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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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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65278423 |
2009년 4월 12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누가복음 24장 1절~8절
설교제목 : 큰 죽음의 삶
그러나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에,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데, 보니, 남자 둘이 눈부신 옷을 입고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여자들이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부인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누가 24:1~8).
<부활 이야기>
오늘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부활절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이들에게 부활은 놀랍고도 감사한 사건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이 사건은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부활은 신비로운 사건이지만, 교회 밖에서 부활은 ‘믿겨지지 않는’ 황당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부활절입니다.
그러면 이를 어찌해야할까요? 성경의 부활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할까요? 결론적으로 말씀 드려서, 저는 이 사건을 인생의 원리, 삶의 법칙, 역사와 우주의 근본적 이치라는 차원에서 풀어보려고 합니다.
<장일순의 책 이야기>
얼마 전 읽은 책 중에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에서 장일순 선생은 예수의 부활사건에 대해서 풀어보면서 ‘대사일번 절후소생(大死一番 絶後蘇生)이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즉 “인생에서 크게 한번 죽음으로서 대처한 일은 후에 반드시 되살아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의 동양의 불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금언입니다.
장일순 선생의 이 이야기를 읽는 순간 참 좋았습니다. 부활에 대한 어떤 해석과 풀이보다도 제 마음 가운데 와 닿는 이야기여서 그랬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실제적으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제자들에 의해서 다소 과장되게 꾸며진 이야기였는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님에게서 촉발된 ‘하느님 나라 운동’이 예수가 죽임을 당한 후에도 꺾이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점이 몇 만배나 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한지 3일만에 살아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작하셨던 ‘하나님 나라’운동이 아무런 동력도 얻지 못한 채, 그냥 흐지부지 되어버렸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엄청난 비극이지요.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날에도 상당히 많이 일어나는 ‘죽음 체험자’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님께서 정말 살아나셨느냐 아니냐의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촉발된 하느님 나라 운동이 그의 죽음 이후에도 전혀 꺾이지 않는 동력을 갖고, 서서히 뻗어나갔다는 점입니다. 즉 대사일번 절후소생(大死一番 絶後蘇生)입니다. 즉 “인생에서 크게 한번 죽음으로서 대처한 일은 후에 반드시 되살아난다”는 점이었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유감>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중요한 차원이라고 생각되어서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근대 이후로, 서양신학계를 중심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진짜 예수님이 어떻게 살다가셨는지에 대한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연구를 진행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는 잘못된 연구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연구는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서 ‘달을 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달은 보지 않은 채 예수님의 손가락만 연구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연구입니다.
우리가 정말 온 몸을 기울여서 연구해야할 대상은 예수님의 손가락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리켜 주신 달을 연구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의 손가락에 다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집중시켜서, “예수님의 손가락이 길었다는 둥, 그렇지 않고 짧았다는 둥” 한심한 논쟁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게 서양신학의 한계와 잘못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말씀의 적용>
대사일번 절후소생(大死一番 絶後蘇生), “인생에서 크게 한번 죽음으로서 대처한 일은 후에 반드시 되살아난다”. 이 부활의 놀라운 메시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할까요?
그것은 죽는 것입니다. 크게 죽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교회와 가정, 학교와 사회, 국가와 지구촌에서 우리가 ‘크게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 대해서, 또 우리가 삶 가운데 겪는 사건들에 대해서 크게 죽는 것입니다. 작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죽는 것입니다. 사사롭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공명정대하게 죽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크게 죽는 마음으로 사는 삶, 그런 큰 죽음의 삶으로 살면 오히려 후에 다시 제대로 되살아나는 삶이 우리에게 축복처럼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부활의 참 메시지입니다.
<큰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궁금증이 남습니다. 도대체 ‘큰 죽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시니까, 베드로는 큰 마음 먹고 말했습니다. “그럼 한 일곱 번정도 용서해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태 18:21~22). 바로 그게 크게 죽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는 이로’ 원한을 갚는 유대인들에게 “원수조차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 뺨을 돌려대라”고 하셨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옥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크게 죽는 것입니다. 그런 큰 죽음의 삶을 살 때,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우리 교회와 가정, 학교와 사회, 나라와 인류공동체에서 일어난다는 메시지가 곧 부활절의 메시지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큰 죽음의 삶’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우리가 큰 죽음의 삶을 살 때, 우리에게 놀랍고도 신비한 삶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임을 기억하시는 시간 되시길 바라며, 오늘 이 시간 ‘큰 죽음의 삶’을 사시기로 결단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 이제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언제나 어디서나 자비의 마음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진리의 동반자로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동행이 여기 고개 숙인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아멘.
[출처] 큰 죽음의 삶 |작성자 말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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