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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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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설교 |
1장 1절-3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소원 목적하지 않고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의 진리말씀을 붙잡고 깨달으면서 이룰구원을 이뤄나가는 것이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말씀을 받고 훈련을 받으면서 실력이 커지며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것과 이치는 똑같다. 그렇게 예수 믿는 것이 말씀을 받는 정신적 태도요 자세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 예수님의 속성, 하나님의 온전을 닮아가는 것은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속성이라 하면 무엇을 보고 속성이라고 하느냐? 인격 속성 혹은 성품이라고 할 때 성품이란 뭘 보고 말하는 거냐? 일반인격은 이 세상에 국한이 돼 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국한이 돼 있다. 그런데 당신을 닮으라는 주님의 인격, 주님의 것은 신령천국에 들어가서도 영원히 쓸모 있는 것, 쓸 수 있는 것. 천국에서도 쓸모 있는 그 인격 즉, 하나님의 성품. 예수님을 믿으면서 만들어지는 그 성품은 진리지식, 그 다음에 그 진리지식에서 나오는 지혜. 그러니까 그 질은 주님의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 믿으면서 이걸 모르면 헛 믿는 거다. 이러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소원 목적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는 없다. 이렇게 믿으면 죽을 때까지 예수를 믿어도 그 사람 속에서는 걱정 근심 세상염려가 떠날 길이 없다.
하나님의 진리, 지혜지식, 그 다음에 하나님 도덕성. 도덕성에는 하나님의 선 사랑 거룩 진실.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 사랑의 사람으로 닮아져 가는 것. 세상사랑은 빠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사랑으로 채우는 것.
인인 간에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고, 그 다음에 일반적인 사랑은 활용 이용이다. 일반사람들의 사랑은 그게 목적이고, 우리는 이용 활용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세상의 사랑을 이용할 때는 활용적으로 여러 가지 방편이 나온다. 말로 행동으로 봉사로 희생으로 나온다. 교육으로도 나오고. 교훈으로 할 때는 상대에게 하나님의 영원히 가는 본질적인 사랑으로, 변질 없는 사랑으로 들어가게 해서 깨닫게 해서 바꿔놔야 한다.
이렇게 해서 듣는 자로 하여금 세상 것을 들고 와서 일반적인 것을 들고 와서 하나님의 것과 예수님의 것과 비교를 해서 현재 믿는 네가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다. ‘100년 가는 게 좋은 거냐, 천 년 만 년 무궁히 가는 게 진짜냐’를 자기가 스스로 판단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어느 것을 가질 것인지 판단을 하게 해서 그 사람 속에서 성품적 인격적 이해타산 평가적으로 바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이 참 고상해진다. 속사람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강하고 속사람이 그렇게 예쁘고 그렇게 진실하고 정직하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 사람이 바로 선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껍데기만 볼 줄 알지 속은 못 본다. 우리는 속을 봐야 한다. 속을 보려면 그냥 보면 보이는 게 아니고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 그 사람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나온다. 말은 그 사람의 중심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깨닫게 하고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가 세상 목적적인 것을 자기 속에 묻어두고 숨겨두고 ‘나는 예수 믿어 부자 되려네. 나는 예수 믿어 뭐가 되려네’ 하면 이건 하나님 앞에 은혜가 안 된다. 왜냐? 자기 생각과 하나님 생각과는 늘 배치가 되니까.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서로가 원수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영생이다. 영의 생각은 살리는 생각이고 육의 생각은 네가 죽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영원히 가는 걸 가질 때 가능한 것이다. 그 판단은 정확하고 옳은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거짓 인도자들은 머리에 자기가 거짓이라고 이름표를 써 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거짓 인도자들은 세상배경을 딱 깔아놓고 그 세상배경을 가지고 자랑을 한다. 예수님은 배경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가지고 사람 속에서 사람을 하나님 앞에 깨닫게 해서 바로 세운다. 그게 하나님 말씀의 교훈이다.
목사님을 소개할 때 ‘나는 어디 나왔고, 무슨 박사고, 수 천 명이 있는 어느 교회에서 뭘 하고’ 그렇게 하면 그런 것 듣지 말라. 그런 건 세상 것이고 세상에 속한 것이다. 그런 것 자랑할 것 없다.
사도바울은 뭘 자랑했느냐? 사울 적에 가말리엘 문하 밑에서 철학자요, 가만히 있어도 돈이 들어올 수가 있는 신분이었다. 그 신분 위치가 엄청난 것이다. 그런 분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런 건 다 내버리고 오직 예수로만 자랑한다.
세상 땅의 것은 자랑할 것이 없다. 왜? 불에 타고 변질되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금방 변질되고 넘어간다.
그런데 믿음이 좋은 걸 보통 보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충성봉사 많이 하면 이걸 알아주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세상 것을 자랑하는 자는 세상 유행바람이나 어떤 바람이 불면 금방 넘어진다. 100% 넘어진다. 세상 것은 있다가 없다가 하고, 변질되고 불에 타지고 하는 거니까 자랑할 것 없다. 없어질 것으로 변질될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다. 시집장가 갈 때도 ‘집이 몇 채고, 돈이 얼마고, 직장이 어떻고’ 하는 거 정말 어리석다. 그런 데 속지 말라. 속사람이 어떻게 생겼느냐?
세상요소적인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 축복인 것처럼 하는 자는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아도 그는 하나님 앞에 그림자 같은 자다. 이건 아예 사고방식 이해타산 평가성이 하나님 앞에 사망이라. 예수 믿는 질, 신앙의 질, 믿음의 질을 바로 알라.
그래서 우리 교회만큼은 아무리 예수 못 믿어도, 한 이치를 깨달아도 하나님 앞에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그 중심에 그 의중에 적중성이다. ‘믿음이 높다’ 그런 게 아니라 적중성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신앙이 아주 높은 거냐, 낮은 거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 ‘마리아 처녀의 신앙이 아주 높구나’ 그걸 본 건지, 아니면 마리아의 신앙을 당신의 의중에 적중성을 본 건지? 화살이 과녁 가운데에 맞듯이 마리아 신앙의 적중성을 보고 마리아에게로 간 건지, 아니면 당시에 마리아가 신앙이 높아서 예수님이 그 쪽으로 간 건지? 적중성을 본 것이다.
적중성이라는 것은 그 다음에 다른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의중에 그 질이 적중성이라야 하고, 그 다음에 높이 올라가는 것은 자기 노력 하에 되는 거다. 올라만 가면 정말 수준급이 되는 거다.
광야에서 주님이 보내시는 사자를 만나야 자기 마음속에서 세상은 물러가고 하나님의 것으로 차게 된다. 그런 신앙을 가졌다면 그 교인은 광야생활을 하는 교인이다. 희망이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세상을 자기 가슴에 앉고 있다면 이건 불에 타지고 형벌 받고 세상이 넘어지면 너도 같이 넘어진다. 어리석은 사람이다.
잠:에 보면 세상의 금은보다도 재산 재물보다도 무엇을 취하라? 지혜를 취하라. 하나님의 지혜를 네가 가져라. 재물은 세상 대표적 관사다. 지혜 속에는 금은보화만 있느냐? 어리석은 자가 금은보화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지금 같으면 그 날로 칼 맞아 죽는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오늘날 교회에서 거짓 인도자들이 세상을 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사람들에게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을 받아서 죽게 만드는 것과 같은 가르침이다. 이건 말하자면 광야에서 훈련 연단을 받아 영인성장과 영능의 실력이 되는 건 없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마음이구나. 예수 믿어도 세상 것으로 구한다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마음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따라 사니, 세상을 먼저 취하니 신앙정조 팔지, 하나님 배반하는 거지, 주님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거다. 그러면 사람 꼴이 뭐가 되느냐?
우리가 일반적으로도 어떤 사람이 맨 날 ‘돈 돈’ 하고, 돈 없다고 울고, 카드로 맨 날 메꾸고 하면 사람이 어찌 되겠느냐? 사람이 참 추해진다. 그 다음에 어떻게 감당하느냐? 견디다 견디다 그 고통을 못 견뎌서 자살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작은 거라도 내 속의 그런 생각은 도려내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과 정을 떼게 만들고, 소원 목적을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게 만든다. 이 모세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 라고 했다. 이것은 네 마음대로 하는 것을 벗으라는 것이다. 네 주관성을 벗으라. 이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다. 그리고 벗었던 그 신을 도로 신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신을 신고 애굽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래야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수 있다.
오늘날 거짓된 종들은 모세와 비교하면 제 마음대로 계획을 하고, 제 마음대로 교회를 인도한다. 인본주의 사고방식이다. 인간사회 윤리 도덕적 개념으로 교회를 인도하려는 것은 거짓 종들이다.
예수님을 바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들어가서 죄악 되고 타락된 물질 이해타산이 자기 속에서 쏙 빠진다. 진리로 된 지혜지식은 하나님의 것이라서 세상 것으로 이해타산을 계산을 안 한다. 진리에서 나온 지혜지식을 가지고 세상 모든 것을 판단 평가하는 것이다.
이 진리지식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인간 너를 만드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지혜지식이다. 이게 기독교의 지혜지식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단 교파를 막론하고 인간의 지혜지식을 가지고 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니 교회가 얼마나 많고 교인이 얼마나 많으냐? 그런데 지금 사회가 이 모양이다. 얼마나 고통스럽느냐? 말하자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사람이 안 바꿔졌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좋은 집에서 물질에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만 살다가 죽는 게 좋은지, 아니면 가난과 환난 핍박을 다 겪고, 뭔가 편한 것 같다가 또 내려가고,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 그렇게 살면서 영능의 실력이 잘 자란 사람이 좋은지?
안 믿는 사람에게 물으면 어느 게 좋다고 하느냐? 평생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것. 이게 안 믿는 사람들의 가치판단 평가성이다. 그러면 믿는 자기는 어느 쪽으로 판단이 들어가느냐?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판단은 예수님이 내리는 것처럼 내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판단을 바로 가져야 한다. 지금 이건 목사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이다. 말이 이치가 분명히 나오면 이건 하나님 앞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판단을 바로 가져야 한다. 설령 믿음이 없다고 해도 지식이나마 알고 있고 바로 가져야 한다. 지식마저 없다면 어디다 쓰겠느냐?
우리교회가 진짜교회냐, 가짜교회냐? 가짜도 아니고 진짜도 아니고 어중간한 거냐? 우리교회가 하나님 앞에 참 교회냐? 참 교회가 맞다면, 즉 진리교회라면 외형적으로 자꾸 커져야 하는 거냐? 옳은 교회라면 자꾸 커져야 하는 것이라면 그러면 목사가 진짜라면 몇 백 년은 더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 이게 다 이치다.
목사님이 옳은 목사라면 세상에서 오래 오래 살아야지 금방 죽으면 가짜냐? 예수님은 진짜 예수가 맞느냐? 그런데 백 살도 못 살고 40세도 못 돼서 어디에서 죽었느냐? 그것도 당신이 가르치는 제자에게 팔림을 받고. 그러니까 못에 박혀 죽은 예수님은 가짜고, 양쪽 강도들이 진짜냐? 이치를 따져라. 빨리 죽으면 가짜고, 오래 오래 살면 진짜냐? 진리는 그거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냐? 빨리 죽고 오래 살고 하는 그건 주님이 할 일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제가 제 몸을 학대해서 빨리 죽을 것이고. 이건 진짜고 가짜고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하나님 앞에 신앙 믿음이라는 게 뭐냐? 뭘 보고 그러는 거냐? 예수 잘 믿으면 부자가 되느냐? 잘 못 믿으면 가난해지느냐? 말도 아니냐?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교회에서들 많이 한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니 말도 안 되는 믿음을 가진 것이고,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치에 틀리는 사람이다. ‘안 그렇다, 그렇다’가 아니라 이치가 아니니 그건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되 적중적인 신앙을 가지고 서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성격도 고쳐지고 성질도 고쳐지고 자기를 쳐다볼 수 있고 다른 사람도 보이니 자기를 속일 수 없게 된다.
성경에 보면 ‘원수들이 한 길로 와서 일곱 길로 도망간다’고 했다. 이건 그 사람의 신앙의 질을 말하는 건데, 이런 신앙의 사람은 그 신앙의 질이 얼마나 강하고 지식이 있고 지혜롭고 속을 들여다보는 명철한 눈을 가졌게 때문에 악한 자들이 그 성도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도망을 가는 거다. 자기가 탄로가 나서 못 이긴다.
하나님의 진짜 종은 자기의 교만하고 자기주의적인 주관적인 그런 신발은 벗고 하나님의 말씀의 신발을 신는다. 그러면 말씀의 신발이 뭐냐? 복음의 신. 그걸 신고 그것으로 간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 이룰구원이 없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뭘 해 보겠다고 하는 건 타락된 자기 신발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발을 신지 않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사자는 나로 하여금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것을 끊게 하고 약속의 땅 천국을 소원 목적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온전을 소원하게 한다. 내가 세상 소원 목적을 품었다고 해서 그게 다 이루어지느냐? 안 품으면 세상 소원성이 안 이뤄지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복음생활이요, 복음생활은 곧 광야생활이요 그것이 믿음생활이다. 종교생활이 아니라 믿음생활이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 안에 살지 않고 하나님 제일주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이것이 곧 복음생활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주님을 닮지 못하면 예수 믿는 효력이 없다. 교회에 다녔느냐? 오래 다녔느냐? 그만큼 깨닫고 아는 게 풍부해야 한다.
지금 기독교 사역자들이 ‘나는 주님의 종이다. 주님이 보내신 사자라’ 그렇게 이구동성으로 말하겠지만 주님이 보내신 사자는 광야의 정신 사상을 가졌다. 도시 안에 살아도 광야의 사상 정신을 갖고 있다. 즉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다. 세상을 의지하면 세상이 넘어지면 자기도 같이 넘어진다. 안 넘어질 것에 기대야지.
오늘날 부모들이 자식을 하나 낳아놓고 그 자식에게 기대면 어떻게 되느냐? 자식이 하나님이냐? 하나님이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하려고? 자식을 우상을 만드는 부모는 자식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준다. 안 해 주면 어떻게 될까봐 벌벌 떠는 건 우상이 돼버린 거다. 우상이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는 것도 자기 주관적 생각이다. 그래서 두 번째 아이가 태속에서 생기면 약물로 자꾸 죽이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게 하나님 앞에 큰 죄인 줄을 모르고 있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겠다? 하나도 기르기가 그렇게 힘들어서 야단법석인데 자식이 열 명이면 어떻게 키우겠느냐?
눈높이 교육? 눈높이 하는 교육이 그 모양이냐? 누구 눈높이냐? 아기 눈높이다. 그러니까 아기 눈높이에다 두고 어머니 아버지가 교육을 시키려니 내려가야지. 우리의 교육은 하나님에다 두고 끌어올려야 한다.
광야정신을 가진 종은 은둔자가 아니다. 은둔자는 이단자들이다. 살다가 보니 시집장가를 못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 ‘시집장가 안 가자 주의’는 이단자들이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이단자들이 참 많다.
사회의 공인을 얻어서 하면 그게 기독교냐? 기독교는 사회의 인정이 아니라 주님의, 하나님의 인정이다. 그 원칙 하에서 세상 모든 것을 바르게 처리해 들어가는 거다. 교회가 사회의 공인을 얻은 걸 가지고 ‘그러니 우리는 이단이 아니다’ 해도 가르치는 교훈이 세상 소원 목적으로 가르친다면 이건 마귀의 종이다. 성경을 통해서 보는 원칙이 그렇다. 마귀가 세상을 가지고 유혹 미혹을 하는 거다.
교회는 이 세상이 훈련장이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 밑으로 들어가서 예수이름을 가지고 봉사를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게 이치가 어떻게 된 것이냐? 완전히 주객이 바뀐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시길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나니’ 라고 했다. 교인이 말씀에 불이 붙어서 높이 오르는 쪽에서 말씀의 빛으로 흑과 백이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교회가 세상 밑으로 들어갔으니 그 등불은 꺼져버렸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의례히 교회를 알기를 궂은일은 다 교회가 하는 걸로 안다. 복음정신은 그런 주의가 아니다.
광야사상이 아닌 자는, ‘사상 사상’ 하니까 이북사람들이 쓰는 사상으로 알지만 그게 아니다. 광야사상이 뭐냐? 광야사상은 하나님 제일주의 사상이다. 그런데 이 광야사상이 아닌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종도 아니고 사자도 아니고 역시 복음도 아니다. 본문의 말씀이 뭐라고 하고 있느냐? 그러니까 마귀의 종이다. 세상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마귀의 종이다. 마귀의 종은 세상 것으로 자꾸 이루라고 한다.
이방종교인들은 자꾸 세상 것으로 소원 목적한다. 점쟁이도 ‘세상 복 복’ 하면서 점치고, 무당 하는 것도 역시 돈 복이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당 점쟁이만 귀신이 들린 게 아니라 그것을 보고 점치러 가는 자도 귀신들린 것이다. 알고 보면 귀신에게 복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귀신은 또 남을 속여먹는 것이다. ‘내일 모래면 당신의 목숨이 위태해질 것이다. 이걸 액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아니, 누구 마음대로? 사람이 죽고 사는 게 누구 마음대로 되는 거냐? 얼마나 마귀수법이 교묘하고 악한지?
교회의 거짓 종들은 교인들에게 세상 것을 자랑하고 돋보게 하여 교회를 넘어뜨린다. 교회는 주님의 정신 사상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서는 건데 교회를 넘어뜨리는 방편이 성도들에게서 그 마음이 없어지게 하고 세상 것으로 잔뜩 소원을 집어넣는다. 이런 자들은 교회를 넘어뜨리고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는 악한 종들이다. 믿는 자기는 교회다. 교회는 사람이다. 건물은 예배당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천국복음인데, 땅의 것을 구하게 하는 것은 땅의 복음이다. 그리고 이것을 소원하도록 가르치는 자는 거짓 종이다. 땅의 복음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자기가 나가는 교회가 진짜 교회인지, 그 목사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종인지 그걸 심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되라’ 하고 가르치면 여러분들은 다 도망가야 한다. ‘저 속에 마귀가 들어갔구나’ 하고 다 도망가야 한다. 자기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옳은 진리를 찾아가라. 어느 교회로 가던 그 정신을 가져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이 15년 이상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진리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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