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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4:1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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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66386709 |
2009년 5월 3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4장 18절~22절
설교제목 : 사람을 낚는 어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성경 이야기>
우리가 흔히 신구약 성경말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꼽으라는 이야기들을 가끔 하곤 하는데, 저는 요즘 만약 이런 질문이 내게 오면 오늘 성경말씀(마태 4: 18~22)을 꼽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고기를 잡는 어부’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성화(聖化)되는 변화만큼 귀한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자칫하면 이 성경구절을 잘못 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고기를 잡는 직업’은 천한 것이고, ‘사람을 낚는 직업’ 즉 전도사 목사 시인 소설가 언론인 교사 교수 등은 귀한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지요. 그건 잘못된 성서읽기입니다. 그 반대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만난 베드로 일행이 이른 바 ‘사람을 낚는 직업’의 사람들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즉 당시 유대나라의 제사장 그룹(목회자들), 서기관그룹(지식인들)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추정하건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른바 ‘사람을 낚는 직업인들’이었는데, 그 행태가 위선적이고 거짓에 사로잡혀 있고, 나약하고 추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잘못된 지식인들은 힘겨운 노동을 통해서 그 의식과 생각과 마음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그런 정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머리만 비대해진 괴물 같은 지식인들은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하는 말로 “노동이 기도”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정말 100% 그대로 의미가 살아있는 놀라운 금언입니다. 노동은 기도입니다. 노동을 통해서 땀을 흘리면서 그 영혼을 정화시키는 과정은 정말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노동이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갈릴리의 무식자 노동자들을 그 제자로 부르셨을까요? 그건 그 노동자들이야말로 힘겨운 노동을 통해서 그 영혼을 아름답고 강건하게 정화시킨 ‘위대한 예비 성자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당대에 가장 볼품없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그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가장 맑고 건강하고 아름답게 정화된 이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노동자 신학’의 출발점쯤 될 것입니다. (박노해 시인 이야기, 노동자 문학 ‘삶이 보이는 창’)
<성경말씀의 현실 적용>
이야기가 좀 장황해지고, 엉뚱한 방향으로 많이 가버렸습니다만, 아무튼 ‘사람을 낚는 어부’ 이야기는 고기 잡는 직업을 천하게 여기고, 사람 낚는 직업을 귀하게 여기는 차원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즉 직업선택의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관의 변화, 가치관의 성화, 철학이 있는 인생 … 뭐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서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학교에서 공부한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학교 공부가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 한 학생이 있습니다. 만약 이 학생이 밤을 새우며 열심히 공부하는데, 그 이유가 단지 다른 친구들보다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것이라면, 그건 ‘고기를 잡는 공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가 좋은 대학을 졸업한 후 평생 출세해서 편안하게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라면, 그 학생은 ‘고기를 잡는 공부’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공부는 재미도 없고, 행복도 없고, 성장도 없는 무미건조한 삶입니다. 지겨운 나날이지요. 그러나 만약에 공부의 이유가 인생의 문제를 풀고, 삶의 도약을 생각하는 진리의 탐구에로 그 초점이 모아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진리를 탐구하려는 공부는, 하면 할수록 흥미로워지고, 하면 할수록 큰 깨달음을 얻고, 하면 할수록 행복해지고, 하면 할수록 그 사람 자체의 품격이 달라집니다. 그 공부자에게서 위대한 성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낚는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기 시장이나 국회의원에 나서는 정치인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그 정치인이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름 석자나 알리려는 명예욕심 때문에, 또 이런 저린 이권(利權)을 차지하려는 물질적 탐심 때문에 정치를 하려한다면, 그이는 ‘고기를 잡는 정치인’일 뿐입니다. ‘사람을 낚는 정치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낚는 정치인은 더불어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정치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낚는 정치’에는 기쁨이 넘치고, 평화가 살아있고, 행복이 퍼집니다. ‘사람을 낚는 정치인’은 당선이 정치의 목표가 아닙니다. ‘당선과 낙선’은 그냥 삶의 과정일 뿐입니다. 당선과 낙선에서 자유로운 정치, 이웃들과 함께 사랑과 평화를 나누는 ‘아름답고 고귀한 정신의 교유’, 그것이 ‘사람을 낚는 정치인’의 존재이유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해야 할 사명으로 생각하는 분야 중에 출판이 있는데, 출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만약에 돈을 벌 목적으로, 또는 사회적 명예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출판을 한다면, 이는 ‘고기를 잡는 출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건 예수님의 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정신은 ‘사람을 낚는 출판’입니다.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는 출판이 아니라, 진리탐구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참된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교유로서 출판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낚는 출판’의 일은 너무나도 재미 있고, 너무나도 행복하고,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건강한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을 낚는 어부’는 바로 그런 차원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사람을 낚는 공부 / 정치 / 출판’은 ‘고기를 잡는 공부 / 정치 / 출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그물을 걷어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일깨워주시는 ‘역설의 축복’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잡아보았습니다.
교우 여러분들의 삶은 어떠십니까? 가정생활과 직장생활,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이 불행하다고 느끼시는지요? 그렇다면 그건 아마도 교우 여러분의 삶이 ‘고기를 잡는 어부’의 삶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삶의 방향을 대전환하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결단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 길이 예수님께서 일깨워주시는 ‘역설의 축복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 이제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언제나 어디서나 자비의 마음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넓으신 은총과, 진리의 동반자로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여기 고개 숙인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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