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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미6: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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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구하라 목사 |
참고 : |
찬송: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
성경은 계속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우리가 말을 하며 의사소통을 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지으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편 94편 9절이 오히려 우리에게 되물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입을 지으신 창조주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세와 요나에게 임했고, 예레미아에게도 임하였으며, 바울에게 임했고 오늘 우리에게도 임합니다. 이 임하신 말씀을 듣는 자는 하나님의 도구로 귀히 쓰임을 받는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애써 그 말씀하심을 외면하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히스기야 왕 시대의 백성들이 그러하였습니다. 미가서를 살펴보면 1장 2절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하시면서, 시작된 미가서는 3장에도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통치자들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 함께 보신 6장 역시 보시면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고 1절에 시작하며,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하고 2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듣고 또 무엇에 귀 기울임으로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합니까?
4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주님은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되셨고, 노예 된 그들을 값으로 사셔 자유케 하신 속량자가 되셨으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그 앞서 보내신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구원자가 되셨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압 왕 발락이, 브올의 아들 발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려 할 때에, 발람이 타고 다니던 나귀를 통해서까지 꾸짖으시며 이스라엘을 돌보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민22). 그 분은 가장 힘든 싯딤에서,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앞에 둔 길갈까지의 여정속에도 함께 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은 귀를 닫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외쳐 부르시건만 당신의 자녀 이스라엘은 그 소리를 들으려 하지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공의와 정의, 공평과 사랑을 그 삶에 닮아가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정작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지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삶의 모습,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찾으시는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는 삶이며 이스라엘에게서 보기 원하시는 삶이었을까요?
6절과 7절을 읽어드립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제물로 드리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일년 된 송아지, 아니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허물을 위해 첫째 아들을, 죄 때문에 몸의 열매를 드린다는 것도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성과 헌신이 아닙니까? 이 정도면 주님 기뻐하실 만 한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8절입니다.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주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은 그 백성, 그 자녀들이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이 모든 종교적인 행위보다 앞섭니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
성경 인물 중 참 흥미로운 인물이 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사람 둘이 있습니다. 한 분은 엘리야요 또한 분의 이름은 에녹입니다. 엘리야에 대한 기록은 많은 반면 에녹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삼백 년 동안 자녀를 낳고 주님과 동행하였다는 창세기 5장의 기록이, 히브리서11장 5절과 유다서 몇 절 기록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나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매일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 24절 말씀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매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은 삶으로, 히브리서11장 믿음의 선진들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박하지만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드러내는 매일, 주님과 함께 걷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큰 업적이 없더라도, 특별한 능력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천천의 만만의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더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자라 하는 증거를 받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분과의 동행은, 그분과 함께 매일을 살아,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를 통해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인생을 계속해서 산다면, 불의한 재물과 가증한 에바와 강포와 거짓 저울추를 두고 산다면, 주님의 치심이 있을 것이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공허한 삶, 감추어도 빠져나가는 삶, 씨를 뿌려도 추수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고 주님은 오늘 6장 후반부에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마치 생수의 근원되신 여호와를 버리고 터진 웅덩이에 무언가를 가두려고 애쓰지만, 열매도 없고 만족도 없으며 채움이 없는 허무한 인생을 살게 된다 하시는 것입니다 (렘2:13).
어떠한 삶으로 주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종교적인 행위는 가득하지만 정작 주님은 잃어버린 삶입니까? 매일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까? 정의의 기준도 없어져 버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정의가 된 세상입니다. 힘이 세고 목소리가 크고 가진 것이 많으면 정의인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은 참된 정의와 공의를, 그리고 참된 은혜와 진리를 예수님 안에서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삶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길이요 진리 되신 예수님을 통해 그리 하셨습니다. 어제 살펴본 미가서 5장, 곧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이름이 온 열방으로 흐르게 될 것을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을 통해 이루어진 약속이 계속 흐르는 일에 우리를 쓰시고자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에 쓰임 받는 영광된 인생은 일상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인 행위나 업적이 아니라, 그분을 내 삶의 정의의 기준으로 삼아 인자와 긍휼을 사랑하고 매일의 일상을 주님과 겸손히 함께 동행함으로 성취됩니다. 오늘도 그와 같은 일상으로 예수님을 높이시는 주님과 동행하시는 삶에 참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공의로우신 주님, 인자와 긍휼의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미가 선지자의 이름처럼 당신과 같은 분이 없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와 영원히 동행하시기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셨으니, 오늘 하루를 주님과 깊이 동행하고 정의를 행하고 인자와 긍휼하심을 사랑하는 삶 살아, 부족한 우리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열방으로 흐르는 일에 동참하는 영광된 일상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성경은 계속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우리가 말을 하며 의사소통을 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지으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편 94편 9절이 오히려 우리에게 되물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입을 지으신 창조주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세와 요나에게 임했고, 예레미아에게도 임하였으며, 바울에게 임했고 오늘 우리에게도 임합니다. 이 임하신 말씀을 듣는 자는 하나님의 도구로 귀히 쓰임을 받는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애써 그 말씀하심을 외면하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히스기야 왕 시대의 백성들이 그러하였습니다. 미가서를 살펴보면 1장 2절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하시면서, 시작된 미가서는 3장에도 야곱의 우두머리들아, 통치자들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 함께 보신 6장 역시 보시면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고 1절에 시작하며,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하고 2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듣고 또 무엇에 귀 기울임으로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합니까?
4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주님은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되셨고, 노예 된 그들을 값으로 사셔 자유케 하신 속량자가 되셨으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그 앞서 보내신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구원자가 되셨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압 왕 발락이, 브올의 아들 발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려 할 때에, 발람이 타고 다니던 나귀를 통해서까지 꾸짖으시며 이스라엘을 돌보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민22). 그 분은 가장 힘든 싯딤에서,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앞에 둔 길갈까지의 여정속에도 함께 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은 귀를 닫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외쳐 부르시건만 당신의 자녀 이스라엘은 그 소리를 들으려 하지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공의와 정의, 공평과 사랑을 그 삶에 닮아가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정작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지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삶의 모습,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찾으시는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는 삶이며 이스라엘에게서 보기 원하시는 삶이었을까요?
6절과 7절을 읽어드립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제물로 드리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일년 된 송아지, 아니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허물을 위해 첫째 아들을, 죄 때문에 몸의 열매를 드린다는 것도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성과 헌신이 아닙니까? 이 정도면 주님 기뻐하실 만 한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8절입니다.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주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은 그 백성, 그 자녀들이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이 모든 종교적인 행위보다 앞섭니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
성경 인물 중 참 흥미로운 인물이 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사람 둘이 있습니다. 한 분은 엘리야요 또한 분의 이름은 에녹입니다. 엘리야에 대한 기록은 많은 반면 에녹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삼백 년 동안 자녀를 낳고 주님과 동행하였다는 창세기 5장의 기록이, 히브리서11장 5절과 유다서 몇 절 기록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나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매일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 24절 말씀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매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은 삶으로, 히브리서11장 믿음의 선진들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박하지만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드러내는 매일, 주님과 함께 걷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큰 업적이 없더라도, 특별한 능력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천천의 만만의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더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자라 하는 증거를 받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분과의 동행은, 그분과 함께 매일을 살아,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를 통해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인생을 계속해서 산다면, 불의한 재물과 가증한 에바와 강포와 거짓 저울추를 두고 산다면, 주님의 치심이 있을 것이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공허한 삶, 감추어도 빠져나가는 삶, 씨를 뿌려도 추수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고 주님은 오늘 6장 후반부에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마치 생수의 근원되신 여호와를 버리고 터진 웅덩이에 무언가를 가두려고 애쓰지만, 열매도 없고 만족도 없으며 채움이 없는 허무한 인생을 살게 된다 하시는 것입니다 (렘2:13).
어떠한 삶으로 주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종교적인 행위는 가득하지만 정작 주님은 잃어버린 삶입니까? 매일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까? 정의의 기준도 없어져 버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정의가 된 세상입니다. 힘이 세고 목소리가 크고 가진 것이 많으면 정의인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은 참된 정의와 공의를, 그리고 참된 은혜와 진리를 예수님 안에서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삶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길이요 진리 되신 예수님을 통해 그리 하셨습니다. 어제 살펴본 미가서 5장, 곧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이름이 온 열방으로 흐르게 될 것을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을 통해 이루어진 약속이 계속 흐르는 일에 우리를 쓰시고자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에 쓰임 받는 영광된 인생은 일상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인 행위나 업적이 아니라, 그분을 내 삶의 정의의 기준으로 삼아 인자와 긍휼을 사랑하고 매일의 일상을 주님과 겸손히 함께 동행함으로 성취됩니다. 오늘도 그와 같은 일상으로 예수님을 높이시는 주님과 동행하시는 삶에 참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공의로우신 주님, 인자와 긍휼의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미가 선지자의 이름처럼 당신과 같은 분이 없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와 영원히 동행하시기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셨으니, 오늘 하루를 주님과 깊이 동행하고 정의를 행하고 인자와 긍휼하심을 사랑하는 삶 살아, 부족한 우리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열방으로 흐르는 일에 동참하는 영광된 일상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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