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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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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71703003 |
2009년 7월 5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고린도전서 15장 31절, 갈라디아서 2장 20절
설교제목 : “나는 날마다 사노라”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거는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합니다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 15:31).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영원과 하루」 이야기>
가톨릭 대학교 신학생들의 일상사를 조명한 VTR 「영원과 하루」를 보았는데, 그 영상물에는 아주 멋진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가톨릭 신부님들이 ‘수단’이라는 옷을 입고, 낙엽이 아름답게 물들은 교정을 조용히 생각하면서 걷는 모습입니다. 그 영상물을 보면서, “나도 한번, 아니 자주 저 ‘수단’(soutane)이라는 옷을 입고, 걸어봤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만큼 그 영상이 멋졌습니다.
수단(soutane)은 검은 색 정장으로서 신부님들의 온 몸을 감싸 앉는 옷이었는데, 그 옷이 의미하는 바는 ‘죽음’이었습니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죽고, 다만 하느님을 따르는 수도자로서의 나는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검은 색 수도복 ‘수단’이었습니다. 「영원과 하루」에는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사제 서품을 받는 이들이 바닥에 엎드렸다가 일어나는 장면입니다. 그에 대해서 어느 교수님은 해석하기를 “이제 엎드릴 때 개인으로서의 나는 죽고, 이제 일어설 때 하느님의 사제로서의 나는 살아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훌륭한 해석이었습니다.
가톨릭 신부들에게 있어서, 또 수녀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있어서, 우리 모든 신앙인의 삶에 있어서 ‘신앙의 삶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개개인의 삶은 죽고 하느님을 섬기는 나는 사는 삶, 그게 수도이며 신앙입니다.
저 역시 조금이나마 부족한대로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초중고교와 대학 동창회 모임에 안 나갈 뿐만이 아니라 친구들과의 이런 저런 모임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한 때 우리 아이들이 제게 묻기를 “아빠하고 친한 친구들은 누구야?”라고 묻기도 했고, 어릴 때 친구들 중에서도 제게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그런 친구들에게, 또 일가친척들에게, 이런 저런 인연의 끈이 있었던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제가 하고 싶었던 속마음의 답변은 “김 아무개는 죽은 것으로 생각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구도자 혹은 수도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에게 ‘일가친척’이나, 가까운 친구나, 이런 저런 인연의 끈은 “가급적이면 버려야할 인연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환희의 수도생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의 분위기가 착 가라 앉습니다. “수도생활은 곧 죽음이다. 신앙은 죽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사는 이들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 가운데 ‘죽음’이라는 어두운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 때문에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엄청난 오해입니다. 정반대입니다. 수도의 삶이, 즉 영성의 삶이 죽음과 가까운 삶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도와 영성의 삶이 어둡고 칙칙하고 우울한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밝고, 활기차고, 명랑한 것이 바로 참된 ‘수도적, 영성적 삶’인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거는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합니다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 15:31).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이 성경말씀을 기록한 사도바울은 ‘죽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바울이 선언한 ‘죽음’은 어떤 죽음이었을까요? 그건 결국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죽음이었습니다. 진리(眞理)와 비진리(非 眞理)가 있다고 했을 때, ‘비진리’에 대한 죽음 선언이었습니다. 선과 악이 있다고 했을 때, 악에 대한 죽음 선언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사람에 대한 죽음 선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죽음 선언은 어둡고 칙칙하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밝고, 활기가 생기고, 명랑하고, 평온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게 죽음 선언의 참된 의미였습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사도바울의 선언은 “나는 날마다 사노라”라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설교의 결론>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성경의 구절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즉 “나는 날마다 죽음으로, 날마다 사노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게 바울의 정확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날마다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상에 대해서 죽고, 참된 하느님의 신앙에 대해서 살아야 합니다. 비진리에 대해서 죽고, 진리에 대해서 매일 살아야 합니다. 악에 대해서 죽고, 선에 대해서 매일 살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에 대해서 매일 살아야 합니다. 그게 사도바울의 메시지이며, 하느님의 말숨입니다.
<살아나는 삶이란?>
이제 우리의 궁금증이 하나 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살아나는 삶’일까요? 한 가지 예화를 들겠습니다.
존 오도나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작가이며 가톨릭 신학자입니다. 아일랜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땅과 친밀한 성장기를 보낸 후, 12살 때 집을 떠나서 기숙사생활을 했고, 아일랜드 대학과 독일의 튀빙겐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조상인 고대 켈트인들이 지니고 있던 독특한 사상에 눈을 뜹니다. 이때부터 그는 안개 속에 어른거리는 정신적인 풍경, 삶과 죽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등을 고대 켈트인의 언어로 그려내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 1월 갑자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아일랜드 서부의 한 아담한 집에서 홀로 지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고대 아일랜드어인 게일어를 사용했습니다.
그의 책 중에 『사람이 사람에게-존 오도나휴의 깊은 축복』(21세기북스)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시구가 나옵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낄 때 / … /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 그대 영혼이 알고 / … /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 …”(‘죽음을 맞이하며’ 중에서).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또 머리만 커진 서양의 철학이 아니라 인간의 감성으로 따뜻하게 생각할 줄 아는 ‘켈트영성의 위대함’을 떠올리면서 크나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고, 죽음이 지니는 바 ‘따뜻한 평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제게 있어서 ‘살아나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나는 날마다 사노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나는 날마다 사노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 이제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언제나 어디서나 자비의 마음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넓으신 은총과, 진리의 동반자로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여기 고개 숙인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어디서나 풍요로우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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