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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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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62480382 |
.2009년 2월 22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5장 3절~10절
설교제목 : 괜찮아 괜찮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책 이야기>
몇해전 출간된 책 중에 아주 훌륭한 일본인 교사에 관한 책이 있었는데, 그 책에 관한 서평이 오마이뉴스에 실렸습니다. 먼저 그 서평 기사를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죽음 가까이 있는 교사, 미즈타니 오사무
《서평》 밤의 아이들에게 빛을 주는 한 교사의 이야기
<애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
"저, 도둑질한 적 있어요." 괜찮아.
/ "저, 원조교제했어요." 괜찮아.
/ "저, 친구 왕따 시키고 괴롭힌 적 있어요." 괜찮아.
/ "저, 폭주족이었어요." 괜찮아.
/ "저, 죽으려고 했어요." 괜찮아.
/ "저, 공갈한 적 있어요." 괜찮아.
/ "저 학교에도 안 가고 집에만 처박혀 있었어요." 괜찮아.
/ "죽어 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얘들아,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은 구절이다. 그는 무엇이고 괜찮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상식으론 전혀 괜찮지 않은 것들을 그는 괜찮다고 말한다. 다만 한 가지, 죽어버리고 싶다는 말에는 절대 안 된다며 강하게 거부한다.
왜일까? 그에게 어제까지 일은 흘러간 과거이니까 전부 괜찮지만 죽는 건 안 된다고 한다. 죽음은 끝이지만 살아 있음은 희망의 만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건 아님 혼자 힘으로건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조건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절망의 시궁창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살아주기만 해도 좋다고 한다. 고맙다고 한다. 난 그의 이런 말에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진정성이 읽는 이를 부끄럽게 했기 때문이다.
미즈타니 오사무. 그는 일본의 한 야간고등학교 교사이다. '밤의 선생'. 밤거리의 아이들과 폭력조직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 그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밤 11시부터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번화가를 돈다. 거리에 나부끼는 야한 전단지와 즐비하게 늘어선 유흥업소의 간판들을 치운다.
그가 밤거리를 도는 것은 단순히 그런 것들을 치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밤거리를 돌며 본드를 마시거나 싸움을 하거나 약물 중독에 의해 위급에 빠진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다. 그는 아무리 위험한 상황일지라도 아이들에게 달려가 말을 한다. 어떤 땐 어린 학생을 폭력조직에서 빼내기 위해 조직 우두머리를 찾아가 직접 대면하기도 한다. 두렵지만 그는 간다. 그에겐 아이의 삶이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잘못되어 그는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폭력조직에게 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손가락 하나를 잃은 아픔은 매우 컸다. 그러나 소년의 미래를 위해서 손가락 하나쯤은 희생할 수 있었다."
그 소년은 일본인이 아니라 대만 소년이었다. 손가락 하나와 바꾼 그 소년은 그 후 고등학교로 돌아갔으며 일본 영주권도 획득하여 지금은 도쿄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일하며 성실하게 일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왜 그는 이렇게 위험한 일을 홀로 하고 있을까? 한때 폭력조직에 가담하여 방황했던 자신의 어릴 때의 삶이 하나의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을 어두운 밤거리로 내몬 것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희망의 믿음이었다. 그런 사랑과 믿음 때문에 그는 그 어떤 위험과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12년 이상을 밤거리를 찾아 떠돈 것이다.
"나는 절대 학생을 야단치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꽃을 피우는 씨앗'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꽃씨라도 심는 사람이 제대로 심고, 시간을 들여서 정성스레 가꾸면 반드시 꽃을 피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학부모와 교사, 지역의 어른들과 매스컴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정성껏 돌본다면 아이들은 반드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꽃을 피우는 씨앗'.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꺾여버리고 만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짓밟히기도 한다. 꺾인 그들은 아무런 희망 없이 신음하다 갈기갈기 몸과 마음이 찢어진 채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들을 위해 손을 쉽게 내밀지 않는다. 헌데 미즈타니 오사무는 버려진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옷을 벗어주고 마음을 주었다. 경원시하던 아이들은 그에게 의지했다. 물론 배신 같은 것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또 찾아오면 또 맞아주었다. 이런 그에게 일본 경찰은 '일본에서 가장 죽음 가까이 있는 교사'라며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밤거리를 포기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이들이 걱정돼서요."
이보다 더한 사랑이 있을까. 어느 사회에나 버려진 아이들은 많다. 여러 사정으로 가출하고 몸을 팔고 술집에 나가고 싸움판에 기웃거리는 아이들은 있다. 우리 주변에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문제아란 인식하에 멀리하려고 한다. 손을 내미려 하지 않는다. 손을 내민 순간 자신의 손도 더러워질까 봐서이다. 그런데 그는 말한다. 그런 아이들일수록 누군가의 손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그는 마지막으로 어른들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어떤 아이라도 그들이 살아온 과거와 현재를 인정하고, 제대로 칭찬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말이다. "지금까지 정말 잘 살아줬어."】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해하는 바,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은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선생님이 기독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느끼기에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은 예수의 닮은 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지지 않으시는지요?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의 어떤 점이 예수님의 어떤 점을 닮은 것일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이 성경구절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예찬의 메시지로 읽혀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편에 서셨다는 이야기로서 이 성경구절이 읽혀졌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인류 모두가 정신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가난한 삶 가운데 살아야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고, 지구 환경의 차원에서도 가난하게 사는 삶 만이 생태계 위기에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본문은 좀 다른 각도에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즉 약간 헷갈리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만, 「‘괜찮다’ 영성」의 차원에서 이 성경구절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에는 가난하고 불쌍한 삶을 사는 이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층은 소수인데 반해 지배당하는 피지배층은 다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가진 재산도 없고, 배운 학식도 부족하고, 크고 작은 질병 때문에 고통스럽게 죽어가야만 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고, 매일 손해만 보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해도 해도 되는 일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그런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위로의 메시지로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 비극적이고, 불쌍하고, 어리석고, 재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그대들에게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다. 그대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대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대들이 배부를 것이다. 그대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그대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대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하늘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다.(마태 5:3~10).】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 이야기>
엊그제 온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김수환 추기경께서 평온한 가운데 세상을 떠나셨다고, 온 매스컴들이 보도했습니다. 정말 복된 일입니다.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죽음만 복되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 반대의 죽음이라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만큼이 온 국민의 사랑을 받으셨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을 기억하시는지요? 그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죽음은 성자의 평온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에 앞서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 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 저기 뿌려 주기 바란다. …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셨을 때, 그런 죽음도 괜찮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이들도 너그럽게 품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시간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불쌍하게’ ‘비극적으로’ ‘비통하게’ ‘억울하게’ ‘슬프게’ ‘애통하게’ …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그대들에게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다. 그대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대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대들이 배부를 것이다. 그대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그대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대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하늘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다.(마태 5:3~10).】
<관대하신 하나님>
서양의 교회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내리시는 냉혹하신 하나님, 그런 무서운 하나님을 서양의 교회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관대함’이 있습니다. 그걸 서양의 교회들이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천 개의 표정을 가지신 모순의 실재일지도 모릅니다. 그걸 서양의 교회들이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양의 사람들은 그런 넉넉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더 깊은 기쁨이지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하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에게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창 4:15)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징벌의 신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신이기도 합니다. 즉 관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이의 모든 삶을 품어주시는 분입니다.
<말씀에의 적용>
우리 인생이 김수환 추기경처럼 기승전결(起承轉結)로서 그 아귀가 딱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건 정말 큰 축복입니다.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인생에서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나서 말년의 세월을 비참하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온 가정이 풍비박산되어도 괜찮습니다. 공부를 못해서 대학에 못 가도 괜찮습니다. 병에 걸려서 고생해도, 그래서 비극적으로 인생을 마쳐도 괜찮습니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인생을 마감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런 사람에게도 활짝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그대들에게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다. 그대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대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대들이 배부를 것이다. 그대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그대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대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하늘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다.(마태 5:3~10).】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괜찮아 괜찮아”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화롭게 여유있고 행복한 존재들임을 기억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 이제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언제나 어디서나 자비의 마음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진리의 상담자로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동행이 여기 고개 숙인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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