는 인생과 우주에 대한 본질적 통찰력(通察力),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도달하게 되는 무한한 행복과 기쁨, 환희와 해방 … 그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셔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마가 1:9~11)】
이 성경구절에 대한 우리 기독교의 해석은 어떤 것들입니까? 신학적 입장에 따라 달라집니다.
먼저 근본주의자들(성경주의자 혹은 복음주의자)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성경구절은 문자 그대로 다 진실이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진짜로 하늘이 갈라졌고,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건 만화 같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교회 밖으로 1미터만 나가서 세상의 보통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비웃음의 소리만 들려올 뿐입니다. 설득력이 전혀 없는 이야기이죠.
다음 자유주의자들은 이 성경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성경구절은 성경을 기록한 마가가 과장한 것이다. 예수에 대한 흠모의 마음이 넘치다보니, 허구의 이야기를 끼워 넣은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의 이런 성경해석은 하나마나한 해석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그런 식의 냉소적 태도라면 굳이 성경을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자유주의자들은 영성적 세계에 대한 탐구나 수련이 전혀 없는 자들입니다. 그건 마치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않는 사람이 이성(異性)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아주 혹평하자면, 관심도 없고, 애정도 없고, 사명감도 못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별 관심 없이 지껄이는 차원에 머물고 있는 셈입니다. 그건 하나마나 한 소리일뿐입니다.
제가 제안하고 싶은 성경해석은 세 번째 차원입니다. 제 3의 길입니다. “이 성경구절은 예수님과 그 제자그룹들에게 들려온 내면의 소리입니다. 그 영성의 공동체 사람 모두에게 분명하게 들여온 영혼의 소리입니다. 즉 대각(大覺), 큰 깨달음의 순간에 그들의 영혼 가운데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퍼진 영혼의 소리인 것입니다.”(류기종 교수 해석). 저는 영성적 성서해석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대각(大覺)의 순간에 대한 놀라운 기록이 예수님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위인들 모두에게서 ‘큰 깨달음’ 즉 대각의 순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사례만 들겠습니다.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 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 보내고 난 다음에,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분이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그분은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그분이,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분이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옵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 하면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다. (창세 32:22~32)】
오늘 성경본문은 야곱이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역사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구절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들의 해석은 어떤 것들인가요? 긴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성경구절에 대한 영성적 해석은 곧 “수행의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된 하나님의 진리”, “긴박한 참선의 기도를 통해서 보게 된 하느님의 얼굴”를 뜻합니다. 그것은 마치 동양의 수행자들이 “나는 비로소 무(無)의 끝을 보게 되었다”는 고백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 =인간의 본질적 변화>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해야할까요? 왜 대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수도해야할까요? 그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은 큰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그 깨달음의 순간을 통해서 하느님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권모술수에만 능하던 사람이 하늘의 지혜를 얻게 되고, ▲나 밖에 모르던 이기주의자가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얻게 되며, ▲현재의 삶만을 즐기던 사람이 미래 인류의 삶을 걱정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으로 바뀝니다. 또 ▲현생만 화려하게 꾸미려던 사람이 영원한 생애에 대한 시야를 갖게 되고, ▲자기 몸만의 건강만 생각하던 어리석은 인간이 영혼육의 통전적 건강, 그리고 우리 사회의 건강함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한 마디로 큰 깨달음의 순간을 통해서 인간의 옹졸한 마음속에 원대한 하느님의 마음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일이 이기주의자 야곱에게 일어났고, 또 결정적으로 예수님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았던 우리 기독교의 성자들에게서 일어났고,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느님의 마음을 품으세요”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수도의 생활을 통해서 얻게 되는 크고 작은 깨달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음을 기억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 이제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의 마음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진리의 전달자로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실 성령님의 동행이 여기 고개 숙인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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