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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6:66-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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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67149938 |
2009년 5월 17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요한복음 6장 66절~69절
설교제목 : “너희도 가려느냐!”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그를 따르지 않았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시기를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요한 6:66~69).
<설교라는 말>
우리 교회의 예배순서 중에 설교가 있고, 우리가 교회생활 중 사용하는 용어 중에 ‘설교’(說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르침을 말한다’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초창기에 저는 이 ‘설교’라는 말을 ‘신앙 이야기’라는 말로 바꿀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을 말한다’는 설교의 뜻이 너무 부담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설교’, 즉 가르침을 말한다는 것이 왠지 주제넘은 일이고,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용어를 바꿀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중에는 반드시 ‘가르침을 일깨우는’ 부분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인데, 다만 제가 그걸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그냥 ‘설교’라는 말을 사용해왔습니다. 다만 설교의 내용을 요약하는 글에 대해서는 ‘나누고 싶은 신앙 이야기’라는 용어로 대체해서 사용해 왔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에 앞서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 말씀드릴 설교 내용이 ‘가르침을 말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냥 제가 느끼는 신앙적인 차원을 그냥 서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의 설교 내용도 대부분 그랬지만, 오늘은 특히 제 개인적 차원의 느낌과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오늘 설교에 앞서서 이런 저런 말씀을 드리게 됐습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저는 오래전부터 “너희도 가려느냐?” 라고 고독하게(비참하게, 불쌍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교본문으로 택해서 꼭 한번은 설교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저에게 또 우리 모두에게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생각하게 하는 ‘아주 매력적인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평소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바에 대해서 작심을 하고 깊이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인하여 살리라. …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한 6:53~58).
* 참고 : “하느님을 먹으라” 동학의 가르침
추정하건대, 당시에 예수님 주변에는 그냥 군중심리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도 유명하니까, 또 이런 저런 병자들도 많이 고치시니까, 또 크고 작은 기적들도 나타나니까, 갈릴리 촌놈들이 어느 날 갑자기 대도시로 나와서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하니까 … 호기심 반 기대 반의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 같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충격요법의 말씀으로 강력하게 그들의 영혼을 찢어놓으셨습니다. “얼렁벌렁한 마음으로 나를 따르는 이들은 물러가라. 떠나라. 나를 따르려면 매일매일의 삶이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는 삶이 되어야 하느니라.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니다. 진리의 생활이다. 진리의 생활은 위험한 것이고, 부담되는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이고, 슬픈 것이고, 아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진리의 생활을 위해서 온 몸과 영혼을 다 바친 사람이다. 나를 따르려면 나처럼 하느님의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와 함께 죽을 자만이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군중들을 술렁거리게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 이 말씀은 우리에게 걸림이 된다.”(요한 6:60~61). 수근거리던 군중은 하나 둘씩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수백 명쯤 되던 제자 그룹은 반토막의 반토막을 거듭했고, 이제는 불과 열 댓 명만 남았습니다. 찬바람만 휑하니 부는 허름한 창고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몇 되지도 않는 초라한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쓸쓸하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대중을 배반한 예수>
예수님은 대중(군중)을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지점에 예수님의 위대함이 있다고 단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면, 바로 대중을 배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던 대중들의 얄팍한 기대치대로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그냥 인생을 풍요롭게 살다간 ‘역사상의 한 인물’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명예와 이익, 재물과 자손 … 누릴 수 있는 인생의 복을 다 누리고 살다간 이스라엘의 위인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대중들의 얄팍한 기대치를 여지없기 깨트리셨고, 그 때문에 더욱더 고독한 인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허나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성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중을 배반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가요?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바로 설려면, 예수를 따르기로 결단한 우리들이, 특히 목회자들이 대중(군중)을 배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점쟁이는 아닙니다만, 가만히 세심하게 살펴보면, 목회자의 외모만으로도 그 분이 담임하시는 교회의 성도숫자를 맞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은 대중(군중)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의 얄팍한 기대치, 신앙생활을 취미생활 비슷하게 생각하는 대중들, 사교의 차원에서 혹은 사업상 이익을 목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신앙을 그냥 문화의 차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등이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 한국교회 현실 속에서 목회자들이 대중들의 얄팍한 기대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중들의 얄팍한 기대치를 찢어놓으셨는데,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은 대중의 기대치에 기대어서 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비극이며, 죄악이며, 타락입니다.
* 참고 : 연예인의 외모 / 나의 반성문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잡아보았습니다.
하느님을 매일 먹는 사람들, 즉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삶은 대중들의 얄팍한 기대치와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대중들의 얄팍한 기대치는 무엇이었습니까? 더 큰 기적을 행하고, 치료가 더 어려운 병자를 고치고, 더 멋진 말을 하고, 더 깊은 깨달음의 메시지를 주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그게 아니다’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우상적인 기대치들을 다 깨트리셨고, 그 대신 다만 ‘하늘로서 내려온 떡’을 먹는 삶만을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 이제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언제나 어디서나 자비의 마음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넓으신 은총과, 진리의 동반자로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여기 고개 숙인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어디서나 풍요로우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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