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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0:3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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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68265617 |
2009년 6월 7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0장 34절~39절
설교제목 : 홀로 서기의 영성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 10:34~3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내가 이 땅에 분쟁을, 불과 칼의 전쟁을 주러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섯 식구가 있는 집에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서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설 것입니다. 모두가 홀로 설 것입니다.”(도마복음 16절). /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에 섰으나 홀로인 사람만이 신방에 들 것입니다.(도마복음 75절).】
<책 이야기>
저는 최근 『또 다른 예수』(오강남 지음, 예담출판사)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도마’라는 제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 도마복음서인데,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님께서 도마복음서를 읽으시면서 느낀 이야기들을 설명해 주신 바로 이 책, 『또 다른 예수』입니다.
책 제목이 암시해 주는 것처럼, 이 도마복음서에는 우리가 신약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 실려져 있습니다. 즉 복음서의 예수님은 주로 ‘믿음’에 대해서 일깨워주는 말씀을 주로 하신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도마복음서의 예수님은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점, 즉 ‘깨달음의 신앙’에 대한 가르침은 굉장히 중요한 차원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도마복음서의 발견, 그 의미>
도마복음서가 기록된 때는 예수님 세상 떠나신 후 100년쯤 지난 시점이었습니다만, 놀랍게도 1천이 넘도록 도마복음서는 지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왜 일까요? 궁금하시죠? 그 이야기를 하려면,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4세기 초, 로마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을 통치할 하나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로서 ‘유일 신 신앙체계’를 갖고 있던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종교, 하나의 신조, 하나의 성서’로 통일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에 따라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고, 이를 계기로 당시 개별적으로 떠돌아다니던 기독교 문헌 중 27권을 선별해서, ‘신약성경’으로 확정했고, 그 밖의 문서들은 이단적 문헌으로 판단해서 모두 불태우도록 명령했습니다. (* 참고 : 기독교 국교화가 좋은 일이었나? 아니다. 무지개 빛 신앙을 흑백 신앙으로 만들었다. 집단화, 평면화, 단일화, 제국주의화.)
그러나 이때 이집트의 파코미수도원 수도사들은 도저히 불태워버릴 수 없는 소중한 기록인 ‘도마복음’를 도서관에서 몰래 빼내서, 빈 항아리에 넣은 후 훗날 누군가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도록 산기슭 큰 바위 밑에 묻었고, 이것이 천년의 세월 후에 즉 1945년에 이집트의 농부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도마복음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세계 교회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도마복음서의 내용이 신약성경의 복음서의 내용과 질적으로 다른 분명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기적, 예언의 성취, 재림, 종말, 부활, 최후 심판, 대속 등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그 대신 내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을 통해서 내가 새 사람이 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돋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깨달음의 신앙은 이제까지는 예수님과 기독교에는 전혀 없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가 발견된 이후로, 그런 통념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임이 판명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계교회가 놀랐고, 지금도 여전히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 10:34~3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내가 이 땅에 분쟁을, 불과 칼의 전쟁을 주러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섯 식구가 있는 집에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서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설 것입니다. 모두가 홀로 설 것입니다.”(도마복음 16절). /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에 섰으나 홀로인 사람만이 신방에 들 것입니다.(도마복음 75절).】
마태복음서가 도마복음서가 그 기본적 내용은 비슷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알게 되는 자들이 겪게 되는 세상과의 불화, 그것이 기본주제입니다. 물론 그런 영성적 불화의 내용도 쉽게 말할 수 없고,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너무나도 중요하고 무거운 이야기입니다만, 더욱 놀라운 것은 도마복음서의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서는 그 불화의 끝에 대한 언급이 불분명한데, 도마복음서는 다릅니다. 도마복음서는 영성적 불화 뒤에 오는 ‘홀로된 깨달음’이 우리를 자유와 해방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놀라운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마태복음과 도마복음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거의 비슷한데, 도마복음서에만 있는 돋보이는 한 가지 초점이 있었습니다. 즉 ‘홀로 깨달음’의 세계였습니다. 도마복음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의 메시지는 결국 깊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서 홀로됨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삶이었습니다. 홀로의 깨달음, 그 깨달음이 주는 자유와 해방, 그것이 도마복음서의 핵심이었습니다. 저 역시 도마복음의 메시지에 동의합니다.
(* 참고 :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석가가 태어났을 때 외쳤다고 하는 탄생게(誕生偈). 석가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일곱 발짝을 걸어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게(偈)를 외쳤다고 한다. 즉 이 우주만물 중에서는 내가 가장 존엄한 존재라는 뜻인데, 이것은 인간의 존귀한 실존성을 상징하는 말이며, 석가의 탄생이 속세로부터 성스러운 세계로의 초탈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비극>
현재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오늘 이런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또 세계교회의 문제는 ‘지나치게’ 모이려고 하는데 있다.”
신앙은 원래 독존(獨存, 홀로 깨달음)의 세계인데, 우리는 지금 군중의 심리가 주는 편안함에 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잘못이고, 큰 착각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인간은 ‘독존’(獨存)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단은 홀로 해야 합니다. 죽음의 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엄숙하고 장엄하고 진지한 순간을 우리는 홀로 맞서야합니다. ‘독존’(獨存)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교회들은 너무 모이려고만 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모이지 말고 흩어져서, 홀로 하느님과 대결해야 합니다. 홀로 하느님과 씨름해야 하고, 그 고독한 결투에서 승리해야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홀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홀로 설 수 있음에 있다고 단언합니다. 그 무엇에 대해서도 홀로 설 수 있는 자, 그 어떤 순간에도 홀로 담담하게 설 수 있는 자, 무슨 일을 만나도 홀로 담백할 수 있는 자 … 바로 그런 사람이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하느님의 아들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홀로 서기의 영성’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아주 오래전 유행하던 시 중에 ‘홀로 서기’(서정윤)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지금 그 싯구들은 다 잊어버렸지만, 그 시의 도입 부분만큼은 분명하게 기억됩니다.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런 것이지요.
오늘 이 시간 ‘홀로 서기의 영성’이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귀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 이제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언제나 어디서나 자비의 마음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넓으신 은총과, 진리의 동반자로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여기 고개 숙인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어디서나 풍요로우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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