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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1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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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형선 형제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index.php?mid=sermon&category=129757&page=2&document_srl=130281 |
교회와 신앙
(로마서 14:4-5)
2013년 2월 24일 주일예배
정형선 형제
(연세대학교 교수, 한국보건경제정책학회 회장)
세 번째 이 자리에 섭니다만, 이 자리에 설 때마다 큰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선, 무슨 내용이 되었든 성경과 연관을 지어야 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성경말씀 구절을 제시해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성경과 연관 짓기에는 저 자신 성경에 대한 지식이 충분치 못합니다. 새길교회에는 신학을 거의 전공 수준으로 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성경 얘기를 하게 되면 그야말로 누구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다음으로, 남들에게 설교를 하려면 무언가 선한 얘기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사실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적어도 신앙을 추구하고 사는 분들에게 선하게 살라고 얘기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지금 성경 지식도 그다지 많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그냥 평범하게 하는 얘기 정도로 들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처음 말씀증거의 자리에 선 것은 11년 전인 2002년 8월이었습니다. 보건복지부의 관료생활을 접고 대학 교수로 막 옮기는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보건복지부에서 맡고 있던 직책이 ‘자활지원과장’이었는데, 우리 사회의 흐름에서 낙오된 생활보호대상자들이 자활을 통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관심도 있고 해서 첫 말씀증거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과 품삭에 관한 비유”를 ‘사회보장’의 시각에서 풀어보는 내용이었습니다.
두 번째 말씀증거는 작년 이맘때쯤인데 지역편견의 문제를 얘기했습니다. 약간은 자극적일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지만 다루어보았습니다. 두 가지 모두 무거운 주제였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번에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얘기하고 들을 수 있는 주제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를 둘러싼 저의 삶의 과정을 반추해보고 싶습니다. 흔히 말하는 간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무슨 ‘은혜’ 받은 일을 간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오랜 시간 교회를 다녀왔던 저의 모습을 반추하고 반성하면서 이를 공유해볼까 합니다.
어렸을 때는 왕십리에 있는 예수교 장로회 소속 교회를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근본주의 기독교라고 할 정도의 신앙을 가졌었습니다. 어린 저는 심판의 날이 얼마 남지 않고 예수께서 재림해서 새하늘과 새땅이 열리게 된다는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지요. 그냥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고 당장 몇 년 내로 심판의 날이 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구름 타고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지금은 이미 50대가 되어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이 나이까지 세상의 일상을 영위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근본주의적 신앙의 또 한 사례는 ‘안식일 엄수주의’를 이행하려 했던 것입니다. 일요일에는 물건을 사서도 안 되고 공부해서도 안 되고 오로지 교회와 하나님만을 생각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노목사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당신도 철저하게 이를 지켰으니까, 신도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었습니다. 이를 실천하느라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월요일부터 시험인데 일요일에 책을 봐서는 안 된다고 해서 죄책감 속에서 시험공부를 하곤 했으니 이 얼마나 큰 제약이었겠습니까? 일요일 먹을 음식은 평일에 사두어야 한다는 식이었지요. 요즈음도 그렇게 신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의 목사님과 교회 어른들은 안식일 지키는 것을 무척 강조했었습니다.
이러한 잔인한 요구는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에게는 지키기 어려운 율법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조적 해석은 순종하려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이것이 이행할 수 없는 것이 되자 저는 율법의 죄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죄를 덧씌우는 격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조적 신앙이 바뀌는 것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였습니다. 1978년에 대학에 들어가서는 기독교학생회라는 서클에 가입했습니다. 당시는 유신독재의 서슬이 퍼럴 때입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에서 기독교학생회는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의 메카 역할을 했던 소위 ‘문제’ 서클이고 ‘의식화’의 산실이었습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부르는 CCC와는 달랐습니다. 이 서클에서 선배들과 매주 계속되었던 세미나를 통해 저의 기독교관은 일대 변환을 맞게 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금까지 하늘에서 저를 지켜본다고 여겼던 하나님은 제게서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그 뒤로 가끔 이 교회 저 교회 들러보기도 했지만 바뀐 신앙에 맞는 교회를 주변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와 멀어지는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불교 관련 서적은 보아도 성경 관련한 내용은 아예 외면했습니다.
그러다 찾게 된 것이 새길 교회입니다. 처음 새길교회에 나온 것은 1988년도입니다. 당시 저는 20대 후반의 나이였습니다. 지금의 보건복지부에 해당하는 보건사회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행정고시를 통해서 세상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독재와 신군부에 저항하면서 자신을 희생하던 친구들에 대해 항상 미안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흑석동 부근의 교회에서 ‘한완상교수 강연’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보고찾아갔습니다. 말씀 중에 당신께서 다니시는 교회에 관한 언급이 있으셔서 여쭈어보고 바로 문정동을 찾아갔는데, 그것이 새길교회였습니다.
저는 앞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역할을 맡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앞에 나서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당시에도 새길교회를 비교적 조용히 다녔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청년들과의 비공식적인 모임은 활발히 했습니다. 그 당시 같이 모임을 가졌던 청년들은 지금은 대부분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에 제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중년의 멋진 신사, 숙녀 분들이 지금은 반백의 노신사숙녀로 변해 계시는 것을 보면서 세월의 흐름을 실감합니다. 물론 그동안 저도 결혼 전의 청년에서 지금 50을 넘어서 중반을 향하는 상황이 되어 있습니다. 일요일에만 나오고 예배 후에 청년회 모임을 갖는 정도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중장년층들은 저를 모르고 계셨을 겁니다.
그러다가 1991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는 한국인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교회도 아버지 목사님에서 아들 목사님으로 세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척박한 교회 상황 때문에 목사 세습을 다들 별로 문제라고 여기지 않던 분위기였습니다.
1994년에 한국으로 돌아와보니 새길교회는 없어지고 압구정의 현대교회에 들어가 있더군요. 현대교회에 몇 번 다니다보니 새길교회가 다시 이곳으로 분리해서 옮기게 되었고 저도 좇아와서 이곳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제 처와 어린 아이들도 같이 교회에 나왔었고, 교회의 비슷한 또래의 분들과는 예배 후에 담화도 나누면서 교제를 했었습니다. 96년도에는 전남 장성의 백운교회에 가서 난생 처음 똥지게를 지는 경험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96년 말에 한국이 OECD에 가입하게 되면서 97년 초에 프랑스 파리에서 주재관으로 파견되게 되었습니다. 원래의 근무기간은 3년이었는데, OECD 자체에서 2년을 더 근무하게 되면서 5년이라는 긴 기간을 그곳에 지내게 되었습니다. 파리장로교회라는 한인교회에 다녔는데, 외국 생활하면 의례 교회 가듯이 하는 정도로 다녔습니다. 그렇지만 구역예배 모임을 하면서 비슷한 연배의 구역형제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독실한 교인들과는 달리 항시 교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취하는 편이었습니다.
2002년에 한국에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보건복지부의 과장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교수 모집이 있어서 옮기게 되었습니다. 처음 2년 동안은 가족 전체가 원주로 이전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 기간 중에는 새길교회에 거의 나오지 못했습니다. 2004년에 서울로 이사해 오면서 다시 새길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만, 가족들이 새길교회가 재미없다고 해서 저만 가끔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조금 길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 20여년의 세월입니다. 그동안 새길교회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고 많은 분들이 오가고 했습니다. 새길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주변 여건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기존 교회의 부끄러운 행태는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연세대학교가 미션스쿨이다보니 교회적 분위기가 강합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히 주변 사람들에게 교회에 다닌다는 얘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누가 물어보아서 대답을 해야 하게 되면, 그 때는 새길교회라는 것에 대해 설명을 한 뒤 이 교회에 그것도 ‘가끔’ 나간다고 부연합니다. 기성교회와는 다른 교회라는 점을 설명하지 않고는 교회에 다닌다고 하기가 그만큼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새길교회가 무엇이 다를까요? 무엇이 저로하여금 교회에 다니는 변명으로 새길교회를 얘기하게 만들까요?
이번에 이 말씀증거를 준비하면서 새길교회의 과거와 현재를 조금 더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1987년3월7일의 창립취지문을 되새겨보았습니다. 교회와 복음에 대한 정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해석, 기존 교회에 대한 단죄,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결단으로 이어지는 내용 구구절절 공감입니다. 새길을 찾게 되는 이유를 정말 잘 집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손댈 곳이 거의 없는 이 정도의 창립취지문을 만들어낼 수 있던 초기 위원들의 지혜와 의식에 찬사를 아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탄 속에서도 딱 한 구절에서는 약간 멈칫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고통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뜨겁게 기억하면서”라는 구절입니다. 우리 교회는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부활인지 아니면 사후 ‘영혼’의 부활인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니고 ‘사상의 재발견’과 같은 추상적 상징뿐인지 하는 것이지요. 논란의 여지가 커서 각자의 해석에 맡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창립취지문에 나올 정도면 무언가 분명한 논의가 있었을 것도 같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뜨겁게 기억하면서”라는 문구의 ‘취지’가 아주 궁금합니다. 나중이라도 형제자매 분들 중 어느 분이든지 아시면 한 수 부탁드립니다.
지난 20여년간 평신도 중심 교회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새길교회는 상당한 노하우를 쌓았고, 이러한 새길교회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기독사회문화원의 운영과 관련한 치열한 논의를 보면서 민주적 운영체의 건강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전담 목사 없이 교회조직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예수정신 안에서의 건전한 비판과 반성이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현재의 새길교회는 한 마디로 성공모델이 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의 실험이 더 성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대를 넘어서 지속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워낙 능력 있는 신학위원들께서 교회의 중심을 잡고 계셔왔지만, 이 분들이 점차 연로해 가면서 과연 이분들을 대체할만한 분들을 계속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성경과 신학에 대해 전공 수준의 깊은 성찰의 기회를 가진 분 중에서 교회의 활동에 수입을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분이 필요할 것입니다. 권진관 형제가 대표적인 경우이겠지만, 비슷한 입장에 계신 분을 얻기가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아무튼 성공적인 새길교회의 운영방식이 세대를 넘어서는 지속가능한 모델로 자리잡기를 소원합니다.
다시 제 얘기로 돌아와서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옛날 주일학교 시절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의존하는 신앙과 열정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사라져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교회도 여러 세상 활동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새길교회 이외의 교회는 잘 알지도 못하고 다닐 의사도 없으니, 앞으로도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새길교회를 계속 다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면 지금처럼 계속 방관자적인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 외국 생활할 때의 경험에 비추어, 성도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면 구역모임을 적극적으로 해야 할 텐데 그것이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 현재 저의 가족이 새길교회에 우호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같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만, 아직은 동의를 얻고 있지 못합니다. 아무튼 과거 20여년보다는 형제자매 여러분과 더 많은 교제를 하면서 함께 하는 교회 생활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길이 현재까지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세대를 넘어선 지속성을 보임으로써 이 사회의 교회들을 선도하는 모델로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감사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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