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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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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01979 |
정용섭 목사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막 9:2-9, 주현절 마지막 (예수 변모) 주일, 2015년 2월15일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감동받을만한 이야기가 복음서에 적지 않게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정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도 종종 나옵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했다는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막 9:2-9절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읽으면 ‘저게 뭐지?’ 하고 말할 겁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이런 이야기에서는 거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었다고 합니다. 옷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게 얼마나 강렬했든지 아무리 빨래를 잘 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렇게 깨끗하게 빨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에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인 엘리야와 모세가 그곳에 등장했습니다. 이 상황 앞에서 제자들은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이곳에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초막 세 채를 지어 머물러 살자고 제안했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곧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이 정신을 차려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졌고, 예수님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그리고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일까요?
소위 변화산 이야기는 마가복음만이 아니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초기 기독교에 잘 알려졌다는 뜻입니다. 세 복음서는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이 그 현상 앞에서 크게 두려워하며 엎드리자 예수님이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누가복음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잡혀 죽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으며, 제자들이 졸다가 이 모습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마가복음에는 없습니다. 세 복음서가 약간씩 다르게 보도하고 있지만 기본 골격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1) 예수님이 제자들과 산에 올라갔을 때 모습이 변형되었습니다. 2)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3) 구름 속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가 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예수의 변모
본문 2절이 말하는 변형은 성형수술을 받아서 얼굴 모양이 달라지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에 대한 제자들의 새로운 경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평소에 알지 못하던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일상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교인으로 등록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그 사람을 전혀 다르게 볼 것입니다. 그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서 충격을 받을 겁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새로운 차원이 열리면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죽어 있던 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의 영혼은 늘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그게 없는 사람의 영혼은 궁핍해집니다. 영혼의 궁핍은 상투성입니다. 그런데 빠지면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고, 거기에 다시 목말라하면서 영혼은 더 심각하게 피폐해집니다.
예수님의 변형에 대한 제자들의 경험은 부활 경험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경험할 때만 본문이 말하는 예수 변형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을 오해하거나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단순히 다시 살아난 사건이 아닙니다. 다시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다시 죽습니다. 다시 죽는 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부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다른 생명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그 이전의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변형은 아무도 구체적인 것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빛이나 흰옷이라는 메타포로 표현할 뿐입니다. 이런 메타포는 부활보도나 변화산 보도에 똑같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변형에 대한 경험의 뿌리가 부활경험이라는 사실은 제자들이 보인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따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변형 앞에서 크게 두려워하여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도하는 대목마다 사람들이 두려워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막 16:8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흰옷 입은 청년의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였다는 겁니다. 절대 생명, 영원한 생명, 그 생명의 심연 앞에서 사람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명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롭고, 완전히 낯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그런 경험이 궁극적으로는 예수 부활 사건 앞에서 명백해졌지만, 이보다 훨씬 앞에서 일어난 오늘 본문의 변형 사건에서 그 전조가, 또는 그 암시가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형에 대한 제자들의 경험은 그에게서 참되고 궁극적인 생명을, 즉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그 장면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모세는 당시로부터 1천4백 년 전 사람이고, 엘리야는 8백 년 전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은 해괴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요? 모세는 산과 관련이 많은 사람입니다. 호렙산에서 소명을 받았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으며, 느보산에 죽었습니다. 특히 시내 산에 중요합니다. 그는 40년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대목에서 시내산에 올라갔고,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경험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었다고 해야 옳습니다. 어쨌든지 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그를 둘러싼 아우라에 눈이 부셔서 사람들이 그를 직접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인물이 변화산에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확실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제 1독서에 나오는 엘리야는 구약에서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에게는 초자연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가뭄 끝에 비를 내리게도 하고,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다 태우게도 했습니다. 그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당시 사람들은 엘리야가 죽지 않고 산 채로 불 수레를 타고 승천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상 마지막 때 구원자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변형 사건에서 엘리야가 거기 등장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리킨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모세와 엘리야가 거기 나타난 거냐, 아니면 소설을 쓰듯이 그렇게 기록한 것뿐이냐,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건 성경읽기의 정도가 아닙니다. 수백 년 전 사람이 다시 우리의 현실에 등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주장은 강물이 낮은 데서 높은 데로 흐를 수 있다는 주장처럼 허황된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 이야기를 누군가 지어낸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인 사건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했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이 변화산 전승이 초기 기독교 안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제자들이 무서워서 초막 셋 운운하면서 당황하고 있을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났습니다. 구름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는 말은 물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소리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도 똑같이 났습니다. 세례 순간에 대한 보도인 막 1:1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시 2:7절에도 나옵니다. 이런 표현들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아들, 또는 딸은 혈연관계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입양의 경우는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왕적 칭호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차원의 배타적 권위를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왕적 권위는 인간을 구원하는 메시아로서의 권위입니다. 세상은 그에게만 지배를 받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의 왕적 권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 중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게 초기 기독교로부터 이어진 신앙의 초석이고, 이런 신앙에 근거해서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를 절대 생명의 주인으로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지만 그 중심으로 들어간 기독교인들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대충 이런 식입니다. ‘그래, 예수에게 왕적 권위가 있고, 그래서 메시아라는 사실이 지금 우리 삶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야.’ 솔직한 주장입니다. 현대인들은 지금 예수에게 별로 지배받지 않습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왕이 아닙니다. 왕은 따로 있습니다. 특히 요즘과 같이 온갖 정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인터넷 시대에는 예수님의 왕적 통치를 실감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루 종일 그런 정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삽니다. 개인에 따라서 관심의 영역도 다양합니다. 연예계 소식, 주식 정보, 정치 이야기, 건강과 취미생활 정보 등이 쓰나미처럼 우리의 삶을 압박해오고 있습니다. 이런 데 삶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마당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이고, 그에게만 왕적 권위가 있고, 그래서 우리가 지배당해야 할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갈 리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예수 믿어서 인생이 잘 풀리고, 죽어서 천당 갈 수 있다는 기대에 머물고 맙니다. 나름으로 세상과 삶에 대한 의식이 투명한 기독교인들은 사회개혁이나 교회개혁에 마음을 둡니다. 상대적으로 좀더 나은 신앙이기는 하지만 이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이룬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사회적 이슈는 복지와 세금의 관계입니다. 정부는 증세하지 않고 경제를 활성화해서 복지 기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고, 반대쪽은 증세해서 복지를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 중간의 다른 입장도 있습니다. 주요 골자는 먹고 사는 데 걱정 없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더 나가서 어떻게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만약 어떤 위대한 정치가가 혜성처럼 나타나서 이 모든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한다면 우리는 정말 만족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더 이상의 다툼도 없고 분열도 없는, 아픔과 모순이 없는 세상이 될까요? 그렇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계몽과 발전과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기는 하되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이련 변혁과 개혁의 길은 성경의 방식으로 말하면 예언자의 길입니다. 이사야, 요엘, 호세아 같은 사람들은 사회정의와 평화의 질서를 위해서 투쟁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그런 개혁의 단초를 기대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십자가 처형에 물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투쟁은 다시 투쟁의 악순환을 불러올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모른 척해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가능한대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에 담겨 있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입니다.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가 여전히 현실에서 너무 먼 이야기라고 느끼시나요? 그래서 이런 성경을 읽거나 이런 설교를 들으면 불편하지는 않으신가요? 그런 생각과 느낌은 이상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걸로 자신을 믿음 없다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변형 사건 앞에서 정신없이 초막 셋 운운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모세와 엘리야와 구름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과 자신들 뿐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절대적인 경험은 한 순간이고 현실은 계속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경험을 현실성(reality)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한두 번 그런 경험을 했어도 그걸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예술가들이나 시인들의 경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어떤 영감을 받아서 그림도 그리고, 작곡도 하고, 시도 씁니다. 그런데 그런 영감은 한 순간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고 맙니다. 그 순간을 놓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위대한 예술가나 시인들은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경험의 순간이 오히려 현실 세상을 압도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최선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이런 경험을 허투루 처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시인이 시적 영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매일 시를 읽고 쓰듯이 기독교인들도 구름 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대부분의 인생을 일상에 묶여서 지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절대적인 사건에 대한 경험도 크게 부족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건 하나님의 순전한 은총인데, 우리는 바로 그런 경험을 소중히 간직하고 기억하는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교회는 매주일 예배를 통해서 그 경험을 상기하고 기억하고, 더 나가서 서로 공유하는 예배공동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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