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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린도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636 추천 수 0 2015.04.02 16: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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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9:16-23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00898 

jys.jpg 정용섭 목사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주현절 다섯째 주일, 2015년 2월8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8장의 소제목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고, 10장의 소제목은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 들어있는 9장도 역시 우상 숭배에 대한 이야기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글쓰기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9장의 주제는 그것과 달리 ‘사도의 권리’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소제목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고 훗날 학자들이 성경을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 붙인 겁니다. 이런 소제목만 잘 따라가도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우상숭배 문제를 짚으면서 전체적인 문맥의 단절 위험을 무릅쓰고 사도의 권리 운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날 우리는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여기지만 초기 기독교 당시에는 사정이 그렇게 못했습니다. 바울의 사도성이 자주 부정되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그리고 여러 집단에 의해서 부정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제자로 부른 명단에 바울이 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초기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그가 훗날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심하고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곧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복음에 대한 바울의 진정성이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유대교와의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던 유대 기독교와 달리 주로 이방인들이 주축이 되는 교회를 세움으로써 신학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적지 않은 충돌을 빚었습니다. 바울은 결국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과격한 인물로 지목 당했고, 소아시아에서의 선교 활동이 금지당하면서 유럽으로 밀려났습니다. 사도성이 부정당한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어느 정도 의기소침해지긴 했지만 침묵만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끝까지 주장했습니다. 고전 9:3절에서 분명하게 말하듯이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적극적으로 변호했습니다. 자기는 사도로서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의 권리를 세 가지나 예로 들었습니다. 4절에서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고 하였고, 5절에서 ‘우리가 야고보나 베드로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그리고 6절에서 ‘일하지 않을 권리가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뒤로 구약 신 25:4절을 거론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를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가 인용한 신명기에는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건 실제 소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고전 9:14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목사 사례비는 당연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다른 사도들은 결혼생활도 하고 교회로부터 사례비도 받았지만 바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독신생활을 하면서 가죽으로 천막 만드는 노동에 종사했습니다. 나중에 빌립보 교회에서 상당한 정도로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게 일정하지 못해서 먹고사는 문제는 스스로 해결했습니다. 그를 자비량 선교사라 하는 것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바울이 사도가 아니니까 사도가 받아야 할 그런 예우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사도성이 부정당하는 바울의 입장이 곤혹스러웠다는 사실은 갈라디아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세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이들이 와서 바울의 설교를 비판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바울은 갈 1:6절에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더 나가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그렇고,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비판하는 자들을 향해서, 이것은 결국 자신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것인데,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런 내용으로만 보면 당시부터 교회에 갈등과 다툼이 많았다는 게 분명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왜 이런 충돌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나쁘기 때문에, 또는 바울이 잘난 척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충돌이 벌어질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완전히 잘못한 사람도 없고, 완전히 잘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20% 잘못한 사람과 80% 잘못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 80% 잘못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교회에서는 이게 어렵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의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게 더불어 살아야 할 인간들의 딜레마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저주가 내리기를 바란다고 비판한 대상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당시에 최고의 권위를 행사하던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쪽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과 인격이 왜곡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유대교의 압력이 거세지던 어려운 시기에 예루살렘 교회를 힘써 지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고 선교하던 사람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의견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고, 그게 더 진행되면서는 감정적으로까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이런 현상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복음은 단련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충돌과 다툼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매몰되어 버린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투게 된 원인은 오간데 없고 서로의 감정이 얽힌 실타래가 되고 맙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도들이나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다툴 때 다투더라도 더 근본적인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자기를 변호한 것도 결국은 복음전파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16절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굉장히 강한 발언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어떻게 이런 차원의 신앙에 도달했을까요? 바울은 복음을 자기의 존재 근거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에게 복음 전파는 밥 먹는 일이나 숨 쉬는 일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은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따라서 다른 것들은 자기 삶에서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상대적인 것으로 자기의 존재 근거가 훼손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신주의자가 아니지만 독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판도 감수할 수 있었고, 거꾸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할 수도 있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라면 그는 무슨 일이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복음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은 겁니다.

 

복음을 통한 자유는 자유일 뿐만 아니라 제한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복음을 위해서 자유마저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문 19절 이하에서 율법을 예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지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율법과 관계없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가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는 바울의 이런 태도를 못마땅하거나 오해했을지도 모릅니다. 신학적인 깊이가 없다거나, 인기 영합주의자라고 말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도 이해해주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저를 진보 신학자,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보수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저는 사안에 따라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고, 또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뿐입니다.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아무런 선입견이 없고, 사회 변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통일 문제에서도 그렇습니다.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고 최대한 평화 통일의 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지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입니다. 사도신경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예배도 가능한 전통의 예전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경우에 복음 전파가 관건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따를 수도 있었고,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23절에서 다시 이렇게 피력합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오늘 본문인 16절에서 23절 사이에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가 몇몇 변형 형태로 반복됩니다. 복음은 ‘좋은, 또는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좋은 소식은 다릅니다. 시험을 치룬 사람에게는 합격 소식이 기쁘고, 병원 진료를 받은 사람에게는 병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이 좋은 소식입니다. 장애인들은 장애 극복이, 감옥에 갇힌 사람은 출옥이 좋은 소식입니다. 이런 경우를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해서 인생 자체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어려운 문제들이 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정말 ‘좋은 소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복음에 몰입하겠다는 결기도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합니다.

 

23절에서 표현된 ‘복음에 참여한다.’는 말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쉽게 복음 전파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의 핵심은 아닙니다.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은 복음에 사로잡힌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복음을 다루는 게 아니라 복음에 의존하는 겁니다. 복음이 주체이고, 사람이 객체입니다. 복음이 상수이고, 사람은 변수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이 행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바람을 생각하면 됩니다. 바람을 씌려면 바람 부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앞이 꽉 막힌 곳에 서서 바람을 끌어오려고 노력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바울이 율법적인 사람들 앞에서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면서도 율법적인 사람처럼 행동하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 앞에서는 율법 해체주의자가 아니면서도 율법 없는 사람처럼 처신한 이유도 자신의 판단, 의지, 실존, 더 나가서 신앙까지도 넘어서는 복음 사건에 참여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이 말은 거꾸로 복음을 전파한다고 해서 모두가 복음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24-27절에서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달리기 시합을 하는 거와 같습니다. 거기서 상을 받는 사람은 일등뿐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달리기를 잘 할 수는 없습니다.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필요한 일을 절제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달리기에 가장 적합한 몸과 마음을 갖출 수 있습니다. 달리기에서 방향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달리기 능력이 갖춰졌다고 해도 방향 없이 달리면 헛수고입니다.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할 수 없습니다. 복음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신이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영적 순간, 또는 경지를 마지막 27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은 과연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초기 기독교 당대의 최고 권위자였습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의 선교 역사는 바울에 의해서 주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 지역에 한정된 종교로 머물 가능성이 높았던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확장된 데에는 바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의 선교 비전은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외형적인 업적만이 아니라 그의 신앙 경험과 신학적 깊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복음의 세계에서 대가였지만 그는 자신이 복음에서 배제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두려워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바울은 구원의 확신이 없었을까요? 왜 이렇게 믿음 없는 말을 한 것일까요? 단순히 종교적 겸손을 표현한 것일까요?

 

답은 이미 앞에서 제시되었습니다. 복음 사건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이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으로 그것을 성취하거나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행위 앞에서 인간의 노력은 상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뚫어볼 때만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는 바울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 몇 번 말씀하셨습니다. 마 25장의 보도에 따르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구원받은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이나 생각에 근거해서 판단하지만 그 판단은 틀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날고 기는 학자라고 하더라도 아는 것은 한줌 밖에 되지 않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며 연주자이고 지휘자였던 번스타인은 말년에 음악이 뭔지 모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음악을 깊이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 많더라는 고백입니다. 복음 전파에 평생을 바쳤지만 자기가 그 복음에서 소외될지 모른다는 바울의 고백은 허튼소리가 아닙니다. 백척간두에서 어떤 절대적인 것을 경험한 사람의 정확한 진술입니다.

 

이것을 좀더 일상적인 신앙생활로 바꿔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나름으로 열심을 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귀한 분들입니다. 여기에는 목사와 장로가 대표적이고, 거기에 이르려고 하는 여러 신자들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교회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기쁨과 평화의 삶이 심화되고 확장될까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도 자신은 기쁘지가 않습니다. 종말론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이면서도 종말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버림당하는 거지요. 두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여러 가지 일로 사도성이 부정당하는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거기에 참여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적인 진술만이 아니라 바울의 영적 실존이 담긴 고백입니다. 여러분, 진지하게 생각하십시오. 남에게 전파한 후에 오히려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는, 그래서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는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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